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106
106화. 지음(知音) (2)
오상은 차를 마시고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 삼노야도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아파 이만 자야겠다며 마음대로 자리를 떴다. 도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가, 네가 오늘 연주했던 곡은 어린 소녀에게 어울리지 않더구나. 너무 애절하고 쓸쓸해.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더 그랬어.”
따뜻한 차 두 잔을 마시고 가라앉았던 마음을 회복한 임근용이 가볍게 웃었다.
“전 그냥 상황에 맞게 마음 가는 대로 연주했을 뿐이에요. 어머니가 싫으시다면 다음부터 그 곡은 연주하지 않을게요.”
작년 가을 그녀가 막 환생해 가장 슬펐을 때 연주했던 곡은 이보다 몇 배는 더 슬펐다. 심지어는 임 노부인도 듣다못해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오씨와 작별인사를 할 기회를 주었을 정도였다. 그때 도씨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었는데 오늘 오상이 우연히 던진 이 말 한마디로 인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녀가 평소에 딸을 사랑하지 않아서일까? 그건 아니었다. 도씨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너무 쉽게 감정에 사로잡혀서 들인 노력에 비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에 분노하고 슬퍼하느라 기뻐하고 즐거워할 기회를 놓쳤을 뿐이었다.
도씨는 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었다.
“오상이 거만하긴 하지만 그 아이 말도 일리는 있어. 넌 마음을 좀 열어야 해. 마음을 편하게 가지렴. 나와 네 아버지 문제로 너까지 이렇게 슬퍼하는 건 좋지 않아…….”
그녀는 딸과 이렇게 감정적으로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에 서툴렀다. 그녀는 말을 빙빙 돌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사실 이 어미가 잘살고 있는 건 아니니 날 보고 배우지는 말거라. 네 주관이 있는 건 좋지만 굽힐 때는 굽힐 줄도 알아야 해.”
임근용이 진지하게 말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전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하게 잘 살 거예요.”
전생에 그녀가 도씨와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든지 아니든지 간에 이번 생에서 또다시 그렇게 살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은 세상에 갇히지 않고 더 멀리 내다보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인생을 개척할 것이다.
* * *
하늘이 어슴푸레 하게 밝아오자 사람들이 일어나 불을 피워 밥을 짓고 말을 먹이고 수레를 얹었다. 도씨는 한쪽에서 사람들을 지휘했고 임근용은 여지와 함께 식탁에 밥을 차렸다. 오상이 들어오더니 그녀와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서서 아침 인사를 하고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넷째야, 작년 겨울에 내가 너랑 겨루기 전에 육함이 분명 내가 너한테 질 거라고 단언했었거든. 소리에 담긴 감정이 한참 모자란다면서. 그때는 나도 잘 몰랐는데 나중에서야 깨달았지.”
“그런데요?”
임근용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일이 잘 풀려서 억울한 일을 당해본 적이 없어. 유일하게 받아본 벌이란 게 할아버지께서 땅에 수십 년 동안 묻어 두었던 술을 훔쳐 마셔서 아버지한테 몇 대 맞고 할아버지의 꾸지람을 좀 들은 게 다였지. 그건 응당 받아야 할 벌이었지만 그래도 난 너무 억울해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오상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임근용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늘고 긴 눈에 선의와 동정이 가득했다.
“넷째야,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인생에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늘 말씀하셨어. 나는 아직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난 네가 마음을 좀 편안하게 가졌으면 좋겠어. 어른들은 너의 그런 연주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별일 없어도 되도록 많이 웃고 어르신들하고 많이 대화하려고 노력해 봐. 그럼 좋아하실 거야.”
임근용은 앞에 있는 소년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 아래 서 있는 소년은 여전히 하얗고 호리호리하고 키가 컸다. 소년의 입술 가장자리에는 푸른 솜털이 한 바퀴 둘러 있었고 마치 어른인 양 훈계를 하는 그의 눈과 눈썹에는 아직도 풋풋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이 사람은 그녀가 갈망했지만 얻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에게 다가가고, 또 다가가면…… 그녀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오상이 그녀의 시선을 좀 불편해하는 티를 내자 임근용은 마침내 시선을 거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지금은 전보다 많이 나아졌어요. 안 그랬으면 이번에 청주에도 못 왔을 거예요. 오상 오라버니, 고마워요. 이런 충고를 해 준 사람은 오라버니밖에 없어요. 어제는 제가 완전히 졌지만 그래도 깨달은 바가 많았어요.”
그녀는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마음을 담아 말했다. 오상은 오히려 부끄러운지 부끄러움을 감추려 귀를 만지작거리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게, 사실 넌 참 괜찮은 사람이야. 나도 전에는 네가 너무 유약하고 좀 어리석다고 생각했었어. 나중에 너한테 지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문득 너희 집 같은 상황에서 사는 게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임근용은 그의 고훈 연주에 담긴 뜻을 알아듣고, 그의 호의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며 패배를 당당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가 보통의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애교나 질투가 전혀 없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임근용은 오상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그를 떠보았다.
“신지가 그러는데 오라버니가 청주에 올 때 다른 물건은 별로 안 들고 왔는데 책은 많이 들고 왔다면서요. 가는 길이 무료한데 책 두 권만 빌려 줄 수 있어요?”
책을 빌린다는 핑계는 꽤 괜찮았다. 빌렸다가 돌려주고 하면 이런 저런 말을 할 기회가 많아질 것이다.
오상 또한 그녀가 이 말을 하자마자 방금 전의 불편해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웃으며 말했다.
“넌 평소에 무슨 책을 즐겨 읽어? 시? 소설? 산하지(山河志)가 있는데 꽤 재미있어. 이거 볼래?”
“볼래요, 왜 안 보겠어요? 나도 세상 구경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싶은데 기회가 없어서 아쉽네요. 난 태명부에도 못 가봤어요. 소문에 태명부에 시작부터 끝까지 책만 파는 거리가 있다고 하던데 정말이에요?”
오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응, 태명부에 있을 때 할 일 없으면 그 거리를 돌아다니곤 했어. 그중에 한 집이 책이 아주 괜찮고 진서(珍本)도 있었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있었는데 육함한테 뺏겨 버렸어. 어찌나 화가 나던지…….”
임근용은 그가 기뻐하며 말하는 것을 듣고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육함의 이야기가 튀어 나왔다. 그녀는 육함이 자신에게 사과를 강요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제 선생의 책을 망가뜨렸던 것이 떠올랐다. 임근용은 또 약간의 혐오감이 올라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뭐든 먼저 오는 사람이 사는 건데, 육함 오라버니가 어떻게 오라버니의 책을 뺏어요?”
오상은 그녀가 진지하게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뺏은 건 아니고 내가 내기에서 진 거야. 참, 너 그거 알아? 육함이 고서의 글씨와 그림을 수선하는 솜씨가 아주 절묘하다고 하더라고.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겠는데 나한테도 좀 보여달라고 했더니 안 보여 주더라. 걔 솜씨가 어떤지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 책을 넘겨 줬어. 근데 정말로 그쪽 방면에 재주가 대단한 것 같더라고…….”
임근용은 절로 어리둥절해졌다. 육함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니? 우습게도 그녀는 정말로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또 그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오상에게 계속 물었다.
“태명부에 맛있는 음식이나 재미있는 게 뭐가 있어요?”
오상은 외출을 자주 할 수 없는 불쌍한 그녀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고심했다.
“재미있는 건 별로 없고 맛있는 건 많아. 아, 맞다. 거기에 괜찮은 연지와 물분(*水粉: 화장품 종류)을 파는 가게가 있어. 우리 어머니도 나한테 사다달라고 하셨어. 너희 집에서도 누가 갈 일이 있으면 사다 달라고 해서 써 봐.”
임근용은 그가 이런 방면의 대화에는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닫고 신속하게 화제를 바꿨다.
“양미가 강남으로 돌아갔는데 혹시 편지가 왔나요? 어떻게 지낸대요?”
오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편지 왔었어. 맞다. 양미도 너에 대해 물어보더라. 시간 나면 편지 쓰래. 써서 우리 집에 가져다주면 강남으로 가는 사람이 있을 때 같이 보내 줄게…….”
임 삼노야는 하품을 하며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마침 오상과 임근용 사이에 있는 탁자와 거기에서 잠에 취해 몽롱한 눈빛으로 앉아 있는 임신지를 보았다. 한 사람은 즐겁게 말하고 있고 한 사람은 열심히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하나는 젊고 재능이 있는 소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온화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 정도면 나름 성사된 인연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에헴! 너희들 무슨 이야기를 나누길래 이리 즐거운 게냐?”
임 삼노야는 기침 소리를 내고 거드름을 피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오상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고 임근용 역시 오늘따라 예뻐 보였다.
임근용이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고 그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며 말했다.
“양미 얘기했어요.”
“양미?”
임 삼노야는 두어 번 양미를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그제야 어렴풋하게 얼굴이 떠올라 오상에게 물었다.
“네 외숙부 댁 자제 맞지?”
오상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임 삼노야는 입가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굴렸다.
“내가 기억하기론 그 아이가 예전에 자주 너희 집에 드나들었던 것 같은데?”
오상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어머니께서 딸이 없으셔서 그런지 그 아이를 아주 귀여워하셨어요. 그래서 자주 저희 집에 와서 놀았지요.”
양미에 대해 말할 때 오상의 표정은 밝았고 말투도 다정했다. 이를 눈치챈 임 삼노야가 에둘러 물었다.
“그 아이가 우리 아용이랑 나이가 비슷했지 아마. 강남에서 평주까지가 아주 먼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 어린 아가씨가 왔다 갔다 하기에 쉬운 여정은 아니잖아? 그 아이가 이리 자주 자네 집에 오는 걸 그 아이 부모님께서 아쉬워하시지는 않고?”
사실 그가 묻고 싶었던 것은 양미가 약혼을 했는지 여부였다. 설마 벌써 오상하고 약혼한 건 아니겠지?
정신 나갔나, 쓸데없이 왜 남의 집 아가씨의 개인사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거야. 오상은 임 삼노야가 구린 눈초리로 꼬치꼬치 캐묻는 것을 보고 절로 기분이 나빠져서 눈살을 찌푸리며 대충 얼버무렸다.
“괜찮으신 것 같은데요?”
임 삼노야가 또 물었다.
“이번에도 너희 집에서 머무니?”
오상은 더욱 짜증이 났다.
“모르겠어요.”
임근용이 얼른 끼어들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오셨어요. 이제 식사하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