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ed a tyrant from a slave trader RAW novel - chapter 16
“그래서 뭘 살 건데?”
“건초.”
사려고 생각한 건 정말 오래전이었는데 이제야 그걸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시간이 뒤로 밀린 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사이에 알게 된 사람들이 꽤 도움이 되어서였다.
그들이 도와준 자작만 해도 그랬다.
그는 많은 귀족을 소개해주며 페이먼 용병대에 많은 일거리를 주기도 했지만, 헤레이스가 원하는 건초를 대량으로 싸게 구할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했다.
그들은 아직 전쟁의 기미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기에 헤레이스가 건초를 사려고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만한 건초를 사려고 하는 걸 보면 어디에서 전쟁이라도 나는 것 같다고 말을 하기만 할 뿐 정말 전쟁이 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헤레이스의 행동을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전의 삶과 바뀐 것은 황자들이 노예상에게서 탈출했다는 것 정도였고 그 외의 것들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헤레이스가 일을 벌이는 동안 에이바르는 애가 닳았다.
헤레이스가 자기에게 복수를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기가 가능성도 없는 도박판에 끼어서 돈을 걸고 그걸 다 잃고 빚까지 얻어쓰고 돌아왔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아보라고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에이바르는 걱정이 됐다.
그 많은 건초를 둘 장소를 확보하는 것도 문제였다.
페이먼 용병대가 승승장구하면서 용병들이 많아지지 않았다면 건초를 지키는 일도 불가능했을 터였다.
헤레이스는 일을 저지르고, 그녀의 뜻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벌벌 떠는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헤레이스가 건초를 대규모로 사들인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갔다.
그녀가 건초를 사들인다고 하자 건초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건초도 그녀에게 넘기고 싶어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페이먼 용병대가 사들이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 건지 물어왔고 에이바르는 헤레이스가 알려준 대로, 작물을 재배해보려고 한다면서 즉답을 피했다.
“헤레이스. 건초는 얼마나 더 살 건데?”
로젠비크는 일의 끝을 알고 싶어하며 물었다.
“가능한 한 많이. 다른 걸 사고 싶기는 하지만 우리가 쓸어담을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그게 무슨 말인데?”
궁금해하는 로젠비크에게 헤레이스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 생각에는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
5장
“내전? 다시 반역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로젠비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반역이 다시 일어난다고 하면 아주 격렬히 지지해줄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긴 그는 지금의 황제에게 유감이 많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니. 제국이 다른 나라에 전쟁을 선포하는 거지. 지금의 정국이 불안하고 많은 사람들이 새 황제를 인정하지 않잖아. 황제에게는 성과가 필요하고, 제국민들을 하나로 결집하고 애국심을 고취할만한 이벤트도 필요해.”
“그래서. 겨우 그런 근거를 가지고 건초를 이렇게 마구 사들이고 있는 거라고?”
로젠비크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터였다.
흉작이 예견된다고 이렇게 공격적으로 물건을 사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무리 높은 가능성으로 예견이 된다고 해도, 만에 하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헤레이스는 로젠비크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기에 어느 순간에 이르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제부터는 전쟁이 일어나기만 바라야 되는 거군. 아니면 완전히 망하는 거잖아.”
로젠비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 * *
대공저에 여러 사람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대공은 그들을 평소에 맞아들이던 접객실이나 집무실이 아닌 지하실로 오게 했다.
지하실 가운데에는 제단처럼 보이는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었다.
원탁에는 다리가 없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십여 명이었는데 들어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을 살피면서 이것이 무슨 분위기인지 알아보려고 애썼다.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둠을 밝히는 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바람도 없는 곳에서 가끔 불이 크게 일렁였고 그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대공이 손짓을 하자 후드를 뒤집어쓴 두 사람이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왜, 왜 이러느냐…! 대공 전하. 대공 전하. 저를 살려주십시오!”
남자가 소리쳤지만 대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드를 뒤집어쓴 이들이 그의 양팔을 결박한 채 그를 원탁 위로 데려가 눕혔고 그의 저항이 다 끝나기도 전에 도끼를 내리쳤다.
그러자 바닥에서부터 검은 마법진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면서 원탁에서 흐른 피를 흡수했다.
“헤레이스 아르시아. 그 아이를 데려와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누가 저 원탁으로 올라가게 될지 궁금하군.”
대공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돌아섰다.
그는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대공 전하. 헤레이스 아르시아를 그냥 납치하면 어떻습니까.”
누군가 말하자 대공이 자리에 멈췄다.
“그 아이는 자의로 이곳에 와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
“다시 여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대공 전하. 마법으로 능히….”
“아니. 마법이 관여하는 순간 그 아이는 이미 헤레이스 아르시아가 아니게 돼. 절망하게 만들어라. 내가 아니고는 기댈 수 없게 만들고, 스스로 대공저로 찾아오도록 만들어.”
말을 하는 대공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 * *
헤레이스는 자신의 행적을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수상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들이 찾는 사람이 자기라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황자들이 아니었다면 한 번쯤은 의심을 해 볼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는 황자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이 황자 때문에 다가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고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에게서 아주 옅은 살기만 느껴져도 로젠비크와 황자들이 그들을 지워버렸다.
쌍둥이 황자들은 각성 이후 날이 갈수록 비약적으로 실력이 늘었다.
헤레이스의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구는 그들이 일단 살기를 느끼기만 하면 지옥에서 온 사자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 경이로울 정도였다.
헤레이스는 황자들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고 생각하며 걱정을 했고 자기도 더욱 검술 수련을 열심히 했다.
그들의 오해가 커질수록 서로에 대한 믿음은 더 견고해졌다.
* * *
“헤레이스 아르시아를 잡으려면 먼저 페이먼 용병대를 망하게 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대공의 총관이 주재한 회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사이에 두 사람이 더 지하실의 원탁에서 죽어갔다.
그때마다 마법진이 공중에 떠올라 피를 흡수했고, 그 힘은 고스란히 대공에게로 흘러들어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대공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도 그는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볼 수도 없는 존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졌다.
“대공 전하께서는 평화적인 방법이기만 하면 방법은 어떤 것을 쓰건 무방하다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자금은 얼마든지 사용하라고 하셨고요. 헤레이스 아르시아가 건초를 사들이고 있다고 하던데, 나는 그녀가 전쟁을 예견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걸로 돈을 벌 궁리를 하는 것 같거든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대공의 가신 중 한 사람인 레인트 백작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용병이라면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남들보다는 발달했을 수도 있겠고요. 곧 그런 분위기가 무르익기는 할 것 아닙니까?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요. 내가 보기에 헤레이스 아르시아는 꽤 독선적이고 고집이 강합니다.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건 보지 못하는 것 같고요. 한번 뜻을 정한 일이 있으면 자기 성에 찰 때까지 해 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우리가 이용하기에는 좋을 것 같아요.”
“생각해두신 방법이 있습니까?”
총관이 기대감 어린 눈으로 물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돈만 더 있으면 건초를 더 사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페이먼 용병대가 요즘 용병들을 계속 받아들이고 의뢰를 거절하지 않은 채 돈을 버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걸 봐도 그렇습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용병대를 돌리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우리가 저리(低利)로 돈을 빌려준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헤레이스 아르시아라면 이미 어느 정도 계산이 서 있을 겁니다. 이익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자를 지불하고 돈을 빌려 써도, 그 이자를 상회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빌려주는 돈을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전쟁은 일어나고 헤레이스 아르시아의 계획대로 될 텐데요? 그녀는 어렵지 않게 돈을 불리고 그 돈을 우리에게 갚을 겁니다.”
총관은 그 계획에 회의적인 듯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건초를 팔기는 하지만 돈은 못 받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헤레이스 아르시아도 돈을 갚지 못하겠지요.”
레인트 백작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권리를 갖고 있는 것과 그 권리를 실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바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돈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바로 돈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돈을 줘야 할 사람이 주지 않고 버티면 권리는 종이조각보다 더 헛된 것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의 채무자들을 압박해서 그녀에게 돈을 주지 않게 하자는 말씀인 건가 보군요.”
회의 석상에 있던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받지 못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를 상정할 수 있을 터였다.
외상으로 건초를 구매한 후에 돈을 주지 않는다면 페이먼 용병대는 바로 타격을 입을 것이고, 페이먼 용병대가 돈을 갚는 과정을 방해해도 좋을 거였다.
“그러면 페이먼 용병대를 자연스럽게 인수할 수 있겠군요.”
그들은 어느덧 희망을 보고 있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그 일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되겠지요. 좋습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좌중에 둘러 앉은 사람들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 * *
에이바르는 기가 막혔다.
살면서 수많은 고난을 겪어왔지만 이번에는 정말 심각했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될 거라고는, 아니, 이런 종류의 고초를 겪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바였다.
죽어라 일을 하고 있고, 용병대가 잘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용병대에 돈이 없었다.
돈을 못 받는 것도 아니었다.
의뢰받은 일을 성공하기만 하면 성공보수까지 착착 다 들어왔다.
그런데도 용병대에 돈이 없었다.
간신히 용병들의 급여만 주고 나면 나머지 돈은 전부 건초로 변신해버렸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헤레이스에게 앞으로 한 번만 더 건초를 사면 가만 안 놔둘 거라고 했지만, 가만 안 놔둔다고 해서 겁을 먹을 애도 아니었다.
그걸 자기가 모르면 누가 알겠는가.
그 사실이 더 화가 났다.
다른 놈들이라도 좀 말려보면 좋을 텐데 이놈들도 헤레이스와 똑같았다.
그 녀석들은 건초를 쌓아 올리는 것에서 성취감을 얻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가 건초를 사들이면서 제국 전역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곧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제국의 떠오르는 태양 같은 페이먼 용병대장이 건초를 미친 듯이 사들인다고 하자 그런 소문이 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참다 참다 에이바르가 로젠비크를 찾아가서 헤레이스를 말려달라고 했지만 로젠비크는 감히 천한 것이 누구에게 말을 거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그 눈초리를 받고 얼마나 빈정이 상했는지 에이바르는 그 자리에서 울 뻔했다.
로젠비크는 자기가 쌓아 올린 건초를 보고 심취한 얼굴이었다.
쌍둥이들은 한껏 고개를 올려 높이 바라보며 건초마다 색깔이 다른 걸 보면 정말 신기하고 아름답지 않냐는 소리까지 했다.
전부 미친 게 틀림 없었다.
그래도 용병들에게 줄 급여는 남겨두고 건초를 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은 그 돈까지 끌어다가 건초를 산 모양이었다.
용병들이 하루 체불이 됐다면서 에이바르에게 와서 따졌다.
하루 가지고 뭘 그러냐고 할 게 아니었다.
그들도 건초더미가 무섭게 쌓여가는 걸 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였다.
자기들이 이해해 주는 것 같으면 헤레이스가 아예 그 돈까지 건초 사는 데 쓸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에이바르가 헤레이스를 쫓아가서 미친 거냐고 소리를 질렀지만 헤레이스는 오빠가 일 몇 개를 더 맡아 보수를 받아서 용병들에게 돈을 주면 안 되겠냐는 말이 돌아왔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았다.
에이바르는 헤레이스가 더는 건초를 사지 못하도록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초라니. 건초에 미치다니. 그냥 차라리 나처럼 평범하게 술이나 도박에 미치면 좀 좋아? 건초라니. 건초를, 저 많은 건초를 어디에 쓴다고. 와. 진짜 기가 막혀서.’
그 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