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ed a tyrant from a slave trader RAW novel - chapter 17
“살기다.”
로젠비크가 그렇게 말했을 때 헤레이스도 이미 몇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로젠비크가 살기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살기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헤레이스라면 그것을 아주 강한 적대감 정도로 규정할 것 같은데, 로젠비크는 주저하지도 않고 살기라고 했다.
헤레이스는 로젠비크가 말한 사람들을 미리부터 주의하고 있었고 그들이 자기들에게 접근할 거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너는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어, 로젠비크?”
그녀는 그들이 로젠비크를 노리고 온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행히 쌍둥이들은 근처에 없었다.
“아니. 나도 여기에 있을 거야.”
로젠비크는 고집스럽게 버텼다.
여기에서 그녀를 지킬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네가 있으면 내가 더 위험해질 것 같은데. 내가 불편해.”
“참아.”
로젠비크는 그렇게 말하며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들에게 다가온 사람들은 만면에 웃음을 지엇다.
그게 억지로 만들어낸 웃음이라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헤레이스 아르시아?”
그녀에게 다가온 중년의 남자가 인자한 표정을 하며 그녀를 불렀다.
“누구시죠?”
“우리는 페이먼 용병대에서 건초를 사들인다는 말을 들고 왔다. 우리는 넓은 지역에 걸쳐서 농사를 짓고 있고 건초가 아주 많아. 그걸 처분해야 하는데 마침 건초를 많이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와 본 거야. 이번에 우리가 좋은 파트너가 된다면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페이먼 용병대에 대한 소문이 워낙 좋게 돌아서 협력을 했으면 하는데. 돈이 필요하면 아주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줄 수도 있어.”
“어디에서 오신 분들이죠?”
“나는 이아노브 블린턴 대공 전하의 가신인 레인트 백작이다. 이번에 거래를 하려고 하는 건초도 대공 전하의 것이다. 그 거래를 내가 대신하려고 왔지.”
이아노브 블린턴 대공….
그들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헤레이스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멈춰섰다.
‘대공이… 대공이 이 사람들을 보낸 건가? 나를 찾아서?’
헤레이스는 그동안 거의 완전히 잊고 있던 일이 갑자기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잊어버려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인연은 자기가 죽고 돌아오면서 완전히 사라진 거라고 여겼다.
‘그가 왜…?’
페이먼 용병대가 사라지면서 어쩌다 갈 곳이 없어진 자기가 그를 만나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페이먼 용병대를 떠날 일이 생기지 않으면 대공과 만나게 될 일도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가신들을 본 순간, 헤레이스는 그것이 자신의 오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대공의 가신들을 다시 보았다.
그녀의 눈에 익은 사람은 없었다.
미네른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그녀는 대공의 가신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낯설기만 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지도 못하는 사람들인 모양이군.’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걱정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헤레이스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 거라면? 내가 우연히 대공을 만나게 된 게 아니라, 대공이 나를 만나기 위해서 수를 썼던 거라면…?’
헤레이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상주 용병의 숫자 제한.
갑자기 바뀐 규정이 대공에 의해서 만들어진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의 그가 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뒤에서 사람들을 조종해서 간단한 규정 몇 가지를 바꾸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서서히 힘을 키우고 세력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는 오래전부터 힘을 가져왔었다는 것을 그녀는 서서히 기억해냈다.
일단 그런 가정을 하기 시작하자 페이먼 용병대를 사라지게 만들고 그녀가 갈 곳이 없게 하기 위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차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처음에는 그럴 가능성이 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뭐가 있겠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 곧 다른 것들이 떠올랐다.
그녀가 미네른에 들어가고 난 후에 대공은 몇 사람을 포섭하기를 원했었다.
그리고 그 일에 헤레이스가 투입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랬었지….’
헤레이스는 뒤늦게 혀를 찼다.
대공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그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정교한 작업을 펼쳤었는지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위한 거였어. 나를 끌어 들이려고… 황자들이 아니라.’
헤레이스는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초조해졌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 변화를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얘기를 했으면 하는데. 조용한 곳에서 말이야.”
그들은 로젠비크가 없는 곳에서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헤레이스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로젠비크도 그녀가 혼자 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여기에서 말씀을 하셨으면 합니다. 대기 중이라서요.”
헤레이스는 대충 둘러대고 그 자리에서 버텼다.
“거래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너무 없군.”
레인트 백작이 직격으로 말했다.
귀족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면 부담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지금 자기가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다가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사실 건초는 이제 충분히 사서 더 살 계획이 없습니다. 용병들의 급여도 주지 못하는 상태라, 저희도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요. 용병대에서 용병에게 돈을 주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용병대가 어려워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한번 소문이 퍼지면 용병들을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일을 의뢰받는 것까지 전부 연쇄적으로 안 좋아지거든요.”
헤레이스는 그전까지만 해도 건초를 맹렬히 사들이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그렇게 말을 바꾸었다.
로젠비크조차도 건초를 그만 살 거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처음 들었으니 대공의 가신들이 느낀 당혹감은 훨씬 더 컸다.
그들은 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난감해졌다.
헤레이스는 그들이 세운 계획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대공이라면 황제의 전쟁 계획을 가까이에서 알고 있을 것이고, 그 역시 이번 전쟁을 통해서 크게 한몫 잡게 되는 사람이었으니 그녀가 왜 건초를 사들이는지 예상할 수 있었을 터였다.
페이먼 용병대가 망하기를 바라면서 건초를 팔기로 결정했다면 그들이 어떤 술수를 쓰려고 생각하는 건지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헤레이스는 그들과 처음부터 엮이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며 단번에 선을 그었다.
“그건 정말 아쉽군. 우리는 돈이 바로 필요한 건 아니네. 페이먼 용병대의 활약에 대해서 우리도 많이 듣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빚을 지워두고 우리가 페이먼 용병대의 도움을 받을 일이 생겼을 경우에 도움을 얻으려는 생각일 뿐이야.”
그러자 헤레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외상 거래는 하지 말자는 것이 저희의 철칙입니다.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 중에 하나이기도 했고요.”
다급해지자 유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들이 더 다급해졌다.
그들은 어떻게든 헤레이스와 거래를 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강권하면 할수록 그들의 모습이 꽤 수상쩍게 보였다.
자기들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이제 그들뿐인 것 같았다.
“헤레이스 아르시아. 그것은 우리 대공 전하께서 보이시려는 성의이기도 하네.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받도록 해.”
“정말 감사합니다만 한편으로 죄송하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저희가 구하려고 한 양은 이미 충분히 구했습니다. 이 이상 건초를 사 봐야 그걸 둘 곳도 없습니다.”
“그러면 필요할 때까지는 우리가 우선 보관을 하고 있어도 되네. 필요할 때 가져가면 된다.”
그때는 로젠비크도 그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필요하게 되면 그때 저희가 대공 전하께 찾아가서 건초를 파시라고 요청을 드리겠습니다.”
헤레이스는 그들이 하는 말에 굴하지 않았고 대공의 가신들은 표정이 굳어졌다.
헤레이스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더욱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에도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저희 페이먼 용병대를 다시 찾아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찾아와주시고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제안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헤레이스는 완곡한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고 그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거기에서 더 고집을 부리다가는 헤레이스에게서 괜한 오해를 사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짐작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성과 없이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후부터 헤레이스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것을 로젠비크가 모를 리가 없었다.
“헤레이스. 무슨 일이지?”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도 사실을 얘기해 줄 수가 없었다.
나는 원래 대공이 너희를 반역하도록 돕다가 너희에게 죽는 사람이었노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로젠비크와 쌍둥이 황자들에게 점차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확실하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들이 헤레이스를 친구라고 생각할지 거기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었다.
헤레이스는 결국 그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혹시 그 사람들을 알고 있어?”
로젠비크의 말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가 왜 그런 걸 묻는 건가 하고 생각하던 헤레이스는 그런 의문을 갖는 게 당연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잘 몰라.”
로젠비크는 온통 의문투성이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헤레이스는 그의 의문을 풀어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어쨌건 그때부터 페이먼 용병대는 더 건초를 사들이지 않았다.
에이바르는 한시름 놓았다. 그사이에도 크고 작은 의뢰를 계속 맡았다.
헤레이스는 성공 가능성이 적고 위험 부담이 큰 임무를 거침없이 맡았고 그런 임무에 황자들과 함께 나섰다.
처음에는 쌍둥이 황자들이 임무에 나서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던 에이바르도 나중에는 그들을 믿어도 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의뢰를 받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떠나 그들의 실력을 점점 쌓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헤레이스는 그들의 실력이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매 순간 새롭게 놀라곤 했다.
그들은 헤레이스가 자기들을 보고 놀라는 것을 볼 때마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헤레이스. 우리도 이제 정말 잘하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쌍둥이 황자들이 말할 때마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들에게 칭찬을 하는 것도 전과 달라졌다.
전에는 자기가 우위에 선 채 제법이라는 듯이 칭찬을 했지만, 이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과 자신의 실력을 비교하면 이제 자기가 낫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도대체 언제 그렇게 그들이 자신을 추월해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들이 헤레이스를 위해 더 강해지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한동안 알지 못했다.
그녀의 용병대와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서 그들이 고통스러운 수련 과정을 모두 다 버텨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페이먼 용병대는 날이 갈수록 그 명성이 더해졌다.
그리고 대공은 헤레이스에게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헤레이스 아르시아를 갖는 것이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도 그녀에게 특별히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우연히 알게 된 하나의 조각일 뿐이었다.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가져다 두면 일을 수월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징검다리 같은 존재였다.
그에게는 딱 그 정도의 가치만 지녔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존재가 이상하게도 계속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대공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자기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지하실 원탁에서 이미 스물이 넘는 자들이 죽어가자 이 이상은 그 생각을 미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발발 직전에 건초를 사려는 사람들이 페이먼 용병대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그곳에 엄청난 양의 건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건초를 모두 가져갔다.
헤레이스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막았고 돈을 먼저 주지 않으면 건초를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결국은 헤레이스의 승리였다.
황성에서 마차를 타고 온 사람이 마차에 실린 궤짝을 몇 개나 내려놓았다.
헤레이스는 폭리까지는 취하지 않았지만 건초 장사로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다른 품목을 건드렸으면 더 큰 이익을 남겼겠지만, 그럴 돈이 없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도 앞으로 황자들이 기반을 닦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헤레이스는 이제 결단해야 할 순간이 온 것을 깨달았다.
지난 생애에서 그녀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대공의 밑으로 들어가 미네른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배웠다.
세상은 전쟁에 휩싸여 있었지만 대공은 거기에 크게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에 맞춰 준비를 해 나갔다.
어차피 다른 이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일으킨 전쟁이었던 만큼 모두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헤레이스는 페이먼 용병대와 황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전쟁에 참가하고 싶은지.
그러고 싶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국이 다른 왕국에 침략 전쟁을 벌이는 거였는데 명분이 없었다.
헤레이스도 결국 전쟁에는 참가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용병대의 쓰임은 더욱 많아졌다.
헤레이스는 에이바르와 함께 용병대를 더 키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