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94
94화 환영의 샘(2)
‘이건 환영이다.’
잠시 정신이 멍해졌지만.
현우는 바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환영이 바로 보스급 마족 미미르겠지.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들. 지금 이 상황까지 모두 예측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주양태 회장이라니.
현우는 뜻밖의 상황에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기억하는 최고의 강적이 환영으로 나타나는 기믹이니. 무조건 다니엘 블랙이 튀어나올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저번 대련의 인상이 강했던 모양이군.’
솔직히 말해서 이건···.
정말 예상 밖의 사태가 맞았다.
그러나 그게.
이번 던전 공략의 실패로 이어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억 속의 적이란 결국 진짜에 비해 훨씬 못하기 마련이니까.
“어떤 경우가 닥쳐도 담담하게 대처하던 녀석이. 고작 이 할애비를 본 것만으로 그리 표정을 굳히다니.”
주양태 회장.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치 맹수 같은 사나운 웃음이었다.
그저 그렇게 가볍게 미소를 지었을 뿐인데. 현우는 전신이 무형의 압박에 짓눌리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긴장일까.
현우는 저도 모르게 꾸욱 주먹을 쥐었다.
“시련의 조건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만. 네녀석 쪽에서 먼저 올 테냐?”
“···그럼, 선공이라도 양보해주시렵니까?”
현우는 되레 반문했다.
그 물음에 주양태 회장은 다시 한 번,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기믹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영락없이 진짜 주양태 회장이라고 생각할 뻔했겠지. 그의 웃음을 마주하는 현우의 입가엔 쓴웃음이 서렸다.
“원한다면!”
주양태 회장이 짧게 대답했다.
고작해야 환영인 주제에 정말로 주양태 회장이 할 법한 소리였다. 현우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두 발의 간격을 벌렸다.
“진짜가 아닌 환영일 테니. 죄송하지만 손속에 사정을 두진 않을 겁니다. 그 정도는 이해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혀가 길구나.”
환영이지만···.
느껴지는 기백만큼은 확실히 압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우는 천천히 주먹을 들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어디 한 번 와보거라.”
과연 주양태 회장다웠다.
그러나 눈앞의 녀석은 진짜 주양태 회장은 아니다. 고작해야 현우의 기억을 통해 재현된 가짜일 뿐.
‘그래도 강하긴 할 거다.’
아무리 기억 속의 존재라도.
주양태 회장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이쪽이 당하겠지.
하지만 오히려 좋다.
저번 대련에서 오직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생사결이 아닌 대련이었기에 서로 살초를 펼치지 못했다는 것.
저 환영은 현우의 기억에 기반한다.
그리고 현우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주양태 회장의 진짜 실력을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건 곧···.
‘내게 조금은 유리하단 소리지.’
현우의 기억 속에 주양태 회장이 펼치는 살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눈앞의 환영 또한 마찬가지일 터.
꽈앙─!
현우의 오른발이 지면을 박찼다. 오직 각력만으로 움푹 꺼진 지면을 뒤로하고. 그의 몸이 잔영을 남기며 쏘아졌다.
“흠!”
선공을 양보하겠단 소린 거짓이 아니었다.
환영 주제에 정말로 오만한 판단.
하지만 그게 주양태 회장의 환영이라면. 충분히 오만할 자격이 있었다. 이윽고 현우가 뻗은 손이 일장이 되어 그의 몸을 거세게 타격했다.
터엉, 마치 맨손으로 벽을 미는 것 같은 느낌. 현우가 채 다음 수를 생각하기도 전에 오싹한 감각이 전신을 꿰뚫고 지나갔다.
‘···온다!’
창천십팔무(蒼天十八武)
제16초식 용호상박(龍虎相搏)
일전, 대련에서 경험했던.
고작 막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던 기술이, 현우의 눈앞에서 다시 펼쳐졌다. 눈으로 쫓기 어려운 초속의 난타 공격.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현우의 눈은 그 주먹을 완벽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기도 했다.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진짜 주양태 회장이 선보인 용호상박의 위력과 정교함은, 현우의 뇌리에 백 퍼센트 정확하게 새겨져 있진 않다.
눈에 보였던 것만큼.
그래서 기억에 남아 있는 만큼.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용호상박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건 막을 수 있다.
몰아치는 권격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은 일 초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현우의 시야엔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할 수 있다.’
확신을 가지고.
현우는 주먹을 마주 뻗었다. 재현하는 것은 당연히 주양태 회장의 환영이 펼치는 것과 똑같은 제16초식, 용호상박.
마찬가지로 초속에 이른 공격.
삽시간에 펼쳐진 맞수에 일순 공간이 뒤틀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주먹과 주먹이 맞닿으며 열다섯 합이 지나갔다.
손목이 으스러지는 것 같은 격통.
마지막 합에 도달했을 때. 현우는 즉시 맞닿은 주먹을 펼치며 환영의 품속으로 또 한 번 파고 들어갔다.
창천십팔무(蒼天十八武)
제1초식 재천(在天)
비틀어 뻗은 주먹이 환영의 흉부에 닿는다.
이번엔 최초의 일격과 달랐다.
격렬하게 요동치는 우레불꽃이 환영의 몸을 침범했다. 이윽고 일직선으로 쏘아진 푸른 불꽃의 폭발.
환영의 몸이 밀려난다.
찰나의 순간,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반대로 현우의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서렸다.
정말 가능하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일희일비는 좋지 않지.”
환영의 몸이 살짝 기우는 듯하더니.
물리 법칙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현우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왔다. 경악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주먹이 현우에게 직격했다.
하지만 역시나, 내지른 그 일격은 진짜보다 못했다.
몸 주위에서 타오르던 창염갑이. 강력한 힘을 밀어내며 일그러진다. 그러나 환영은 주양태 회장을 흉내 내듯, 사나운 웃음을 터트리며 힘을 주어 창염갑을 밀어냈다.
강하다.
환영에 불과할 지라도.
주양태 회장은 역시, 명불허전 주양태 회장이었다. 드드득! 펼친 창염갑 위로 불길한 소리가 내달렸다.
결국, 밀려난 쪽은 현우였다.
쿠웅! 그래도 대부분 흘려낸 힘이 땅으로 향했고. 흡사 거인이 짓밟은 것처럼 지면이 움푹 내려앉았다.
또한, 그 일격의 여파는 현우의 기혈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큭···!”
울컥, 핏덩이가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그러나 현우는 토혈을 하는 대신. 비죽 웃으며 핏덩이를 도로 꿀꺽 삼켰다. 비린 뒷맛이 입안에 서서히 퍼졌다.
‘살기를 담은 공격도 아닌데.’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단순히 생각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실제로 주양태 회장의 환영은 살초 따윈 펼치지 않아도. 능히 현우와 대등한 합을 겨루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크, 흐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현우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죽음이 두려워서 뇌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맞겠지.
‘그래, 이거지.’
현우의 눈이 번뜩 빛났다.
이거야말로 지난 생에서는 절대 경험해 볼 수 없었던 기연이 아닌가.
어쩌면 두 번째 삶이라고 해도.
이렇게 주양태 회장에게 직접 목숨을 노려지는 경험은 웬만해서는 해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30분을 버텨볼까 했는데···.”
소극적으로 방어한다면.
분명 30분 정도야 충분히 버틸 수 있다. 현우는 방금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그건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생각이 달라졌어.”
현우는 주양태 회장···.
아니, 그의 환영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주양태 회장을 넘어서는 경험.’
그것 또한, 벌써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곤. 감히 생각하지 못한 것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적어도 저 환영이 상대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확신이 현우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현우는 아공간 포켓에서 빠르게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혼돈의 성배.
마나를 불어넣자 연보랏빛 불꽃이 흔들, 타오르며. 그 권능이 신체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무조건 이긴다.’
이번 던전에서 현우는···.
단순히 신물이라는 물질적인 보상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의 심득(心得)을 손에 넣어볼 생각이었다.
***
한편···.
환영의 샘 바깥.
세계수의 묘목을 수비하는 팀 역시.
현우가 샘을 통해 사라짐과 동시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마족의 환영을 상대하느라.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10분 째.
“마족의 수가 줄어드는 것 같소.”
“···그게 샘 안쪽에서 일이 잘 흘러간다는 증거라면 좋겠군요.”
류한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상황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샘에서 튀어나오는 마족의 환영이 조금씩 줄어드는가 했더니. 이번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토르의 형제단 길드 마스터, 토르켈이었다.
“프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토르켈.
죽었다고 결론 내렸던.
그의 아내 프레다 한센이 눈앞에 나타났다.
제아무리 강한 헌터라고 해도.
마음까지 강하게 단련하기는 어려운 법.
하물며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웬만한 사람은 빠르고 정확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 자리에 토르의 형제단뿐만이 아니라. 주건우와 류한나, 두 사람도 남아 함께 전투를 치루고 있다는 거였다.
짧은 순간.
오직 그 두 사람만이 빠르게. 눈앞에 벌어진 이변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저건 백 퍼센트 환영이야.’
건우의 판단은 정확했다.
지금까지 마주한 기믹을 통해 내린 결론. 그리고 그는 토르켈의 상태를 살폈다. 딱 봐도 이성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판단을 내린 건우의 행동은 빨랐다.
이대로 놔둔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는 바로 지면을 박차며 코어에서 마나를 끌어올렸다.
창천십팔무(蒼天十八武)
제8초식 기염포(氣炎砲)
원거리 견제에 특화된 기술.
주건우의 손에서 쏘아진 창염의 구체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프레다 한센의 발치에 착탄했고. 뒤따라 거센 폭발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인해, 그녀의 신형이 뒤로 밀려나는 것이 보였다.
“프레다!”
토르켈이 비명을 질렀다.
거친 그의 외모에선 도저히 연상할 수 없는 다급한 목소리.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그였지만···.
“토르켈 씨!”
주건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저건 환영이에요! 정신 차리세요!”
“하, 하지만···.”
토르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하는 약간의 의심이 그의 마음을 좀먹기 시작했다.
“진짜 프레다일 가능성도 있지 않소?”
“뭐라고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주건우.
하지만 토르켈은 필사적인 눈빛이었다.
“지, 진짜 프레다가 살아남았을 수도 있지 않소. 만약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아뇨.”
이번에 그를 붙잡은 것은 류한나였다.
던전 공략에선 한 끝 차이로 생사가 갈린다.
토르켈의 주장대로 이성이 아닌 감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는지. 적어도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부정했다.
토르켈은 침음성을 흘리며 류한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머리가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모양이었다.
“마지막 공략으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프레다 씨가 아무리 SSS급 헌터였다곤 해도. 절대로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시간입니다.”
류한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냉정한 말이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마지막 공략에서 프레다 한센이 실종된 이후로 벌써 6주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
제아무리 그녀가 SSS급에 달하는 베테랑 헌터라고 해도. 던전 내부에서 6주 이상 실종 되었던 헌터가 생환했다는 기록이나 소식은 지금까지 없었다.
‘6주라는 긴 시간은 행운의 여신이 함께 한다고 해도.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긴 하지···..’
토르켈은 쓴맛을 다셨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은 맹렬히 그 사실을 부정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닳고 닳은 SSS급 헌터로서. 어떤 판단이 옳은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전원···.”
살짝 목이 메었지만.
토르켈은 가까스로 감정을 삼켰다. 여기서 감정에 휘둘린다면 그의 목숨만 잃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믿고 함께해준 토르의 형제단 길드원들은 물론. 호의를 베풀어 공략에 동행시켜준 천무그룹 공략팀에게도 큰 폐를 끼치게 된다.
“최선을 다해 프레다를 공격해라. 그녀의 전투 방식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선두에서 내가 주의를 끌겠다.”
다만 한 가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끝낼 정도로 독한 마음까진 먹기 어려웠다. 아무리 진짜가 아니라곤 해도. 그가 보기엔 저 환영의 모든 것은 프레다 그 자체였으니까.
“···마무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음, 고맙소.”
류한나 역시,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소중한 사람을 두 번이나 떠나보낸다면, 평생 가슴에 회한으로 남겠지.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한 부담은 그녀의 손으로 덜어줄 수 있었다.
“잠깐.”
그러나 세계수의 미궁이 그들을 압박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고작 프레다 한센이란 환영 하나 만이 아니었다.
“뭔가 더 나오는 것 같은데요.”
섬뜩한 예감.
주건우가 손을 들어 이들을 멈추었고. 안타깝게도 그의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고 말았다.
“저, 저건···!”
에릭 보른이 놀라 숨을 삼켰다.
평소 말수가 적은 그였고. 전투에선 우직히 길드 마스터인 토르켈의 지시를 따를 뿐인 그였지만.
지금 만큼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주건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현우 형···?”
샘에서 튀어나온 것.
그건 다름 아닌 주현우였으니까.
그러나···.
‘뭔가 달라.’
주건우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건 그가 알고 있던 주현우가 아니다.
방금과 같은 환영.
뇌리를 그 생각이 스친 순간.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서늘한 소름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