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495
상남자 495화
굳이 무덤을 파지 않더라도, 유현은 두 사람을 처리할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언제든 손가락만 까딱하면 묻어 버릴 수 있지만, 굳이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기왕 하는 거 끄나풀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깔끔히 도려내는 게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다.
5차 임단협이 일주일 정도 남아 있는 터라, 파업 후속 처리를 미리 해 둘 여유도 있었다.
공장장 집무실 소파에 앉은 유현이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마주 앉은 안홍구 공장장은 자신의 목줄이 얼마 남지 않은 줄도 모른 채 껄껄 웃었다.
“역시 그룹전략실 인원이 오니까 일이 술술 풀린다니까.안 그런가, 이 팀장?”
“네.맞습니다.이렇게 쉽게 정리될 줄은 몰랐습니다.”
안홍구 공장장 옆에 앉은 이성렬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이 장석준 노조위원장을 만났단 걸 아는 이 두 사람은 추정환 상무의 비리와 연결된 끄나풀이 확실했다.
유현은 추가로 연결된 끄나풀을 확인코자 슬쩍 운을 띄웠다.
“뭐,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근데 그룹전략실에서 강하게 압박한단 건 어떻게 알린단 겁니까?”
이미 한편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안홍구 공장장이 바로 답했다.
“보통 기사로 압박하지.아침에 펼치는 신문만큼 효과적인 건 없거든.”
“호오, 요즘 기자들이 웬만해선 안 받아 줄 텐데요?”
“꽤나 이슈가 되는 내용이라 그리 어렵지 않아.”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그걸 설마 이 팀장님이 하시는 겁니까?”
유현이 훅 치고 들어오자, 공장장 눈치를 살피던 이성렬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팀원들이 하죠.제가 컨펌하고요.”
“생산 관리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전천후 직원들이네요.”
“과장님 지원 아니었으면 고생만 하고 빛도 못 봤을 겁니다.”
이성렬 팀장이 조심스러운 성격처럼 겸양을 떨었다.
안홍구 공장장도 이에 질세라 바로 거들었다.
“그렇지.한 과장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안 됐지.이게 다 한 과장이 먼 길 와 준 덕분이야.”
“별말씀을.근데 어째 먼 길 온 손님 접대를 말로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듣고 있던 유현이 익살스런 표정으로 물음을 던진 순간이었다.
한 박자 늦게 이해한 안홍구 공장장이 어색한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하하.당연히 그럴 순 없지.말 나온 김에 오늘 진하게 한잔 어떤가?”
“에이, 나이대가 안 맞잖아요.전 젊은 친구들과 놀고 싶습니다.”
“뭐?”
유현이 손을 휘휘 젓자 안홍구 공장장이 눈을 껌뻑였다.
분명 접대를 원하는 것처럼 말해 놓곤, 느닷없이 농담을 던지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홍구 공장장의 이해도와는 상관없이 유현은 편하게 원하는 바를 요구했다.
“그 돈으로 생산관리팀 회식이나 시켜 주세요.저도 끼어서 좀 놀게요.”
“갑자기 회식은 왜…….”
이성렬 팀장이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 때였다.
끼이익.
밖에서 꽤 긴 시간 동안 통화하던 추정환 상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그는 유현을 말없이 힐끔 바라봤다.
유현은 달라진 그의 눈빛을 보며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누구와의 통화였기에 저럴까?
유현이 그 배경을 떠올리고 있을 동안, 이성렬 팀장에게 전후 사정을 들은 추정환 상무가 조금 전의 상황을 중재했다.
“공장장님, 그렇게 하시죠.그간 노조 등쌀에 생산관리팀원들이 고생 많았으니, 이참에 밥이라도 사 주면 좋아할 겁니다.”
“그렇긴 하지.”
“그리고 직원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공장장님이 자리를 빛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추정환 상무는 안홍구 공장장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을 껌뻑였다.
안홍구 공장장이 눈치를 채기 전에 유현이 먼저 그의 의도를 꿰뚫었다.
감시하겠단 건가?
물론 겉으로는 절대 티내지 않고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또 한 박자 늦게 이해한 안홍구 공장장이 유현의 눈치를 봤다.
“늙은이가 가도 될지 모르겠네.”
“물주가 온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얼마든지 좋죠.”
“하하.그렇긴 하지.”
안홍구 공장장은 생소한 기분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시각, A공장 1층에 위치한 생산관리팀 사무실은 분주했다.
카메라를 목에 멘 채 지나가던 남자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후배에게 물었다.
“뭐 해?”
키보드에서 손가락을 뗀 공진한 대리가 윤준우 과장을 바라봤다.
“기자에게 넘길 내용 정리하고 있습니다.작업 사진은 찍었어요?”
“어.찍긴 했는데 별거 없어.작업화 미착용한 거랑 근무 시간에 담배 피우는 정도?”
“일단 그거라도 주세요.대충 모자이크하고 배경 바꾸면 트집거리 정도는 될 거예요.”
“알았어.하.근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이게 다 그룹전략실 어린 과장 놈 때문이랍니다.”
공진한 대리의 갑작스러운 말에 윤준우 과장이 눈을 껌뻑였다.
“뭐? 왜?”
“그놈이 저희가 마련한 안건 다 퇴짜 놓았대요.그래서 노조 압박한답시고 제가 또 대리 기사 쓰는 거 아닙니까.”
“젠장.일만 늘어나네.”
윤준우 과장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팀 막내가 달려와 크게 소리쳤다.
“오늘 팀 회식이니까 전원 참석이랍니다.공장장님도 오신대요.”
약속이나 한 듯 팀 내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에휴.짠돌이 공장장 때문에 또 눈칫밥만 먹겠네.”
그중 윤준우 과장의 탄식 소리가 가장 컸다.
생산관리팀이란 공장 전반의 생산 설비 및 인력을 관리하는 팀으로, 공장장 직속 조직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이번 파업과 연관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들을 역으로 이용하면 파업 후속 조치를 단숨에 끝낼 수 있단 의미였다.
남은 시간 동안 생산관리팀을 미리 움직여 둘 생각인 만큼, 유현은 먼저 그들과 가까워지고자 했다.
그리고 꼭 확인해 볼 사람이 있었다.
그게 지금 이성렬 팀장에게 연락하지 않고 먼저 회식 장소에 온 이유였다.
드르륵.
유현이 식당 안 미닫이문을 열자, 방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생산직 작업복이 아닌 옅은 회색 점퍼가 그들의 신분을 말해 줬다.
“누구십니까?”
의아한 듯 묻는 남자 뒤로 한 남자가 눈을 뻐끔거렸다.
임원 회의실에 다과를 챙겨 줬던 남자가 유현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어? 그, 그룹전략실?”
“헉.”
동시에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낯빛이 파리한 게, 유현에게 상당히 겁을 먹고 있는 눈치였다.
팀장급들도 벌벌 떠는데 그 밑은 다를 리 없었다.
유현이 허리를 굽히려는 사람들에게 대뜸 말했다.
“자자, 앉으세요.저 이렇게 부산스러운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네? 아, 네.”
유현은 얼떨떨해하며 자리에 앉는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테이블 위를 훑었다.
도착한 지는 꽤 되어 보이는데, 아직 주문조차 하지 않은 모습이다.
딱 봐도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아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렀다.
“이모님, 여기 한우 꽃등심 세트로 쫙 깔아 주세요.”
“전부요?”
“네.육회도 하나씩 올려주시고, 술도 소주, 맥주 각 2병씩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빨리 가져다 드릴게요.”
종업원은 인사 후 빠르게 돌아갔다.
“…….”
할 말을 잃은 사람들을 비집고 지나간 유현이 자리에 앉았다.
팀에서 서열이 꽤 높아 보이는 남자가 유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습니까? 돈이 상당히 들 텐데요.”
못해도 인당 10만 원, 배불리 먹으면 20만 원까지 들 정도로 비싼 메뉴였다.
유현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훑으며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파업 진정시키느라 불철주야 고생한 여러분들을 위해 사는 건데, 뭐가 아깝겠습니까?”
“…….”
“생각 같아선 포상까지 내리고 싶은 심정입니다.여러분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유현이 대뜸 고개를 숙이자, 양옆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고개 숙였다.
“아, 아닙니다.”
마치 파도 타듯 총 8개의 테이블로 인사가 퍼져 나갔다.
다시 고개를 든 사람들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했던 그룹전략실 직원의 분위기와 너무 다른 탓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꽃등심과 육회가 나온 순간 싹 사라졌다.
곧이어 술이 들어가자 긴장감이 확 풀어졌다.
어느새 잔을 든 사람들이 입을 맞춰 소리쳤다.
“위하여.”
술잔을 부딪친 유현이 대각선 테이블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큰 얼굴에 순박한 인상이 특징인 남자, 카메라를 목에 맨 윤준우 과장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유현이 식당에서 생산관리팀원들과 단합할 때였다.
회식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안홍구 공장장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조금 전 추정환 상무가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한 과장이 그룹전략실에서도 요주의 인물이랍니다.만약을 위해 약점을 잡아 놓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전화 한통 받고 와서 태도가 달라진 게 의아했지만, 추정환 상무가 허튼소리 할 사람은 아니었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안홍구 공장장이 이성렬 팀장에게 물었다.
“약점을 어떻게 잡을까? 혈기 왕성한 놈이니 룸에 데리고 들어가서 여자 붙이는 게 딱인데, 왠지 안 넘어갈 거 같단 말이야.”
“아까 젊은 사람들이랑 놀고 싶다고 하는 거 보니까, 저희랑 안 갈 거 같긴 합니다.”
“아.그렇지.어쨌든 여자만 붙이면 되는 거잖아.일단 준비해.”
박수를 짝 친 안홍구 공장장이 수준 낮은 계획을 떠벌릴 때였다.
지이잉.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한 이성렬 팀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고, 공장장님, 한 과장이 지금 회식 장소에 있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랑 같이 간다며?”
“그게…….”
“젠장.일단 가면서 얘기하자고.”
안홍구 공장장이 조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점퍼를 들고 바로 나갔다.
뒤따르던 이성렬 팀장이 상황 파악을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1시간이면 먹고 놀기 딱 좋은 시간이다.
그 사실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생산관리팀원들이 증명했다.
이미 꽃등심 2판이 비워져 다들 배가 불렀고, 빈 술병들이 바닥에 주르르 깔렸다.
평소 같았으면 1시간 내내 젓가락만 빨며 공장장이 오길 기다려야 했던 사람들은,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 소리 높여 웃었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웃던 윤준우 과장이 유현 앞에서 합장 자세를 취했다.
혀가 꼬인 게 꽤나 취한 것 같았다.
“처음엔 되게 차가울 줄 알았은데, 완전히 제가 오판했습니다, 오판.실수 인정.”
“정확하게 보신 겁니다.대신 막돼먹은 어르신들 앞에선 싹수가 없는 편입니다.”
“하하하.진짜 재밌는 사람이시네요.”
유현은 배를 잡고 웃는 윤준우 과장을 보며 의문이 들었다.
‘왜 공장장의 뒤를 캐고 있었던 걸까?’
마스터키로 한성정밀 시스템에 접근했던 유현은 윤준우 과장이 남긴 흔적을 확인했었다.
그는 유현과 마찬가지로 담당 권한을 이용해 자료를 수집 중이었다.
꽤 깊이까지 조사했던 터라, 진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변수가 될 수 있는 사항이니 만큼, 유현은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할 생각이었다.
유현이 윤준우 과장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며 안홍구 공장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옆에 젊은 여직원도 함께였다.
그 순간 유현의 머리가 돌아갔다.
‘여러 가지 하네.’
내심을 숨긴 유현이 놀란척했다.
“어? 공장장님.”
“효주 씨가 여기 왜……?”
우르르 일어나는 사람들 사이로 윤준우 과장이 눈을 껌뻑였다.
휴가 중인 생산관리 담당 비서가 이 자리에 온 까닭이다.
과하게 놀란 윤준우 과장과 무척 어두운 여자의 표정이 대비됐다.
순간 윤준우 과장을 바라보는 유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짐작가는 부분은 있지만 지금은 확인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유현은 일단 상황부터 정리했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이제 벌써 1차 마무리 됐는데요.2차 가시죠.”
“뭐? 벌써?”
“다들 소고기를 물려해서요.그러게 좀 빨리 오시지 그러셨습니까.자, 다들 일어나시죠.”
벌떡.
유현이 일어나자, 생산관리팀원들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가슴 한편이 시원하긴 했으나, 실시간으로 구겨지는 안홍구 공장장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별종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