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60
160화 격리 차원(2)
굴절된 공간을 통과한 직후.
현우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매우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여긴···.”
눈에 익은 풍경은 아니다.
다만, 굉장히 독특한 풍경이었기에 잠시 멈춰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드넓게 펼쳐진 황야.
그리고 그 가운데에 홀로 고고히 솟아 있는 거대한 검은 탑. 그 외견만큼은 일전 인도 벵갈루루에서 보았던 세계 7대 미공략 던전, 바벨과 매우 흡사했다.
그러나···.
적어도 탑 전체에서 느껴지는 힘은, 현우가 기억하는 바벨 따위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기이하고 강대했다.
‘노골적이군.’
숨을 생각이 없다는 걸까.
아마 현우가 아는 다니엘 블랙이라면, 저 탑의 존재 자체도 블러핑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신화를 체득하며 사물과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진보한 현우의 안력은, 이 공간에서 다니엘 블랙이 있을 곳으로 가장 유력한 장소는 저 탑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판단했다.
함정일 수도 있다.
그런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저게 녀석의 함정이라고 한들. 여기서 달리 선택이 가능한 차선책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당초 이 공간 자체가 다니엘 블랙이 만들어낸 격리 차원이다. 그걸 생각하면, 도리어 함정이 없는 편이 이상하리라.
페일 라이더의 고도를 서서히 낮추며.
현우는 눈앞에 보이는 검은 탑을 면밀히 관찰했다. 외부로 나 있는 창 따위는 한 개도 없었다.
내부를 관찰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취할 수 있는 전략의 가짓수도 굉장히 줄어들게 된다. 이렇다 할 정보가 없는 이상, 이곳에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결국 추측에 불과하니까.
‘페일 라이더로 진입하는 것은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불가능하고. 반대로 상공에서 접근한 후에 최상층으로 진입하는 것도···.’
시도 정도는 해봄직 하나.
다니엘 블랙이 멍청한 녀석도 아니고. 오히려 그 정도의 대책이 되어 있지 않은 편이 이상하다.
“그냥 정석적으로 오라는 건가.”
현우는 제 턱을 매만졌다.
애초에 녀석이 저곳에서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그것조차 직접 부딪혀보지 않는 이상은 미지수다.
저곳으로 진입하는 순간.
다니엘 블랙이 아가리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현우의 입장에선 불리한 싸움을 시작한 셈이었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없다.
또한, 함정이라는 것은 그 존재를 예측치 못했을 때에나 위협적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알고 있다면 모르고 뛰어드는 것보단 훨씬 낫다.
페일 라이더에서 내린 직후.
현우는 거대한 검은 탑을 향해서 한 발 나아갔다. 주변의 황야는 고요하기만 했고. 이곳에서 그의 걸음을 막는 것은 전무했다.
탑의 입구는 하나뿐이었다.
아마 나무로 만들어졌을 걸로 보이는 문. 가볍게 밀어보니 잠겨 있지는 않았다. 쓸데없이 부수지 않아도 된다는 점 하나 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현우는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끼기기기─!
낡고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육중한 문이 서서히 열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어두운 홀.
그리고 그 홀을 둘러싸듯 타고 오르는 나선의 계단이었다. 현우는 잠시, 가만히 서서 계단을 바라보았다.
최상층은 보이지 않는다.
과연, 다니엘 블랙은 저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일단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현우는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계단을 얼마나 올라갔을까.
현우는 자신의 앞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처참하게 망가진 마족의 시체.
그리고 그 앞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 사내의 인영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도 현우는 그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푸른 안광.
그리고 희끗하게 새어버린 머리칼을 지닌 노년의 남성.
“···으음.”
주양태 회장이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벽에 몸을 반쯤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대강 살펴보기에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지만, 상태가 만전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조부님.”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다니엘 블랙이 만들어낸 함정, 잠깐은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경계했으나. 저토록 강대한 존재감은 흉내를 내려 한들 가능한 것이 아니다.
“···.”
찡그린 얼굴로 주양태 회장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현우를 발견한 그의 눈동자가 일순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현우냐.”
“예.”
“늦었군.”
별다른 질문은 없었다.
현우가 이곳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그리고 또, 그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양태 회장은 그런 상투적인 질문 따위를 던질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젊은 녀석이 팔자 좋게 그리 잠이나 퍼질러 자고. 이렇게 다 늙은 할애비보다 한참 뒤에 도착해서 되겠느냔 말이다.”
대신,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무사한걸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주양태 회장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을 거란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으나. 세상만사는 믿음과 달리 흘러가는 일도 빈번하니까.
“쯧, 이거 괜히 모양만 구긴 꼴이 되었군.”
혀를 차는 주양태 회장.
다행히 그는 금방 체력을 회복했는지. 기대고 있던 벽에서 한 발 떨어졌다. 그러나 역시, 현우의 예리한 안력에는 그의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뭘 어떻게 되긴, 이 빌어먹을 흉물들을 보이는 족족 죽이면서. 빌어먹게 높은 탑을 올라가는 중이잖느냐.”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다.
“뭔가 소득은 있으셨습니까.”
큰 기대는 없었다.
이렇게 주양태 회장과 다시 만난 것만 해도. 현우와 천무그룹에 있어서는 작지 않은 소득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서 그가 목숨을 잃는 것보단. 살아서 최후까지 함께해주는 것이 훨씬 이득이 될 거라는 사실 만큼은 변함이 없다.
“아니.”
역시, 주양태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다만, 그 녀석이 뭔가 더러운 꿍꿍이를 이곳에서 꾸미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졌구나.”
“뭐, 그렇군요.”
잠깐의 침묵.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기는 것을 기다렸던 것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마족의 사체가 움직였다.
“···!”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잠깐 감돌았던 긴장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우드득─!
형태를 알아보기도 어렵게 망가진 마족의 사체가 계단에 서린 어둠 속으로 잡아먹히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깔끔을 떠는군.”
주양태 회장이 불쾌한 듯 중얼거렸고.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두 사람은, 이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움직여야한다.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아니, 오히려 그쪽에서 직접 그들을 찾아왔다.
차분한 발소리.
이윽고 계단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현우와 주양태 회장. 두 사람 모두 기다리고 있던 이였다.
“다니엘 블랙···.”
그가 어두운 계단에서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쓰레기가.”
주양태 회장이 중얼거렸다.
이내 그는 주위의 어둠을 단번에 걷어버릴 정도의 축염강기를 전신에 휘감으며. 눈앞의 다니엘 블랙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멍청한 블랙 가문의 애송이가 직접 사지로 걸어 들어왔군. 위에서 마냥 겁먹은 쥐새끼처럼 기다리는 것은 질린 모양이지.”
“사지라···.”
비죽, 녀석이 웃음을 머금었다.
주양태 회장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녀석을 노려보았으나. 녀석은 그런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며 다가왔다.
“그건 오히려 그쪽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데. 설마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리라 생각하지만, 이곳은 이미 나의 성역일세. 겁도 없이 침범한 것은 그대들이 아닌가.”
성역.
그 단어에 현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왠지 모르겠으나.
녀석이 내뱉은 ‘성역’이라는 소리가. 이 공간에 진입하기 전, 어렴풋이 느껴졌던 신성력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추측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죽이기 전에 한 가지만 묻겠다.”
주양태 회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혈족들은 어떻게 했지.”
“흠, 과연 그것 때문에 그 대단하신 주양태 회장이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신 건가. 오랜 시간 당신을 파악하고 분석했지만, 이리도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정보는 일절 없었는데 말이야.”
“질문에 대답이나 해라.”
축염강기가 위협적으로 날뛰었다.
그 사이에서 현우는 침묵을 지켰다.
유럽 지부에 일어난 행방불명 사태가 녀석의 암수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발을 들인 이후에도 그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이미 다니엘 블랙의 손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을 가능성도 그리 낮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네도 궁금한가.”
다니엘 블랙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었다. 대답을 꼭 녀석의 입을 통해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여기서 너를 죽인 다음에 천천히 알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니까.”
“역시, 오만하군!”
녀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중얼거리듯이 현우가 말했다.
그의 대답이 다니엘 블랙에게는 썩 마음에 들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녀석은 가늘게 뜬 눈으로 현우를 바라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지금 발을 담그고 있는 그 우물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나. 만약 그렇다면 지금껏 그런 자네에게 당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군.”
“알 바냐.”
현우는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는 물론이고, 곁에 있는 주양태 회장 역시. 언제든지 출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으면. 괜히 서로 시간낭비 하지 말고 빨리 시작이나 하지. 너 말고도 해야할 일이 있거든.”
이건 최종 결전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다니엘 블랙은, 어디까지나 당장 거쳐 가야 하는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는···.
이 다음에 있을 미래의 다니엘 블랙. 유일하게 현우를 완벽히 패배시킨 녀석과의 일전이다.
“흐흐, 역시 성격이 급하군.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네. 하지만, 가끔은 몇 마디의 말보단 행동이 명확한 대답이 되어줄 수도 있지.”
녀석이 보란 듯이 양팔을 펼쳤다.
“자네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했네. 확실히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지. 주현우, 자네는 지난 몇 년간 나와 블랙 가문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다.”
“흐흐, 글쎄···.”
다니엘 블랙이 조용히 읊조렸다.
“지금부터는 내가 자네를 매우 곤란하게 만들어볼 생각인데. 너무 억울하게 생각지는 말았으면 좋겠군.”
“개소리를···.”
현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이 가볍게 손을 들어 허공을 긁었다. 마나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분명,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뭐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끼기긱─
흡사 칠판을 긁는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돋게 하는 소음이 울러펴졌다.
현우와 주양태 회장, 두 사람 모두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서 풀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세상이 뒤집힌다.
아니, 마치 거울처럼 반전되었다고 해야 하나.
머릿속을 스치는 수많은 비유 중. 어떤 표현이 가장 적합한 걸지는 몰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차원이 뒤틀리고 있다.’
***
한편···.
일본, 교토.
이와카미 가문의 총본산이자 일본의 천년 수도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고즈넉한 도시의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는 교토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차원 쐐기가 만들어낸 현상이었다.
그리고.
교토의 이와카미 가문과 그들이 이끄는 헌터 부대는, 차원 쐐기가 도시에 생겨난 지 어언 일주일여 만에. 쏟아지는 수많은 마족 군단을 뚫고 그 아래까지 겨우 도달할 수 있었다.
통신과 물자, 심지어 인력까지.
무엇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던 상황에서. 그들의 반격이 이리 성공적으로 성사될 수 있던 까닭에는 천무그룹의 지원, 그 중에서도 주건우의 공이 가장 컸다.
“드디어···.”
주건우.
그는 감격한 표정으로 하늘 높이 솟아오른 차원 쐐기를 바라봤다. 주현우의 도움 하나 없이 이런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모든 게 주건우님의 덕분입니다.”
이와카미 하나코.
전대 이와카미 가문의 무녀, 이와카미 미코를 대신하여 헌터 부대를 이끌고 있는 그녀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이··· 제가 뭐 별거 한 게 있나요. 이와카미 가문의 여러분들이 열심히 해준 덕분이죠. 그리고 우리 덕춘이도 이번에 많이 고생해줬고요.”
“쉭!”
자신의 몸으로 주건우의 목을 휘감으며 혀를 날름거리는 덕춘이. 그런 녀석의 모습을 하나코는 귀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레 덕춘이가 고개를 틀었다. 녀석의 시선은 차원 쐐기가 존재하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쉬이익···!”
날카롭게 경고하는 덕춘이.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전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간이···.’
흔들리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드드득─
강철이 구부러지는 듯 한 기분 나쁜 음색. 소리의 발원지가 어디인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걸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직감적으로 소리의 발원지는 발견했지만, 주건우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마땅한 비유나 표현을 빠르게 찾아내기 어려웠다.
“하나코님!”
그래서 자세한 경고는 포기했다.
일단 사태에 대해 머리를 굴리기에 앞서 몸부터 움직인다. 주건우에겐 오히려 그쪽이 훨씬 편했다.
주건우가 하나코를 뒤로 물린 순간.
차원 쐐기의 사슬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우뚝 멎었다.
‘뭔가 벌어지고 있어.’
꾸욱, 말아쥔 주건우의 주먹이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