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AW novel - chapter (1231)
회귀자 사용설명서 1231화
대륙에서(5)
아무리 생각해도 담담하게 미소를 보이는 것이 더욱더 씁쓸하게 느껴진다.
뭔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스스로 당당하고 싶다고,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다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은 분명 빛기영의 그것이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난리를 치는지 알 것 같자너. 도와주고 싶기는 하자너….’
말려보려고 하기야 했지만 전혀 말려지지 않는 것이 문제, 보통 김현성이 저렇게 강경하게 나올 때면 어지간해서는 마음을 돌리기가 힘들다.
물론 상대가 빛기영 정도가 된다면 모든 일이 어지간해지기는 하겠지만 현시점에서 정말로 김현성의 선택을 막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박사인가 뭔가가 김현성을 제대로 치료해 줄 수 있냐 없느냐는 둘째 치더라도 김현성 스스로의 문제를 인지하고 마주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했다.
어찌 됐건 간에 김현성이 한 발자국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구태여 막을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했다.
솔직히 말하면….
‘적당히는 고쳐졌으면 좋겠는데….’
완치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고칠 수 있기는 한 건가.’
정신의학과에 대해서는 뭣도 모르는지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정신병이라는 게 쉽게 완치되기 힘들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예민하고 복잡한 인간의 뇌를 어떻게 질환이라는 단어 하나로 뭉뚱그려 정의할 수 있을까.
여기저기에서는 완치가 가능하다 말하고 있고 그런 사례야 찾아보면 많이 나오기야 하겠지만 말이야 어 다르고 아 다른 법이다.
누군가는 스스로 증상을 인지하고 제어할 수 있는 단계만 되어도 완치라고 정의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질환을 완전히 잡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질환들을 평생 마주하고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컨트롤하고, 손을 잡고 걸어야 할 동반자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정말로 그 능력 있는 박사라는 놈이 김현성의 머리에 있는 썩은 부분을 완전히 드러내고자 하고, 실제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면… 솔직히 내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다.
김현성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이유가 대부분 거기에 얽혀 있었던 탓이다.
‘분리불안 같은 거….’
김현성이 어느 정도는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는 있었지만 나를 의지하지 않는 상황은 그리 이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기는 하겠지만….’
“그렇지? 누나. 쉽게 될 리가 없겠지?”
“그럼 그게 단기간에 되겠어요? 김현성이 잃어버린 시간이 얼만데… 원래 그런 질환들은 초장에는 잡기 쉬운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어려워진다고요. 솔직히 완치는 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일 거라고 봐요. 실력 있는 박사든 나발이든 간에 관계없이 아마 고생깨나 하게 될 거예요.”
“으음….”
“대륙에도 처방할 약이 몇 개가 있기는 하겠지만… 김현성이라는 인간이 약발 잘 받는 인간도 아니고… 결국에는 상담치료로 조금씩 조금씩 빌드업을 쌓아야 된다는 건데 김현성이 숨기고 있는 게 오죽 많아야죠. 회귀했다는 걸 알리겠어요? 환자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치료를 하겠다고….”
“그렇기는 해.”
“그냥 그런 기분만 느끼게 해주는 것도 성공이에요. 그리고 이건 오빠가 부탁한 거. 검은백조가 그 박사에 대해 조사한 거예요. 지구에서의 이력도 있다고 하니까 한번 봐보세요.”
“고마워 누나.”
“그래서. 걔는 오늘 출발한 거 맞아요?”
“응. 아침에 인사하고… 종종 길드 하우스에는 들른다고 하던데? 연락도 계속 하다고 하더라. 요즘은 워프게이트도 있으니까 딱히 거리가 문제는 아니야. 문제 생기면 곧바로 보러 갈 수도 있고… 솔직히 요즘 길드 분위기가 좋지는 않아서 그냥 좀 쉬라는 의미로 보내줬어. 로헨에서도 고생 많았으니까.”
“음 그것도 그렇네요. 뭐, 그럼 걔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좀 나가요.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응.”
지혜 누나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갑네.’
몇몇 교국 의원들과의 만남이었다. 몸이 이렇게 된 바람에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했던 터라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고용인들도 대동하지 않은 자리였기 때문에 평소와도 같은 다과회장이 훨씬 넓어 보였다.
“이기영 님?”
“오랜만입니다. 카트린 의원, 엘리제 의원도 말이에요.”
“그… 그 모습은… 사전에 듣기는 했었지만 정말… 정말로 어려지셨군요.”
“네. 아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회복될 것 같습니다만….”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얘네들도 다 은근슬쩍 안아보려고 하네.’
오랜만에 만나도 굳이 포옹은 하지 않았었는데. 어째 레퍼토리가 다 똑같은지 모르겠다.
“이기영 님… 정말….”
일단 두 손을 꽉 잡는 것부터 시작하고 아픔과 상처를 위로해 주겠다는 스탠스를 취한다.
가볍게 포옹하며 등을 두드려 주는가 싶더니 점점 손에 힘이 들어가 이쪽을 꽉 껴안기 시작한다.
“이기영 님!… 하아… 이기영 님!”
“마를린 의원. 숨… 숨 막혀요.”
“앗. 죄송합니다.”
얘는 어째 달라지는 게 없네.
그래도 감회가 새롭기는 했다. 한 때 캐슬락의 금지옥엽이라고 불렸던… 우효열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그래, 천둥벌거숭이 같은 포지션이었는데 어느새 교국의 의원 자리를 꽤 차고 있다니….
심지어 일도 나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캐슬락 전 백작에게는 무척 잘된 일이었다.
사실 이쪽 라인이야말로 정말 직접적으로 만난 지 오래된 사람들이었다.
바젤 교황님이야 기도회를 하면 매번 보는 얼굴들이고, 오스칼 역시 종종 교국 업무차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이 다과회만을 위한 조합은 크게 마주칠 일이 없었다.
아니, 마주치더라도 길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 문제.
카트린 의원과 엘리제 의원이 귀족 부인, 마를린 의원이 영애였던 시절에는 사교회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온전히 열정을 쏟을 수 없었지만 교국에서 의원직으로 녹봉을 받아먹으며 일을 하는지라 예전보다는 더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내 이름으로 다과회를 열어 초대장을 보내면 무리해서라도 찾아오기는 했지만 아마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분들도 전부 만나 뵙고 싶지만 몸이 이렇게 된 까닭에 여러분 세 분에게밖에 연락을 드리지 못했네요.”
“어머. 그거 영광이군요. 이기영 님께서 저희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그동안 무리를 해서라도 다과회에 찾아오길 잘했다는 표정들이 눈에 띄었다.
“당연하죠. 저희가 어디 보통 인연이겠습니까?”
“호호호.”
“오늘은 평범한 홍차를 준비했습니다. 평소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냥 조촐하게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말이에요.”
“그것도 좋죠. 사실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피곤함도 커지는 것 같아서….”
“카트린 공작부인 말이 맞아요. 네. 네. 가끔은 이런 소소함이 그리웠답니다.”
“공작부인이라니요. 엘리제 의원 큰일 날 소리를….”
“아! 실례가 됐나요? 저는 그냥 오랜만에….”
“옛날처럼 놀아보자 싶다 이 말이죠? 엘리제 백작부인?”
“아! 그럼 저는 마를린 영애가 되는 거군요.”
“레이디 마를린이라 부르겠습니다.”
“호호호호.”
“호호호호호호.”
‘재미있기는 해.’
“디저트도 드시면서 묵힌 이야기나 풀까요?”
“저희야 좋죠.”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점은 이 세 명이 교국 고위층으로 통하는 소통창구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검증됐든 검증되지 않았든 간에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 말이다.
심지어 검은백조조차 알아내지 못한 사실들을 알아낸다. 그야 검은백조가 어느 의원의 사촌 딸과 어느 유력가문의 가주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신경을 쓸 리 없었으니 말이다.
일단 워밍업은 교국에 관한 이야기부터. 필요하지만 재미는 없는 시간이었다.
“이번에 세율이 좀 조정됐죠? 부동산값이 빠르게 안정화되어야 할 텐데요. 특히 린델 같은 경우에는….”
“수도보다 더하니까요. 근처에 위성도시를 빨리 지어야 할 텐데… 아직 통과가 되지 않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삼대 길드 쪽에서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의 범위가 점점 축소된다.
“제가 없는 동안 소식을 듣지 못해서 그러는데… 카트린 공작부인.”
“아아아아. 해드릴 이야기야 정말 많았어요.”
“이기영 님이 계셨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쉬웠다니까요.”
“글쎄 이번에 의회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발언을….”
“네?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요. 얼마나 사람이 무식한지 정말… 언론에 두드려 맞고 있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지 뭐예요?”
‘내가 그 양반 언제 한번 실수할 줄 알았다니까.’
그리고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달을 때 즈음에 진짜 가십거리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솔직히 이거 때문에 다과회를 못 끊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 풀기에 좋다.
“글쎄 그렇게 해서 친자확인 마법을 걸었는데 친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어머. 어머. 그게 정말인가요? 엘리제 백작부인?”
“그럼요. 카트린 공작부인.”
“그럼 친부는…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나요?”
“네. 공작부인 추측이 맞아요.”
“역시… 말콤 경이었군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혹시나 했었는데. 그야 그 붉은색 머리는 누가 봐도 말콤 경이었잖아요. 이기영 님도 그때 분명히….”
왠지 이상하기는 했어.
“네. 당연히… 누가 봐도 붉은색 머리가 말콤 경과 똑 닮았는데… 남작부인의 붉은색과는 확실히 다르죠.”
내가 이 눈으로 말콤 뭐시기랑 붉은 머리랑 특성이 비슷한 것도 분명히 확인을 했었다.
“혹시 그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네? 이기영 님.”
“저도 자세히는 전해 듣지 못해서 진위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공화국의 군사가 추잡한 치정관계로 지금 공화국이 떠들썩하다고…”
“네에? 공화국의 군사라면 그… 진청….”
“네. 진청 님 말입니다. 저번에 블랙마켓에서 어떤 노예를 구매했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었는데… 단순 헛소문이라고 치부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인 것 같더군요.”
“하…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블랙마켓이… 그 사람도 참… 겉과 속이 너무 다른 것 같다니까요.”
“나라에서 제지를 한다고 해도 이용할 사람들은 전부 이용하니까요. 참 안타까운 일이죠. 특히나 노예 구매 같은 경우에는 목적이 너무 뻔해서. 사실 아직도 공화국에서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도 하잖아요.”
“그것뿐이 아니라 제가 듣기에는 비밀스러운 클럽에 가입되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블랙마켓 다니는 인간이 뻔하죠.”
마음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로헨에서의 일, 도착한 뒤로도 파란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에 일어났던 스트레스들이 조금은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조금 처져 있었던 삶에 활력도 슬그머니 고개를 올리는 것이 느껴진다. 어려져서 그런진 몰라도 홍차와 디저트도 더욱더 맛있게 느껴졌다.
“공화국에 숨겨둔 아이가 세 명이라고….”
“네?”
“그 사람… 그렇게 보지 않았었는데….”
쾅!
“그림자의 영웅이라는 이명이 울겠어요!”
마를린의 큰 소리로 말할 정도라면 내일 기사까지 뜨겠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저는 그 이야기 들었어요. 엘프 왕국의 엘리오스 님이 여자에게 빠져서 국정운영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거. 상사병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고 하네요.”
“왜 이렇게 추문들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한참 중요한 시기에 다들 뭣 하고 있는 건지… 참… 대륙에 중심을 잡아주셔야 하는 분들이 되려…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다니… 이 대륙의 미래가 어떻게 되려는지….”
순전히 개인의 즐거움 때문은 아니었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큰 이슈는 큰 이슈로 덮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김현성의 병원행이 들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만족스럽게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진청의 악행에 대해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엘리제 의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들으셨나요? 왜 하네스트 의원의 아들이 이번에 퇴학당할 뻔했다는데. 뇌물 주고….”
“엘리제 의원!”
그 뒤로는 갑작스레 크게 소리치는 카트린과 왠지 모르게 내 눈치를 보는 마를린의 얼굴이 보인다.
‘뭔데?’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이기영 님. 엘리제 의원이 아무래도 너무 신이 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왜 하네스트 의원 아들 뇌물 건이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고민하는 시간은 길었지만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혹시 파란 유소년 교육시설에서 일어난 일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