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74)
475화 대척점 (4)
“저들은 어쩔까요?”
김미소의 물음에 중언개는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김미소.’
중언개는 눈앞에 있는 혈교 부교주의 이름을 뼛속에 새기며 고심했다.
습격자들은 무림의 동도이나, 무림맹의 기치 아래 들어오길 거부한 자들이고, 동맹세력인 혈교를 적대한 이들이다.
혈교라는 공동의 대상으로 하나는 적, 하나는 아군이 되어 무림인 전체가 두 쪽이 나도 이상치 않을 판국이다.
아니, 이미 두 쪽이 났는지도 모른다.
‘어찌한다.’
저들을 무림맹의 권위 안에 품어 봉합하는 것이 가장 이득일 것이나, 시일이 오래 걸릴 일이다.
색출하여 도려내자니 무림인의 사분오열은 차지하고서라도 그 긴 전쟁으로 말미암아 맹이 받을 타격 또한 상당할 터.
봉합이든 발본색원이든 둘 모두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일인 건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하나는 해야 했고, 중언개는 고개를 들어 김미소와 눈이 마주쳤을 때 고민 따위 할 순간이 아님을 깨달았다.
“처, 처분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중언개는 저 생글거리는 얼굴의 마녀가 혈마보다 더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패도적인 건 혈마가 더하지만, 그의 성격은 예측이나 가능했다. 헌데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혈교 부교주의 생각은 어디에 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뭐, 맹에서 알아서 하세요.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콰드드득.
김미소가 손짓하자, 암살자들을 결박하고 있는 나무들이 저마다 몸을 꼬았다.
“끄아아아!”
여기저기 비명이 난무하는데 스르륵 나무들이 알아서 풀려났다. 배배 꼬인 실타래 같던 넝쿨들이 절로 풀어지고 유들유들해지더니 바닥에 착 가라앉았다.
“으으으.”
착 가라앉은 넝쿨밭엔 어디 하나 부러져 부상당한 암살자들만 백여 명이었다.
애초에 가장 근접했던 화경의 고수들은 죄다 창에 꿰여 죽었는데, 그들보다 못한 무사들은 모조리 인질로 남은 셈이다.
‘열개, 수습해라.’
‘네, 방주님.’
전음을 받은 대제자 열개가 대기 중이던 무림맹 무사들을 우르르 이끌고 습격한 암살자들을 거둬들였다.
“맹으로 드시지요. 저들의 정체를 철저히 조사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중언개는 미소로 답하며 따르는 그녀를 감히 마주 보지도 못하며 걸었다.
저리 여상스럽게 말하는 건 정말 이 일이 혈교에게 있어서는 하등 중요할 게 없어서다.
‘중요한 게 아니다라.’
분명 부교주가 그리 말했다.
습격자들이 있건 말건, 아무 상관이 없다.
‘하긴, 애초에 명분 따위…….’
지금 눈앞의 김미소 하나만 해도 무림이 초토화된다. 전력의 차이가 이리도 명확한데 명분의 빌미를 줄까 두려워하고 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저들은 무림맹을 위협 정도로도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혈교엔 고수가 얼마나 많다는 말인가?’
김미소 하나만 적으로 가정해도 무림맹이 감당하기 힘든데, 그녀와 함께 온 혈교의 인물들은 또 어떠한가?
‘감히 경지를 가늠할 수 없는 자들이 여럿이다.’
중언개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어떤 대비를 해도 무용하니, 어차피 자신은 물론 맹의 생사여탈권이 전부 저들의 손에 달려 있다.
저들의 이번 구천행 목표가 맹의 해산이라면 막을 방도가 없다.
그 사실이 중언개의 요동치는 마음가짐을 가라앉혀 주었다.
“혈교의 부교주께서는 맹엔 어인 일이신지요?”
“음? 공문을 보내지 않았나요?”
“으음.”
오긴 왔다.
수호 길드에서 무림맹의 본단 안에 있는 역사의 눈에 볼일이 있어 온다는 간단한 내용.
“그것이 전부입니까?”
“네. 아!”
김미소는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마몬족 진영 역사의 눈에 들를지도 모르겠네요.”
나이 많은 개방 출신의 무림맹주가 지나칠 정도의 저자세로 나오기에, 김미소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긴장이 풀리도록.
“마, 마몬족과 전쟁을 벌이시렵니까?”
아니, 혈교가 나선다면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 되겠지.
“혈마께서 그들의 왕을 처치하고, 아직도 질서가 잡히지 않았다는 첩보가 있사온데…….”
제 딴엔 정보라고 흘리는 것이, 은근히 혈교가 마몬족을 공격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김미소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볼일만 보고 갈 거예요. 수호 길드…… 아니, 혈교가 구천 행성의 알력다툼에 끼일 일은 없을 거예요.”
지구만 해도 벅찬데 굳이 구천 행성까지 신경 쓸 여력도, 이유도 없다.
김미소가 살인에 미친 냉혹한 학살자도 아니고 말이다.
“맹은 지금처럼 우리의 일에 잘 협조해 주시면 됩니다.”
“아무렴요.”
중언개는 바짝 고개를 숙이면서도 무림맹의 처지가 자신과 다를 바 없어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굴욕의 세월이 길겠구나.’
맹의 정문을 넘어 마차는 연무장에 멈췄다.
역사의 눈은 무림맹의 후원에 있다.
“한 이사. 부탁해요.”
“네.”
한동수가 아직도 의식불명인 당진철을 업었고, 김미소와 중언개가 함께 역사의 눈이 자리한 후원으로 향했다.
“무림맹은 사천당가와 은원이 깊죠?”
“아, 아닙니다. 그건 전대 무림맹주의 일이지, 지금의 무림맹과는 무관합니다.”
김미소가 미소지었다.
“그래야 할 거예요. 당 장문인이 차기 무림맹을 맡을지도 몰라요.”
“예에?”
사천당문은 무림인들과의 은원을 끊고 스스로 지구로 나아가 새롭게 개파하지 않았나?
이제 와 다시 구천 행성으로 돌아오게 되면 얽히고설킨 은원이 복잡해 무림맹이 또다시 사분오열될지도 몰랐다.
‘첩첩산중이구나. 차라리 확 은거를 해버릴까.’
살신성인의 자세로 초토화된 무림맹을 수습하기 위해 임시 맹주로 나선 중언개지만 이제는 정말 힘에 부치는 기분이었다.
“당가주는 현경의 고수가 되었어요. 믿고 따를 자격은 충분할 거예요.”
“헉, 정말입니까?”
현경의 고수가 가지는 위상은 구천 행성에서 절대적이다.
두 종족으로 나뉜 마몬족과 무림인.
그들 중 행성 최강자만이 현경의 고수가 되기 때문이다.
구천 행성의 제일 고수.
절대자만이 오를 수 있는 경지기에 무림맹을 휘어잡을 권위는 충분하다. 하오문을 주축으로 하는 불온세력의 통합도 넘볼 정도.
“헌데, 당가주께서는 어인 일로 저리 의식이 없으신지…….”
“그걸 몰라 여기까지 왔죠.”
“…….”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아담한 담벼락이 빙 둘러쳐진 후원에 도착했다.
삼엄하게 경비되었을 단 하나의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긴장한 문지기들을 뒤로하고 들어서니, 세월의 흔적을 맞은 듯한 돌비석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구천 행성의 곳곳에 위치한 증명의 비석보다는 확실히 크고 위압감이 느껴지는 비석이다.
“저기 내려 보세요.”
“넵.”
한동수가 당진철을 비석의 앞에 내려 기대게 했다.
그러곤 한발 물러나 김미소의 옆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무 반응 없는데요?”
“흐음, 그러네요.”
김미소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한 이사의 추측이 맞았던 걸까요?”
“으음. 그럴지도요.”
당진철이 깨어날 열쇠가 구천 행성도, 역사의 눈도 아닌, 그저 시간이라면 딱히 방도가 없다.
그저 그가 깨어나길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김미소의 시선이 중언개에게로 향했다.
“맹주님.”
“예, 부교주님.”
“그간 역사의 눈에서 뭔가 특이할 만한 점이 없었나요?”
“으음, 맹이 새롭게 꾸려지고 나서는 딱히……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흐음.”
김미소는 가만히 비석에 기대어 있는 당진철을 관찰했다.
조화력을 다루는 그녀이기에 지금 당진철과 역사의 눈 사이에 어떠한 에너지 교감도 없음을 알고 있다.
“음, 진짜 기다려야 하나.”
“이왕 기다리는 김에 반대쪽에도 한번 가 보죠?”
한동수의 의견에 김미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굳이 기다리자면 당진철을 마몬족 진영 역사의 눈까지는 데려가 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때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당진철이 스스로 의식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수호가 그러했듯, 지금 당진철도 신이 되기 위해 어떠한 동기화 과정 중일 수도 있으니까.
그때 동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
본능적인 떨림.
이건, 그가 가진 야수의 직감과 비슷한 것이다.
G급 각성자들은 모두 인간신 수호로부터 사제, 혹은 기사에 임명된 자들이다.
사제는 조화력을 느끼며 한가지 조화마법을 다루고, 기사는 야성을 깨우쳐 한 가지 야수로 변신할 능력을 얻는다.
지금 한동수가 느끼는 떨림은 야수의 본능과도 같은 것.
털이 바짝 서는 섬뜩함.
이건 분명 위기의 순간 나타나는 육감과 비슷한 감각이다.
자신보다 더 상위 포식자를 마주한 기분!
“뭐, 뭐지?”
동수의 시선이 비석으로 향했다.
비석이 은은히 빛나고 있는 것은 허상일까?
“부, 부사장님. 보여요?”
“으음, 뭔가 느껴지는 것 같긴 한데.”
“허, 저만 보여요?”
한동수는 벌떡 일어났지만 쉽게 비석으로 다가서진 못했다.
호랑이 앞에 선 하룻강아지가 된 기분이다.
“으으.”
갑작스럽게 변한 비석의 기세에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왜 그래? 한 이사.”
“모, 모르겠어요. 그냥 무섭네요.”
비석과 조금 더 멀어졌다고 한결 표정이 풀린 동수다.
“꼭 바위에 뭔가 씐 것 같은데요?”
“으음, 뭔가 이질적인 것 같긴 한데 딱히…….”
김미소는 옆에 있는 나이 많은 9결 매듭의 거지를 보았다.
“맹주.”
“네, 부교주님.”
“뭔가 느껴지는 게 있나요?”
“아무런 변화도 모르겠소이다.”
무림맹주 중언개는 대사제도, 기사도, 심지어 지구인도 아니다.
“이건 야성을 내려받은 기사들에게만 크게 해당하는 느낌인데요.”
“그, 그렇죠?”
김미소가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까닥하며 고민에 빠져들려 할 때였다.
파파팟.
갑작스럽게 이어지는 의식의 홍수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츠츠츳.
빛에 휩싸이며 그녀의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허억.”
중언개가 깜짝 놀라 물러나며 대비했다.
혈교 부교주 호호마녀가 뭔가 사술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대경실색한 모습이었다.
“신탁이에요. 잠깐 물러나세요.”
“아, 알겠소.”
동수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경계하는 기색은 여전했다.
동수는 공중에 부유한 김미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파팟!
김미소의 눈이 떠지며 그녀의 눈에서 안광이 폭사되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은 그 빛은 주변을 휘이 둘러보더니 동수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동수 오랜만!]실없는 신탁에 한동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성우 처치는 알아서. 여기 쿠로 강림. 차이 상태 살필 것.]김미소의 입에서 나왔다곤 믿기지 않는 굵은 목소리는 동수에게 너무나 낯익었다.
“똑똑히 들었어요. 형님.”
김미소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차츰 사라졌고, 부유했던 그녀의 몸도 서서히 땅에 내려와 닿았다.
잠깐 휘청인 그녀를 잡아주었다.
“괜찮아요?”
“후우. 괜찮아요.”
김미소는 수호의 신탁을 곱씹었다.
수호가 말한 건 세 가지다.
이성우 처리에 대한 위임.
루나 행성에 쿠로의 출현.
수호시티에 역소환되었을 차이의 상태 관찰.
“쿠로……. 야만신의 루나 행성 강림과 연관 있을까요?”
“네?”
동수의 되물음에 김미소가 턱짓으로 비석을 가리켰다.
“아직도 빛나요?”
“네. 은은히 빛나고 있어요.”
“…….”
우연히 일어났을 리가 없다.
‘야수왕의 힘이 깃든 역사의 눈이라.’
그러고 보니 회귀자 이성우가 회귀하기 위해 찾았던 역사의 눈은 마몬족 진영에 있었다.
‘무림인 진영의 역사의 눈에는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풀리지 않는 해답에 김미소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