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변신
범오아가 자리에 돌아가 앉자 손 부인이 범오아의 옷을 한 번 훑어보고 갑자기 입술을 오므리고 비웃듯 웃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 손 소저 쪽으로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씨에게 작별을 고했다.
“아직 시간이 이르고 정찬도 안 나왔는데 좀 더 있다 식사를 하고 가시지 그러세요?”
오씨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손 소저가 범 소저보다 나은 것 같아 내심 안타까웠다. 범씨 가문은 범 부인의 수완이 좋아 여태껏 무슨 소동이나 추문이 일어난 적은 없었지만 집안 내부 상황은 절대 깔끔하지 않았다. 엉망진창인 집에서 자란 아이가 마음이 올바를 리가 없지 않은가? 도씨의 그런 성격으로 계략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지만 며느리를 선택하는 건 자기가 입을 옷을 선택하는 것과 같아서 도저히 싫다는 걸 권할 수는 없었다.
손 부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어쩔 수 없네요.”
손 부인이 자신의 시누이를 이런 방식으로 선을 보게 했다며 오씨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손 소저는 상황이 특수한지라 집으로 방문해 선을 보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괜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더욱 불리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손홍리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억울한 기색만은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신분을 낮춰서 선을 보았는데 그럼에도 범오아가 더 마음에 든다니 정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저런 사람과 저런 가문……. 그녀는 자신이 저런 사람들과 비교당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굴욕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미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고 얼굴이 화끈거려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오씨도 더는 그녀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 완전히 결정된 문제가 아니고 만회할 여지가 있으니 차라리 오늘은 일찍 보내고 나중을 기약하며 미움을 사지 않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오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계단 입구까지 배웅하며 한껏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손 부인은 마침내 마음속의 울화가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건물을 올려다보며 낮은 소리로 욕했다.
“흥! 아무리 서자의 혼사라도 정실 부인이 도씨 가문의 딸이라 체통을 잃을 정도까지는 아닐 거라 생각했거늘 지금 보니 내 생각이 짧았네요.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에요. 그 도 부인 딸도 좋은 아가씨는 아닌 것 같고요.”
손 부인은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또 마음이 초조해졌다. 시누이가 나이가 꽉 찼음에도 시집을 못 가고 있어서 그 밑에 있는 시동생 역시 혼담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안이 가난해서 못하는 것도 아니고 괜스레 이런 난처한 상황이 되다 보니 주변에서도 그녀가 기분 나빠할까 봐 뭐라 말도 못 꺼냈다.
손홍리가 붉어진 눈으로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올케 언니, 저 때문에 괜히 마음만 상하셨네요.”
손 부인이 굳은 얼굴로 언짢아하며 말했다.
“운이 나쁜 걸 누굴 탓하겠어요.”
임근용은 창가에 서서 멀리 가는 손씨 가문 시누이와 올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손홍리의 원래 성격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시누이와 올케는 돈이 부족하지는 않고 염치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만으로도 범오아보다는 조건이 훨씬 좋았다. 설령 매일 도씨와 불화하고 서로 눈에 거슬려한다 할지라도 집안에 숨어든 도둑처럼 늘 뒤통수를 칠 계략을 꾸미는 사람보다는 나았다.
도봉상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임근용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언니도 다 봤잖아요. 내가 저 언니 새 옷을 더럽혀서 내 옷으로 변상해 줬어요.”
그 옷이 바로 범오아를 위한 위로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도봉상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이고 착하기도 하셔라…….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너 정말 못됐구나.”
임근용이 부정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뭘 어쨌다고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봉상이 그녀의 허리춤을 매섭게 꼬집었다. 도봉상이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협했다.
“어디서 아닌 척해! 네가 잠시 고모를 속일 수밖에 없었다는 건 이해해 줄 수 있어. 범오아야 그 치마가 뭔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걸 몰랐다고? 네가 골라 주지 않았으면 그 아이가 그 치마를 골랐겠어? 그것 때문에 손씨 가문 언니가 가 버렸잖아.”
임근용도 더 이상은 속일 수 없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가 달리 뭘 어쩌겠어요? 내가 나설 수 있는 문제도 아닌데.”
도봉상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너 말해 봐, 왜 그렇게 범오아가 싫은 건데?”
임근용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볼 때 그 언니는 너무 옹졸하고 음흉하고 아닌 척을 잘하는 거 같아요. 범 부인이 보통이 아니잖아요. 얼굴은 웃어도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는 사람인데 그걸 안 배웠겠어요? 언니는 우리 어머니가 그런 사람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이 들어오면 집안의 평화가 깨지지 않겠어요?”
임근용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범오아를 억울하게 모함했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근용아, 지금 정말 음흉한 사람은 너라는 생각 안 드니, 너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다른 사람을 괴롭혔어.”
도봉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처음 봤는데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긴 하지. 나도 범오아는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눈빛이 유난히 번들번들하고 눈동자를 속눈썹 밑에 숨기고 이리저리 굴려대는 게 꼭 쥐새끼 같더라.”
그녀는 원래부터 쥐새끼였다. 임근용은 마침내 지음(知音)을 찾은 것 같았다. 그녀는 범 부인이 도씨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걸 보고 적어도 도씨는 아직까지 범오아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도봉상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혹시 범씨 가문에서 앞서 시집간 서녀들한테는 혼수를 두둑이 챙겨줬나요?”
도씨는 점잖은 체하며 며느리의 인성을 중요시한다 말했지만 임 삼노야의 경우 며느리의 혼수가 얼마나 두둑한지를 가장 중점적으로 보았다. 만약 도씨가 범오아로 결정을 내린다면 임 삼노야를 끌어들여 막는 수밖에 없었다.
도봉상이 웃으며 말했다.
“범 부인은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해.”
일반적으로 여자 측의 혼수는 모두 남자 측의 납채보다 높았다. 하지만 범 부인의 경우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아들이 장가갈 때는 며느리 측에 혼수를 많이 챙겨오라고 요구했지만 딸이 시집을 갈 땐 상대방이 보내는 만큼만 챙겨줬다. 물론 적통의 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범 부인에게 뭐라 하지 못했다. 범 노야가 딸들을 아주 많이 낳아 놓은 탓에 그나마 보기 좋게 모양을 갖춰 시집을 보내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상황이었다.
임근용은 조소했다. 범씨 가문의 서녀들은 전부 범오아처럼 벙어리 냉가슴 앓듯 괴로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살았다. 그녀들은 집에서는 적모에게 속아 진짜를 가짜로 바꿨고 밖에 나가면 그녀들이 다른 사람을 속여 가짜를 진짜로 바꿨다. 임근용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건물 안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맞은편 무대 위에서 기예단이 단체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도 대노야와 부인께서 소인에게 이렇게 상을 내려 주시니 소인 너무나 감동하였습니다. 주인 어르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소인이 귀빈 분들께 변신 마술을 보여드릴까 합니다. 변신이 잘 되면 귀빈들께서 상을 주시면 되고 변신이 잘 안되면…….”
그 사람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하늘에 대고 물었다.
“잘 안 될까요?”
한 소녀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 건지 몰라 사람들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말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예인이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하늘에 계신 선녀님께서 잘될 거라고 하시네요. 오늘은 도 대부인의 생신 잔치이니 복숭아 두 개를 부인께 선물해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좀 전에 그 소녀 목소리가 주저하듯 말했다.
“괜찮긴 한데, 서왕모의 선도(*仙桃: 신선의 복숭아)를 어찌 함부로 줄 수 있겠어. 너희들이 있는 거기에 천하의 문곡성(*文曲星: 대문호, 대문장가)이 하나 있는 것 같네. 서왕모께서 그가 쓴 글씨를 좋아하니 글자를 한 장 써서 바꾸자.”
그 예인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선녀님, 소인을 이렇게 난처하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귀하신 분들이 하도 많아 소인 눈이 다 부실 지경인데 누가 문곡성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선녀 목소리가 대답했다.
“너 정말 바보로구나! 거기 태명부의 해원이 있지 않느냐?”
그 예인이 눈을 깜박이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군요, 제가 이렇게 멍청했네요!”
그러더니 오상에게 몸을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소인이 문곡성께 글자 하나만 써주십사 청을 드립니다. 안 그러면 이 변신 마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크게 웃으며 오상을 떠밀어 내보냈고 오상 역시 사양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나가 사람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소생이 여러분들에게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 이렇게 나왔습니다. 글씨를 써서 고모님께 효를 다하려 함이니 부끄럽지만 한 번 써보겠습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금홍색 종이에 붓을 휘둘러 ‘수(寿)’자를 쓴 다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 계신 선녀님, 이 ‘수(寿)’자로 선도를 바꿔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바꿔 줄게!”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오씨도 눈을 휘며 웃었다. 그녀는 약간 으쓱해하며 나무라듯 말했다.
“누가 이런 시시한 계획을 세운 거예요, 아이를 이렇게까지 치켜세우다니요!”
주변에 있던 여러 부인들이 웃으며 말했다.
“평주에서 유명한 신동인데 문곡성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조카를 두셨다니 정말 복이 많으십니다.”
예인이 그 ‘수(寿)’자를 높이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 주니 모두들 칭찬했다. 오상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점잖게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늘씬한 몸에 연자줏빛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자신감과 풍류가 넘쳐 흘렀다.
도봉상은 그의 모습을 감상하다가 임근용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런 미친 짓을 참 잘도 하네!”
임근용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상은 원래 광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광기는 일부러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었다. 오상은 원래부터 기상천외했던 사람이라 그의 그런 점이 사람들 앞에 드러난다 할지라도 그의 재능을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평주 제일의 신동이라는 말은 오상에게 딱 어울렸다.
사람들이 재촉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 예인은 오상의 글자를 하늘을 향해 던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선녀님, 잘 받으셔야 합니다.”
글자를 쓴 종이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맑은 선녀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선도를 줄 테니 잘 받아! 자!”
예인은 깡총깡총 뒤며 온 무대를 한 바퀴 돌더니 어느샌가 갑자기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가 쟁반 위의 붉은 비단을 벗기니 큰 사발만 한 복숭아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인께서는 백 세까지 장수하실 겁니다!”
그 예인이 큰 소리로 외치고 무릎을 꿇으며 웃는 얼굴로 오씨에게 복숭아를 바쳤다.
사람들이 일제히 기분 좋은 환호성을 질렀다. 아래층에서 도순흠의 기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을 내려라! 큰 상을 내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