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69
-69-
이상한 꿈을 꿨다. 몸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는 꿈이었다. 꿈인데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게 아팠다.
지옥의 유황불에 몸이 타들어 간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였다.
아마 눈앞에 칼이 있었다면 당장 집어다가 스스로 심장을 찔렀을 것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통증에 너무 아파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하던 때였다.
누군가 레아를 끌어안았다. 꽉 안아주며 끊임없이 무어라 속삭여주었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프고 괴로운 와중에도 보드라운 온기가, 다정한 속삭임이 좋았다는 사실은 선명했다.
그것 하나에 매달려서 고통을 이겨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괴로움이 겨우 멎었을 때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듯했다. 얼마나 잠들어있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최소한 며칠은 지난 것 같았다.
오랫동안 어둠을 헤맨 끝에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희미한 두통과 함께, 레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
낯선 공간이었다. 아연하게 살펴보니, 웬 막사 안인 듯했다. 그러나 에스티아의 것은 아니었다.
막사 바닥에는 이국적인 문양의 카펫이 깔려있고, 레아가 누워있는 침대에도 무늬가 화려한 천이 덮여있었다.
천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약을 먹고 정신을 잃은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온몸이 뻐근했다.
레아는 침대에 앉은 채로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 벽에 웬 나뭇가지를 엮은 다발이 매달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막사 한구석에는 커다란 화로가 놓여있었다. 화로에서는 서늘한 향기가 올라왔는데, 이샤칸이 자주 피우는 잎담배 냄새였다.
한참 냄새를 맡으며 멍하니 앉아 있던 때였다.
흠칫 몸이 떨렸다. 누군가 가위로 잘라낸 것처럼 엉망진창인 기억들이 조각조각 쏟아졌다.
급류처럼 몰아치는 기억에 머리가 쪼개질 듯 극심한 두통이 일었다. 레아는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흑……!”
아픈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을 때였다. 막사의 문이 펄럭 젖혀졌다. 어둑하던 막사 안에 햇빛이 쏟아져들었다.
“레아!!”
따뜻한 기운이 단단한 방패처럼 몸을 감쌌다. 레아는 필사적으로 제게 주어진 온기에 매달렸다.
헐떡거리던 호흡이 서서히 진정되고, 두통도 느릿하게 가라앉았다.
겨우 진정한 후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선명해진 시야에는 꿈에서도 보고 싶었던 남자가 있었다. 레아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이샤칸…….”
그리고 제 목소리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였다. 이샤칸은 협탁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가져다주었다.
입가에 얼른 유리잔을 가져다댔다. 꼴깍꼴깍 넘어가는 미지근한 물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한 잔을 금방 비워내고 나니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아직 찌꺼기처럼 남아있었던 자잘한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머리가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레아는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들을 질문했다.
“내가 얼마나 잠들어있었어?”
“삼 주 넘게.”
삼 주라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놀라서 바라보자, 이샤칸은 살짝 눈매를 좁혔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죽었겠지.”
주술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한 것이다. 레아는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그럼, 여기는…….”
“사막이야. 쿠르칸으로 가는 중이고, 늦어도 사흘 내에 도착할 듯하군.”
망연한 표정으로 이샤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고요한 눈을 하고서 레아를 지켜볼 뿐이었다.
레아는 힘겹게 이샤칸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순간,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왼쪽 손목을 팽팽하게 당겼다.
안에 부드러운 천을 덧댄 튼튼한 가죽 수갑이었다. 가는 쇠사슬은 침대에 연결되어 움직임을 구속했다.
“……이게 무슨.”
야만적인 취급에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문이 막혔다. 레아는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가 침착하게 말했다.
“당장 풀어. 그리고 날 에스티아로 돌려보내.”
그러나 레아의 요구는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이샤칸은 짧게 비웃으며 되물었다.
“어디, 오베르데령으로?”
그의 눈빛은 여전히 가라앉아있었다. 그가 냉정하게 말했다.
“약탈당한 신부가 돌아가 봤자 퍽이나 좋은 꼴을 당하겠군. 순결하지 못하다며 돌팔매질이나 하겠지. 에스티아 놈들은 그렇잖아?”
비아냥거리는 말에 울분이 차올랐다. 레아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신이랑은 관계없는 일이야!”
이샤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금색 눈동자가 짙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설움에 가득 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가 어떤 마음으로 결심하고, 죽음을 선택했던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레아는 죽음을 택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가 끝까지 저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슬펐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했다. 제발 돌려보내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무엇을 모르지, 레아.”
기묘할 정도로 차분한 어조였다. 레아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샤칸의 눈은 본 적 없이 차가웠다. 분노를 억지로 누르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말해봐.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선뜻 답하지 못하는 레아 앞에서, 그는 먼저 질문을 던졌다.
“네가 왕비의 주술에 걸려 인형이 된 것?”
“……!”
레아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바짝 굳었다가 뒤늦게 입술을 달싹였다.
“어, 어떻게…….”
그러나 제대로 묻기도 전에, 이샤칸은 쏟아내듯 말을 이어갔다.
“나에게 일부러 잔인한 말들을 퍼부은 것? 아니면 그토록 역겨워하는 변경백과 초야를 치를 생각까지 하면서 자살하려고 한 것?”
그가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서 경고하듯 속삭였다.
“내가 뭘 모르냐고, 레아.”
“…….”
애써 숨기고 혼자 품으려 했던 비밀들이 전부 낱낱이 까발려지는 순간이었다.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 남자 앞에서 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궁에서 마지막 밤,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샤칸은 화를 냈었다. 갑자기 덜컥 어떤 감정이 차올랐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눈가에 열이 몰리는가 싶더니, 눈물이 뚝 떨어졌다. 레아는 어,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손으로 뺨을 쓸어보았다.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하얀 뺨이 흠뻑 젖어들었다. 굳어있던 이샤칸은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네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샤칸은 더 말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레아를 안아주었다.
그가 안아주는 순간부터 더욱 걷잡을 수 없었다. 레아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잘하고 싶었다. 완벽한 왕녀가 되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해내야 했을 책무를 실패했으니, 최후나마 잘 짜인 계획으로 훌륭하게 끝내고 싶었다.
겁내지 않고 담담하게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왕비가…….”
하지만 진심은 그렇지 못했다. 여태껏 강한 척 둘러싸고 있던 껍질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나, 나한테, 내가, 당신 목을 조를 거라고, 그, 그리고, 칼로 찌를 거라고……. 내가 당신을 죽일 거라고…….”
끅끅 울음을 삼키면서도, 레아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아, 않아서……. 다, 당신한테, 미움 받기 싫어서…….”
여태껏 쌓여왔던 서러움을 토해내듯, 눈물은 끝이 없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도록 펑펑 우는 레아를 보며, 이샤칸은 무언가 말할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전부 관두고 그냥 더욱 힘주어 안아주었다.
레아는 그에게 달라붙어서 쌓여있던 말들을 털어냈다. 항상 숨기고 감추기만 했던 비밀을 전부 말했다.
“그, 그 여자가, 왕녀궁 시녀들도, 전부 인형으로 만들고…….”
완전히 무너진 채, 제일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속마음까지 꺼내버렸다.
“나 너무 무서웠어…….”
격해진 감정에 몸까지 덜덜 떨렸다. 레아가 제 가슴팍을 눈물로 흠뻑 적시는데도, 이샤칸은 피하지 않고 말없이 안아주었다.
한참 도닥도닥 두들겨주기만 했다. 그러다 레아가 어느 정도 진정한 후에야,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잘 들어, 레아.”
레아는 망설이다가 살짝 얼굴을 들어보았다. 금빛 눈동자는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다만 조금 슬퍼 보였다.
세상에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가 천천히 레아의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내 목을 조르고 심장을 찔러도 괜찮아.”
레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샤칸은 눈물을 닦아주듯 몇 번이고 살짝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 정도로는 죽지 않으니까 얼마든지 마음대로 굴어. 그리고…….”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뱉더니 레아의 콧등에 살며시 입 맞췄다. 부서질세라 애틋하게 입술을 눌렀다 떼어내며 속삭였다.
“내가 너를 어찌 미워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