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49
49화 라비린토스(2)
“여길 통과하시면 돼요.”
마야 카일리를 따라 워프 게이트를 통과하자···. 이전에 크노스 경매 때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라비린토스 내부의 풍경이 펼쳐졌다.
‘과연, 이 지역 전체가 신화등급 아티팩트라고 할 만하네.’
라비린토스라는 이름에서 어둑한 지하 미궁을 연상하는 게 보통이겠지만. 마야 카일리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이 공간은 마치 별세계(別世界) 같은 장소였다.
태양이 떠 있는 한적한 해변.
그리고 그 해변을 내려다보듯 세워져 있는 아름다운 저택. 순간 라비린토스가 아닌 다른 곳으로 워프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건 정말··· 신기하군요. 설마 여기서 태양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분명 라비린토스는 크노스 섬 지하에 위치한 것 아니었습니까?”
류한나가 입을 반쯤 벌리고 물었다.
천무그룹의 정보부대 소속이었던 습관 때문일까. 그녀는 은근히 마야 카일리에게 정보를 뽑아낼 심산인 모양이었다.
“라비린토스는 세계에서도 몇 개 존재하지 않는 신화 등급 아티팩트니까요. 내부는 단순한 미궁이 아니라 여러 공간이 얽혀 있는 상상 이상의 아공간이에요.”
“그러면 라비린토스는 문자 그대로의 미궁이 아니라. 일종의 공간미로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음, 완벽한 정답은 아니지만. 팔 할 정도는 맞아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외부와 내부의 공격 모두에 훌륭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죠.”
가슴을 쭉 펴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마야 카일리.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미 현우는 1회차의 인생에서 라비린토스가 샤오 가문에 공략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안에 계실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기별도 없이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아직 그런 예의치례를 신경 쓰실 정도의 상태는 아니셔서요. 만약 그 정도로 상태가 좋았으면 애초에 이곳이 아니라 접객용 공간으로 갔을 테니까요.”
마야 카일리가 씁쓸한 투로 말했다.
하긴 굳이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라비린토스의 심부로 불러들일 정도다. 가주의 상태가 그만큼 좋지 않다는 거겠지.
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야 카일리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저택 1층에 마련된 거대한 침대.
그곳에 누워있는 노인을 향해 마야 카일리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마야.”
힘겹게 눈을 뜨는 노인.
그는 마야 카일리 뒤의 현우를 발견하곤 용을 쓰며 침상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네가 말했던 그분이시구나.”
“네, 천무그룹의 주현우 님이에요.”
마야 카일리의 부축을 받아.
노년의 사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눈에 봐도 움푹 들어간 뺨과 수척한 인상이 그가 정상은 아님을 나타내고 있었다.
“기껏 먼 곳에서 손님이 왔는데. 이런 꼴로 맞이하게 되어 면목이 없소. 내가 카일리 가문의 현 가주 테오 카일리요.”
카일리 가문의 가주.
테오 카일리는 생각보다 정중한 태도였다. 오랜 기간 중독에 노출되어 심신이 불편한 탓에 유해진 면도 있겠지만. 한 가문의 가주라기엔 너무 유약한 모습이었다.
“최근 소문이 자자한 천무그룹의 잠룡(潛龍)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주양태 회장이 그대를 마음에 들어 할 만도 한 것 같구려.”
“저도 카일리 가문의 혈사자(血獅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옛날부터 조부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인연을 저도 이어가고 싶군요.”
“흐흐, 혈사자라니. 이젠 그저 이빨이 몽땅 빠져버린 늙고 병든 사자일 뿐이지. 보면 알겠지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테오 카일리.
그는 침음성을 흘리며 마야 카일리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부축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서 있기조차 힘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침상에 걸터앉아.
테오 카일리는 다시 현우를 마주보았다.
“내 중독 증세를 완벽하게 치료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 그걸로 우리 카일리 가문과 거래를 하겠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그대가 건네준 해독제 덕분에 그나마 정신은 멀쩡하게 최후를 맞을 수 있게 된 점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소.”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곳까지 걸음 해준 그대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믿음이 가진 않는구려. 해독제로도 증세가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았는데. 대체 어떤 방법이 있다는 건지···.”
“방법은 이겁니다.”
현우가 팔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품속에 있던 덕춘이가 팔을 휘감으며 튀어나왔다.
“그 뱀은···.”
“쉭─!”
뱀이라고 불러서일까.
덕춘이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마야 카일리를 향해 꼬리를 붕붕 저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흠칫 놀라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덕춘이라고 이무기에요. 저번에 샤오 가문과 전투할 때 보셨을 텐데. 그 집채만 한 이무기가 바로 얘였죠.”
“아, 아아···.”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마야 카일리.
“뭔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했는데.”
테오 카일리가 입을 열었다.
그는 가늘어진 손가락으로 덕춘이를 가리켰다.
“크노스 경매에 나왔던 이무기의 알. 천무그룹에게 낙찰되었다던데. 거기에서 부화한 영물이 분명하겠군. 그걸 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2회차로 회귀한 덕분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지. 아무튼,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영물이라고는 하지만. 그 작은 이무기가 어떻게 내 중독 증세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소.”
“말로 전부 설명하긴 어려운데.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 녀석이 영물이라 체내에 퍼진 독을 빨아들일 수 있습니다.”
“독을···!”
테오 카일리의 눈이 반짝였다.
잠시나마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온 느낌이었다. 설명이 충분한 건 아니었지만. 그를 확실하게 설득할 만한 한 마디를 현우는 알고 있었다.
“저희 조부님께서도 이 녀석 덕분에 목숨을 건지셨죠. 한 번 해본 일이니. 위험하거나 어렵진 않을 겁니다.”
“아니, 잠깐만. 그럼 그 말은 샤오 가문이 주양태 회장에게까지. 더러운 마수를 뻗치려 했었단 말이오?”
“예.”
테오 카일리가 탄식을 흘렸다.
“이거, 의심해서 미안하오. 천무그룹 쪽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군. 그래서 천무그룹이 샤오 가문과 결판을 지었던 것이로구려.”
본래는 반신반의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팔을 들어 내밀었다.
“팔 정도면 충분할지 모르겠군.”
“아마 그럴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게 제가 아니라 이 녀석 맘이라서요.”
“음.”
“조금 따끔할지도 모릅니다.”
뭔가 기시감이 드는 말을 하며.
현우는 덕춘이를 테오 카일리의 팔로 보냈다. 송곳니를 그의 팔에 꽂고 한참을 우물거린 덕춘이가 드디어 입을 뗐다.
“어떠십니까?”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은 드네만···.”
여전히 테오 카일리의 안색은 어두웠다.
이거 설마 안 되는 건가.
예상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상황. 독은 분명 전부 빨아들였을 텐데···.
현우는 인상을 쓰며 덕춘이를 쓰다듬었다.
“나아진 건지는 잘 모르겠군.”
“이, 일단 치유사를 불러 확인해보죠.”
마야 카일리가 그 자리에서 튀어 나갔다.
***
“완벽한 해독은 불가능합니다.”
카일리 가문 치유사의 선고.
그 한 마디에 마야 카일리가 억장이 무너진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마지막 희망이었을 텐데.
그마저도 실패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기혈은 물론이고 코어까지 독에 침식된 상태입니다. 천무그룹의 도련님께서 영물로 체내의 독을 몰아내 준 덕분에 전보다 훨씬 호전되시긴 했지만···.”
카일리 가문의 치유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샤오 가문에서 사용한 독이 대체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토록 강인한 실력자였던 테오 카일리를 거의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혈관에 흐르는 독을 모두 몰아냈음에도. 이미 침식되어 있는 독까지 빨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여생을 고작 몇 주 늘린 수준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세상에···.”
“적어도 몇 개월 정도만 일찍 발견했다면. 이런 조치로 충분히 회복되긴 했을 것 같습니다만···.”
“정말로 방법이 없는 건가요?”
마야 카일리는 절망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어서 말씀해보세요.”
그녀가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치유사는 곤란한 눈빛으로 잠시 현우를 바라봤다. 왜 이쪽을 바라보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저 영물이 독을 빨아낼 줄 아니. 누군가 마나를 유도해주기만 한다면 가주님의 전신의 기혈과 코어에 침강된 독기를 전부 빼낼 수 있을 겁니다.”
“그거라면 당장···!”
“말을 끝까지 들어주셔야 합니다. 이런 방법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저 영물은 아마 주인의 마나에만 감응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갑작스럽게 돌아온 질문.
현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덕춘이는 자신의 마나에만 감응한다. 비슷하게 창천신공을 익힌 주건우에게 친밀감을 느끼긴 하지만. 이런 일이라면 현우가 나서야 할 것이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마나를 유도하는 정도야 못할 것도 없겠죠.”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치유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타인의 마나를 유도하는 것은 상대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서나 가능한 일. 마나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해도 가주인 테오 카일리의 심후한 마나를 감당하긴 어려울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아니, 자칫 잘못하면 수준이 아니다.
치유사는 쩝, 입맛을 다시며 말을 바꿨다.
“높은 확률로 천무그룹의 도련님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습니다. 가주님의 기혈에 흐르는 마나의 흐름을 버티지 못한다면. 독기가 그대로 그 쪽에게 역류할 테니까요.”
“역류라···.”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현우에겐 이미 유일 등급 아티팩트인 ‘세이렌의 순수한 눈물’이 있었고. 만약 마나를 감당하지 못해 역류하는 경우에도. 독기만큼은 어렵지 않게 버텨낼 수 있을 테니까.
‘뭐, 그래도 멀쩡하진 않겠지.’
독이야 둘째 치고.
타인의 마나가 역류한다면 현우의 기혈도 걸레짝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애초에 그렇게 될 확률이 굉장히 적다는 걸까.
현우의 마나는 일반적이지 않다.
인피니티 코어로부터 비롯되는 무한한 마나가 있으니. 최악의 경우를 맞이하게 되는 일은 없겠지.
카일리 가문의 가주, 테오 카일리의 마나가 얼마나 심후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한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심지어 오랜 중독으로 심약해진 지금이라면, 역류는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해보죠.”
“···위험하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 혹시 이곳에서 천무그룹 도련님이 사망하기라도 한다면. 저희 카일리 가문도 크게 곤란해질 겁니다.”
치유사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물러설 현우가 아니었다. 어차피 위험해 질 일도 없는데. 물러설 필요가 없었다.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볼 일 아닙니까?”
“주현우 님···.”
마야 카일리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현우를 바라봤다. 위험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로 알기 때문일까. 약간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해주는 편이 나았다.
‘이거 잘만 하면···.’
단순히 거래 수준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카일리 가문의 가주를 회복시킨 은인이 될 수도 있겠지.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볼 겁니다.”
“하지만, 도련님···!”
“다들 행운을 빌어주시죠.”
사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일단 비장한 표정을 연기하며 현우는 테오 카일리의 등에 양 손바닥을 붙였다. 덕춘이도 슬그머니 그의 팔뚝을 향해 입을 벌렸다.
말 하지 않아도 통하니.
역시 영물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시작하겠습니다.”
대답은 기다리지 않았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현우의 인피니티 코어에서 솟구쳤다. 전신의 기혈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그 기운을 양손에 집중해 테오 카일리를 향해 밀어냈다.
“잠깐,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마나의 흐름.
테오 카일리는 깜짝 놀라 허리를 세웠다. 그러나 현우는 고작 그 정도로 멈추지 않았다.
“오, 잠···! 끄악, 그아아앗···!”
카일리 가문의 가주.
테오 카일리의 허리가···. 체면 따위는 상관없이 활처럼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