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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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손실[失]
무명은 정신없이 배수구를 빠져나왔다. 호흡은 입술 끝까지 차오르고 몸은 열로 달아올랐다.
그늘에서 들것을 만들면서 간간히 이마진을 보던 무명은 일이 이렇게 급변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마진이 창살을 봉인해 두었던 끈을 잘라내는 것을 보고 무명은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마진이 옥 안에 들어가 공진희를 안아주고 있을 때, 무명은 서투르지만 단단하게 천을 고정시켜 들것을 만들어냈다.
무명은 일어나 들것을 들고 옥으로 다가가려 했다. 이마진이 공진희의 결박을 풀면 옥에서부터 공진희를 들것으로 옮길 심산이었다.
이마진이 공진희의 결박을 풀기 위해 일어선 순간, 무명은 건물의 그림자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내밀지 못했다.
지금까지 평온하던 이 장원의 공터에 갑자기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가면 죽는다.’
무명은 상체를 부들부들 떨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명이 느낀 것, 그것은 명백한 살기였다. 그 살기의 시선은 모두 옥에 집중되어 있었다. 저 목제 창살의 옥은 곧 어마어마한 위압감으로 덮였다.
‘도, 도망치라고 말해야 해.’
무명은 생각했지만 입술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혀를 움직이려 하자 거대한 그림자들이 횃불을 가로지르며 옥으로 내달렸다. 무명은 더 이상 어떠한 소리도 입술을 열어 낼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호인 둘이 창살 바깥쪽에서 이마진의 몸통과 목에 정확히 올가미를 던지고 무서운 괴력으로 잡아당겼다.
이마진은 붕 떠서 창살 벽에 떨어졌다. 이마진이 목을 조이는 끈을 끊으려 단검을 가져가자 그의 오른팔이 좌우로 두어 번 춤추더니 오른 어깨와 분리되었다.
눈 두어 번 정도 깜빡할 시간에 벌어진 이 사태에 무명은 넋이 나가버렸다.
이마진은 고통에 울부짖다 못해 목이 막혔고, 공진희는 귀신이 들린 것처럼 몸을 경련하며 이마진의 애칭인 가랑을 연신 외쳤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무명에게는 증폭되어 가슴 깊이 비수처럼 목소리가 꽂혔다.
이소호칸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무명은 털 한 올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그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이소호칸이 나타나자 분위기가 한순간 환기되면서 무명은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무명은 급히 몸을 숙이고 숨을 멈추었다. 혹시나 호인들이 자신의 냄새를 맡게 된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은밀하게 무명은 들것을 분해했다.
분해하는 와중에도 무명은 이마진과 공진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손을 놀렸다.
이소호칸의 말은 멀리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이마진을 살려두려 하는 것. 호인들이 이소호칸의 명령에 따라 이마진을 지혈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무명은 천을 허리에 동여매고 그 자리를 빠르게 떠났다.
무명은 그렇게 지금 막 장원 밖의 배수구를 허겁지겁 기어 나왔다.
무명이 배수구 바깥으로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피자 유기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소리는… 들었어. 실패한 거야?”
유기이는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살짝 뜸을 들였다. 그녀에게도 닿았을 터였다, 이마진의 처절한 외침은.
“네, 이마진 형이 붙잡혔어요.”
“혹시 몰라 기다리고 있었어. 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니까. 자세한 것은 나중에 듣도록 하자. 어서 이 바구니 안쪽으로 들어와. 곧 수색이 시작될지도 모르니까.”
유기이가 바구니 뚜껑을 열어 손짓했다. 힘이 전혀 실려있지 않는 몸짓이었다.
무명은 몸을 축 늘어트리고 바구니 안쪽으로 들어갔다.
유기이는 무명이 바구니 안에 들어가자 서둘러 덮개를 닫고 이동했다. 오던 때보다 더 빠른 걸음걸이였다.
무명은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바구니 안에 안기듯 엎어졌다. 눈을 감아도 끔찍한 장면들이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머리를 흔들고 털어내봐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무명은 암울한 기억을 이겨내지 못하고 충격과 노곤함 속에서 울며 잠이 들었다.
모든 것이 붉디붉은 색을 띠었다. 하늘도, 달도, 땅도, 전부가 피처럼 붉었다. 자신의 두 다리, 두 손마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붉은색 말고는 다른 색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세상은 오직 붉은색의 어둡고 밝음의 음영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무명은 공포에 잠겼다. 순간 붉은 물들이 급속도로 차올랐다. 비린 냄새가 풍겼다.
짙고 짙은 피 냄새.
무명은 피의 웅덩이를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헤엄쳤다. 하지만 어디선가 올가미가 무명의 목과 상반신에 날아들어 강렬한 힘으로 피 웅덩이 깊숙이 끌어당겼다.
무명은 발버둥 쳤다. 코와 입으로 핏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숨을 쉴 수 없게 되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용케도 죽지는 않았다.
그저 숨이 막혀 괴로운 고통만이 뇌리에 파고들었다. 핏물의 웅덩이 속에서 무명은 수많은 피를 쉴 새 없이 들이켰다.
영겁의 시간이 지났을까. 웅덩이의 수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무명이 피를 남김없이 들이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침없이 마셔댄 탓에 코 언저리까지 수위를 줄여내고 무명은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첫 숨을 들이켜자 인중 언저리까지 차있던 피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무명을 얽매고 있던 올가미의 동아줄도 사라졌다. 무명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한참이나 숨을 들이켰다. 구역질과 구토가 연신 입에서 튀어나오고 비릿한 내음이 사방 전체에서 풍겼다.
무명은 살아남았다. 무명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 남은 소년은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소년에게 남은 것은 비릿한 냄새의 죽음뿐…….
소년에게 남은 것은 암울한 맛의 증오뿐…….
소년에게 남은 것은…….
* * *
“일어나, 무명아.”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지하여 무명은 간신히 눈꺼풀을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두통이 엄습했다. 아무것도, 아무 움직임도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힘에 의해 무명은 결국 고통스러운 현실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제가 잠들었나요?”
무명은 바구니 속에서 머리를 들며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피곤함을 떨치기 위함이었다.
“우리, 수에르의 집에 도착했어. 다행히 아직 수색은 이루어지지 않았나 봐. 수색의 기미는 없어. 자, 방 안으로 들어가자. 수에르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유기이가 힘없이 무명의 어깨를 부축해 바구니 속에서 나오게 하며 말했다.
무명은 굉장히 강렬한 꿈을 꾸었지만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지독한 두통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히 점령하고 있어서 이마진이나 공진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유기이에게 끌리듯 방 안으로 들어간 무명은 온주로를 돌보고 있는 수에르와 대면했다.
“표정을 보니 일이 잘 풀린 것은 아닌가 보구나.”
수에르는 무명과 유기이의 분위기를 읽어내고 말했다.
셋은 이전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과 같이 삼각형으로 앉았다.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
수에르가 먼저 유기이에게 물었다. 무명이 아직까지 심각한 두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먼저 유기이에게 말한 것이었다.
유기이는 침울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데까지 수에르에게 말을 했다.
이마진을 만나고 이마진과 무명을 배수로까지 데려다 준 것까지…….
“그리고 그다음은?”
유기이는 수에르의 다음 물음에 자세히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유기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까지 간단히 대답했다.
“둘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마진의 비명 소리가 들렸어. 나는 그 자리를 빠르게 피하려다가 무명의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조금 기다려 보기로 했지. 잠시 후 무명이 추레한 모습으로 배수구를 기어 나왔고, 나는 우리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직감했지. 그리고 바로 이곳으로 왔어. 그 안에 있던 내용은 잘 몰라. 아마… 무명이 잘 알겠지.”
유기이가 말을 마치자 이마를 짚고 있던 무명이 그때의 기억이 상기되는지 그 어떤 숨소리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무명에게 들어야겠구나. 지금 네가 어렵고 힘든 건 알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줄 수 있겠니?”
수에르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 무명은 약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로 열이 쏠리고 어지러웠지만 수에르에게 반드시 전해주어야 할 말이 있었다.
“저와 이마진 형은 배수구를 통해 장원 안쪽으로 들어갔어요…….”
무명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유기이와 수에르가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들의 안면은 어두운 그림자로 가득 찼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처절한 아픔과 고통이었다.
이마진이 받았을 그 고통, 공진희가 느꼈을 광기가 무명의 말을 통해 둘에게 전해졌다.
무명은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 중간 말을 잇지 못하고 구역질을 내뱉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것이 분명했다.
수에르와 유기이는 무명이 진정될 때까지 그리고 말을 다시 이을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무명이 구역질하기를 수 번, 드디어 이야기가 끝났다.
“그랬나, 그렇게 되었군. 고스보치, 그 어른이라면 그렇게 용의주도할 만하지.”
무명이 끝이 곡선으로 휘어있는 대도를 휘두른 범인의 모습을 말할 때 수에르는 그자가 고스보치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단칼에 도집에서 정확히 어깨를 깨끗이 베어버리는 위력의 발도술은 오직 고스보치만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고스보치 어른도 아마 나를 의심하고 있겠지.”
수에르는 이를 부딪치며 드드득 이를 갈았다. 자신과 무명이 힘들게 짜낸 계획은 이미 고스보치가 훤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확실히 이마진과 공진희의 접점을 자세히 분석한다면 범인 중에서는 수에르 자신만이 유력할 것이 뻔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빨리 대처할 줄은 수에르도 상상하지 못했다. 고스보치는 확실히 수완과 일처리가 대단히 유능한 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마진과 공진희가 아직 살아있다고 하지만 살아도 산 것이 아니구나.”
수에르가 참담한 얼굴로 못을 박듯 말했다.
무명이 그제야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분노와 광기, 슬픔과 우울, 고통과 혼돈의 감정들이 물밀듯 무명의 가슴속을 채웠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최악으로 일이 치닫고 말았다.
이렇게 초라해지고 나약해진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부터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도 작았지만 이토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끼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도 짧은 인생사를 통틀어 지금이 처음이었으며 최악으로 치달은 것도 지금이 최초였다.
무명이 통한하며 울자 수에르와 유기이는 달리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저 무명을 지켜봐주는 수밖에 없었다.
“유기이, 어쩌면 우리도 각오를 하는 것이 좋겠어.”
무명이 눈물을 쏟아내는 와중에 수에르가 조용히 입술을 들어 유기이에게 말했다.
“각오는 이전부터 했는걸.”
유기이는 참으로 당찬 여자였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그 어떤 자보다 대장부가 되었을 터였다.
유기이의 굳은 말을 듣고 수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최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가정하고 있었지만 닥치고 보니 참으로 암담하군. 손쓸 방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 더욱 옭아매는구나.”
수에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유기이는 자리를 이동하여 온주로의 곁으로 갔다.
온주로는 밤이 깊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갓 태어난 온주로는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각오가 되어있지만 우리의 아이에겐 너무나도 미안하네. 온주로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래도 잘되리라 생각하고 계획을 밀어붙였는데 말이지.”
유기이가 온주로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방 안의 초롱불이 둘을 포근하게 비추었다.
무명은 울면서도 유기이와 온주로를 쳐다보았다. 종족이 다르고, 쓰는 언어도 다르고 생활이 다르지만 엄마가 아이에게 가지는 애정만큼은 마음에 절실히 다가왔다.
자신이 바라던 공진희의 모습이 떠오르자 더욱 서러워졌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자신이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일단 날이 밝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겠군. 잠을 청할 수 있다면 청해두는 것이 좋아. 아침에는 조금 더 냉정할 필요성이 있으니까. 그럼 불을 끄도록 할게. 날이 밝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말이지.”
수에르는 기운 없이 말하고선 심지에 손가락을 뻗어 불을 꺼트렸다.
방 안의 빛이 사그라지고 온주로를 포함한 넷의 모습은 어둠에 잠겼다.
무명은 그 후로도 한참을 어둠 속에서 홀로 눈물을 흘렸다.
수에르와 유기이의 잠을 방해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눈물은 쉴 새 없이 무명의 눈두덩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끊임없이 차오르는 우물처럼 흘러내렸다.
무명은 심연과도 같은 어둠과 눈물 속에서 잠들었다. 우는 것도 기력이 필요했기에 피로한 몸이 한계에 이르자 기절과도 같이 잠에 든 것이었다.
수에르와 유기이도 무명의 흐느낌이 잦아들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무명이 잠들고서야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참으로 을씨년스러운 밤이었다.
============================ 작품 후기 ============================
2014-08-07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