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less Warrior RAW novel - Chapter 224
내 말을 들은 건지 알레나의 얼굴은 확 일그러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을 냈다.
“아무리 대신격이라도 이건 실례입니다.”
오, 아직 허세를 부릴 여력이 남았나.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에요!”
그녀의 주장에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눈앞에 숙녀가 없는데 신사답게 굴 필요 있겠나?”
너나 숙녀답게 행동하라고 돌려 까자 알레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보란 듯 인자한 어머니를 에스코트해서 자리에 먼저 앉게 했다. 인자한 어머니가 상대라면 세계 제일로 예절바르게 굴 수 있다. 반면 알레나에겐 손가락만 까딱였다.
“뭐해, 어서 앉아. 귀찮으니까 두 번 안 부른다.”
“누가 앉을 줄 알아요!”
그녀의 이런 태도에 경매장 직원들은 서둘러 말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딱이다. 원래 개념이 없거나 무대포인 경우겠지. 생각해 보면 나도 쥐뿔도 없으면서 어둠의 대군에게 저런 식으로 뻗댔다. 하지만 알레나와 결정적인 차이는 내겐 대책이 있었다는 거다.
“레이디 알레나가 무리수를 두는군요.”
“누가 안 말리면 큰일 나겠는데요.”
“대신격 앞에서 저러다니… 담이 센 건지, 멍청한 건지?”
“그냥 돌은 거죠.”
주변에서 지켜보는 드래곤들은 팝콘각이 제대로라 흥미진진한 모습이었다. 다들 자기 행성에선 귀한 신분이다. 대륙을 떨게 하는 네임드 드래곤이거나, 왕국의 수호자, 혹은 드래곤 로드라 불리는 존재다.
그런 격 높은 이들조차 내 앞에서 꼬리 잘 흔드는 강아지처럼 굴고 있는데, 알레나가 저러니 어이없겠지.“
“자존심이 모든 걸 망치는 법.”
나는 별로 화나지 않았다. 알레나와 나의 차이가 너무 심대해서다. 가령 장수풍뎅이를 잡을 때 놈이 성을 내며 몸을 뻣뻣하게 들어 올린다고 열 받는 인간은 없다. 그냥 재밌어하지. 지금 내 기분도 그랬다.
“레이디 알레네. 저희가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저 자리에…,”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겁먹은 경매장 직원들이 사정사정하고 나서야 알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왼쪽에 앉았다. 그녀를 병풍처럼 따르던 잘생긴 드래곤 청년 둘은 머뭇거렸는데 내가 한 번 쏘아보자 곧장 줄행랑을 쳤다.
“죄송합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길!”
뒤도 안 보고 달아났기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다음부터는 좀 더 괜찮은 남자를 끼고 다니는 게 좋겠는걸? 저렇게 여자를 두고 도망가다니 말이야.”
“신경 쓰지 마세요!”
뾰족하게 쏘아붙이고 있었지만 알레나는 마음이 꽤 상한 기색이었다. 설마 자기를 따르던 남자들이 저렇게 쉽게 튈 줄은 몰랐겠지. 나는 잔뜩 뿔이나 와인은 연달아 들이키는 그녀를 보고는 슬쩍 인자한 어머니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쟤 성질 좀 긁어봐.”
인자한 어머니는 성격상 비꼬는 건 잘 못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알겠어요.”
살짝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건너편에 있는 알레나를 도발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는 게 어떻겠니.”
“어머, 언니야말로 원하는 물건을 얻지 못할까 겁나나요? 제게 진심 어린 부탁을 하면 양보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답니다.”
“알레나, 부푼 풍선처럼 허세를 부리는데….”
거기까지 말한 인자한 어머니는 알레나의 흉부를 보며 작게 중얼거린다.
“그 시간에 네 납작한 가슴을 부풀릴 방법이나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겠니. 그쪽은 좀 허세가 필요할 거 같은데.”
“윽!”
다짜고짜 강펀치를 날렸다.
“언니, 말이 심하시네요.”
“심하기는. 매사 그렇게 열 내다가는 그나마 있는 가슴도 더 작아지고 말 거야.”
한쪽 입꼬리를 올린 인자한 어머니는 탁자에 몸을 기댄 채 상채를 앞으로 기울인다. 풍만한 모습이 그녀의 팔 사이에서 아찔하게 뭉쳐 존재감을 과시한다. 노골적인 포즈였다.
부들부들.
알레나는 매우 분한 듯 글러먹은 여신의 눈물이 출품되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10억 피나!”
피나는 이 경매장에서 쓰는 돈 단위다.
웅성웅성.
알레나의 외침에 소란이 일었다. 글러먹은 여신의 눈물은 감정가가 2억 피나였기 때문이다. 단번에 다섯 배를 불러버렸으니 다들 놀랄 수밖에.
“오늘 경매장에 오길 잘했습니다.”
“흥미진진하군요.”
드래곤들은 이제 내가 어찌 나올지 궁금한 얼굴이었다. 인자한 어머니는 낭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꼭 필요한 물건인데 갑자기 다섯 배로 뛸 줄 몰랐던 거지. 알레나는 그런 모습에 한껏 콧대를 세웠다.
“언니, 옆에 있는 분께 아양이라도 떨어보지 그러세요? 안 그러면 언니가 원하는 걸 제가 낙찰받게 되겠네요. 호호호. 왜요? 어젯밤에 부린 교태가 부족했나요?”
적정가를 훨씬 뛰어넘은 자존심 싸움이 시작됐다. 응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11억 피나.”
내가 입찰하자 알레나가 비웃는다.
“대신격님이시면서 쫀쫀하게 1억 피나 더 부르시나요? 좋아요! 저는 12억 피나입니다.”
쫀쫀하게 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너무 확 불렀다가는 알레나가 지레 겁먹고 포기할까 싶어서다.
“13억 피나.”
“14억 피나!”
“15억 피나.”
“16억 피나!”
연달아 가격이 올라가자 경매장의 열기는 더더욱 뜨거워졌다. 우리 둘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치킨 레이스를 이어갔다. 그런데 그때, 마법으로 은밀하게 연락이 왔다.
-실례합니다. 대신격님.
-지금 경매중인데 누구신가?
-저는 우라비트 행성계의 드래곤로드인 하마바라스입니다. 바쁜 와중에 죄송합니다. 하오나 관심이 있으실 거로 생각해 연락드렸습니다.
-좋은 소식은 때를 가리지 않고 환영받는 법이지. 어디 말해보게.
-레이디 알레나에 관한 정보입니다. 그녀는 생각보다 가진 돈이 얼마 없습니다.
-호?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저 드래곤은 돈만 믿고 대신격 앞에서 까불던 거 아니었나.
-계속 말해보게.
-현재 그녀는 본국에서 파산하고 쫓겨난 처지입니다. 아직 소문이 돌지 않아 알려지진 않았을 뿐이죠. 현재 그녀는 남은 돈을 가지고 이곳에 와 미래를 잊고 향락에 빠져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바보 같은 여자였군.
살림을 아껴 재기를 도모해도 모자랄 상황이다. 한데 사이 나쁜 언니에게 한 방 먹여주려고 가진 걸 모두 쏟아붓고 있다니. 하긴 그런 성격이니 이런 곳에서 남은 돈을 까먹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레이디 알레나에겐 묘한 재주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남자 돈 뜯어먹는 데는 신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다른 건 모르지만 미모 하나는 타고났으니까요.
아까 그녀가 병풍처럼 끼고 있던 자들도 돈 많은 명가의 자제들이라고 했다. 이 도시에 온 이래 알레나는 많은 남자 드래곤을 유혹해 돈 문제를 해결해 왔다고.
-혹시 피해자인가? 자네도.
-크흠… 그저 순정을 농락당한 사내라고 알아주십시오.
이런 모자란 놈을 보겠나. 혀를 찰까 하다가 알레나의 경국지색을 보니 한편으로는 동정심이 일었다. 하긴, 저런 미모면 알고도 당하겠지.
-이렇게 연락해 온 걸 보니 뭔가 생각이 있나 보군? 복수라도 하고 싶은 건가?
-맞습니다. 옹졸하다 하셔도 저 여자에게 맺힌 게 많습니다.
-옹졸하다 탓할 리가 있겠는가. 복수의 대상에 신사숙녀가 따로있겠나.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나는 부지런히 1억 피나짜리 팻말을 들어 올리면서 하마바라스의 계획을 들었다. 역시 머리 잘 돌아가는 드래곤답게 상당히 마음에 드는 작전이었다.
-좋아. 마지막에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그대로 하지.
-알겠습니다.
원래는 알레나를 돈으로 찍어 눌러 기만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순정을 농락당한 사내 덕에 계획이 바뀌었다. 훨씬 근사한 결과가 이뤄질 것 같군.
“끄응…. 이거 참.”
32억 피나까지 갔을 때 나는 일부러 앓는 소리를 냈다. 돈이 없어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알레나가 민감하게 반응한다.
“호호, 이제 한계인가요? 언니를 위해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으니 그만 포기하시지요?”
“영 곤란하군.”
돈이 궁해서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경매장이 술렁였다. 설마 대신격이 질 줄은 몰랐던 거겠지.
“레이디 알레나, 깡이 장난 아닌데요.”
“막무가내로 나가서 이기려나 봅니다. 이 정도까지 오면 솔직히 박수라도 쳐줄 수밖에요.”
당장 알레나도 흥분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가 1억 피나 팻말을 또 들자 분해서 입술을 깨문다.
“그렇게 나오신다 그거죠!”
당연히 알레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입찰했다. 뜻밖의 제보자 덕에 그녀가 돈이 별로 없다는 걸 알기에 그런 행동이 이제는 처절해 보였다.
그녀는 쌈짓돈치고는 꽤 가진 모양이지만 본국에 성처럼 쌓아놨다던 금화와 금괴는 싹 날릴지 오래라고 한다. 대강 40억 피나가 넘어가면 한계에 부딪힐 터.
“34억 피나!”
“35억 피나!”
“36억 피나!”
“37억 피나!”
내가 포기할 기색을 보이면서도 경매를 이어가자 다들 웅성거렸다.
“기만인 건가?”
“하지만 정말 난처해 보이는데. 팻말을 한참 고민한 뒤에 올리잖아?”
당연히 연기다. 하지만 내 연기력은 어둠의 대군들에게도 먹혔던 것. 드래곤 정도 속여먹지 못할 리가 없다. 당장 알레나도 조금만 더하면 이긴다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마침내 40억 피나가 넘자 그녀의 자금은 더 이상 여력이 없게 됐다.
“으윽….”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안도한 얼굴로 땀을 닦았다.
“하하, 이제 포기하는 건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한시름 놨다는 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진정성 가득한 연기였다.
“으윽… 이대로 포기할 줄 알아요?”
하지만 없는 돈을 어쩌겠는가. 그녀는 매우 분해하는 기색이었다. 경매 때문에 완전히 시야가 좁아져 날 이길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조금만 더하면 되는데….”
이미 저 물건의 감정가가 2억 피나에 불과했다는 건 새카맣게 잊은 것 같다. 그저 날 쓰러뜨릴 생각밖에 없었다.
“잠시 휴식을 했으면 하는군요.”
알레나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려는 모양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발러님?”
진행자의 물음에 나는 나지도 않는 땀을 닦는 척하며 동의했다.
“물론이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10분간 휴식한 후에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경매가 임시로 중단되자마자 인자한 어머니가 날 붙잡는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요. 그렇게까지 않아도 되니까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걱정해주는 거야?”
“당연하지요. 서방님 일이 제 일이잖아요!”
흥분한 그녀에게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와 얘기 중인 알레나를 가리켰다.
“잘 보고 있어 봐.”
“네?”
“글쎄 보면 알아.”
알레나는 여기저기 돈을 빌리려고 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고 있었다. 한데 그때 잘 차려입은 중년의 신사가 나타났다. 그러자 알레나는 당황하다니 곧 결심한 듯 그에게 다가갔다.
“하마바라스님.”
“호? 레이디 알레나. 이제 저 같은 남자에게 더 관심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만?”
“그럴 리가 있나요? 일전에 무례는 사과드릴게요. 제 본심이 아니었어요.”
“다행이군요. 곤란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제가 도울 수 있다면 영광이겠군요.”
“하마바라스님!”
“대신 내일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제가 영광이랍니다.”
알레나는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해서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지금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돈을 빌리고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하마바라스가 내 쪽을 보더니 슬쩍 엄지를 치켜세웠다.
“크크큭.”
나는 만족해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인자한 어머니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서방님.”
“조금만 더 지켜보면 알 거야. 그나저나 노예 하나 안 필요해?”
“네?”
갑자기 경매의 목적이 바뀌었다. 아마 경매는 소원대로 알레나가 이기게 될 것이다. 내 구매 목표가 글러먹은 여신의 눈물이 아니라 레이디 알레나로 바뀌었으니까.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경매가 재개되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나는 온갖 연기를 다 하며 낙찰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아, 제길!”
“조금만 더해본다!”
“으윽! 금화가 이제 없는데!”
일부러 생수를 이마에 묻히며 비지땀을 흘리는 듯 가장했다. 내가 생각해도 상이라도 받아야 할 연기였다. 알레나는 연이어 터지는 내 한탄에 승리에 젖은 표정이 됐다. 이제 자신은 대신격의 콧대조차 눌러진 여자가 되는 거라 상상하고 있겠지.
그리고 경매가가 60억 피나까지 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이제 이 철없는 아가씨도 꿈에서 깨어날 때가 왔기 때문이다.
“여러분, 여기서 레이디 알레나의 승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녀의 배포가 보통이 아니군요.”
설마 내가 패할 줄은 몰랐던지 소란이 일었다.
“대단해! 대신격을 돈으로 이긴 거야?”
“솔직히 이겨도 이긴 게 아니지. 2억 피나짜리를 60억에 사게 생겼으니.”
“대신격이 발을 뺀 것도 이해가 가는데.”
하지만 당사자인 알레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한껏 충족된 자신의 허영심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호! 언니 안타깝게 됐군요. 언니의 남자, 생각보다 능력이 없으시네요.”
지켜보는 이들은 의외의 상황이란 반응이었다. 하지만 연극이 이렇게 끝나면 재미가 없는 법이지. 잘나가는 연극은 다 괜찮은 반전을 있다. 참고로 이 극의 반전은 지금부터다.
딱!
나는 모두의 주목을 끌기 위해 손가락을 튕겼다.
“참, 한 가지 여러분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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