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848)
러스트 [RUST]-848
며칠 동안 실험실 구석에 박혀서 사실상 격리 상태에 있던 터라, 제국에서 작업해야 할 일을 둘이서 조용히 처리하자는 김 양의 주장은 실로 유혹적이었다.
“같이 비행선 타고 가긴 위험할 텐데?”
[가는 거야 따로 가면 되는 거 아님?]혹시라도 능력이 폭주해 비행선이 고장 나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에, 김 양이 태연하게 답했다.
[그럼 천천히 야영하면서 이동하면 되지 않겠음?]신형 혹한기 장비라면 스키와 썰매로 충분히 올 수 있지 않겠느냐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꼬드기는 김 양이었다.
[어차피 나는 원거리에서 지원하는 거니까 폭주한다고 해도 먼저 피하면 되는 거고. 내부에서는 마음껏 폭주하건 어쩌건 괜찮지 않겠음.]본래 증거가 없고 증인이 없으면 그것이야말로 옳은 암살이라며 눈을 반짝이는 그녀였다.
“일단 둘이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 회의를 해보자.”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나주연과 후드가 반발했다.
“혹시라도 비행선에 문제가 생기면 한 달 가까이 걸릴 텐데 그 기간을 두 사람이 외박한다고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위험할 것 같아요.”
“제국 의원과 군부 인사 죽이는 것으로 결정하신 겁니까? 저번 회의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국에 관여하지 않기로 하고 제국 의원과 군부 인사를 암살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판단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 제국 애들은 죽여야 할 때 죽이지 못하면 나중에 더 피곤해진다니까. 죽이는 것도 죽이는 거지만, 우리 존엄 능력은 어떻게 할 건데. 실전에서 직접 사용해 봐야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않겠어? 뭣보다 통제력 확보하려면 실전 뛰는 게 제일 빠른데. 가지 말라고? 그럼 그냥 저렇게 가둬놓고 있을 생각임?”
기순도 걱정했다.
“신성 왕국을 물 먹이려는 제국 의원이나 군부 인사를 정리해야 한다는 이야긴 알겠지만, 정말 그래도 될까 싶다. 일단 덴 아재가 건드리지 않고 있다는 건 그 인간들이 덴 아재의 선을 넘지 않았다는 이야기거든. 선을 넘으면 알잖아. 덴 아재도 자기 목숨 걸고서 선 넘은 작자들 몰살시켜버린 거.”
덴 브라운도 마냥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해진 선이 있고 그 선을 넘는 자들을 한 번에 처분할 정도로 강단있는 사람.
지금 신성 왕국에서 제국 의원과 군부 인사를 죽인다면, 덴 브라운이 어떻게 생각할까? 제국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사실상 제국 정치를 작살 내 버리는 짓인데.
“그러니까 증거 있음? 그 사람이 아무리 어쩐다고 해도 증거가 없으면 되는 거 아님. 그리고 그렇게 죽으면 식인귀가 그랬는지 흡혈귀가 그랬는지 어떻게 알고 그럼?”
“신성 왕국에 부정적인 애들만 골라서 죽이는 흡혈귀, 식인귀라고 하자고?”
기순의 대답에 김 양이 날름 대답했다.
“우리와 제국을 이간질하려 했다고 하면 되지 않겠음?”
“정말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후드가 확인하듯 묻자, 김 양이 차갑게 대응했다.
“다들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중요한 건. 최고 존엄이고. 여기 신성 왕국임. 제국이건 뭐건 내가 그쪽 사정을 왜 알아줘야 하는 건데? 그리고 그래도 괜찮은 게 아니라,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 아님? 똥오줌 구분 확실하지 못한 걸 보면 아직도 꽃밭?”
“그러니까 제국 의원을 죽이는 게 당연하다. 제국 군부 인사를 죽이면서 능력 연습하도록 하는 게 폐하를 위한 일이다. 그런 말이라는 거죠? 여차하면 식인귀 흡혈귀에게 덮어씌우면 된다고 하는 것이고요. 신성 왕국이 가야 할 방향이 그런 방향이라는 겁니까?”
후드와 김 양이 서서히 날을 세웠다.
[거기까지만 하지? 서로 감정적으로 갈 필요는 없어. 가치관이 다른 걸 그대로 감정으로 풀려고 하면 뭐가 남겠어.]마루가 중간에 끊었다.
[능력을 써봐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어. 언제까지 실험실 한쪽 구석에 갇혀 있을 순 없으니까.]“가상현실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보장이 없어요.”
나주연의 말대로 그게 문제였다. 가상현실이 마루의 능력을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
지금도 연구 개발 일정에 차질이 생겼는데 또 그런다면? 가상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버린 마루의 능력이 더 크게 폭주하기라도 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생체 단말기는 전부 폐기됐고 양자컴퓨터도 무리가 가서 전면적으로 수리하고 있는 판인데, 실전을 시뮬레이션하는 건 무리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가상현실로 능력 발현과 통제 훈련을 하는 건 어려워요.”
“실전 훈련을 자유 캐나다 연맹에서 하는 건 어떻습니까?”
PD가 대안을 제시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제국에서 실전 테스트를 하는 게 곤란하다면, 자유 캐나다 연맹에서 하는 건 어떨까?
흡혈귀 백작을 제거했기에 수직적으로 통제되던 식인귀들이 흡혈귀 백작의 지배력에서 벗어나 독립했을 것이다.
지배력에서 벗어난 식인귀들은 다시는 누군가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적극 세력을 넓히려고 할 테고 남부 연맹이 혼란에 빠졌듯, 캐나다 지역도 혼란에 빠졌을 터.
“치열한 실전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겠지만, 능력을 시험해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겸사겸사 자유 캐나다 연맹이니 뭐니 하면서 허겁지겁 식인귀가 된 자들을 단죄하는 의미도 있겠고.
“······.”
“······.”
PD의 의견에 김 양과 후드가 침묵으로 반대하지 않음을 밝혔다. 기순도 갑자기 제국을 뒤엎는 것에 비하면 캐나다에서 식인귀 때려잡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었다.
“에- 또- 거기 지도부를 잡는다고 자유 캐나다 연맹을 지지했던 분들이 신성 왕국으로 돌아설까요?”
간호사의 말대로였다. 마루가 식인귀가 된 지도부를 제거한다고 해서 신성 왕국으로 돌아오지는 않겠지. 돌아온다고 해도 받아줄 생각이 없었고.
[상관없어. 제국은 캐나다 지역에서 손 떼기로 했으니까.]마루가 가건 가지 않건 어떤 선택을 해도 자유 캐나다 연맹에 있는 자들은 겨울을 버티기 쉽지 않을 터. 모든 것은 그들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
‧
‧
11월 초임에도 최저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미친 날씨. 자유 캐나다 연맹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주요 대도시에 인구가 모였기에 좋았던 치안과 유통, 편의시설이 전부 박살 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달 보름 정도.
2m 가까이 쌓인 눈을 파 참호를 만든 사람들이 차가운 입김을 내뿜었다.
“젠장 추워 죽겠군. 연초 있는 사람?”
“연초? 대가리에 구멍 뚫리고 싶나 보지?”
“빌어먹을. 연초 하나 마음껏 피우지 못하는 판에 뭐가 자유 캐나다란 거냐?”
“거 입조심 합시다. 옆에 있는 사람들 생각도 좀 하쇼.”
신성 왕국이 떠나고 난 뒤, 고작 한 달하고도 보름 남짓한 시간에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전기와 상수도가 끊기고, 그걸 복구해야 할 지휘부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 뿔뿔이 흩어져 동네 하나씩을 깔고 앉아 땅따먹기를 시작했다.
“내 입으로 욕도 못해?”
“입에 걸레를 물었나.”
덩치가 큰 부대장이 동굴 저음으로 목소리를 깔았다.
“주둥이에 미싱을 박아 버리기 전에 둘 다 지퍼 채워.”
“······.”
“······.”
조용해지자, 사람들을 어르기 시작하는 부대장.
“다들 굶어 죽고 싶지는 않을 것 아냐? 여기서 미적대고 있다간 뒈진다고. 여기서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 처자식 있는 사람들은 혼자 죽는 게 아니라 가족 전체가 죽을 거 아닌가?”
“······.”
“······.”
“어쨌든 이번에 제대로 한몫 잡아야 한다고. 나도 그래. 여기서 안 그런 사람이 어딨겠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Fuck···.”
“······.”
“현실적으로 보자고. 우리가 설령 마트를 먹는다고 지킬 수 없어. 설령 지킬 수 있다고 해도 의미가 없지. 그러니 우리는 놈들이 싸우는 동안 밖에 널브러진 물자만 챙긴다. 밖에 있는 물자를 우선해. 그리고 나서도 여유가 있다면 밖에 있는 창고까지만 챙기고 빠진다.”
대도시를 나눠 먹은 지휘부, 자유 캐나다 연맹 의원들은 마치 갱단 두목처럼 굴고 있었다. 갱단이든 사적 집단이든 세력을 유지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먹거리였다.
그렇게 대형 마트와 식품창고 근처는 전쟁터가 됐다.
뺏지 못하면 굶는다.
지키지 못하면 가족이 굶주린다.
지키는 자도 뺏는 자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명제 앞에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고작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잔인해질 필요도 없었고 물자가 부족하지도 않았건만, 무엇 때문에 이런 싸움이 시작된 걸까?
투두두두둑!
철컥 팡- 철컥 펑-
기관총과 샷건이 내뱉는 불규칙한 불협화음이 생명을 탐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필사적이긴 마찬가지.
총구를 이쪽으로 겨눈 자의 눈빛에는 악이 가득했다.
저쪽을 바라보는 이쪽의 눈빛도 마찬가지겠지.
같은 자유 캐나다 연맹을 지지했건만.
저들도 같은 캐나다 사람일 텐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둔탁한 총성과 동시에,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눴던 사람의 머리통이 뒤로 젖혀지는 모습이 사내의 동공에 박혔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호통치는 부대장의 호통이 끝나기도 전, 그의 얼굴에 대각선으로 실선이 그어지더니 쪼개지는 얼굴.
철푸덕-
으아아아아-
사내는 뒤로 물러서려 버둥거렸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잘린 머리통 뒤로 저쪽 편 시의회 의원이 삐죽 웃는 모습이 보였다.
“이 씨발- 죽어!”
사내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반쯤 무너진 부대장의 시체를 방패로 삼은 식인귀. 투다다다닥- 철갑탄이 부대장의 시체를 흔들었다.
팅- 크릭- 크릭-
순식간에 비어버린 탄창.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이 애처롭게 움직였지만 그뿐. 변하는 건 없었다.
나지막하게 웃은 시의회 의원. 자칭 신인류가 쪼개는 머리통 속 보드라운 살덩이와 뇌수를 사내의 앞에서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씹을 것도 없이 꿀떡 삼킨 시의원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법인데? 항복하면 받아주지.”
“······.”
으직-
입을 벌려 척수 위에 붙은 골을 씹어 먹는 시의원. 마치 척수 개구리처럼 사지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부대장의 시체를 본 사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탄창을 교체했다.
“도망치지 않고 탄창을 가는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만, 빨리 답하는 게 좋을 거야. 난 그렇게 인내심이 길지 않거든.”
사내는 탄창은 갈았지만, 재장전을 완료할 수 없었다.
저렇게 인간을 잡아먹는 걸 선택한 것이 자유 캐나다 연맹이라고? 시의원이 사람을 잡아먹고 품평하는 나라를 원했다고.
철컥-
격철을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시의원이 시체를 앞으로 내던졌다. 골수를 뜯어 먹힌 시체가 꿈틀거리며 총구를 막았다.
그리고 식인귀의 뒤편에서 검은 넝쿨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아무런 전조 증상 없이 갑자기 불쑥 자란 검은 넝쿨.
?
???
사내를 향해 달려들던 식인귀도. 시체에 가로막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사내도. 그 이상한 기운을 느끼곤 멈춰 섰다.
붉게 물든 하얀 눈밭 위로 검붉은 정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풀잎 사이로 넝쿨이 자라고 있는 모습.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풍경. 소리마저 사라진 공간을 거부하듯 식인귀가 외쳤다.
“누구냐? 지금 뭐하는 짓이지!”
그에 대답하듯 검은 넝쿨이 식인귀를 향했다. 이까짓 넝쿨 따위가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냐는 듯한 표정을 짓던 식인귀가 그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내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넝쿨에 닿는 순간, 식인귀의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을.
그 무서운 식인귀가 그저 유기물 덩어리로 변하는 것을.
어?
사내의 고개가 꺾이며 바닥으로 향했다.
그가 본 것은 어느새 그의 발목을 휘감고 있는 검은 넝쿨이었다.
사방에 요란했던 총성이 언제부터 조용했지?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시야.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넝쿨과 풀잎으로 가득한 정원이 펼쳐진 공간이었다.
‧
휘유-
빌딩 옥상에서 스코프로 상황을 보던 김 양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예전 살의 즉사 범위는 대충 10m 안쪽이었다. 반경 10m 조금 더 하면 12m 정도. 몸이 굳거나 공포에 빠지는 유효 범위를 아무리 크게 잡아도 20m~25m가량.
작은 생명체인 쥐나 조류, 개미는 거기서 두 배 더 많이 영향을 받았고. 그런데 지금은 뒤에 0을 하나 더 붙여야 할 정도로 넓은 범위에 죽음의 정원이 펼쳐졌다.
[범위 확인했음. 118m~123m 반경까지 펼쳐졌음.]그리고 그 범위 안에서는 마루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었다. 치솟아 오른 넝쿨과 길게 자란 검은 풀숲이 마치 갈대처럼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뭐야!”
“쏴!”
양쪽에서 공격받는 죽음의 정원.
마루는 뉴클립스를 뽑지 않았다.
그저 몇 걸음 걷는 것만으로도 조용해진 공간.
모두가 착한 사람이 되어 잠들어 버리는 광경.
휘유-
김 양은 그저 휘파람을 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