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1
01
“호오.”
결국 또 손등이 트고 말았다. 들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고 살짝 입김을 쏘여보자 아릿한 통증이 살갗을 뒤덮었다. 이런 강추위엔 얼굴도 제일 예쁘고 마음씨도 제일 예쁜 은하 이모가 준 크림을 아무리 발라도 소용이 없다. 쓰라린 손등에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잠시 서서 몇 번 움찔움찔 움직이다 체념하고 다시 양동이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영차!”
빨리 안가면 또 뭐라고 한 소리 듣겠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아앗!”
마음이 너무 급해서였을까, 서두른 발걸음이 화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돌부리에라도 걸렸는지 비틀거리기 무섭게 그대로 고개가 바닥에 처박혔다. 퍽, 둔탁한 소리에 하나둘씩 홍등이 켜졌다. 짜증 섞인 목소리들과 함께.
‘무슨 일이야?’
‘뭐야?’
덜컥 겁이 났다. 빨리 수습해야 하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한참 데굴거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양동이가 저만치 멈췄을 때쯤 그림자마저 표독스러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주였다. 그녀가 나타남과 동시에 어깨가 빳빳하게 굳었다.
“또 너야?”
앙칼진 목소리와 동시에 철썩, 요란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삽시간에 부어오른 뺨이 얼얼했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오늘은 몇 대나 맞으려나. 아니, 몇 대나 버틸 수 있을까.
“아이, 엄마, 그만해. 응? 날도 추운데 그냥 들어가서 자자.”
맞은편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 혜수가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곤 얼른 포주를 뒤에서 껴안아 더는 손찌검을 할 수 없도록 막았다.
“이거 놔! 이 쓸모없는 년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어 그냥!”
다시 하늘 높이 치켜드는 손에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 이모,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 주세요…….”
“누가 네 이모야? 아가릴 확 찢어버리기 전에 안 싸물어?”
“아이, 엄마! 좀! 이러다 다른 사람들도 다 깨겠어!”
아닌 게 아니라 어느새 한둘 씩 무슨 일인가 지켜보는 머릿수가 늘었다. 붉은 등 아래 검게 늘어진 긴 머리카락 그림자들이 기괴하게 느껴지지만 그저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어린 것에겐 그런 걸 느낄 틈이 없어 보인다. 가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 은하가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들어가자. 일어나, 얼른.”
은하가 한 줌이나 될까 한 소녀의 어깨를 덜렁 들어 제 방으로 끌고 들어가고 나서야 새벽의 작은 소란이 마무리됐다.
“미안해, 이모.”
한겨울 북풍보다 더 서슬 퍼런 포주의 언행에 짓눌려있던 말문이 은하의 방에 와서야 겨우 터졌다.
“내가 주연이 물심부름하지 말랬지.”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면서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은하의 모습에 간신히 열렸던 입이 다시 꾹 닫혔다. 안 하면 주연 이모가 보이지 않게 꼬집는걸. 꼬집는다고 이를 사람도 없고. 일렀다가 괜히 이모들끼리 말다툼이라도 일어나는 날엔 대빵 이모가 잡아채 아까보다 더 무섭게 혼을 낼 게 뻔했다. 제 어미 잡아먹은 년이 또 화를 불러왔다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입 밖에 내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기에 애꿎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은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약상자를 찾았다. 아직도 겁먹은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아 반창고를 꺼내 그 위에 연고를 짰다.
그런데 반창고 하나로는 턱없을 것 같다. 해져서 터진 바지 사이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또 다른 상처가 보였다. 잔뜩 긁혀 피가 맺힌 무릎의 상처엔 작은 모래 덩어리들이 얽힌 핏덩이가 찐득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연고를 바르려던 은하의 미간이 세로로 접혔다.
“이거 어떡해. 손등도 또 다 텄네. 너 내가 준 거 안 발라?”
“발라도 자꾸만 이렇게 돼, 이모.”
조심스레 바지를 걷어 올리곤 손수건에 물을 묻혀 무릎을 닦아주던 은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숨결을 따라 은은한 화장품 냄새가 풍겼다. 그녀가 은하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옅은 화장품 냄새도 있었다. 다른 이모들 방에선 코가 먹먹해지는 독한 냄새가 나는데 은하는 그렇지 않았다.
“이모, 잘못했어.”
“네가 뭔 잘못이 있어. 됐어. 가서 할 일 해 이제. 조심하고. 응?”
금세 표정을 풀고 어깨를 다독이는 다정한 손길도 그녀가 은하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응! 이모 고마워!”
“또 그런 일 있으면 엎드려서 빌지 말고 냉큼 도망가, 이 바보야. 왜 그걸 다 맞고 앉아있어. 엄마 금방 화 풀리는 거 알면서.”
“알았어.”
대빵 이모는 유독 그녀에게만 엄마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 홍등가의 모든 여인이 자신을 엄마라 불러도 그녀만큼은 엄마라 부르면 도끼눈을 뜨고 화를 냈다. 제 어미를 잡아먹은 년이 이젠 나까지 잡아먹으려 한다며.
하는 수 없이 삼촌들이 하듯 ‘대빵’이라는 칭호에 이모를 붙여 불렀는데 그마저도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줌마라고 부르면 싸가지가 없다며 뺨을 올려붙이고, ‘저기요’라고 부르면 어딜 그따위로 사람을 부르냐며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그나마 대빵 이모라고 부르고 ‘내가 왜 네 이모냐’고 한 소리 듣는 것이 그녀가 찾아낸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어휴, 빨래 널어야 하는데.”
구멍이 숭숭 난 낡은 바지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까진 무릎이 쩍쩍 갈라지는 것도 모른 채, 가느다란 다리가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꺼진 가로등 위로 동이 터오는 새벽. 아직 이모들이 일어나려면 네다섯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아직 한 구석에 나동그라져 있는 양동이를 얼른 집어 들고 수돗가로 향했다.
일단 주연 이모 방 앞에 물부터 채워 갖다 놓고, 그다음에 빨래를 널어야겠다. 설거지는 아직 그릇이 남아있으니 아침 식사 후 해도 괜찮겠지.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 맞다. 윤정 이모가 보석 가게에 주문해놓은 팔찌 찾아오랬지.
중얼중얼 해야 할 일을 읊어대면서 양동이 손잡이를 잡은 고사리손에 힘을 주었다. 아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런데 일진이 사납기도 무척이나 사나웠다.* * *“이게 이제 도둑질까지 해!”
거센 발길질에 급기야 입술이 터지고 말았다. 도둑질한 것이 아닌데. 낡을 대로 낡아서 너덜거리던 바지가 문제였다. 분명 팔찌를 받자마자 주머니 속에 쏙 넣었었는데. 금은방에서 나서는 길, 제 그림자가 점점 짧아지는 것을 보곤 이제쯤 밀린 설거지를 할 때가 되었나 싶어 다급하게 길을 되짚어 온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없다. 응당,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윤정 이모, 여기…… 어?”
주머니에 손을 넣었건만, 보푸라기가 뭉친 먼지 따위가 잡힐 뿐, 허전하다.
“어? 이모, 잠깐만…….”
이쪽 주머니가 아닌가 싶어 반대쪽을 확인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윤정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흰자위가 푸른빛을 띤다 싶더니 급기야 포주를 불러냈다.
“쪼끄만 년이 당돌하게 물건을 훔쳐?”
“뭐 했어? 너, 그거 어디다 팔아먹었어?”
“대답 안 해?”
번갈아 가며 다그치니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버렸다. 우물쭈물, 겁에 질려 머뭇거리며 서 있자 기어이 드센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은하 이모가 이럴 땐 맞고 있지 말고 도망치라 했는데. 그런데 도망이 뭐더라. 간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결국 제가 다시 돌아올 곳은 여기 밖에 없는 것을.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서 있는 그녀에게 다시 달려드는 매서운 손놀림에 귀에서 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더러운 년!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년! 제 어미 잡아먹은 악마 같은 년!”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포주의 입에서 속사포같이 터져 나오는 악담들이 어쩐 일인지 점점 작게 들린다.
‘아파.’
왼쪽 귀를 부여잡고 그만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은 자그마한 등 위로 사정없는 발길질이 쏟아졌다. 무지근한 아픔이 연이어졌다. 어느 순간 무감각해질 정도로. 그러다 가끔 참을 수 없이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져 이따금 신음이 샜다. 비명을 참는 울음이었다.
“아따, 대빵 아짐, 미쳤소. 암것도 모르는 아한티 왜 이라는디.”
춘재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허리를 부둥켜안아 떨어트려 놓고 나서야 사나운 매질이 멈췄다.
“이년, 오늘 버릇을 고쳐놔야지, 아침서부터 속 시끄럽게 하더니 기어코 손모가지를 못되게 놀려!”
“지금 그랄 때가 아닌디…….”
평소와는 달리 조심스러운 충재의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어낸 포주가 비로소 웅크린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위를 살폈다. 가만히 서서 이 꼴을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길쭉한 키나 벌어진 어깨는 건장했지만 얼굴은 아직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그렇다고 마냥 어리게만 볼 수도 없는 것이, 마주한 눈빛이 끝을 모르게 어두운 까닭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어 시선을 돌린 포주가 괜히 죄 없는 춘재에게 날을 세웠다.
“누군데?”
“아, 왜, 거 있잖아…….”
춘재의 귓속말에 포주의 시선이 다시금 그쪽으로 향했다. 검은 양복 윗팔에 비스듬히 걸쳐진 하얀 띠가 선명했다. 며칠 전 칠성파에게 칼 맞고 비명횡사했다던 그 오야의 아들이구나. 이정후. 예리한 눈매가 제 아비를 꼭 빼어 닮았다. 그런데 여긴 왜? 아직 봉분의 흙이 채 마르지도 않았을 텐데.
포주가 저의를 가늠하는 동안 춘재가 부러 요란을 떨었다.
“귀한 도련님께서 요까진 어쩐 일이다요?”
“…….”
춘재의 알랑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홍등가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걸음걸이에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았다. 또래보다 성숙해 보이는 외모 때문인지 혹은 한참 올려다봐야 하는 키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딘지 모르게 위압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차분히 걷던 이정후의 발끝이 이윽고 포주에게 개 패듯 맞았던 그녀 앞에서 멈췄다. 동시에 춘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재수 없게도 하필 이런 때.’
일단 포주를 막고 나서 정후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팔짱을 끼고 말없이 내려다보는 품새가 이 아이라고 확신한 듯했다.
“그냥 허드렛일이나 하는 아한테 와 신경을 쓴당가요.”
“얘지.”
그녀 앞에 정후가 멈춰선 순간부터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던 춘재가 초조함을 못 이기고 그만 정후의 팔을 잡아끌었다.
“계집놀음 하러 오셨음 죽이는 델 아는디…….”
헛된 노력이었다. 저를 말리는 춘재를 벌레 보듯 바라보는 서슬에 놀라 제풀에 손을 놓아버렸다. 더 이상 거칠 것 없어진 이정후가 한쪽 무릎을 괴고 그 앞에 앉았다.
“이름이 뭐야?”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계집의 고개를 들어 묻는 모양새는 춘재에게 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다정했으나,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살벌한 눈빛에 춘재의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나 조용한 성격은 친모를 빼어 닮았는데, 서늘한 눈빛만큼은 꼭 제 아비를 닮았다.
“이름이요?”
신기한 소릴 들은 것처럼 동그란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이름으로 불린 기억은 없다. 그녀는 주로 ‘년’이라 불렸다. 그 앞엔 으레 재수 없는, 쓸모없는, 썩을, 미친 등의 욕설이 붙게 마련이었다. 그러니 원래 이름을 알 턱이 없다. 가끔 은하가 꼬맹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이름이 아니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왠지 이름이 없다고 곧이 말해선 안 될 것 같다. 대빵 이모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사나웠기 때문이었다.
이쪽저쪽 눈치만 살피는 그녀 앞에 손이 놓였다.
“나랑 가자.”
길쭉한 손가락에 짧게 정돈된 손톱이 인상적인, 예쁜 손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선뜻 잡기 어려웠다. 얼음장처럼 차가울 것 같다. 제 속까지 꽁꽁 얼릴 만큼.
망설이는 그녀를 두고 춘재가 옳다구나 여기며 다시 한 번 그를 말렸다.
“아따, 아무리 아니라캐도 그라요. 그냥 여서 부려먹게 냅두라 안 허요.”
춘재가 다시 한 번 옆에서 만류하지만 이정후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들은 체도 안 한다. 자기 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며 어리둥절하게 앉아있는 그녀의 앞을 대빵 이모가 막아섰다.
“아무리 오야 아들이라도 이건 아니지. 이때껏 입혀주고 재워준 게 있는데.”
“맞아. 입혀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그것만 했겠어?”
“잘 아네.”
기세등등하던 포주는 이어 나직하게 또박또박 읊조리는 목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발로 차고, 손으로 때리고, 매로 두들겨 패고, 개처럼 부려먹고.”
“…….”
“수준 낮아.”
“…….”
“괴롭히는 방법치곤.”
마지막은 비웃음에 가까웠으나 질책처럼 들리기도 했다. 저의가 무엇인가. 보다 괴롭혔어야 했다는 것인지, 단순히 방법이 글렀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잠시 이리저리 재보다가 그만 비켜서서 계집아이를 내주고 말았다. 어쨌거나 상대는 오야의 하나뿐인 아들이고 곧 여길 직접 관리하게 될 게다. 잘못 보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계산도 한몫했다.
“이라믄 안 되는디, 아이고.”
춘재의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물러선 자리에 자그마한 몸뚱어리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엎어진 채 잔뜩 구정물이 튄 얼굴엔 하얀 눈물 줄기 두 가닥이 양 뺨에 길을 냈다. 아직 어찌 된 일인지 상황파악이 잘 되지 않는 듯, 당혹스런 표정이다.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같이 가자.”
뭔가에 홀린 것처럼 주춤주춤 일어난 여자아이의 앙상한 손가락이 이내 손 위에 얹혔다. 차가울 것 같았던 손은 의외로 뜨거웠다. 겪어본 적 없는 온기에 작은 손이 힘을 주어 마주 잡았다.* * *검정 세단에 오르기 전, 손을 잡고 선 남자의 눈치를 보더니 바이바이, 작은 손바닥을 활짝 펴 흔드는 꼬맹이를 보자마자 은하가 바로 포주에게 따지고 들었다.
“엄마, 뭐야 저 사람. 꼬맹이 왜 데려가는 거야?”
“데려다 써먹을 데라도 있나 보지.”
“뭐 알고 저러는 거야? 응?”
“나도 몰라, 이년아. 영업할 준비나 해.”
“뭐냐고! 애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해?”
“모른다고! 내가 그놈 속을 어떻게 알아!”
“정말 꼬맹이 미워해서 내준 거야?”
“네년이 그 눈빛을 못 봐서 그래. 이 바닥에서 뼈가 굵은 나도 지릴 뻔했다니까.”
쯧, 차는 입맛이 쓰다.
“엄마!”
“그렇지 않아도 정신 사나우니까 좀 싸물고 있어!”
포주의 단호한 표정에 은하도 그만 단념하고 홱, 돌아서지만 신경질적인 몸동작에서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걸 읽을 수 있다. 제깟 년이 화를 내 봤자. 곧 있으면 생글거리면서 웃음이나 팔아야 할 처지에 누굴 걱정하고 앉았누. 주제도 모르는 년. 뒤통수를 향해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혀를 끌끌 차대지만,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건 포주도 마찬가지였다.
‘제 엄마 배속에 들어설 때부터 재수가 없더라니.’
낮의 나림동은 검푸른 문신을 새기고 위협적으로 돌아다니는 어깨들 때문에 인적이 드물었다. 사위가 어둑해져 태양 대신 홍등이 휘황찬란하게 거리를 밝히고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어지러운 불빛 사이를 채우면 비로소 나림동의 밤이 시작됐다. 그 밤,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는 수현이 포주가 머무는 방을 찾았다.
– 엄마, 나 오늘은 몸이 좀 별로다. 좀 쉬면 안 돼?
– 잡것. 언제부터 내 허락받고 쉬었다고?
퉁명스레 던지는 대답에 헤헤헤 속없이 웃었던가. 그냥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간간히 취객이 난동을 부리면 춘재 같은 따까리들이 뒷수쇄를 하고, 손 큰 손님이 왔다 가면 부채 모양으로 팁을 펼쳐 자랑하기도 하거나, 손버릇이 고약한 새끼가 있다며 저들끼리 은근히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던, 그런 평상시와 다를 것 없던 저녁. 그러던 것이 불길한 일이 생기려고 그랬는지 자정이 지날 즈음, 날씨가 꾸무럭해지더니 부슬부슬 비가 내렸었다. 오싹, 오한이 기분 나쁘게 등줄기를 쓸었다. 유난히 스산하게 내리던 비.
– 오늘은 텄다, 그치, 엄마.
문지방에 걸터앉아 창밖을 올려다보던 수현이 생긋 웃으며 말을 건넸었다.
– 그러게. 오늘은 영 파이다.
– 난 역시 운이 좋다니까, 어쩐지 몸이 찌뿌듯하니 영 손님 받을 기분이 안 나더라.
– 돈 못 버는 거야 이래 뒹굴고 있으나 비 오나 매한가지지 뭐가 그리 좋냐, 이년아.
– 에이 엄마, 벌 때 바짝 벌고, 쉴 때 바짝 쉬는 게 좋은 거지! 이런 날 앞에 서봤자 지지리 밖에 더해? 머.
-터진 입이라고 말은 잘하네. 망할 년.
화제는 곧 얼마 전에 받은 진상 군인한테로 넘어갔었다.
– 우리 군인 좀 안 받으면 안 돼? 별것도 없는 것들이 이것저것 바라는 것만 많아. 그리고 너무 늙다리들도 싫어. 돈 자랑은 있는 대로 하면서 풀지도 않아.
– 그런 것 다 일일이 가려 받으면 남아나는 사창가가 없겠다 이년아.
– 엄마, 난 언젠가 한탕 크게 잡아서 여기 꼭 벗어날 거야.
– 제 발로 들어와 놓고 뭔 소리야. 누가 들으면 억지로 끌려온 줄 알겠네.
– 제 발로 들어왔어도 다 등 떠밀려진 사연이 있다니까.
– 여기 사연 없는 년이 어디 있냐.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온통 사연 있는 년 천지지.
– 아이, 참.
간간히 생기는 침묵 사이사이를 빗소리로 메우면서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춘재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기 전까지.
– 청룡파에서 아가씨들 다 내놓으라는디? 아따, 이일을 우짜쓸까?
– 저들 구역은 어쩌고 이리로 와?
– 아 몰러, 막무가내여. 곱게 놀다가겠다는디 뭐라 할 수도 없고.
– 오야는 뭐라는데?
– 소란 피우는 거 아니면 지켜봄서 있으라는디, 영 께름칙혀…….
정말 께름칙했다. 나림동을 뒤덮은 홍등은 하나 같이 형형한 붉은 색을 띠고 있지만, 색이 같다고 해서 다 같은 홍등은 아니었다. 나림동 중간을 관통하는 작은 도로를 하나 사이에 끼고 북서쪽은 청룡파, 남동쪽은 고황파가 맡아 각기 관리하고 있어서 늘 미묘하게 신경전이 벌어지곤 했었다.
– 요즘 오야가 사업 확장헌다고 여그는 너무 내깔겨두는 것 같기도 허고…….
– 됐고, 정당하게 값 치르면 치른 만큼 대주면 되는 문제니까. 춘재 삼촌도 가서 일봐.
은근 서운한 뜻을 내비치는 춘재를 밀어내고 몸을 털고 일어났다. 어찌 된 일인가 직접 보고 오자는 심산으로.
살피러 나간 포주를 알아보곤 한 남자가 다가왔다. 눈썹 옆으로 난 긴 칼자국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 여기 있는 아가씨들이 전부?
대답대신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좁지 않은 거리를 빼곡히 메운 검은 양복들 덕에 오늘따라 그 많던 취객이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 보이는 애들이 전부인데, 왜, 한 번에 비용 치르시게?
수현만 제외하고는 마침 모두 나와 있던 참이었다. 아가씨들의 수를 세던 칼자국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 한 명이 부족한데.
– 나라도 괜찮으면 머릿수는 채워줄게. 응?
– 뭐? 하하, 하하하!
금세 표정을 풀고 호탕하게 웃는 게 걱정과는 달리 의외로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진 않아 은근슬쩍 엉덩이로 툭 건드리며 농까지 쳤었다.
– 구관이 명관이란 말, 몰라?
잠시 주거니 받거니 농담하는 동안,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거, 난 신경 쓰지 말고.
체구는 작지만 온몸이 살기로 똘똘 뭉쳐진 듯한 남자가 엷게 웃음을 띠고 있었다. 가끔 본 적이 있는 청룡파의 우두머리였다. 살모사 같은 눈으로 그녀를 살피던 청룡파의 두목이 턱짓과 함께 요구했다.
– 게는 커피나 타주지.
– 최고로 맛있게 타드릴게, 따라 오셔요.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놀라는 말에 검은 양복들의 분위기가 풀어진 탓이었을까, 눈웃음을 치며 별생각 없이 뒷방으로 안내한 것이 화근이었다. 홍등가에서 나고 자라 눈치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던 그녀였는데 그날만큼은 마가 씌웠었는지.
– 없어진 한 명, 여기 있네.
칼자국이 비릿하게 웃으며 방바닥에 엎드려 노래를 흥얼거리던 수현을 내려다보았다. 한 명이 저쪽 쪽수가 아니라 우리 아가씨들이 빈다는 얘기였어? 그렇다는 건, 미리 이쪽 인원을 파악해 두었다는 것 아닌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설마? 다급히 문을 나서려는데 칼자국이 긴 장도를 꺼내들고 막아섰다.
– 이 바닥에서 거짓말하면 혓바닥이 반 토막이 나는걸 알런가 몰라. 세로로 찢어줄까, 가로로 갈라줄까.
– 왜…… 왜 이래요!
– 승필아, 적당히 해라. 우리 여기 싸우러 온 것 아닌데.
점잖은 듯 말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질척하게 감기는 두목의 탁한 목소리에, 칼자국이 장도를 내려놓았다.
– 엄마. 나 안 돼. 나 오늘은 정말 안 돼. 응?
날카로운 쇳덩이가 거둬진 후, 놀란 숨을 고르는데 수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청룡파 두목의 주름진 손이 더듬더듬 수현의 짧은 반바지 속을 더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걔는 오늘 아파서, 쉬는 애한테 그러지 말아요!
저도 모르게 겁 없이 소리를 빽 질렀으나 어느새 차가운 장도의 칼끝이 목 끝에 느껴졌었다.
– 판단 잘해. 여기서 다 같이 뒤지든가, 저년 하나로 끝내든가.
칼자국의 말에 결국 고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윽고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수현의 울음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양복들이 다 빠져나가고 난 후, 흐느낌과 새된 비명이 홍등가를 가득 메웠다.
검은 무리들은 역시 단순히 즐기러 온 것이 아니었다. 하나씩 여자들을 꿰차고 들어가 겁박한 후 생살에 청룡파를 뜻하는 무늬를 새겨놓았다. 죽죽 찢겨진 상처, 그건 일종의 도발이자 경고였다.
그날 청룡파의 무늬가 새겨지지 않은 여자는 오로지 수현 하나뿐이었는데, 대신에 수현에게는 청룡파 두목의 탯줄이 심어지고 말았다.
“흥! 불길한 년…….”
다시 떠올려도 소름이 쭉 끼치는 그날 이후, 점점 배가 불러 이제 출산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새벽, 생각보다 이른 진통을 겪던 수현은 계집애를 낳다가 제 혀를 깨물었다. 누군가는 산통이 심해서 얼결에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 안타까워했고, 누군가는 제 새끼를 두고 무책임하다고 비난했으며, 혹자는 독한 년이라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수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든, 얼결에 그랬든 그것은 포주 생활로 뼈가 굵은 이 여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계집애가 생을 얻음과 동시에 수현의 생은 끊어졌다는 것이다. 아기를 보면 그날 짧은 반바지 속을 헤집던 주름진 손이 생각나서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수현이 낳은 아기는 그 끔찍한 날의 결정체라는, 어떤 확고한 믿음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렇게 제 어미를 잡아먹고 나온 핏덩이을 방안에 방치해 두기를 사흘째, 쪼글쪼글하게 말라가는 작은 생명체를 보다 못한 춘재가 나서서 대신 키우려는 것을 막았었다. 저 아이는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일으킬 것 같다는 막연하지만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소, 허믄 죄 없는 아 죽이지 말고 이거라도 먹이라고.”
춘재가 내민 분유를 물에 타 주자 기다렸다는 듯 매달리던 핏덩이. 그 핏덩이가 청룡파의 핏줄이라는 것은 홍등가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기의 출생을 두고 수군거리다가도 오야의 사람만 나타나면 일제히 다물어지며 쉬쉬하던 입들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당시 끔찍한 사건을 겪었던 이들은 대부분 떠나고 새로운 얼굴들이 자리했다. 이대로 잠잠해지나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오늘 오야의 아들이 계집애를 덜컥 손에 넣어버렸다. 어쩌려는 것일까. 원수의 딸을 데려가선.
‘늑대 굴 벗어나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격이지 뭐야. 그년의 팔자, 세기도 하다.’
지난 기억을 떠올리느라 굳게 다물렸던 포주의 입술이 흉하게 비틀렸다.* * *“은하 이모, 바이바이.”
정후의 손을 잡고 홍등가를 벗어나던 중, 곱게 단장하던 은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딱딱하게 굳어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은하의 모습에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다. 은하 이모가 왜 저러지.
“넌 꿈이 뭐야?”
문득 옆자리의 키 큰 남자가 부드럽게 물어왔다.
“꿈이요?”
“앞으로 커서 되고 싶은 것.”
“어…… 은하 이모요.”
우물쭈물하다가 평소에 생각만 하던 것을 수줍게 입 밖에 내었다.
“은하 이모?”
“네, 은하 이모는 여기서 제일 예뻐요! 천사 같아요!”
그녀의 눈에는 곱게 화장하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은하의 모습이 세상 무엇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인기도 이모가 제일 많은걸. 은하의 문 앞은 늘 초입부터 길게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래?”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정후가 가만히 자그마한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맞춰왔다. 보기 좋은 호를 그리고 있는 입술과 대조적으로 가느스름하게 뜬 눈이 어쩐지 기묘했다. 이질감에 흠칫 떠는 어깨를 잡은 손이 단단했다.
“내가 널,”
“…….”
“최고로 키워줄게.”* * *“양양아, 어찌자고 입을 함부로 놀려 쌌냐!”
기어이 꼬맹이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키 큰 그림자를 바라보던 춘재는 별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평소엔 별생각 없이 지나치던 커다란 문이 오늘따라 꼬맹이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보였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불길한 기분을 지우지 못해 집으로 돌아와 신경질을 부렸다.
“오빠! 내가 일부러 그랬나 머, 그냥 수다 떨다 보니까 그런걸.”
“고놈의 주둥아리! 말이나 못 하면!”
따지고 보면 이 사달이 벌어진 건 다 가볍게 나불거리는 양양의 주둥아리 때문이었다. 애교로 넘어가려 해도 평소와는 달리 좀체 풀리지 않는 춘재를 보며 제가 먼저 토라져 돌아앉는 뒤통수에 혀를 끌끌 차댔다.
상 차리기 귀찮다고 노래 부르기를 반나절, 도우미 아줌마한테 밑반찬 좀 얻어오겠다며 본채로 갈 때부터 느낌이 심상치 않았는데 기어이 사고를 치고 왔다.
“이만큼 숨기고 버틴 것도 어디야! 나 아니었어도 다들 입이 근질거려 죽겠다 했는데!”
좀처럼 춘재의 화가 풀릴 기미를 안 보이자 양양이 도리어 소리를 빽 질렀다. 그것만큼은 양양의 생각이 맞았다. 홍등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처럼 키워지는 어린 계집에 대해 떠들고 싶어 했다. 어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비는 누구인지, 혹은 그 아비가 이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에 대해 저마다 입을 놀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만큼 쉬쉬하며 덮어진 건 순전히 포주가 알게 모르게 뒤에서 입단속을 잘 시킨 덕분이다.
둘의 다툼에 승수가 나와 분위기를 살폈다.
“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별일 아닌게, 닌 가서 공부나 혀.”
갸우뚱하며 들어가는 승수의 얼굴을 보니 조금 기분이 풀렸다. 어따, 언놈의 자식인지 아주 훤하게 생겼다. 춘재의 씨는 아니었다. 아기를 낳곤 죽겠다고 울며불며 난리 치는 양양을 어르고 달래 가족을 이루었다.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갓난이를 밤마다 업어 재우고, 방싯방싯 웃어대는 꼬물이에게 안 좋을까 싶어 담배도 하루아침에 끊었던 춘재. 그러던 것이 저렇게 자라 아버지, 부르는 품새가 제법 든든하다. 이렇듯 정 많은 춘재였기에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본채 쪽을 향해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거다.* * *춘재의 걱정과 다르게 그녀는 난생처음 호사를 누리는 중이었다.
“와아.”
탄성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얼떨떨했다. 당장 지금 자신을 보드랍게 쓸어주는 헬퍼의 손길이 얼떨떨했고, 그 전에 먼저 온통 대리석으로 꾸며진 으리으리한 하얀 내부가 얼떨떨했다.
이제부터 네 방이라고 안내된 곳도 홍등가에서 제일 넓다는 포주의 방보다 몇 배는 됨직해 보였다. 등을 새우처럼 굽혀 쪼그려야 겨우 제 몸을 눕힐 수 있었던, 곰팡내 가득했던 골방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방.
“식사시간 되면 다시 부르러 오겠습니다.”
향긋한 바디로션을 꼼꼼히 발라주던 헬퍼가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나가고 나서도 수분이 지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여긴 어딜까.’
또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른 건 알 수 없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홍등가에서의 삶과는 정반대의 생활이 이어지리라는 것. 잔뜩 엉켜서 어느 순간 빗질을 포기한 머리카락이 고개를 흔들 때마다 보드랍게 찰랑거리는 걸 보면, 쩍쩍 갈라져 밤이면 피고름이 배어나오던 손등에 정성스레 반창고가 붙여진 걸 보면.
그렇지만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생활이 이어진다 해도 그것이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길러진 것이라곤 눈치뿐인 그녀였다.
‘없어…….’
일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응당 있어야 할 사람 냄새가 전혀 나질 않는다. 고혹적인 무늬의 대리석 바닥도,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높은 천장도, 심플한 가구들로 꾸며진 정갈한 방 안도, 은은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이름 모를 꽃향기도. 모두 다 아름답고 완벽하지만, 그래서일까, 어딘지 모르게 무서웠다. 해서 몸을 동그랗게 말아 홍등가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탁자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녀가 좁은 탁자 사이에서 빠져나온 건 식사하라는 부름이 있은 후였다.
“생선 먹을 줄 몰라?”
아까부터 반찬에는 손도 안 대고 눈치를 보며 밥그릇에만 수저를 들이미는 그녀를 보며 정후가 의아하게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놀라 움찔한다는 것이 그만 수저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유난히 시끄럽게 울리는 쇳소리에 그렇지 않아도 잔뜩 접혀있던 어깨가 더 오그라들었다.
‘어지간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섰던 석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포주가 어지간히 쥐 잡듯 잡고 살았던 모양이다. 하긴. 가끔씩 둘러보러 가면 웬 쥐가 파먹은 것 같은 아이가 비실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간간히 눈에 띄긴 했었다. 사내아인지, 계집아이인지도 몰랐다. 워낙에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그만큼 형편없는 몰골이기도 했기에. 그랬던 아이가 그런 비밀을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도 데려와 씻겨놓고 꾸며놓으니 제법 태가 났다. 하는 짓은 여전히 비루했던 홍등가의 그 모습 그대로지만. 생선을 먹을 줄 모르냐는 정후의 질문에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계집애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먹을 줄 몰라요.”
물에 말은 밥과 김치가 전부였다. 그나마 김치조차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땐 자장면 배달 후 모아둔 단무지를 대신 씹었다. 대강 찬밥에 물을 말아 허겁지겁 먹고 나면 심부름 다니기 바빴다. 홍등가는 넓고, 막 부려먹을 수 있는 이는 그녀 하나였기에 그 밥조차 제대로 챙겨먹을 틈이 나질 않았다.
때문에 지금 이렇게 제 앞에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 수십 가지 놓여있어도 김치 외엔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다른 반찬들엔 왠지 제가 닿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물에 말아 먹던 습관 때문인지 밥이 잘 넘어가지도 않았지만, 주어진 것만 받아들이고 사는 데 익숙한 그녀는 물을 달란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제 앞에 놓인 것만 비워내기 바빴다.
그러던 것이 정후의 질문을 받고 생선 먹을 줄 모른다는 말을 간신히 뱉고 나선 이젠 아예 밥 먹을 생각조차도 사라져버렸다. 어떡하나. 이제 또 혼나게 되려나? 그냥 안다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정말 모르는데.
걱정과 달리, 먹을 줄 모른다는 말에 정후가 생선 접시를 제 앞으로 끌어당겨 조기의 머리와 꼬리를 익숙하게 떼어내곤 깔끔하게 가시를 발라 그녀의 수저 위에 올려놓았다.
“모르는 건 차차 배우면 되는 거야, 그치?”
다정하게 웃는 얼굴에 갈 곳 모르고 흔들리던 눈동자가 간신히 제자리를 찾았다. 말로만 듣던 천사를 만난 기분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천사.
홍등가의 검은 양복들은 무섭기만 했다. 그녀가 허드렛일을 하느라 바삐 뛰어다니다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통행을 방해한다며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다. 그럼 긁힌 상처를 살펴볼 새도 없이 발딱 일어나 언제 그랬냐는 듯 제 갈 길을 또 뛰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손찌검이 날아들 테니.
똑같이 검은 양복을 입었는데, 정후는 그들과 어쩜 이렇게 다른 걸까.
‘검은 옷을 입은 천사.’
몇 번이고 되뇌면서 수저를 입에 넣었다.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조기 살이 담백한 밥알과 어우러졌다.
‘와, 맛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후가 확인하듯 물었다.
“맛있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한 점을 올려주며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어준다. 아, 이 사람은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일 거야. 천사가 분명해. 비록 검은 옷을 입었지만. 제멋대로 ‘검은 천사’라고 속으로 이름 붙이곤 콩닥콩닥 뛰어대는 가슴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 *겉으로 봐선 여느 가정집과 다를 바 없는 정감 넘치는 식사 시간이건만, 정후의 웃음이 환해질수록 석우의 등줄기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속을 알 수 없어.’
발인 후, 화장을 마치고 봉안 절차가 끝나자마자 정후는 본가가 아닌 나림동으로 차를 돌리라 지시했다. 전후 사정은 춘재를 통해 대강 전해 들었다. 청룡파가 비열한 수를 썼던 당시 일은 석우도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 살아계시던 오야가 다른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던 차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손 쓸 겨를이 없던 틈을 타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포주의 방에서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몇 살입니까?”
사실은 이미 춘재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계집의 나이 따위를 묻고 싶은 게 아니었다. 왜 데려왔는지,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지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정후는 치밀했다. 한 대 맞았다고 한 대 되갚아 때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잠자코 기다렸다가 기회를 노려 때린 손의 숨통을 조일 게 분명하다. 계집애를 학대했던 포주에게 괴롭히는 방법 치곤 수준 낮다고 했었다던가. 과연 그 다운 말이라고 석우는 생각했다.
“나이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
“중요한 건 그 속에 흐르는 피의 주인이지.”
역시 청룡파를 노리는 게 맞았다. 하지만 어쩔 심산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청룡파에서도 모르는 핏줄을 데리고. 설령 계집의 존재를 안다고 해도 눈이나 깜짝할까 의문이었다.
“졸지에 결혼도 안 한 총각을 애 아빠로 만들게 생겼네.”
입술은 미안하게 됐어, 라고 읊조리지만, 태연한 표정엔 별 변화가 없다. 그깟 계집아이 하나 호적에 올리는 것쯤이야 석우의 입장에선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결혼을 안 한 이유도 오로지 좀 더 제가 속한 조직에 충성하기 위해서일 뿐.
하지만 불길하다. 날 때부터 제 생명을 이어준 어미를 잡아먹었다는 계집아이가 정후마저 잡아 삼킬까 봐. 칼부림으로 갑작스레 비명횡사한 부친상으로 정후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은 아닐까, 저쪽 핏줄을 데려와서 뭘 어쩌겠다고. 석우였다면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고 던져주고 왔을 테다.
“출생 신고도 안 했던 모양이야.”
정후가 서류를 내밀었다. 출생 신고서였다. 받아든 것을 대강 훑어보았다. 제일 먼저 이름을 살펴보았다. 예쁠 윤, 계집 희, 윤희. 성은 석우를 따서 강 씨였다.
‘예쁜 계집이라.’
계집애가 예뻤었나. 아직은 눈에 익지 않은 얼굴을 떠올려 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별 뜻을 담고 지은 이름이 아닐 거다. 적당히 무난하게 지은 이름에 어떤 의도가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그러다 생년월일에 이르러 약간 멈칫했다.
“본래 나이보다 두 살이 더 어립니다.”
생일이면 몰라도 태어난 년도가 헷갈리진 않았을 텐데. 이거야말로 어떤 의도가 있지 않은가. 어떻게든 의중을 떠보려는 석우를 정후가 뚝 잘랐다.
“요즘 부쩍 말이 많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서늘한 표정에 착잡한 심정을 애써 누르고 그만 물러서 나온 것이 바로 조금 전의 일인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선을 발라주며 환하게 웃는 이정후와 점점 밝아지는 계집애의 모습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오싹.
무의식적으로 팔을 쓸자, 오소소 돋아있는 소름이 손바닥을 기분 나쁘게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