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31
121화
흐르악! 히얍! 허어어어!
별의별 해괴한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공간.
앞에서 우당탕탕 안전매트가 뭉개지든 말든, 퍽퍽 내치는 소리와 함께 몸뚱이가 넘어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나는 조용히 고서의 종잇장을 넘기고 있었다.
입으로 웅얼대며 눈앞의 문장을 따라 읽었다.
“이런 [지혜의 표적]은 한순간에 집약적인 집중력을 요구하므로 타 스킬들과의 호응도가 낮을 수 있다. 캐스팅한 후의 시전 시간은 10여 초 정도지만 그사이 마수의 공격을 받는다면 스킬을 구성하고 있는 수의 룬이 가장 먼저 무너져…….”
【‘지혜의 표적’ 연구도…… +0.218%】
【총 연구도 ― 32.109%】
뭐 이런 뻔한 얘기만 하고 있어?
투덜대며 하품이 뻑뻑 나오는 입을 가렸다.
게임 속에서는 대충 몇 줄만 보여주고 스킵하면 알아서 연구도가 쌓였는데, 역시 현실은 뭘 하나 해도 영 쉬운 게 없었다.
입으로 줄줄 읽어도 머릿속으로는 하나도 남는 게 없는 행위의 반복은 지루함의 극치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이게 필요한데.’
맨 처음 마법 협회에 도착했을 때에도 조금 읽었었던 스킬.
[지혜의 표적]은 마수의 약점을 파악해 조준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로, 신화급 이상 마수를 사냥하는데 필수적인 스킬이었다.그때에는 이모아가 신화급 이상 마수를 만날 일이 뭐가 있겠나 싶어 알면서도 그냥 재꼈었는데, 지금은 뭐.
‘완전 상황역전인거지.’
쩝. 매트에 배를 깔고 누운 자세를 빙글 돌렸다.
데스 카운트도 없고, 원샷 원킬로 최종 보스와 배틀을 떠야 하는 딜러의 입장으로서는 근심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리오가 탱커 스킬을 여럿 익혀놔서 망정이지, 만약 전처럼 그냥 기사 역할로 검을 들고 있었다면…….
‘끝장.’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본격적인 계획을 진행하기 전에 체크했던 바로 이야기하자면, 리오는 드디어 A-등급에 도달해 있었다.
듣자마자 비명 지르고 싶었던 마음을 꾹 참느라 얼마나 허벅지를 꼬집었는지 몰랐다.
백골에게 대리 육성을 당한 게 신의 한 수처럼 느껴질 정도.
그러니까, 이제 리오는.
‘보스 관문에 데려다 놓아도 죽지는 않을 정도.’
기본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등장하는 번지르르한 S급 성기사까진 아니었지만, 간신히 제 몸을 챙길 급이 되었다고 할까.
실상 아직 내 기준에 살짝 미달이긴 해도, 파티 조합으로 따져보면 지금 상황이 모든 메인 스토리를 통틀어 질은 더 좋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당연한 말이긴 한데,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긴급안내문자] 노원 월계로45가길 54, 월계동 602-1 S-A+급 포탈 신호 감지. 위험 지역에서 즉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반경 1km 이내 민간인의 이동이 제한됩니다.】
간헐적으로 날아오는 재난 문자를 보고 있자면 시한폭탄 타이머라도 심어놓은 것처럼 마음이 촉박해졌다.
다른 랭커들이 이모아를 왕좌에 앉히려 뒤를 쫓기라도 하는 순간, 내 모든 계획은 어지럽혀질 게 뻔했다.
그리고, 철푸덕.
누워있는 내 옆으로 패대기쳐 널브러진 리오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하얀 도복을 입은 그가 상기된 얼굴로 호흡을 골랐다.
“많…….”
이 힘들어요?
끝까지 묻기도 전에 멱살이 잡힌 리오의 상체가 주욱 끌어 올려졌다.
“아직 쓰러지긴 이르다! 일어나라!”
“네, 하지만, 정말 잠시만…….”
“바닥에 발붙이고! 허벅지에 딴딴하게 힘주고! 나는 저 높은 돌산에 고고히 서 있는 소나무다. 결단코 꺾이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알겠습니…… 윽!”
“흐라야아압!”
비틀거리는 리오가 미처 중심을 잡기도 전에 머리 옆으로 뒷발차기가 작렬했다.
순발력으로 간신히 피한 그가 몇 발자국 몸을 물리자,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매서운 펀치가 따라붙었다.
보호구 위로 부딪히는 맹렬한 타격.
일단 무조건 대련하는 게 답이라고 세워놓더니, 어쩐지 리오를 줘 패고 있는 대호 태권도장의 관장.
박범석 마스터를 심드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 여기는 호암산 인근.
진짜 호랑이의 기운을 받는다며 전단지나 창문, 심지어 태권도장 입구에도 호랑이 조각상을 걸어놓은 과몰입 귀재의 한 태권도장.
그리고.
‘스킬 [칠전팔기]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
몇 번이나 고꾸라져 뒹굴고, 짓밟힌 껌딱지마냥 납작 쓰러지는 리오를 쯧쯧 안쓰러운 소리로 감상했다.
처음 태권도장에 데려왔을 때 신기한 눈으로 여기저기를 살피던 얼굴이 아직도 선한데, 이제는 저 호랑이 관장에게 시달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땀에 젖어 다닥다닥 붙어있는 앞머리.
어쩐지 핼쑥해진 볼.
그런데도 군말 없이, 이유도 모르고 벌이는 대련에도 멈추지 않는 그는 뭐랄까.
‘우리 호구 어디 안 가는구나.’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물론 상대가 나라서 곧이곧대로 말을 듣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칠전팔기]가 그나마 즉각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리오의 생존율을 확 높여줄 수 있는 최적의 스킬인 것도 맞았다.1분 1초가 아까울 때 그에게 헛된 일을 시키는 건 아니었다.
현재 리오에게 가장 부족한 스킬은 아무래도 스스로를 살릴 수 있는 회피기였으니까.
‘아무리 방어 스킬이 많으면 뭐하냐. 위급한 상황이면 지 말고 나한테 스킬 쓸 게 뻔한데.’
그건 리오를 아는 윤채희의 확신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지금 내가 전투 중에도 그를 덜 신경 쓸 수 있게 만드는 차선의 선택지 같은 것이었다.
일곱 번 쓰러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스킬의 타이틀답게, [칠전팔기]는 일곱 번의 방어 스택을 쌓으면 여덟 번째 공격에는 무조건 MISS가 뜨게 되는 패시브 회피기였다.
발동 조건이 꽤 까다롭지만, 최종 보스 관문에서 리오에게 바라는 건 나를 돕는 공격이 아니라 오로지 ‘살아남는’ 것.
물론 [미약한 온기]를 사용한다면 칠전팔기고 뭐고 그냥 무적 상태로 만들 수 있겠으나, 어디서도 찾아본 적 없는 사기 스킬답게 쿨타임이 상당히 길었다.
‘나 살기에도 바쁜 때에 리오에게 무적 거느라 내가 죽으면 그런 대참사가 또 없지.’
어쨌든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지금 그에게 [칠전팔기]를 주는 건 적절한 선택이긴 한데…….
‘한 번을 안 물어보네.’
그게 리오를 호구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고의 근본이었다.
성균관에서 다짜고짜 장소를 옮겨 웬 허름한 건물 앞에 데려와도.
너무 아침이라 아직 제대로 열리지도 않은 태권도장에 도둑마냥 문을 따고 들어가도.
갑자기 나타난 도복 차림의 남자와 대면시켜 ‘이 사람한테 스킬 좀 배워라’, 아무 설명 없이 엄지를 치켜들어도.
‘리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읽던 책을 덮고 매트 위로 꽃받침을 만들어 기댔다.
잠자코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슬슬 마음이 복잡해져 왔다.
이 모든 준비가 끝나면 곧.
‘……말해야 할 텐데.’
최종 보스 관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는 당신이라고.
이 일만 생각하면 어딘가 입맛이 씁쓸해졌다.
사실, 리오가 이게 어떤 상황을 위해 필요한 스킬이냐고 묻는다면, 즉각 털어놓을 각오도 마치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물어봐 주길 바랐다.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돌아가는 게 목표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이 세계와 널 이렇게 만든 그 보스 자식을 때려잡아야 하고.
나는 네가 처음부터 열쇠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너한테 접근한 것도 맞지…….
‘만.’
하아아. 참지 못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버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글쎄.
평소 윤채희가 해오던 것처럼 뻔뻔하게 굴 수도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어쩐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열쇠로 이용당했다는 생각에 나한테 배신감을 느끼는 것까지는 오케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 ‘말하지 않았냐. 나는 너도 구하고 이 세계도 구하고 나도 구할 거다.’ 당당히 변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딱 하나.
‘리오가 깊은 자괴감에 빠져 버릴까 봐.’
스스로 차근차근 메인 미션을 진행해나가며 깨닫는 것과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한 채 진실을 맞닥뜨리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자신이 그렇게도 끔찍하게 여기는 최종 보스의 부산물이라는 사실을.
이 모든 일을 끝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을 알아채지 못해, 눈앞에서 구하지 못한 사람들 하나하나 떠올리게 될까 봐.
그래서…….
‘마음이 무너지게 될까 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우스워졌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의 나라면 정말 쉬운 일이었을 것인데.’
누군가의 감정 같은 걸 헤아리는 일 없이,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였을 텐데.
그게 맞다고 생각했을 텐데, 분명.
‘정이라도 들었나.’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작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언젠가 반드시 설명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조금만 더 있다가.
아직은 말해봤자 쓸모가 없으니까 조금만 더 나중에.
미뤄왔던 진실이 부메랑이 산더미처럼 쌓여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과거의 윤채희가 지금의 상황을 바라본다면 조금 멍청하다 느끼게 만큼 두려웠다.
어떻게 말해야 나는.
‘조금 더 리오에게 신뢰를 잃지 않고…….’
“채희 님!”
명랑한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건 한순간이었다.
멍하니 매트에 박혀 있던 시선을 위로 올리자, 한쪽 무릎을 구부려 앉은 리오가 열이 식지 않은 발간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다음 미션 받았습니다.”
“아…… 고생했어요.”
몸을 일으키려 바닥을 짚자 곧장 내미는 손이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모든 사실을 말해준 뒤에도 너는 이 손을 내게 내밀어 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녹음의 반지를 낀 리오의 부축을 받아냈다.
이제 다음 장소는.
“오랜만에 포탈 나들이로 가 볼까요.”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