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87)
잠자코 있던 비올레의 질문에 헤인리는 한참 동안 대답을 망설였다.
-황태자 전하와 손을 잡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평소의 자신만만하던 모습과 달리, 헤인리는 불안한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혹시 저 때문에 가문이 위험해진다면…….
-우린 너를 믿는다.
클리프가 헤인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오라버니는 항상 옳은 선택을 해왔잖아요. 이번에도 그럴 거예요.
마지막으로 일리아가 건넨 말에 헤인리는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황제가 작정하고 블로든을 제재하는 지금 상황에서, 그에 맞설 사람은 황태자뿐이었다. 헤인리의 판단대로 황태자와 손을 잡는 것이 옳을 터였다.
그때 일을 지워낸 일리아는 또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수도로 돌아온 일리아는 엘리오드 백작에게 몇 번 연락을 취했다.
그는 블레어드에게 아들을 잃었으며, 복수를 위해 카르한을 찾아갔다고 들었다. 백작을 통해 블레어드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건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카르한의 말로는 백작이 블레어드를 내몰 기회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는데.’
엘리오드 백작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창가에 고개를 기대고 있던 일리아는 자세를 바로 했다. 슬슬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덧 마차는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수도 귀족들의 사교장으로 쓰이는 건물로, 어느 정도 자격이 있는 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이 블로든 가문과 연관된 헛소문의 근원지였다.
일리아는 사교장 문을 지키고 있던 남자에게 신분을 밝혔다. 화들짝 놀란 남자가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프란체와 말렉을 데려갈 수는 없는 곳인지라, 일리아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어줘.”
“예, 아가씨.”
일리아는 홀로 사교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낮인데도 할 일 없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은 샴페인 한 잔씩 손에 든 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래서 블로든이 지금까지 탈세한 금액만 해도…….”
“아니, 돈도 많으면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일리아도 모르는 일이 진짜처럼 포장되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또각, 구둣발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일리아가 완전히 사교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잠깐 정적이 흘렀다.
“…….”
모두의 시선을 받은 일리아는 부채 하나만 손에 쥔 채 느긋하게 장의자에 앉았다. 서 있던 이들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들도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블로든을 험담하던 사람들은 서로를 힐끗거리며 눈치 보았다. 일리아가 올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리아는 사교 모임을 싫어해 초대장을 보내도 전부 거절했다. 그나마 황궁 연회 때나 얼굴을 비칠 정도였다.
목소리가 끊기고 음악만이 공간을 채우자, 일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제 앞에서도 허튼 이야기를 지껄이는지 지켜볼 심산이었다.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떠들어대던 이들은 헛기침하더니 뒤쪽으로 물러섰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몇몇 이들이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블로든 영애 아니십니까.”
일리아에게 아부해서 뭐라도 얻어내려는 심산이 그득해 보이는 부류였다. 일리아가 적당히 그들을 상대해주자, 다른 이들까지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중에는 방금까지 블로든 가문을 헐뜯던 이도 있었다.
무리가 다시 형성되고,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이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름 목소리를 낮추려고 한 것 같지만, 전부 들렸다.
“소공자랑 헤어진 건 아닌지…….”
“이제 에반테온 공자께서 수도로 돌아오셨으니, 후계자 자리는 당연히…….”
사교장은 일리아와 카르한 그리고 블레어드 이야기로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 블레어드를 치켜세우고, 카르한과 일리아를 낮추었다. 그것만으로도 블레어드가 얼마나 사람들을 구워삶았는지 알 수 있었다. 잠자코 앉아있는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에반테온 공자!”
“언제 오시나 기다렸어요.”
블레어드 에반테온의 등장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금방 그쪽으로 몰려갔다. 한 명 한 명 상대해주던 블레어드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일리아는 몸을 일으키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지요?”
당황한 블레어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물었다.
“제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요?
뒤늦게 표정을 수습한 블레어드가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 몰라서 놀랐을 뿐입니다.”
“다행이네요. 제가 이곳에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죠.”
“블로든 영애라면 어느 모임에서도 반길 겁니다.”
“고마워요.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한번 와봐야 할 것 같았거든요.”
일리아가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다들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모두와 눈이 마주쳤다.
“저희 가문이 탈세를 한다거나,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기부금을 횡령했다는 말까지.”
일리아의 말에 몇몇이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했다.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궁금해서 직접 확인하러 왔어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일리아가 블레어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만히 지켜보니 소문이 너무 쉽게 만들어지네요. 입 밖으로 나오면 진실처럼 포장되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일리아가 미소를 거둔 채 속삭였다.
“에반테온 공자가 사람을 죽였다.”
블레어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일리아는 다시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렇게 말해버리면 사실인 줄 아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장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일리아는 여전히 블레어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블레어드의 눈동자가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이윽고 블레어드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 나섰다.
“아무리 예를 들었다지만 경솔한 발언입니다.”
방금 발언으로 이상한 말이 돌면 어쩔 거냐고, 남자가 열을 냈다. 가만히 남자를 응시하던 일리아가 물었다.
“그럼 블로든 가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증거가 있어서 떠들었나요?”
남자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일리아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헛소문을 정정하느라 많은 돈과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어요.”
“…….”
“다들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지실 수 있으시죠?”
하나하나 기억해두겠다는 눈빛에 사람들은 어깨를 움찔했다. 소문내고 헐뜯을 때는 재밌었지만, 이렇게 일이 커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일리아는 블레어드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에반테온 공자. 제가 너무 무례한 발언을 한 것 같네요. 부디 용서해주세요.”
블레어드가 일리아를 샅샅이 살폈다.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가늠하는 눈이었다. 이내 블레어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가문이 그런 소문에 휘말렸으니 당혹스러울 만하지요.”
너그러운 용서에 사람들은 역시 에반테온 공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일리아는 웃지 않는 그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없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날 선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아까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이들이 일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블로든 영애께서는 에반테온 소공자와 교제하고 계시죠? 요즘 소공자께서 통 얼굴을 비치지 않으시던데요.”
“저는 소공자가 잠시 수도를 떠났다고 들었어요.”
저마다 알고 있는 정보를 들이밀며, 카르한에 대해 물어보았다.
“개인적인 사정이라 자세히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곧 돌아올 거예요.”
일리아의 대답에 저마다 수군거렸다.
“1년 이상 자리를 비우신다 들었는데…….”
“저는 전쟁터가 그리워서 자진하여 가신 줄 알았어요.”
아무래도 검술 대회가 끝나고 카르한이 자취를 감춰버리자, 온갖 소문이 돌고 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 이 사교장은 블레어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은근슬쩍 카르한을 깎아내리기 바빴고, 블레어드는 그것을 알면서도 은근히 부추겼다.
“무섭진 않으세요? 성격이 좀…… 그렇다는 말이 있어서.”
쏟아지는 유언비어에 일리아는 웃는 얼굴로 차근차근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요. 소공자께서는 제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친절하신 분인걸요.”
일리아는 카르한에 대해 온갖 칭찬을 쏟아냈다. 꽃을 꺾지 않고 제게 선물했던 일. 전쟁터에서 수많은 목숨을 구해준 것. 끼어들 틈 없이 칭찬을 늘어놓자, 헐뜯던 사람들은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 진실한 사람이에요.”
일리아와 눈이 마주친 블레어드는 심기가 불편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일리아의 칭찬이 끝나자, 누군가 잽싸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에반테온 소공자께서 작위를 계승하지 못하신다면…… 어쩌실 건가요?”
잠시 주위가 조용해졌다. 질문을 던진 이는 슬쩍 블레어드를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소공자께서 후계자이시지만, 그래도 작위는 장남이 계승하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질문의 저의가 뻔히 보였다. 만약 카르한이 공작이 되지 못하면, 헤어질 거냐는 물음이었다. 특히 일리아는 이미 파혼한 전적이 있었기에 편견이 있었다. 일리아는 한 치의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요. 후계자가 못 되어도 계속 함께할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의 신분을 사랑하는 게 아니니까요.”
일리아의 대답에 블레어드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자그맣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런 쓸모도 없는 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헛소리였다. 그건 부모조차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친부인 에반테온 공작은 언제나 블레어드의 가치를 가늠해왔다. 기준에 미달된다면 자식이라도 매몰차게 내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레베타 또한 카르한이 태어나고 나서 점점 블레어드를 등한시했다.
집에서 제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 블레어드는 동생인 카르한을 내몰고, 레베타를 확실하게 제 편으로 끌어들였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아등바등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방금 일리아의 발언은 제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말과 같았다. 심지어 일리아는 치졸한 짓까지 벌여서라도 자리를 보존하려는 블레어드를 비웃고 있었다.
블레어드는 서늘한 눈으로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가증스러웠다. 일리아는 지금 모두를 기만하고 있었다. 카르한과 교제하는 것도 전부 신분 상승을 노리는 거면서, 아닌 척 뻔뻔하게 구는 꼴이 역겨웠다.
블레어드는 겨우 숨을 삼켰다. 여태까지 꾹꾹 눌러온 열등감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벌써요?”
“사실 이곳에 들른 건 헛소문을 정정하기 위해서였거든요.”
일리아는 여전히 블레어드를 쳐다보며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로 인해 피해가 커지면, 책임을 물을 생각이에요.”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말에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퍼뜨렸던 몇몇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일리아였다. 일리아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나가버렸다. 숨을 토해낸 블레어드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저도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블레어드는 곧장 사교장을 빠져나왔다. 마차에 올라탄 그는 좀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고 얼굴을 구겼다.
고작 백작 가문 출신이면서 우위에 있는 척하는 꼴이 같잖았다. 자신이 작위를 계승하면 넙죽 엎드려야 할 신세일 텐데 말이다.
“증거가 없으니 입 조심하라고?”
그럼 헛소문이 아닌, 진실로 만들어버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마차는 어느덧 황궁에 도착했다. 시종장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자, 금방 황제궁으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
“에반테온 공자.”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친히 블레어드를 맞이했다. 블레어드가 자리에 앉자마자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늙은 황제가 이렇게까지 블레어드를 의지하게 된 것은 동질감 때문이었다.
장남으로 태어난 두 사람은 뛰어난 동생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늘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고 있었다. 황위에 오른 지 제법 되었음에도 황제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모양이었다.
비슷한 열등감을 품고 있던 블레어드는 황제의 마음을 깊이 공감해주었고, 그 덕분에 빠르게 신임을 얻어낼 수 있었다.
“황태자가 자꾸만 반대해서 말이지…….”
황제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요즘 들어 황제와 황태자는 자주 부딪쳤다. 늙은 황제는 사욕을 채우기 위해, 제국민의 고혈을 짜내 왔다. 황태자는 그런 황제를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반대했다.
그러나 그건 블레어드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블레어드는 그저 황제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주며 잇속을 챙기면 그만이었다.
“아무래도 황태자께서 아직 정무에 밝지 않으셔서 그러신 모양입니다.”
“그런 놈에게 어떻게 내 뒤를 맡길지.”
황제가 혀를 차자, 블레어드가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폐하. 요즘 도는 소문을 들어보셨습니까?”
“소문?”
“블로든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말이 파다합니다.”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다고 설명하자, 황제는 몰랐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말까지 도는데, 세무 조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당한 핑계도 있다며, 블레어드가 부추겼다. 마침 황제는 금 채굴 중단 사건으로 인해 블로든에게 악감정이 쌓인 상태였다.
“이대로 묵인하면 황실 측에서 탈세를 용인하는 것으로 보이겠지요.”
“……만약 세무 조사까지 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블레어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속삭였다.
“증거야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황제의 눈이 커졌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본보기가 될 겁니다. 탈세를 일삼던 다른 가문들도 몸을 사릴 테니, 세수를 확보할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군.”
턱수염을 쓰다듬던 황제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보지.”
황제에게서 답을 받아낸 블레어드는 적당히 대화를 이어나가다가 몸을 일으켰다. 목적도 이루었으니, 돌아갈 생각이었다.
다시 마차에 올라탄 블레어드는 황궁을 빠져나왔다. 공작저로 향하는 발걸음이 아까보다 가벼웠다. 블레어드는 차근차근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다가 피식 웃었다.
“과연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나도 지금처럼 대할 수 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올 것이 분명했다.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댄 블레어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일이 제대로 풀리기 시작하자, 잠깐 잊고 있던 약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함께 약을 했던 놈을 만나서 더 그런 모양이었다. 한 번 생각나자 금단 증상이 밀려왔다.
“총회가 있을 때까지는 참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잘 참아오지 않았던가.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블레어드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애써 생각을 떨쳐내려는데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잠깐 멈춰라!”
블레어드의 말에 마차가 멈추었다. 충동적으로 마차를 세운 블레어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근처에 한때 블레어드가 자주 들르던 모임 장소가 있었다.
블레어드는 마차에 앉아서 한참을 고민했다. 잠깐 얼굴을 비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그쪽 회원들과 다시 친분을 쌓아야 하고 말이다.
망설이던 블레어드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마차에서 내렸다. 발길을 끊은 지 1년도 넘었건만, 그의 발은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건물 앞에 멈춰 선 블레어드는 암호를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블레어드가 들어간 곳을 확인한 후 다시금 조용히 사라졌다.
***
집무실에 앉아있던 레베타는 현관 앞에 도착한 마차를 보았다. 블레어드가 돌아온 것이다.
근래 들어 레베타는 블레어드와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블레어드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쟁 지역에서 보고가 올라오면서 에반테온 공작은 카르한에게 관심 갖기 시작했다. 공작이 지금껏 손 놓고 있던 일을, 카르한이 고작 몇 달 사이에 해낸 것이다. 그때부터 공작은 카르한과 블레어드를 두고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블레어드는 불안해했다. 원로들을 끌어들여도 공작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전부 수포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레베타는 어깨에 숄을 걸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레어드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복도로 나온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마침내 블레어드의 방 앞에 도착한 레베타가 가볍게 노크했다. 안쪽에서 승낙이 떨어지자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늦었구나. 저녁은 먹고 들어온 거니?”
“예, 황궁에서 식사했습니다.”
“요즘 자주 황궁에 들르는 것 같은데.”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블레어드는 추궁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조금 날카로워진 눈으로 레베타를 바라보았다.
“할 일은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