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86)
487화 개천 (1)
수호가 알기로 침식을 되돌리는 방법은 두 가지다.
세계수의 ‘복구’, 그리고 조화 계열의 마지막 해금 스킬 ‘왕의 대지’.
복구는 세계수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발동 가능하기에, 지구의 수호시티 인근만 가능한 지역 한정 스킬이다.
세계수도 없는 이곳에서 가능한 것은 왕의 대지뿐.
츠츠츠츳.
주변에 온통 검은 공간이라 끌어올 조화력이 없다. 수호의 몸 안에 저장된 조화력이 분출되며 기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될까?’
증명의 무투장은 신성력이 깃든 공간이다. 일반적인 침식은 아니기에 확신이 없었다.
응축된 조화력의 소용돌이가 증명의 무투장에 스며들었다.
스스스.
무투장의 표면을 타고 흐르는 유형화된 기운은 산꼭대기에 걸린 구름처럼 움직였다.
여기저길 두드려봐도 스며들 곳이 없다.
스킬 ‘왕의 대지’는 주변에 숲을 만들어 낸다.
드루이드 조화 계열의 최종 스킬답게, 왕이 살 법한 숲을 재현하는 것이 이 스킬의 목적.
스르륵.
흘러나간 조화력은 증명의 무투장을 지나쳐 산에 스며들었다.
피어나는 생명의 기운에 수호의 발걸음이 옮겨졌다.
무투장의 끝에 섰다.
피라미드처럼 만들어진 계단의 아래.
녹음의 물감을 던져놓은 듯 색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으음.”
산꼭대기 주변 일부가 녹음에 물드는 것을 보며 조화력을 거둬들였다.
루나의 회복은 지구의 침식을 의미한다.
지금 딛고 선 이곳이 지구의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땅을 살릴 수는 없다.
혹여, 반대의 지구에 도시라도 있는 지역이면 이미 수많은 사상자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푸른 들판과 빽빽한 나무들이 생명을 찾은 산꼭대기는 벌써 꽤 너른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안되네.”
와중에 제단만 멀쩡하다.
제단을 쌓아 올린 돌 하나 변한 게 없다.
네 귀퉁이에 자리한 사신을 닮은 석상도 조금의 변화가 없다.
죽은 듯 멈춰 있는 석상이지만 살아 있는 듯 신성력을 담고 있으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쿠로로로.”
수호는 기척에 집중을 멈췄다.
“여기, 원래 어땠지?”
“쿠로로. 여긴 대자연의 인정을 받는 신성한 무투장이다.”
수호가 턱짓으로 석상을 가리켰다.
“저거, 석상 아니지?”
“…….”
쿠로는 멈칫하던 스스로를 책망했다.
이미 인간에게 복속되길 청해 놓고 무슨 망설임일까?
“대자연의 정령왕들이다. 행성의 최후와 함께 죽었다.”
“죽어?”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든 거 같은데.”
“쿠로로로로.”
쿠로가 길게 신음했다.
그의 아련한 시선이 석상에서 온통 검은 세상을 둘러보았다.
“아!”
수호가 뜻을 알곤 물었다.
“이 행성이 죽었듯 저들도 죽었다고?”
“쿠로로로. 어찌 다르겠나?”
“생명체는 침식되지 않아. 그 생명에너지로 쓰이지.”
지구에서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침식된 구역에 몬스터든 짐승이든 발을 디디면 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쓰인 생명에너지만큼 침식된 공간이 넓어진다.
“버티는 건 신격을 지닌 존재뿐이지.”
수호나 쿠로처럼 신격을 지닌 자.
아니면 그 신격을 나눠 받은 김미소나 장재식 같은 이들.
“봐봐, 살아 있잖아?”
“…….”
검게 변해 침식되었지만 아직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신성력이 깃든 이 증명의 무투장도, 저 귀퉁이마다 서 있는 정령왕들도 여전히 죽지 않았다.
“어라?”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구는 침식당하면 우주처럼 공허의 공간으로 변하는데, 어째서 이 행성은 나무며 풀이며 산과 바다가 그대로 있는가?
9성 던전, 혹은 신의 무덤에서 봤던 검은 무채색 공간과 같은 모습이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구랑 루나랑 침식의 모습이 다르다.’
수호가 인상을 찌푸리곤 석상을 보았다.
과연 저들을 깨우는 게 맞는 건가 살짝 불안감이 들었다.
“쿠로로로로, 산이 색을 찾고 있다!”
“뭐?”
수호가 증명의 무투장 밖을 내다보니, 녹음이 넓어지고 있었다. 무투장 주변 조금 색을 찾았던 지역은 경계를 점점 넓히고 있었다.
“뭐야?”
수호는 흩어진 조화력이 있나 싶어 갈무리했으나, 지금 상황은 그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다.
왕의 대지 스킬이나 복구 스킬 외에 침식을 되돌릴 방법은 아직 모른다.
“허? 설마!”
수호는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탄식했다.
침식을 정화하는 건 몰라도, 침식을 늘리는 경우는 존재한다.
침식된 구역으로의 생명체의 진입.
침식은 생명을 앗아가고 그 에너지원으로 구역을 늘린다.
지금 이곳 루나에서 벌어지는 일의 원인은 지구다.
루나가 복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침식되고 있는 상황.
“안 막고 뭐하는 거야?”
지구의 침식구역 관리야 김미소가 알아서 할 텐데…….
“아직 구천인가?”
어쨌든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나와라.”
정령들을 불러냈다.
정령왕 야누스가 만들어낸 엘프들의 정령들도 아니고, 이곳에 자리 잡은 루나 행성의 정령들도 아니다.
“지구 친구들.”
지구의 정령.
파파파팟!
묘한 연기와 함께 등장한 네 존재는 수인을 닮아 있었지만 루나의 것들과 형태가 달랐다.
루나의 정령들이 사대신수를 인간화한 모습이라면, 수호의 정령들은 좀 더 짐승의 그것을 모태로 하고 있었다.
“쿠로로로! 정령들이!”
쿠로는 수호가 불러낸 네 정령에 깜짝 놀랐다.
“루나의 정령왕들이 어째서!”
“뭐가 루나의 정령들이냐? 얘들은 지구 정령이다.”
“하지만 이 기운은!”
쿠로의 경악에 수호가 웃었다.
“루나의 정령들은 차원에너지를 힘의 원천으로 한다지?”
행성이 가진 고유의 차원 에너지.
분명 묘족 출신의 엘프 여왕 야누르도 정령들의 기척만으로 루나의 정령으로 착각했다.
“저걸 봐. 다르게 생겼잖아.”
휘리리릭.
주작을 닮은 정령석상 앞에 불로 뒤덮인 원숭이 정령이 뱅글뱅글 돌며 탐색하고 있었다.
“쿠로로로로! 모, 모습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쿠로로로.”
쿠로의 얼굴은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 뭐가 됐든 지구 애들이야. 넘보지 마.”
수호는 의식으로 연결된 정령들과의 교감에 집중했다.
“넘보는 것이 아니다. 어찌 루나의 정령들이 너를 따르는지 의아할 뿐이다.”
“루나 애들 아니라니까 그러네. 루나 애들이면 소환되지도 않았겠지.”
“아!”
쿠로의 탄식에 수호가 피식 웃었다.
“엘프 정령들은 계약자의 마력을 에너지원으로 삼지.”
태생은 엘프들의 정령들이 스스로 수호에게 다가와 계약한 것이 시작이었지만, 어느새 몇 개의 정령들이 중첩되어 합체되더니 진화해버렸다.
마치 수호의 야수들처럼 짐승인 듯 수인인 듯 이상한 모습으로 변했지만, 쿠로의 눈에는 루나 행성의 여러 자연의 정령들 중 하나로만 보였다.
“지구정령은 내 조화력도 쓰고, 차원 에너지도 품고 있다.”
마력은 조화력에서 쌓고, 차원에너지는 행성 그 자체의 에너지에서 비롯된다.
“조화력에서 차원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다면.”
동면중인 이 루나의 정령들도 깨울 수 있지 않을까?
“어때?”
수호의 시선에 네 정령들이 닿았다.
그들은 물, 바람, 불, 땅의 속성별로 탐색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네 개의 석상을 요리조리 오가던 그들은 동시에 수호를 돌아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지만 의사소통이 된다.
정령과 계약자는 서로의 감정을 나누며 대화한다.
‘될 것 같아.’
‘해.’
‘변할지도 몰라.’
‘괜찮아.’
수호는 네 정령에게 의지를 전했고, 네 정령은 저마다 석상에 흡수되듯 합쳐졌다.
스르르륵.
침식된 정령과 온전한 정령들이 기묘하게 섞여 들어가며 어우러졌다.
수호는 정령들이 서로 합쳐지며 생겨날 무언가를 기대했다.
어쩌면 장재식이 개돌청년 낙송과 합쳐졌듯, 뱀파이어 차이지엥이 라미족의 모습으로 변했듯.
두 종이 합쳐져 아예 다른 무언가가 되리라 예상했다.
푸스스.
형태를 띠던 정령은 그저 불덩어리, 물방울, 바람, 흙이 되어버렸다.
“뭐야?”
원소 상태로 돌아간 정령이었던 것들을 보고 있을 때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여러 정령들이 합쳐져서 외형이 변했던 지구의 정령들이지만 시스템은 그것들을 엘프들의 중급 정령으로 인지했다.
“…….”
수호는 너무 어이없이 실패해버린 정령들의 융합에 할 말을 잃었다.
본디 루나의 정령왕들이 있던 증명의 무투장 네 귀퉁이엔 이제 4대 원소들이 둥둥 떠 있을 뿐이다.
“음?”
수호는 홀린 듯 가장 가까운 불덩이를 향해 걸었다.
‘살아있다.’
저것들은 검은색이 아니다
붉은 화염을 토해내며 빛을 내고 있다.
수호가 다가가 불덩이에 손을 뻗었다.
“…….”
수호는 한참 동안 시스템 메시지를 노려봤다.
“쿠로로로.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불덩이에 손을 넣고 가만히 있는 야수왕이 걱정되어 쿠로가 다가와 물었다.
“쿠로.”
“말하라, 인가…… 야수왕이여.”
그를 따르기로 하였다. 편히 인간으로 부르기도 힘들다.
승부는 깨끗하게 마무리 지어졌고, 패배의 수용은 마땅히 감내해야 할 몫이다.
“창조라는 거 말이야.”
창조주는 쿠로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트라우마나 다름없다.
“말하라.”
“네가 창조주라면 어떤 세상을 갖고 싶지?”
“어떤 세상이라니. 난 그저 수인종이 평화로이 발 디딜 땅과, 숨 쉴 하늘과, 마실 물과 음식만 있으면 족하다.”
“소박하군.”
“야수왕은 다른가?”
쿠로의 반문에 수호가 씨익 웃었다.
“다르지 않지.”
그도 그저 지구가 온전하길 바랄 뿐이다.
수호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이끌리듯 물덩어리와 흙, 바람 한 줌이 다가와 있었다.
“하늘과 땅을 지키고, 물과 불처럼 나를 도와라.”
휘리리릭.
수호의 손에 닿은 불덩이가 요동치더니 야수왕의 상태인 그의 손등 터럭 한 가닥을 태웠다.
화르륵.
터럭은 재가 되어 흩날리고, 불꽃은 원숭이가 되어 수호를 빤히 보았다.
‘원숭이 외형?’
불에 닿아 타버린 터럭이 야수왕을 이루는 수천의 야수 중에 남만원숭이였던 모양이다.
외형이야 아무렴 어떠랴.
수호가 바람덩어리를 향해 손을 뻗었는데, 녀석이 휘릭 흩어지더니 야수왕의 등에 난 날개를 스쳤다.
‘독수리?’
흙이 야수왕의 무릎을 스쳤고, 물방울이 야수왕의 흰 머리칼 하나를 적셨다.
무릎에 난 황색 털은 곰의 것이고, 흰 머리 한 가닥은 백구의 것이다.
‘흙곰에다가 물개라.’
불숭이와 바람수리까지 네 정령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보자.”
“이것부터 활성화해 봐.”
휘리리릭.
새롭게 태어난 네 정령이 검게 변한 증명의 무투장에 스며들자 그것이 점차 본래의 색을 찾아갔다.
수호의 고개가 하늘로 향했다.
이제 열린 하늘로 올라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