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27)
428화 뿌리 (2)
가즈라는 손을 떨었다.
마음 한쪽에 의구심을 가지는 것과 입 밖으로 내는 것의 차이는 크다.
자신의 심상을 들여다본 듯한 그녀의 말은 가즈라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힘든가요?”
“…….”
김미소의 물음에 가즈라는 자문해 보았다.
무엇이 힘든가?
이 떨림은 두려움인가?
“신을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
가즈라의 정신이 번쩍 뜨였다.
그의 심상을 어지럽히는 화두는 그것이다.
‘어머니 야누르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지구를 벗어나 아루카 행성으로 터전을 옮긴 게 실수다.
종족의 안전을 도모했지만, 번영의 기회는 놓쳤다.
가즈라의 심상에 자리잡은 화두는 그가 대마법사가 되기는커녕 초급 마법사 시절부터 자리한 의문이다.
“내겐 친우 넷이 있었소.”
“…….”
김미소는 가즈라의 입에서 나온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편하게 독백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유년기를 지난 엘프들은 모두 마법사로 길러진다오.”
김미소도 익히 아는 이야기다.
가즈라가 하는 말이 정보전달이 아닌 과거 회상이기에 답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 다섯은 비슷한 시기에 마법에 입문했지. 사실 일곱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마법에 재능이 없어 곧 둘은 전사로 길러지고, 다섯은 농부가 되었지.”
숲지기를 길러내는 것이 엘프들의 제1의 사명이다.
하지만 엘프라고 하여 모두가 마법에 재능 있는 것은 아니기에 탈락자들이 있었고, 그중에 정령친화력이 있고 제법 몸을 쓸 줄 알면 모두 전사로서 교육받았다.
이도 저도 아닌 자들은 그저 농부나 일꾼으로 전락할 뿐이다.
“마법에 입문해 초급 수준에 오르면 보조 역할이나마 숲지기 임무를 부여받는다오.”
가즈라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수명만큼이나 멀어져버린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긴 세월을 살아온 대마법사에게도 친우의 죽음은 꽤 큰 충격이었고, 화인처럼 찍혀 오래도록 곱씹기 충분한 기억이었다.
“그때 친우 하나가 죽었다오. 중급 마법사의 보조 역할이었는데, 어찌 꼬여버렸지.”
가즈라는 담담히 과거를 곱씹었다.
“중급 마법사가 되면 보조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숲지기 역할을 맡지. 우리 주울 부족은 중급 이상의 마법사 31명이 한 조가 되어 마력 공급을 맡는다오.”
가즈라는 그리 말하곤 한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눈을 뜨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엔 허무가 가득했다.
김미소가 문득 물었다.
가즈라가 독백을 멈추는 게 싫었다.
그의 입에서 더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다.
“중급 마법사의 보조는 몇이 하나요?”
“보통 동급의 중급 마법사 하나이거나, 초급 셋이 붙는다오.”
31명의 중급 마법사가 한 조로 주축이 되면, 그 보조로 초급 마법사 93명이 더 필요하다는 말과 같았다.
김미소는 가만히 상상했다.
지금처럼 혈석에서 추출한 마력이 아닌, 100명이 넘어가는 엘프들이 세계수를 중심에 두고 둘러앉아 스스로 단련한 마력을 뿜어내는 광경을 떠올렸다.
“장관이었겠네요.”
“지옥이었지.”
“…….”
누군가에겐 신성한 숲지기 임무였을지 모르지만, 내내 세계수와 엘프의 관계에 대한 화두로 고민하던 가즈라에게는 달랐다.
“친우 둘을 잃었소. 중급 마법사였는데도 말이오.”
숲지기 임무 자체가 위험하다.
단련해온 마력의 상납.
그것이 그저 상납에 머무르면 다행이겠지만, 적어도 가즈라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강탈이었다.
세계수가 엘프들을 쥐어짜 마력을 빨아먹는 나무로 보였다.
“베르는 내 남은 벗이었소.”
친우 둘을 잃고 함께 슬퍼했던 시절이 뚜렷하다. 그렇게 함께 성장한 둘이 상급 마법사가 되고…….
“숲지기 임무에 나설 때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상급 마법사가 필요하지. 그것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자리이기에, 어렵고 힘든 일이다오.”
120여 명이 모인 엘프들이 뿜어내는 마력을 오롯이 한 명의 리더가 통제한다.
“마력 통제가 어렵나 보죠?”
미소의 물음에 가즈라가 픽 웃었다.
지구인들은 온전한 마법사가 아니라 모른다.
그들은 그저 몬스터를 죽이고 어느 순간 각성해 능력을 얻으니까.
“통제보다 선택이 어렵지.”
슬쩍 돌아본 가즈라의 눈이 뻘게져 있었다.
“어느 한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리더는 선택을 해야 한다오.”
“…….”
“하나 때문에 모두가 위험에 처하는걸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김미소는 가즈라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도 리더의 책임과 고뇌를 이해하는 위치니까.
“베르 그 친구는 너무 착했지. 선택을 미뤘고, 홀로 책임을 졌다오.”
마력 통제에 실패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목숨이었다.
“비쩍 말라 죽어간 녀석의 모습이 눈에 선하구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마주 보는 가즈라의 얼굴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것이 어찌 신성하다 하겠소?”
부족에 뿌리내린 세계수는 마력을 먹고 자란다.
“마력의 통제가 무엇인지 아시오? 주는 게 아니라, 덜 뺏기는 것이오.”
세계수가 만족할 수 있을 정도의 마력만 공급한다.
그 양은 매번 조금씩 달라, 더 많이 요구하면 분명 문제가 생긴다.
“세계수는 엘프에게 내려진 징벌이오.”
부족에 뿌리내린 세계수가 엘프들을 거둔다.
젖소를 잡아 놓고 우유를 얻듯…….
만족할 만한 우유를 얻지 못하면 도축을…….
“어머니는 잘못된 선택을 하셨소.”
옛날.
엘프들의 선조.
최초의 세계수 야누르.
아니, 세계수 이전의 엘프 여왕이었던 그녀는 분명 잘못된 선택을 했다.
지구를 떠나 아루카 행성에 온 것도.
경쟁을 피해 평화의 정착을 한 것도.
모두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유를 피해 속박을 받아들인 걸지도.
엘프였던 그녀가 세계수가 된 것도.
엘프들이 대대로 세계수에 묶인 것도.
“그래서, 지구에서 답은 찾았나요?”
“……아직 찾지 못했소.”
없는 것이 아니다.
아직 찾지 못했을 뿐.
적어도 이곳 아루카에서는 답이 없었으니까.
김미소의 표정을 빤히 보던 가즈라가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소.”
“아무 말 안 했는데요.”
“부족을 생각하는 형과 나의 생각이 다르지 않소.”
방법이 다를 뿐.
선조의 유지를 따르는 형과,
그것을 부정하더라도 부족의 미래를 위하는 동생.
“신전엔 가 보신 적 있나요?”
“없소.”
“답을 찾으려는 노력치고는 빈틈이 많으시네요.”
정곡을 찔러 오는 김미소의 말에 가즈라는 답할 말이 궁색해졌다.
“신전은 신성한 영역이오. 타 부족의 엘프들이 함부로 발을 디뎌서는 아니 되는 곳이오.”
“선조의 유지를 따르는 형의 말은 안 들으시는 것치고는 꽤 룰을 잘 지키시네요.”
“…….”
“신전에 같이 가실 거죠?”
“…….”
“거기에 답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눈물이 마른 가즈라의 볼이 씰룩였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들의 괴리가 커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다 해 보자구요.”
김미소는 가즈라에게 말했지만 스스로에게도 되뇌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지구의 존속을 위해,
엘프의 자유를 위해.
제각각 뜻이 달라도 함께 움직이고 있다.
그 구심점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돌아가시죠.”
“그럽시다.”
가즈라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눌렀다.
형과 다르다 여겼지만, 자신 또한 선조들의 뜻을 크게 거스르지 못하고 있음이 씁쓸했다.
세뇌라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슈아아악.
왔던 숲길을 되돌아가니, 수호가 책 한 권을 들고 고심하고 있었다.
여전히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이들을 쭉 둘러보다가, 추르라와 수호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응? 스킬북이네요?”
“맞아.”
갑자기 어디서 난 스킬북이지?
대답은 추르라에게서 나왔다.
“생애 처음으로 인간과 친구가 되었으니 주는 선물이라오.”
추르라가 준 모양이다.
귀환자 관리팀에 있었던 김미소다.
그녀가 가장 많이 본 귀환자가 아루카 행성 귀환자다.
그다음이 구천, 그리고 미드얼이다.
구천 행성은 생환율이 낮고, 미드얼은 생환율은 높으나 오크들에게 잡혀 사육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 돌아온 자들이 대부분이라 딱히 이능력을 배워온 자들이 없었다.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귀환자가 아루카와 구천 출신.
아루카 행성 귀환자들은 마법, 혹은 정령술을 배워오는 이들이 꽤 있었고, 구천 행성 귀환자들은 대부분 무공을 배워 온다.
간혹 마몬족 진영에서 살아 돌아와 그들의 비술을 배워오는 전 챔피언 이성우 같은 이들도 있다.
스킬북이야 감정을 해 봐야겠지만, 김미소는 자신의 사장이 누구보다 뛰어난 감정사인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스킬북인가요?”
“뇌신의 강림이라네.”
“전격 계열이군요.”
거창한 이름을 보면 꽤 고레벨의 마법이 담긴 스킬북이리라.
“근데 말야. 주울 부족장.”
“말하시오. 인간 친구.”
“엘프들은 기록하지 않는다면서, 마법은 왜 기록해 둔 거야?”
“음? 무슨 소리요. 우리 엘프들은 서적으로 지식이나 비전을 전하지 않소. 직접 지도하지. 스승에게 배우는데 굳이 비전을 기록할 이유가 무엇이오?”
수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쪽에 멀뚱히 있는 당진철을 보았다.
‘쟤들은 무공서 만들던데.’
수호의 시선이 다시 주울 부족장 추르라에게로 향했다.
“그럼 이건 뭐야?”
“마법서가 아니오?”
“그러니까. 이게 왜 여기 있어? 혹시 드워프 거야?”
“그들 것도 아니오.”
“……?”
해명을 요구하듯 수호가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추르라가 웃으며 말을 골랐다.
돌멩이처럼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는 것을 설명할 때 무엇이라 해야 할까?
“마법서들은 그냥 여기저기 있소.”
“응? 누가 만들었는데?”
“그거야 모르지요.”
“허.”
수호는 기가 막힌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거 안 배워 봤어?”
“모르는 글을 어찌 배운단 말이오?”
“마력 넣어 봤어?”
“그런 종류의 책들은 오직 인간들에게만 발현되는 것이오.”
수호가 고개를 한번 갸웃하다가 당진철을 보곤 납득했다.
무림인들이 적어 놓은 무공서도 지구인이 배우려면 그저 마력만 반응시키면된다.
그럼 무공서는 사라지고, 스킬이 되어 습득한다.
마법서나 무공서나 스킬북으로써 작동한다.
적어도 지구의 인간들에게는…….
“허, 연구도 안 해 봤어?”
“마력에 작동하는 아티팩트는 연구하고 있으나, 서적을 연구하지는 않소.”
“뭐 이런……?”
수호는 더 묻지 않았다.
엘프들은 지나치게 문자에 관심이 없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그것을 기피하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해, 부자연스러울 정도.
“하, 됐다.”
“추측하기론 드래곤들이 있던 그 이전의 문명이 이룩한 것들이 아닐까 하오.”
“으음.”
일리 있는 말이다.
역사나 기록엔 조금도 관심 없는 이 엘프들은 이전에 아루카 행성에 살던 이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아는 것은 지구를 피해 이곳으로 왔고, 드래곤들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는 것 정도?
‘문명이 있었는데 사라졌고, 드래곤들이 살던 땅에 엘프랑 드워프가 살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루카 행성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는 엘프가 하나도 없어, 추측하고도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들이 되풀이하는 말은 하나뿐이다.
‘언제 다시 침략할지 모를 드래곤들을 대비하자.’
그냥 그 뒤로 무지성으로 마법을 익히고, 정령술을 갈고닦고, 전사로서 훈련했다.
“하, 됐어.”
수호는 더 묻지 않고 딱딱한 책의 표지를 쓰다듬었다.
여기서 마력을 주입하면 이 마법서는 빛으로 사라지고 스킬로 등록되겠지.
수호는 이 책을 그저 스킬북으로 사용하기 전에 한번 펼쳐 보았다.
– eocnd dhlrnrakf…….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글자가 빼곡하다.
샤라라락.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니 비슷한 글자들이 가득한 가운데, 몇 가지 도형과 숫자들이 지나쳤다.
대충 페이지를 넘기다 수호는 업적상점을 열었다.
‘대충 맞는 언어나 문자가 있지 않을까?’
업적상점이 수호의 시선에 가 있는 문자에 반응하는 아이템을 하나 골라냈다.
– 문자의 알약(아르펜) 7000p
아르펜 대륙 공용 문자를 습득할 수 있다.
읽고, 이해하며 쓸 수 있다.
‘아르펜?’
처음 들어본다.
확실한 것은 이 아루카 행성에, 엘프들이 정착하기 이전에, 어쩌면 드래곤들마저 이 땅에 보이기 이전에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