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92)
공작의 시신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젊은 원로가 말했다. 그는 발언을 이어가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의심이 가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말을 보태기 망설여졌다.
“그보다 이번에 공자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말을 꺼낸 원로는 보수적이라 자자한 이였다. 블레어드가 불법 모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내내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추문으로 가문에 먹칠을 했으니…… 망설여지는군요.”
“그래도 황제 폐하의 눈에 들지 않았습니까.”
수염 난 원로가 반박했다. 황제는 에반테온 공작가 총회에 관심을 보였다. 종종 블레어드를 언급하며 지지 의사를 내비칠 정도였다.
“황제는 지는 해입니다.”
누군가의 서슴없는 발언에 원로들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작 위험한 발언을 꺼낸 남자는 태평하게 말을 이어갔다.
“곧 있으면 황태자가 제국의 주인이 될 겁니다.”
“…….”
“얼마 전에 소공자가 황태자와 접선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남자는 원로들을 둘러보며 주장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소공자를 미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소공자를 지지한다 한들, 소공자가 우리를 챙겨주려 할까요?”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오랫동안 블레어드를 지지해왔다. 만약 카르한이 작위를 계승하면 배척당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고마워할지도 모르지요.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 셈이니.”
남자의 발언에 다들 서로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결론이 난 셈이었다.
“그럼 제가 소공자에게 따로 연락할 테니…….”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바깥이 시끄러운 탓이었다.
“뭐지?”
고용인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둔 터였기에, 원로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쾅, 문짝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얼어붙은 원로들은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블레어드를 응시했다. 테이블 앞에 멈춰 선 블레어드가 원로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주 섭섭합니다.”
“…….”
“중요한 모임인 것 같은데, 저를 빼놓으시다니요.”
번들거리는 안광을 본 원로들은 숨을 삼켰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혓바닥이 잘려나갈지도 몰랐다.
“우리는 한 배를 탄 사이지 않습니까.”
블레어드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평소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미소가 아닌 음습함이 가득한 조소였다.
“혹시 이제 와서 저를 등지려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긴장한 원로들이 침묵했다. 블레어드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가라앉은 눈동자 심연엔 아가리를 벌린 짐승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를 배신한다면…….”
안색이 하얗게 질린 원로들을 보며 블레어드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들도 무사하진 못할 겁니다.”
***
카르한이 총회로 정신없는 사이, 일리아도 무척 바쁜 나날을 보냈다. 블로든 가문을 상대로 본격적인 세무 조사가 들어온 것이다. 황후 덕분에 시기를 어느 정도 늦추긴 했으나, 아예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황실에서 파견된 조사원들은 블로든 가문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지는 않았는지, 먼지 하나까지 털 기세였다.
그러나 꼬투리 잡을 만한 것이 마땅히 보이지 않자, 일리아 쪽으로 눈을 돌렸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 중 그나마 어리고 만만해 보인 탓이었다.
특히 조사원들은 일리아의 온천 사업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별것 아닌 문제를 끈질기게 추궁하거나 조사가 남았다며 온종일 대기시키는 둥, 피를 말렸다. 보다 못한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항의하자, 그제야 조사원들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일리아는 뻑뻑한 눈가를 문질렀다. 어제도 조사원들에게 잔뜩 시달린지라 피곤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제 세무 조사가 막바지에 달했다는 것이었다.
장부까지 뒤진 그들은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걸로 끝나면 좋겠지만…….’
황제가 순순히 블로든을 놓아주려 할 것 같진 않았다. 그전에 헤인리가 황태자와 함께 황제의 폭거를 멈추게 해야 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일리아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그러자 문이 살짝 열리며, 카르한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일리아, 많이 바쁩니까?”
일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괜찮아요.”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르한을 맞이했다. 그와 함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장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몸이 살짝 기울어지고, 일리아는 카르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노란 햇살과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 때문에 노곤함이 밀려왔다.
카르한이 쏟아지는 금빛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넘겨주었다. 커다랗고 투박한 손과 어울리지 않게 무척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평온한 침묵이 감돌았다. 말 한마디 없어도 어색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일리아가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내일이네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카르한의 손이 멈칫했다. 드디어 내일, 에반테온 가문의 총회가 열린다. 카르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상황은 좀 어때요?”
“원로들을 전부 포섭하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승산이 있을 듯합니다.”
카르한의 편인 원로들은 가문 안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이들이었다. 특히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인 글로시아는 외부에서도 힘이 상당했다. 열세 명의 원로 중 일곱이 확실하게 카르한 쪽에 섰으니, 총회 때는 더 넘어올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면 레베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레베타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빌어 왔다. 카르한은 받아주지 않았고, 그대로 끝이 났다.
그 뒤로 레베타는 아무 연락 없이 조용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에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카르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 온다면 무력으로 탈환하는 방법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정당하게 작위를 계승하고 싶었다.
“잘될 거예요.”
일리아의 속삭임에 약간 남은 불안함마저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졌다. 그런 일리아를 마주 바라보던 카르한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전부 일리아 덕분입니다.”
카르한은 아직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매일 잠에서 깰 때마다 혹시 지금까지 길고 긴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과 너무나 달라진 저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카르한은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했다. 더 이상 스스로를 감출 필요도, 애정을 갈구하며 타인을 부러워할 이유도 없었다.
“당신이 노력한 거예요. 기회를 줘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잘한 걸까요?”
“잘해왔어요. 정말.”
일리아의 칭찬에 카르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환히 웃던 카르한이 목소리를 살짝 낮추어 말했다.
“일리아, 실은 거짓말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서 빨리 실토하라는 눈빛에 카르한은 지금껏 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그게…….”
이전에 카르한은 일리아가 저를 칭찬했던 것을 떠올리며 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일리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어보았고, 얼떨결에 강아지와 뛰어노는 걸 상상했다고 대답했다. 그 후로 남들 앞에서 웃어야 할 일이 필요할 때마다 ‘강아지’가 암호가 되고 말았다.
카르한의 말이 끝났을 때,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좋아했나 봅니다.”
카르한이 비밀이라도 꺼내놓는 것처럼 쑥스럽게 속삭였다. 그 모습에 일리아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카르한의 뺨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닿아오자, 카르한은 곧바로 응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이 한 발자국 물러날 때까지, 그들은 서로를 껴안은 채 입을 맞추었다.
서서히 입술이 떨어지고,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하던 카르한은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 총회가 끝나고 자신이 공작이 되면, 일리아에게 청혼하겠다고.
그리고 마침내. 총회 당일이 찾아왔다.
***
에반테온 공작 저택 위로는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구름 사이에 가려진 햇빛은 존재만 미약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정오가 지났을 때, 마차가 줄줄이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왔다. 현관 앞에 멈춘 마차에서 에반테온 원로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서로 눈이 마주친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침묵을 유지한 채 회의장으로 걸어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글로시아였다. 빈자리가 하나씩 채워지자, 글로시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엄숙한 얼굴이었다. 특히 블레어드를 지지하던 이들은 평소보다 무거운 표정으로 눈만 내리깐 채였다. 글로시아는 그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마지막 설득에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원로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늦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치 무언가에 억압된 사람처럼 그들은 끝내 침묵을 선택했다. 그때 열린 문을 통해 카르한이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카르한에게 향했다. 카르한이 자리에 앉자, 분위기가 조금 더 가라앉았다.
글로시아는 가만히 카르한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고 카르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에서는 긴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총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레베타와 블레어드가 회의장에 들어섰다. 무표정하다 못해 냉랭해 보이는 레베타와 자신만만해 보이는 블레어드의 얼굴이 대비되어 보였다.
나란히 들어온 두 사람은 각자 나뉘어 앉았다. 레베타가 상석에 앉고, 블레어드는 조금 떨어진 오른편에 앉았다.
카르한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블레어드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공손하고 예의바른 척하던 것은 집어치우기로 했는지, 그 표정에서 오만함이 느껴졌다. 레베타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물었다.
“모두 참석했습니까?”
“아직 한 분이 오지 않았습니다.”
글로시아가 빈자리를 확인하고 대답했다. 카르한을 지지해줄 원로 하나가 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기다려보지요.”
레베타의 말을 끝으로 회의장은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카르한을 지지하는 원로들은 초조한 얼굴로 문만 힐끔거렸다. 시계가 약속된 시간을 가리키자, 레베타가 입을 열었다.
“……이만 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계속 기다릴 수는 없었다. 양측 원로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계속 기다리던 원로가 아닌, 테시온이었다. 테시온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카르한의 뒤에서 멈춰 섰다.
“카르한 님. 원로께서 사고를 당하신 듯합니다.”
테시온의 속삭임에 카르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자세한 정황은 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카르한이 직접 가보라며 눈짓했다. 테시온은 불안한 눈으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괜찮겠냐는 시선에, 카르한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실례했습니다.”
테시온이 회의장을 나갔다.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워낙 조용한 탓에 주위에 앉아있던 이들에게도 테시온의 말이 들린 듯했다.
약간의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원로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한 명이 빠졌으니, 최종적으로 모인 원로는 열두 명이었다. 두 후계자의 지지 세력이 정확히 반으로 나뉘는 것이다.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블레어드를 응시했다. 블레어드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카르한은 조용히 주먹만 움켜쥐었다. 이번 사고를 일으킨 것이 블레어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럼 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원래라면 공작이 해야 할 말을 레베타가 대신 했다. 공작의 죽음으로 앞당겨진 총회이나, 공작을 언급하는 이는 없었다. 마치 그의 존재가 지워진 것처럼 기묘한 분위기였다.
“오늘 총회는 다음 대 에반테온 공작을 가리는 자리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사람이 에반테온 공작이 될 겁니다.”
레베타는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공작께서 타계하셨으니 가문의 규율에 따라, 부인인 제게 권한이 위임되는 것을 동의하시는지요.”
레베타의 물음에 모두가 동의했다. 가주가 죽으면 아내가 임시직을 맡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레베타는 공작과 버금가는 권한을 쥐고 있었다. 그녀가 최종 결정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카르한은 묵묵히 레베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면을 쓴 것처럼 어떠한 감정도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럼 한 분씩 말씀해주십시오.”
레베타의 말이 끝나고, 왼편에 앉은 시오릭부터 입을 열었다.
“저 시오릭 에반테온은 카르한 에반테온을 지지합니다.”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원로들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작년까지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시오릭이 정말로 카르한 쪽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그의 선언이 끝나고, 다음 원로가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다르스 에반테온은 카르한 에반테온을 지지합니다.”
이로써 카르한은 두 사람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공개적인 선언인 만큼 남은 열 명의 원로들이 긴장한 얼굴로 차례를 기다렸다. 다음은 블레어드를 밀어주던 원로였다.
그는 잔뜩 주눅 든 얼굴로 눈치를 살피다가, 블레어드와 눈이 마주치고 숨을 들이켰다. 결심을 끝냈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저 멜리어드 에반테온은 블레어드 에반테온을 지지합니다.”
블레어드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남은 이들이 차례대로 선언을 이어갔다. 예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카르한의 편에 선 이들은 카르한의 이름을 입에 담았고, 블레어드를 밀어주던 이들은 블레어드를 지지하겠노라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글로시아의 차례가 왔다.
“저 글로시아 에반테온은 카르한 에반테온을 지지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에 팽팽한 기운이 흘렀다. 지지 세력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린 것이다. 오늘 오지 못한 원로까지 있었다면 카르한에게 승산이 있었을 테지만, 그의 부재로 결과는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레베타에게 향했다. 이제 레베타의 결정만이 남아 있었다. 블레어드의 눈동자가 어느덧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자신이 공작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눈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베타만큼은 블레어드의 편이 되어줄 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조용했다. 레베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블레어드가 재촉하듯 불렀다.
“어머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공식 석상에 맞지 않는 호칭을 입에 올렸다.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고개를 서서히 돌렸다. 블레어드와 마주친 눈에는 매서운 독기가 서려있었다.
“……!”
시선을 받은 블레어드는 가슴이 철렁했다. 언제나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는 듯한 눈길을 보내왔다. 단 한 번도, 저렇게 차가운 눈으로 블레어드를 본 적이 없었다. 레베타가 블레어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넌 공작이 될 수 없다.”
블레어드가 멍하니 레베타를 바라보았다. 레베타는 고개를 돌려, 원로들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저 레베타 에반테온은 카르한 에반테온을 지지합니다.”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카르한마저 놀란 눈으로 레베타를 쳐다보았다. 머리를 강타하는 충격이 휩쓸고 지나가기도 전에, 레베타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블레어드의 몸이 덜덜 떨렸다. 레베타의 입을 막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녀의 말이 더 빨랐다.
“에반테온 공작을 살해한 것은 블레어드입니다.”
잔뜩 굳어진 원로들은 숨도 쉬지 못했다. 블레어드를 의심한 자들조차 입만 떡 벌린 채였다.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다급해진 블레어드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레베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제가 목격자이며, 공조자로서 공작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레베타의 증언이 이어지자, 블레어드가 달려들었다. 블레어드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카르한이 곧바로 달려가 그를 붙들었다.
“이거 놔!”
눈이 반쯤 뒤집힌 블레어드가 거세게 반항했다. 카르한은 손아귀에 세게 힘을 주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파서 멈추었을 테지만, 블레어드는 계속 발악하며 레베타에게 소리 질렀다.
“어떻게 당신이!!”
세상 모두가 등진다 해도, 레베타만큼은 블레어드의 편을 들어줬어야 했다. 지금까지 레베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블레어드가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레베타를 노려보자,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영영 모를 거라고 생각했니?”
발작하듯 날뛰던 블레어드의 몸이 잠시 멈추었다. 레베타의 눈이 블레어드에게로 향했다. 눈동자 아래에 침전한 원망과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네 손에 놀아났던 내가 참 어리석었구나.”
그제야 블레어드는 알아차렸다. 레베타가 자신이 감춰온 진실을 알게 되었음을.
“안 돼……. 이렇게 끝낼 순 없어…….”
숨을 헐떡이던 블레어드는 카르한을 떨쳐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카르한은 힘을 주어 그를 강제로 바닥에 꿇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블레어드는 카르한을 떨쳐낼 수 없었다.
소란을 듣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레베타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체포해라.”
“어머니!!!”
마지막까지 블레어드는 레베타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레베타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제국법에 따라 처벌할 테니, 그때까지 별관에 구금해놓도록.”
“아아악!!”
기사들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블레어드는 괴성을 내질렀다. 돌아오면 전부 죽여 버리겠다고 그가 쩌렁쩌렁 고함쳤다.
이윽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레어드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흩어졌다. 그의 숨겨진 민낯을 보게 된 원로들은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이었다.
레베타는 원로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르한에게 시선을 두었다.
“……총회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레베타가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건조하기만 하던 목소리에 미약한 물기가 스며들었다. 이 순간, 그녀는 또 한 명의 아들을 잃은 것이다.
“다음 대 공작은, 카르한 에반테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