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96)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해요?”
카르한과 클리프는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동시에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별것 아닙니다.”
수상쩍은 반응에 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자꾸 딴청을 피워서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뭔가 저 몰래 진행 중인 일이 있나 보다 하고 말았다.
달이 마른 가지 위에 걸렸을 즈음, 길었던 생일 파티가 끝났다.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하나둘 잠자리에 들었다. 일리아는 침실로 들어가 몸을 씻고 보송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카르한의 생일이 끝나기까지 두 시간도 남지 않았다. 손에 램프를 든 일리아는 침실을 빠져나와, 어두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밀회를 가지는 것 같아서 괜히 두근거렸다. 목적지에 도착한 일리아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카르한, 들어가도 돼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이 절로 열렸다. 카르한은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밤이 늦었는데…… 졸리지 않습니까?”
“아직 잠이 안 와서요.”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설핏 미소 지은 카르한이 일리아를 안으로 들였다.
“당신은 왜 안 잤어요?”
“편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들기가 아쉬워서 조금 더 깨어있고 싶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전부 꿈이었을까 봐…….”
카르한은 아직도 상기된 얼굴이었다. 속으로 웃던 일리아는 침대 위에 잔뜩 쌓인 편지더미를 보았다. 일리아가 관심을 보이자, 카르한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건 분쟁 지역 마을 사람들이 보내준 겁니다.”
생일을 맞이해 마을 관리인인 루벤투스가 한 번에 묶어서 보내준 것이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침대에 앉아서 편지를 함께 읽고 떠들었다.
“다들 바쁘겠는걸요. 주문이 왕창 들어왔거든요.”
얼마 전, 스텔라는 일리아가 선물로 준 공예품을 착용하고 사교장에 등장했다. 머리장식부터 팔찌, 손수건까지…….
스텔라를 추종하는 영애들과 귀부인들은 똑같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찾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일리아만 신이 났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오늘 있었던 일들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말을 경청하는 게 좋은 듯 손등을 문지르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말을 멈춘 일리아는 카르한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약혼식을 치렀을 때 나눠 가진 반지였다. 이제 슬슬 결혼반지로 바꿀 시기가 온 듯했다. 과연 카르한은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슬쩍 물어볼까?’
간접적으로 결혼을 언급하려던 일리아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괜히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요즘처럼 바쁜 시기에 다른 고민까지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카르한의 상황이 정리되면, 은근슬쩍 결혼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말이다.
‘정 안 되면 청혼도 내가 하지, 뭐.’
일리아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시계를 확인한 일리아는 오늘이 5분도 채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리아는 두 팔을 벌려 카르한을 꼭 안았다. 단단한 몸이 제 품에 꽉 찼다. 맞닿은 몸으로부터 심장 소리가 두근두근 들려왔다.
“생일 축하해요. 카르한.”
올해 생일의 마지막 축하 인사였다. 일리아의 품에 안겨 있던 카르한이 마주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최고의 생일을 보내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일리아와 카르한은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찾았다.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두 사람은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맞이했다.
***
길었던 겨울이 물러나고, 멀리 떠났던 봄이 다시 걸음 했다. 봄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가지에 싹이 트고 생명이 움텄다. 블로든 저택에도 봄꽃이 피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아침 일찍 공작저로 출근한 카르한은 회의장으로 향했다. 총회 이후로 원로들이 모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작위 인수인계가 끝난 카르한은 얼마 전에 막대한 빚이 있음을 알았다. 그것도 은행이 아닌 고리대금업자에게서 사채를 쓴 것이었다. 원로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장부까지 조작하는 치밀함을 보였지만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었다.
카르한은 사람을 보내 조사하도록 했고, 레베타가 사채를 빌려 엘리오드 백작에게 합의금을 내어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안 카르한은 고민에 빠졌다. 원로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가는 가문이 뒤집힐 것이 뻔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었기에, 카르한은 결단을 내렸다. 원로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해주기로 말이다.
회의가 시작되고 원로들이 의제를 꺼내기도 전에 카르한은 전대 공작부부가 사채를 썼음을 밝혔다. 잠시 멍하니 있던 원로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은행도 아니고 고리대금업자라뇨!”
“그럼 지금도 이자가 붙는 거 아닙니까.”
회의장이 한바탕 난리 나자, 카르한은 차분하게 한마디 했다.
“전부 갚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수로 말입니까. 안 그래도 공작령의 세수가 줄었는데…….”
일을 벌인 것은 레베타와 블레어드였지만, 몇몇 원로들은 카르한에게 은근히 책임을 강요했다. 카르한이 작위를 계승한 후 일부 원로들과 카르한은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글로시아나 시오릭처럼 카르한을 지지했던 원로들은 조용했으나,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우위에 서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이제 막 작위를 계승한 젊은 공작이니, 제 입맛대로 주무르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기회에 카르한의 약점을 잡으려는 듯 꼬치꼬치 캐물어왔다.
“그만하십시오.”
묵직한 저음에, 원로들이 입을 다물었다. 카르한은 원로들을 슥 둘러본 후에 말을 꺼냈다.
“이자를 포함한 원금은 다음 달 내로 갚을 수 있습니다. 블레어드 에반테온과 선대 공작의 물건을 전부 팔면 일부 상환이 되더군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들 제가 야만족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는 것은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나하나 들어주면 끝도 없을 것 같아, 카르한은 처음으로 원로의 말을 잘랐다.
“방위비가 대폭 감소했으니, 앞으로 분쟁 지역에 들어가는 돈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카르한은 분쟁 지역 인근 마을에 공방을 차린 것과 유통망을 늘린 것까지 전부 세세히 말해주었다.
“경작을 할 수 없는 마을에 공방을 하나씩 늘려볼까 싶습니다. 그럼 공작령 주민들은 스스로 생산 활동을 하고 세금을 내게 될 겁니다.”
지금껏 척박한 땅에 사는 주민들은 공작 가문에서 구휼금을 받아서 생활했다. 주민들이 생산 활동을 시작한다면 구휼금을 환수할 수 있을뿐더러 세금까지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카르한은 잠깐 말을 망설였다. 어제 일리아와 이야기가 끝났으니, 말해도 괜찮을 터였다.
“이번에 분쟁지에서 희귀 원석을 대량 발견했습니다.”
“!”
원로들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금보다 값어치가 높으니 그것만으로도 수익이 상당할 거라 예상합니다.”
공작령에는 광산이 드물었다. 극소량의 금이 매장된 광산 하나 외에, 값어치가 높지 않은 원석이 채굴되는 광산이 전부였다. 그러니 지금 카르한의 발언은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머리를 굴리던 원로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카르한을 견제하던 원로들도 단숨에 조용해졌다.
의제가 바뀌고, 카르한과 원로들은 회의를 이어갔다. 어느새 회의는 카르한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가끔 지나치게 간섭하는 원로가 있으면, 글로시아나 시오릭이 막아주었다. 회의가 길어지자, 카르한은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언제 결혼하실 생각이십니까?”
“슬슬 결혼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회의보다 그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원로들은 카르한이 일리아와 교제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블로든은 이제 재력뿐만 아니라, 권력도 가지게 된 상태였다. 원로들이 결혼을 종용하자, 카르한이 대답했다.
“그럼 여러분 말씀대로 회의는 이만하겠습니다.”
“예?”
원로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한이 처음으로 웃었다.
“지금 청혼 반지를 찾으러 갈 거니까요.”
***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창문 틈새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카르한의 생일을 기점으로 날씨가 따뜻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 꽃이 피었다. 벌써 장미가 움트는 것으로 보아 올해는 여름이 일찍 찾아올 모양이었다.
온천 사업 일로 오랜만에 외출한 일리아는 비올레를 대신하여 거래처 사람들을 만났다. 비올레는 슬슬 일리아에게 사업 권한을 넘기는 중이었다. 일찍 은퇴한 후에 클리프와 둘이서 여행을 떠나는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만약 비올레가 바람대로 일찍 은퇴한다면, 일리아가 블로든 상단의 대표자가 될 터였다. 백작위는 헤인리가 계승하고, 상단은 일리아가 물려받는 것이다.
볼일을 마친 일리아는 오랜만에 오르골 가게로 향했다. 매입한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가게 앞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아직도 제국은 오르골에 반지를 넣어서 청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요즘 청혼하기 좋은 달이라 그런지 저번 달보다 손님이 많아 보였다.
줄을 선 손님들의 얼굴에는 들뜸과 설렘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들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나중에 신혼여행 가면 어디가 좋을까요?
기다릴 만큼 기다린 일리아는 먼저 결혼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그러나 카르한은 일리아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착실하게 여행지만 읊었다. 답답해진 일리아는 대놓고 물었다.
-우리 슬슬 결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그러나 카르한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일리아만큼 적극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혹시 아직 결혼 생각은 없는 건지, 아니면 고민 중인 건지 그의 속내가 궁금했다.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
빙빙 돌리는 걸 싫어하는 일리아는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카르한은 아니라고 고개를 젓더니,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번엔 확실하게 대답을 듣고 싶은데.”
그 후로 둘 다 바빠서 제대로 대화를 나눌 틈이 없었다. 거기다 최근 들어, 카르한은 저녁 식사가 끝나면 금방 잠들어버렸다. 식사하다가도 꾸벅꾸벅 졸아서, 안쓰러운 나머지 붙잡지도 못했다.
“일이 그렇게 바쁜가.”
계속 꼭두새벽에 저택을 나가던데……. 걱정과 서운함이 함께 밀려왔다. 고민하던 일리아는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리아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이번에 재산이 크게 늘어서 은행 금고를 증설해야 했다. 이러다가 은행 옆에 블로든 가문 전용 금고를 새로 지어야 할 판이었다. 은행에서 업무를 보고 나오자,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왔다.
“블로든 영애!”
깜짝 놀란 일리아는 눈만 깜빡였다. 여기서 테시온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일리아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르한도 같이 왔나 확인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 공작저로 와주십시오.”
“무슨 일 있어요?”
“예, 아주 급한 일입니다.”
테시온이 비장하게 말하자, 일리아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최근 카르한이 무척 피곤해했던 것이 생각났다.
일부 에반테온 원로들이 카르한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혹시 그들 때문에 성과를 내려고 무리했다가 과로로 쓰러진 게 아닐까 싶었다.
‘이러다가 사람 잡겠네! 이놈의 원로들을 그냥…….’
일리아는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공작저로 가요!”
일리아는 곧바로 테시온과 함께 공작저로 향했다. 마차가 번화가를 달리는 동안, 온갖 걱정이 들었다.
‘건강식이라도 먹여야 하나. 당분간 쉬라고 말해야겠다.’
혼자 결론을 내릴 즈음,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달 사이, 에반테온 공작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유서 깊은 에반테온 공작저는 장엄하나 한편으로 쓸쓸하고 음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런데 지금은 정원부터 건물까지 싹 손을 봤는지 한결 밝아 보였다. 공작가의 주인이 바뀐 것만으로도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어디선가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짙은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잠깐 향기에 정신이 팔린 일리아는 고개를 내젓고 테시온에게 물었다.
“카르한은 어디에 있어요?”
“후원으로 가시면 됩니다.”
“후원이요?”
뜻밖의 대답에 일리아가 되물었다. 테시온은 그저 이유 모를 미소만 지은 채 후원 쪽으로 손짓했다.
“가보십시오.”
의아한 얼굴로 테시온을 쳐다보던 일리아는 후원 쪽으로 걸음을 뗐다. 사박사박, 새로 자란 잔디가 발에 밟혔다. 후원과 가까워질수록 꽃향기가 짙어졌다. 일리아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후원에 들어선 일리아는 그대로 멈춰 섰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보라색 융단이 너울처럼 펼쳐져 있었다. 보랏빛으로 가득한 라벤더 꽃밭에 일리아는 숨도 쉬지 못했다. 이렇게나 많은 라벤더는 처음 보았다. 마치 보라색 밀밭 사이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지금껏 화려하고 대단한 정원을 수없이 보았지만, 이 광경만큼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듯했다. 두근거리는 가슴 부근을 꾹 누른 채 꽃밭을 둘러볼 때였다. 저 멀리 바람이 불어오는 끝에 카르한이 서 있었다.
“일리아.”
나직한 저음이 일리아를 불러왔다. 일리아는 꽃밭에 세워진 이정표처럼 꼼짝 없이 카르한에게 향했다. 카르한도 일리아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물결을 부수듯 라벤더가 사방으로 퍼졌다가 다시금 모였다. 라벤더 사이를 가로질러 온 카르한이 마침내 일리아의 앞에서 멈춰 섰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카르한은 어느 때보다 신경을 쓴 듯했다. 중요한 날에만 착용하는 커프스단추까지 소매에 달려 있었다.
일리아는 입술만 달싹였다. 머릿속이 꽉 차서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리아를 내려다보던 카르한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전에 일리아와 함께 만개한 등나무 아래를 걸은 적이 있었습니다.”
일리아는 곧바로 자신의 생일날을 떠올렸다. 둘이서 걸었던 등나무 터널. 한 장 두 장 떨어지는 꽃잎은 바닥이 아닌 제 가슴에 쌓였고……, 한여름 밤처럼 아름다웠던 풍경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저는 그날, 제가 몰랐던 감정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카르한의 목소리에서 울림이 느껴졌다. 카르한 또한 그날을 다시 곱씹는 것처럼.
“그 후로 등나무를 볼 때마다 일리아가 생각났습니다.”
“…….”
“아마 평생, 제게 등나무의 의미는 사랑으로 남을 겁니다.”
다시금 눈앞에 등나무 꽃잎이 하늘하늘 흩날리는 듯했다. 그때와 풍경은 달랐지만, 일리아는 카르한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일리아 또한 라벤더를 볼 때마다 카르한을 떠올릴 것이다.
“…….”
카르한은 눈시울이 붉어진 일리아를 응시하다가 작은 오르골을 꺼내들었다. 불어오던 바람이 멎자,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통통 튀는 맑은 소리가 라벤더 위를 뛰노는 듯했다.
일리아는 이 음악을 알고 있었다. 카르한과 처음 오르골 가게에서 만났을 때, 일리아가 추천해준 음악이었다. 그리 길지 않았던 음악이 멈추고 상자가 덮였다. 숨겨져 있던 공간에 반지가 놓여 있었다.
“제가 평생 당신 곁을 지켜도 되겠습니까?”
카르한의 청혼에 일리아는 가슴이 벅차서 숨만 들이켰다. 제 안에서부터 선율이 들려왔다. 세상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사랑스러운 음악이었다.
일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집어 들었다. 카르한이 일리아의 손을 붙잡고 반지를 끼워주었다. 딱 맞게 들어간 반지가 햇빛에 비쳐 반짝였다. 일리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카르한.”
완벽한 순간이었다.
***
어느 날씨 좋은 날, 오랜만에 외출한 카르한은 일찍 볼일을 끝내고 움직였다. 오늘 마침 일리아와 시간이 맞아서, 밖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약속 장소는 이전에 일리아와 만났던 시계탑 아래였다.
카르한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약속시간까지 아직 멀었으니, 꽃이라도 사 갈까 싶었다. 꽃집을 향해 걷던 카르한은 끙끙거리며 가방을 옮기는 여자를 보았다. 카르한은 고민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제가 짐을 옮겨드릴까요?”
“아, 감사합니다.”
여자는 살았다는 듯 반색했다.
“저기까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자가 가리킨 곳은 은행이었다. 어차피 가는 방향이었기에, 카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으로 가뿐하게 가방을 든 카르한은 척척 걸어갔다. 연신 감탄하던 여자는 은행 앞에 도착하자 고맙다고 인사했다.
“도와주셨는데, 이대로 보내기는 그렇고…….”
여자는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더니 카르한에게 말했다.
“점을 안 본 지 오래되긴 했지만, 고마우니까 한번 봐드릴게요.”
카르한은 그제야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화려한 차림새였다. 수상함을 느낀 카르한은 생각했다.
이단인가……? 카르한은 거절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자 여자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제가 이래 봬도 주변에서 소문난 점술사였습니다.”
그걸로 떼돈을 벌었다며, 그녀가 자신만만해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잘 지낼 수 있는지도 점칠 수 있지요.”
카르한은 잠시 망설였다. 여자는 금방 끝난다며 카르한을 구석으로 이끌었다. 트렁크를 바닥에 내려놓은 여자가 그 위에 카드를 펼쳤다.
“자, 뽑아보세요.”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게 된 카르한은 조심스레 카드를 뽑았다. 여자가 카드를 하나씩 뒤집더니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박복한 운명이로군요. 태어날 때부터 재물운이랑 가족운은 최악이고…….”
어떻게 알았지. 여자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하지만 연애운만큼은 모든 걸 상쇄할 정도로 좋습니다.”
“…….”
“딱 한 명, 운명의 상대가 있군요. 그 사람이 당신을 꽃피울 겁니다.”
카르한은 곧바로 일리아를 떠올렸다. 그 말처럼 일리아를 만난 후로 카르한의 운명은 바뀌었다.
“으음……, 뭔가 예전에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우뚱하던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튼 당신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 행복해질 겁니다.”
카르한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더 봐드릴까요?”
“……결혼 생활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여자는 카드 두 장을 더 뽑았다. 눈을 가늘게 뜬 여자가 말했다.
“결혼식은 아직이지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여자가 혀를 찼다.
“주변에서 방해가 들어올 운세예요. 그래도 무사히 결혼식을 치르게 될 겁니다.”
여자는 카드 몇 장을 더 뽑았다. 그러더니 눈을 크게 뜬 채 중얼거렸다.
“부인 되실 분이 고생하겠는데요?”
“예?”
카르한이 심각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인상이 험악해지자, 여자는 움찔했다.
“아이가…….”
“아이가?”
“좀 많네요. 그것도…… 세쌍둥이?”
그녀는 확신 없는 말투였다.
“제가 자식 운은 틀릴 때가 종종 있으니, 이건 너무 귀담아듣진 말아요.”
주섬주섬 카드를 챙긴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이만.”
매번 금화를 은행에 가지고 가는 것도 일이라고 중얼중얼하던 여자는 이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멍하니 있던 카르한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세쌍둥이라고……?”
다사다난했던 카르한의 인생에 찾아올, 새로운 파란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돈으로 약혼자를 키웠습니다 完 / 7권(외전)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