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80
상남자 80화
그때 불쑥 박승우 대리가 끼어들었다.
“고객이 그런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게 상품기획팀의 역할 아닙니까.”
얼마 전 유현이 그에게 했던 말과 토씨 하나 안 바꾸고 똑같은 말이었다.
유현과 눈을 마주친 박승우 대리가 씩 웃었다.
확실히 달라졌다.
과거 박승우 대리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낼 만큼 배포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유현은 그를 향해 식탁 밑으로 엄지를 척 하고 올렸다.
그러자 그가 콧김을 내뱉으며 어깨를 활짝 폈다.
반면 사람들은 황당한 듯 박승우 대리를 바라봤다.
김현민 차장은 혀를 차며 말했다.
“넌 무슨 지금 회사 드라마 찍냐?”
“아뇨.정말 그렇잖아요.기가 막히게 좋은 콘셉트로 엄청 저렴한 패널을 딱 내놓으면 고객이 살걸요?”
“공모전에서 그걸 해내겠다고?”
“그럼요.물론! 저 혼자는 못 합니다.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박승우 대리는 뜬금없는 말을 내뱉으며 벌게진 얼굴을 푹 숙였다.
잘 좀 포장해서 설명하지.
유현이 혀를 찼다.
하긴, 술이 잔뜩 취한 상태에서 이 정도 말 뱉은 것도 용하다.
이대로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그의 말을 유현이 호기롭게 받았다.
“우리 파트에 전문가들이 많은데 같이 힘을 모으면 정말 멋진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후였다.
두 사람을 차례로 본 김현민 차장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 보니까 멘토나 멘티나 똑같은 놈들이네.”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젓고 있지만 내심 반기는 표정을 감추진 못했다.
파트의 가장 큰 문제가 너무 파편화된 프로젝트라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기왕 잘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떻게든 파트원을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을 마련하고 싶을 것이다.
그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 과장 생각은 어때?”
“일이 좀 많아야죠.당장 현일자동차와 협상이 코앞인데 도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워낙 하고 있는 일이 많았다.
그 판국에 성과도 보장받지 못하는 공모전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건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현 역시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걸 고쳐 나가는 게 유현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었다.
휘이이잉.
얼큰하게 취한 박승우 대리가 공원 벤치에 등을 기대며 뇌까렸다.
“아, 바람 참 시원하고 좋다.”
“그러게요.”
옆에 앉은 유현도 같은 생각이었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유난히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다른 파트원들은 회식을 끝내고 모두 들어간 상황이었다.
두 사람만 벤치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이잉.
그때 박승우 대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왔다.
내용을 확인한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담당님 문자 왔다.”
“뭐라세요?”
“그냥, 좋은 시간 보내라고 하지.신기하네.이런 말 할 사람이 아닌데.”
“좋은 일이네요.”
박승우 대리는 벌게진 얼굴로 유현을 바라봤다.
조찬영 상무에게 받은 인센티브로 회식한 거니 사진을 찍어 보내자고 한 것도 이 멘티의 조언이었다.
질색했었지만 막상 하고 보니 조찬영 상무에게 살가운 문자도 받았다.
“고맙다.”
“뭘요.제가 한 게 뭐 있다고.”
“자식.넌 매번 그렇게 말하더라.”
“이번에는 다른 말 할까요?”
유현이 싱긋 웃으며 받아쳤다.
마주 웃던 박승우 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냐? 나 따라서 공모전 준비하는 거.”
“왜요? 자신 없으세요?”
“아니.꼭 자신 있다고 결말이 좋은 건 아니잖아.”
“안 좋으면 또 어떤가요? 그래도 월급은 주잖아요.”
유현의 생뚱맞은 말에 박승우 대리가 속시원하게 웃었다.
“뭐? 푸하하하.맞네.맞아.”
“당연하죠.”
박승우 대리는 시원하게 웃더니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자.내일부터 새로운 일 시작해야지.”
“네.가시죠.”
유현은 앞서가는 박승우 대리의 등을 바라보았다.
-나 이제 회사 그만두려고.미안하다.명색이 선배인데 좋은 모습 못 보여서.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던 과거 박승우 대리의 모습이 그 위에 겹쳐졌다.
유난히 작아 보였던 그의 등이 지금도 어른거렸다.
그때 박승우 대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해.빨리 안 오고.”
유현 앞에는 누구보다 커 보이는 박승우 대리가 서 있었다.
패배 의식이 가득했던 과거 그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갑니다.”
유현이 기분 좋게 웃었다.
다음 날도 언제나처럼 반복되는 일상이 시작됐다.
그렇다고 하는 일이 늘 같은 건 당연히 아니었다.
-컬러폰
박승우 대리의 모니터에 큼지막한 글씨와 휴대폰 모양의 네모난 박스가 띄워져 있었다.
보급형 풀터치폰이 필요한 이유, 예상 판매량, 가격 저감 방안, 세부 콘셉트 등은 어느 정도 정했다.
발목을 잡는 건 일정이었다.
“시간이 너무 없는데…….”
박승우 대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보급형이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저렴하단 말이다.
그간 비쌌던 풀터치 패널을 아주 저렴하게 만드는 게 박승우 대리가 생각하는 차별화 방안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게 생산 라인 공통화였다.
기존의 것과 동일 라인을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생산 일정이나 효율성 면에서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정이다.
HPDA3 패널의 백업으로 공통 라인을 쓰기 위해서 개발이 완료되어야 하는 시기는 늦어도 내년 3월.
그 안에 패널의 액정, 필름, IC, 파워 등 각종 부품의 가격을 혁신적으로 줄여야 했다.
당연히 생산성도 확보되어야 했다.
옆에서 유현도 곰곰이 생각했다.
‘쉽지 않아.’
그냥 아이디어만 내는 거라면 박승우 대리 혼자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아이디어 공모전이 아니라 제품화 공모전이다.
순위에 들기 위해선 아주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일정과 구현 방안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엮여 있는 각종 관련 부서와 일정 및 제작 방안을 협의해야 했다.
거기다 패널뿐만 아니라 휴대폰의 전체적인 외관과 콘셉트까지 신경 써야 했다.
그걸 박승우 대리 혼자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유현이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보다 현장에서 발로 뛸 사람들이 필요하다.
‘어떻게 한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파트원들을 합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손을 좀 써야겠네.”
“응? 뭐라 그랬어?”
유현이 중얼거리자 박승우 대리가 물었다.
“아뇨.그냥요.제가 뭐 도와 드릴까 해서요.”
“넌 일단 목업 생각해 봐.아, 아직 힘들겠구나.”
“왜요?”
유현이 묻자 박승우 대리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거 은근히 손 많이 가거든.”
“하긴요.”
“아, 잠깐만 있어 봐.내가 이거 정리하고 업체 리스트랑 개발 지침서 알려 줄게.”
목업이라.
예전에 유현이 채널폰2 데모를 위해 목업을 손본 건 그야말로 다 되어 있는 것에서 살짝 수정한 터였다.
하지만 새로 목업을 개발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업체를 만나서 일정을 조율하고,
개발 콘셉트를 협의해서 도면을 만들어 내고,
만든 도면으로 제작해 패널에 끼우고,
패널에 이미지를 띄울 수 있는 제어부를 만들고,
어떤 이미지를 띄울지도 생각해 내고 등등.
박승우 대리 말대로 손이 상당히 많이 가는 일이다.
하물며 이번은 단순히 LCD 패널용 목업이 아니었다.
정말로 휴대폰과 흡사한 형태의 목업을 만들어야 했다.
당연히 지금껏 LCD 사업부에서 해 온 목업보다 개발 수준이 높다.
그걸 간파한 유현이 움직였다.
“아니에요.바쁘신데 일 보세요.제가 한번 알아볼게요.찬호 선배가 알 것 같아서요.”
“아, 찬호가 지난번 제품 목업 담당했지?”
“네.”
유현 대답에 박승우 대리 눈이 반짝였다.
“그래.나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무리하지 말고 그냥 배운다고 생각해.신입이 혼자 감당할 일은 아니니까.”
“네.알겠습니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고개를 돌려 이찬호를 봤다.
얼마 전 회식 때 술에 잔뜩 취한 그가 했던 넋두리가 떠올랐다.
-넌 좋겠다.좋은 멘토도 있고…… 일도 인정받고…… 푸…….
꾹 참고 있던 마음속 말이 삐죽 새어 나온 순간이었다.
그는 술 취한 상황에서도 부끄러운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상황에서 유현이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찬호가 지금껏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끈 적은 없다.
다 누군가의 프로젝트를 뒤에서 서포트해 주는 형식이었다.
그가 주로 했던 건 목업을 만드는 일이다.
유현이 주목했던 건, 그간 그가 단 한 번도 일정에 차질 없이 목업을 만들어 냈단 점이다.
개발팀과 업체 사이에서 그만큼 신경을 많이 썼단 의미였다.
하지만 주 업무가 아니다 보니 팀에서 인정을 받진 못했다.
아마 그 자신도 자신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런 그의 도움이 이번엔 꼭 필요했다.
유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찬호 옆으로 갔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일어선 채 전화를 받고 있었다.
“네, 네.아닙니다.네.알겠습니다.”
굳은 표정인 걸 보니 일이 잘 안 풀리는 듯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작년부터 열리기 시작한 유럽 가전박람회 참가 준비였다.
대개 전시회 하면 휴대폰 사업부가 한성전자의 이름을 달고 완제품을 내보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번은 LCD 사업부의 신규 패널도 같이 전시된다.
그것도 완전히 별도의 부스를 만들어 전시를 했다.
그러다 보니 평소보다 준비할 게 많았다.
“……네.바로 보내겠습니다.네.”
전화를 끊은 이찬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현에게 물었다.
“뭐 볼일 있어?”
“아뇨.다음에 물어볼게요.”
“그래.지금은 좀 정신이 없네.내가 회의 준비를 해야 해서.”
이찬호는 유현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모니터에 집중했다.
-LCD 사업부 유럽 전시회 대응 방안
단순히 모바일 그룹 전시만 대응하는 거면 이렇게까지 여유가 없을 리가 없다.
보아하니 TV, IT 그룹의 전시 내용까지 그가 취합하고 있었다.
보통 전체 내용을 취합하는 건 회의를 주관하는 담당자가 할 일이다.
그런데 대체 왜 그가 저걸 잡고 있는 걸까?
아직 해외 전시회에 가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다른 그룹 사람들까지 다 참석하는 회의를 주관하는 게 말이 되나?
그것도 이제 막 입사한 지 2년이 지난 사원이 말이다.
이유는 볼 것도 없었다.
짬밥에 밀렸다.
잠시 후.
이찬호는 노트북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갔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노트북 어댑터도 안 가져갔다.
그때 지나가던 김현민 차장이 물었다.
“쟤는 뭐 저리 바빠?”
“전시회 회의 참석하는 것 같아요.그런데 차장님, 선배가 사업부 자료까지 다 정리하는 게 맞나요?”
“아니.왜? 그건 영업팀에서 담당하기로 한 거잖아.”
김현민 차장은 황당한 듯 되물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일은 일대로 하고, 윗사람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니 고생을 해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찬호는 다 좋은데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보고 능력이다.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니 인정받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떠넘겨 받은 일을 꾸역꾸역 해내는 걸 보고 책임감이 좋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요령이 없는 거다.
속에서 쌓은 문제는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다.
유현은 과감하게 나섰다.
“실은…….”
“뭐? 당장 데려와.”
김현민 차장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자기 직속 부하직원을 타 부서에서 부려먹는데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씩씩거리며 오재환 팀장에게 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김현민 차장이 말했다.
“팀장님도 화나셨네.어서 서둘러.”
내심 쾌재를 부른 유현이 서둘렀다.
“가겠습니다.”
“빨리 가.”
김현민 차장의 목소리가 스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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