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ad Demon RAW novel - Chapter 305
305화. 맹주의 우격다짐.
우리는 마지막 배에 올라타서 백사도를 출발했다. 사공은 먼저 섬 안으로 도망갔던 고공들이 맡았기 때문에 물살을 가르는 속도가 남달랐다.
우리는 간식으로 배를 채우면서 호수에 닿아서 퍼지는 달빛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사도제일인을 죽이러 갈 때 구경하던 호수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임소백이 나를 바라봤다.
“문주는 서른 전의 강호인 중에서 적수가 있나?”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 것일까.
없다고 하면 어쩐지 싸움을 주선할 것 같고. 있다고 하면 누구냐고 물을 텐데, 사실 나는 서른 살 이전의 고수에겐 질 마음이 없다.
“아마 없을 겁니다.”
“확실해?”
“다 겨뤄보진 않았으니 확실하진 않지만, 없습니다. 있겠습니까? 있어도 곧 없어집니다.”
임소백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강호가 나이 순서로 강한 세계는 아니다. 내공은 분명 세월의 힘이 더해져야 깊어지는 맛이 있으나, 기연과 사연이라는 게 있어서 나 같은 놈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삼재의 일원인 개방 방주가 어떻게 강해졌는지도 들었다. 개방의 고수들이 젊은 신개(神丐)의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내공을 불어넣었다가, 우연과 방주의 오성이 더해져서 보기 드문 내공을 갖게 된 사례도 있으니 말이다.
색마는 말했다.
“세가에는 좀 있지 않습니까?”
임소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세가에도 몇 명 있고 권왕(拳王)의 제자도 문주 또래이긴 하지. 듣기로 권왕 별호를 당장 받아도 될 고수라고 하던데 아직 확인해본 사람은 없다. 몽랑아, 네가 확인해보겠느냐?”
이번에는 색마가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권왕의 제자라고는 하나, 그 어린놈이 제 상대가 되겠습니까?”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자네보단 나이가 몇 살 더 많아.”
“어쨌든 장법이나 주먹으로 저를 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죠.”
“술만 잘 마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예.”
사실 보통이 아닌 여인을 소개하는 것도 남다른 일이지만, 후배들의 대결을 적절하게 잘 주선할 수 있는 사내도 무림맹주만 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맹주의 의중은 파악했으나 별다른 의견은 제시하지 않았다. 색마가 계속 잘난 척을 하고, 맹주는 은연중에 그것을 다 받아주고 있었다.
과연 맹주는 맹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유치한 놈의 말도 고개를 끄덕거려가면서 받아주고 있으니 말이다.
임소백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왕들의 제자나 자제들이 자네들 또래군. 사부나 아비들의 명성에 가려서 많이 알려져 있진 않으나 조만간 백도의 중심에서 이들이 활약하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몽랑이나 문주를 상대하긴 힘들 것이다.”
색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각자의 세력권에 틀어박혀서 소국(小國)의 왕이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언제고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할 터인데…….”
나는 맹주의 의중을 대충 짐작해서 말했다.
“만나게 되더라도 죽고 죽이는 싸움은 피할 테니 걱정은 마십시오.”
임소백이 웃었다.
“걱정은 무슨. 자네들이 어디 그럴 나이인가. 걱정하지 않네. 나도 예전에는 제왕이라 불리는 자들과 한두 번씩 붙었었다. 필요한 일이었지.”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대주 이전에는 내가 주로 졌다. 몇 년 후에 다시 찾아가거나 그들이 맹을 방문해서 겨뤘을 때는 제대로 설욕할 수 있었지. 그 세월이야말로 무공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였지.”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모난 놈도 있고, 대범한 척하면서 수련에 매진하는 놈도 있고. 무공 강한 놈이 무조건 맹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놈도 있어서 젊은 시절에 내가 이겼던 제왕들은 지속해서 내게 비무를 요청하고 있다. 일승일패였으니 결판을 내자는 놈도 있고.”
그러고 보니 맹주도 젊은 시절에는 패배를 종종 했었고, 이후에 찾아가서 다시 모조리 꺾었다는 말을 검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면 승리와 패배가 양쪽을 전부 성장시키는 밑거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싸우면서 실력이 성장하는 것을 봤을 때는 겨루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색마나 나를 감당할 젊은 고수가 실제로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 정도면 젊은 놈들이 아니라 제왕들과 겨루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님 말고.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다.
임소백이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실력을 타인에게 증명하려는 욕망을 누를 수 없다는 게 백도의 작은 문제이기도 하다. 실은 나조차도 그랬지.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백도의 장점이기도 해. 경쟁이 없는 강호에 무슨 재미가 있을까. 나도 아직 은퇴할 생각이 없어서 매번 귀찮게 하는 제왕들을 좀 눌러주고 싶은데 몸이 하나라 바쁘구나.”
이때, 임소백이 검마를 슬쩍 바라봤다.
“다행히 자네도 패배에 연연하지 않는 사내이니 나중에 제왕들과 한번 겨뤄보는 게 어떻겠나? 검을 잡은 자는 벽 보고 수련해선 안 된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네.”
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왕들이라면 나쁘지 않지. 그러나 내 무공은 비무에 적합하지 않아서.”
놀랍게도 임소백이 검마를 꾸짖듯이 말했다.
“변명하지 말게. 비무는 자네만 불리한 게 아니야. 백도의 고수들도 마찬가지. 지켜보는 자들이 많아서 실전이나 원수를 죽이는 것처럼 모든 수를 사용할 수는 없네. 그렇더라도 비무가 가진 의미는 있지.”
“어떤 게 있나?”
임소백이 말했다.
“승리하면 그것대로 좋은 일이고. 패배하면 그것보다 좋은 경험도 없다. 종종 사마외도의 고수들이 비무를 낮춰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럴 필요 없다. 자네들은 패배를 두려워하지 말도록 해라. 제왕들에게 패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나는 그 패배의 경험을 권유하고 싶군. 육합, 자네도 마찬가지.”
검마가 냉소를 머금었다.
“두려울 리가 있나.”
나는 화들짝 놀라서 임소백을 바라봤다. 마치 도박장의 주인이 판을 크게 키우는 것처럼 보였다.
색마가 임소백에게 물었다.
“맹주님, 혹시 재신임 기간이 언제입니까?”
“이미 지났다.”
“예.”
나는 색마에게 물었다.
“그게 뭐야?”
색마 대신에 임소백이 설명했다.
“맹주는 임기가 없다.”
“그렇습니까?”
“임기가 없다고 도전하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야. 실력으로 끌어내리려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지. 하지만 도전하는 자마다 받아주면 내가 일을 못 한다. 그래서 세가의 고수들이 에둘러서 표현하게 된 말이 재신임 기간이지. 삼사 년에 한 번씩 몇 명이 도전하는 모양새로 말이야. 내가 여전히 맹주 자리에 적합한 사내인지 확인하는 비공식 행사지. 짧게는 삼사 년에 한 번 정도 진행하는데 이미 오 년이 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전생에도 맹주가 갑자기 바뀌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임소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제왕들을 잘근잘근 밟아줬던 모양이다.
애초에 임소백은 검마의 윗줄에 있는 고수고, 세상 사람들도 교주의 대척점에 있는 사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실력도 삼재의 바로 아래로 평가되고 있다. 그 밑에 무엄하게도 별호에 제(帝)나 왕(王)을 붙인 자들이 줄줄이 대기하는 구조랄까. 사실 오래전에는 감히 갖다 붙일 수 없는 별호가 제왕이었는데 지금은 꽤 많아진 상태다.
색마가 말했다.
“강호에 제왕이 참 많아졌습니다. 삼류 같은 놈들도 붙이는 별호가 되었으니.”
임소백이 말했다.
“자네들은 강호에 언제부터 제왕을 칭하는 자들이 많아졌는지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임소백이 설명했다.
“사마 씨의 종실제왕들이 연달아 죽고 나서부터일세.”
사마 씨의 종실제왕이라면 놀랍게도 사마의(司馬懿)의 후손을 말하는데 이들은 저희끼리 싸워서 서로를 죽여댔다.
“팔왕의 난으로 시작해서 여남왕, 초왕, 의양왕, 회남왕, 진왕을 비롯해서 동해왕, 회제, 민제……. 일일이 기억도 하기 어려운 제왕들이 민생을 피폐하게 만드는 내전을 벌이다가 연달아서 비참하게 죽었지. 그 덕분에 제왕이라는 말의 가치도 땅으로 떨어졌다.”
“음.”
어쩐지 나는 무림맹의 탄생 비화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위엄도 잃은 것은 물론이고, 권력욕에 미친 자들이라는 인식도 박히게 되었지. 그때부터다. 강호인들이 반발의 심리로 별호에 제왕을 붙이기 시작했지. 검왕, 도왕, 도제, 검제……. 어찌 보면 세상의 정점에 서려다가 쓰러진 종실제왕들과 비슷한 사내들이겠지. 천하제일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니 말이야.”
색마가 물었다.
“어쩌다 맹주님은 그런 별호가 없게 되었습니까? 별호를 일체 쓰지 않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전대 맹주께서도 검신(劍神)이었지 않습니까.”
검마와 귀마는 침묵하고 있었으나, 대화가 오갈 때마다 고개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임소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나는 그런 별호가 필요 없다. 내가 할 일은 맹주라는 말의 무게와 가치가 제왕들보다 더 무겁고, 더 강한 사람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것이 내 몫이야. 호칭은 시대에 따라 의미나 분위기가 달라지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맹주는 강호인을 아우를 수 있는 의미가 되어야 해. 검왕이니 도왕이니 하는 놈들도 예외는 없어.”
어찌 보면 이런 투쟁심과 자부심이야말로 임소백이 온갖 어려움에서 버텨내고 있는 근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소백은 맹주라는 말 자체에 무게감을 더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내였던 셈이다.
검마는 임소백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읊조렸다.
“멋진 마음가짐이야.”
하여간 맏형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가짐밖에 없는 모양이다.
임소백이 말했다.
“그나저나 슬슬 나도 후계자를 찾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이들도 종종 있으나 한 놈은 성정이 너무 과격하고, 한 놈은 너무 여자를 밝히는 것 같고. 제왕들의 후계자 중에서 찾아야 할 판국이다. 어쨌든 나도 은퇴할 시기가 오긴 할 테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청하고 있으려니 문득 성정이 과격한 놈은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색마와 눈을 마주쳤다가 욕은 하지 않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귀마가 궁금하다는 것처럼 물었다.
“근래도 제왕들이 계속 맹주께 도전하고 있소?”
임소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를 둘러봤다.
“이미 많이 거절했지.”
배가 육지에 도착할 때쯤에 임소백이 우리에게 제안했다.
“……자네들이 한 번 단체로 무림맹에 방문하겠다면 내가 여태 미뤄놨던 재신임인지 뭔지 불필요한 행사를 진행해 보겠네.”
이야기가 이렇게 정리된다고?
임소백의 설명이 있었기 때문에 왜 이런 의도로 말하는지 금세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임소백이 제왕들의 도전을 일일이 받아주면 정말 쓸데없는 소모전이 된다.
임소백이 결론을 말했다.
“비무를 지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고. 네 사람이 제왕과 겨루거나, 그들의 제자와 실력을 비교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그래야 나도 구경하는 재미가 생기겠지.”
임소백이 검마를 도발했다.
“자네 실력이 제왕에게 먹히는 지도 궁금하고.”
다름으로는 귀마를 자극했다.
“자네도 더 성장해야 해.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해라.”
끝으로 색마와 나를 쳐다봤다.
“너희는 근질근질하지?”
이 단순한 질문에 색마가 단순하게 대답했다.
“예.”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맹주가 나를 쳐다봤다.
“문주는?”
“저는 구경만 하겠습니다.”
“왜?”
“후기지수에 해당하는 자들에겐 질 마음이 없으나 제왕들에겐 자신이 없습니다.”
“본래 이렇게 겸손했나?”
“그러니까 죽일 자신은 있는데 비무로 이길 자신은 없다는 말이지요.”
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이렇게 건방졌나?”
“예.”
“쉽게 죽을 사내들이 아닐세.”
“그러니까요.”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자 무림맹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새삼스럽게 맹주에게 예를 갖췄다.
“맹주님, 어서 오십시오.”
임소백이 뱃머리에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기하고 있는 맹원들에게 명령했다.
“특작대는 수고했다. 지부 파견자들에게 인수인계 확실히 하고.”
“예, 맹주님.”
“사도제일인은 확실히 죽었으니 재산 회수, 동호에서 사는 사람들의 안정에 주력해라.”
“명을 받듭니다.”
임소백이 배에서 솟구치더니 선착장에 가볍게 내려섰다. 우리도 동시에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경공을 경쟁하듯이 내심 여유롭게 내려섰다. 맹주에게 다가온 단혁산이 물었다.
“맹주님, 바로 복귀하십니까?”
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있으면 더 불편할 것이다. 바로 복귀하마. 그리고.”
임소백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리에게 말했다.
“저 넷과 복귀할 생각이니까 따로 호위는 필요치 않아.”
“알겠습니다.”
“데려가서 심문 좀 해야겠다.”
“예? 사고 쳤습니까?”
임소백이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아니고 싸움 좀 붙여야겠다.”
이 뜬금없는 말을 온전하게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단혁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나는 사대악인들과 눈을 마주쳤다가 임소백을 바라봤다.
임소백이 우리를 쳐다보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명령했다.
“나는 맹으로 복귀할 테니까 네 사람이 호위 좀 하게. 맹주 체면에 홀로 복귀할 수는 없지. 가다가 적을 만날 수도 있으니.”
“…….”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맹주의 부하가 아니다. 물론 다른 사대악인도 마찬가지. 어쩔 수 없이 맏형의 의사를 묻기 위해서 쳐다봤다.
검마가 말했다.
“가자.”
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색마가 임소백에게 말했다.
“맹주님, 그 권왕 제자 놈이나 불러주십시오. 방문하는 김에 서열 정리 좀 하겠습니다.”
임소백이 대답했다.
“재신임을 받겠다고 하면 온갖 떨거지들이 알아서 달려올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맹주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긴 했으나 어쨌든 손님으로 초대하는 것이어서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가 않았다. 새삼스럽게 상황을 깨달아보니 맹주는 전생의 공적들을 무림맹으로 초대하는 중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명색이 강호인이고 일문의 문주인데, 범죄자가 아닌 신분으로 한 번쯤은 가봐야지 하는 생각. 여태 내 대답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갑시다. 무림맹으로. 맹주 선배, 안전하게 모셔다드려야지.”
임시직이겠지만, 어쨌거나 잠시 나는 맹주의 호위무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