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42
제141화
달을 가렸던 구름이 물러가자 암흑에 잠겼던 대지 위에 찬연한 월광이 쏟아졌다.
삼보장의 담장 역할을 하는 죽림에서 여러 개의 인영이 빠져나왔다. 먼 누각들에서 지켜보는 눈들은 그림자의 숫자가 다섯이라는 것과 그들 전원이 상승의 경공을 구사하는 고수들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분주해졌다.
진천을 비롯한 세평회 인사들은 각 정보조직의 첩자들이 그들의 출정을 감지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호같이 주안을 동서로 가로질러 날아갔다. 자정을 넘긴 야심한 시각이라 거리엔 절정무인들이 펼치는 화려한 신법을 감상할 행인들이 없었다.
일다경 만에 시진을 벗어난 진천 등은 주안 외곽의 자유산(慈幼山)에 올랐다. 높이가 이십여 장에 불과해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까웠지만 정상에 이르자 주안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어둠의 지배를 비웃듯 기루가 밀집한 지역엔 빛 무리가 그득했다.
진천은 일행을 둘러보았다. 전속력으로 내달은 고량은 허파를 토해낼 것처럼 심하게 헐떡였고 하수린도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느라 작은 입술을 한껏 벌리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들보다는 나았지만 팽하연 역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린만이 산보라도 마친 양 안정된 호흡을 자랑했다.
하수린과 고량이 진정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진천이 팽하연에게 말했다.
“가린과 저는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팽하연이 아니라 하수린이 진천의 말을 받았다.
“잠깐. 나도 함께 갈래요.”
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얘기가 다 끝났지 않소?”
질문의 형식을 빌었지만 확실한 거절선언이었다. 그러나 하수린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동의한 적 없어요. 당신의 일방적인 결정이었잖아요.”
“…….”
“따라가게 해 줘요. 방해가 되지 않을 게요.”
“용천(龍泉)까지는 일천리 길이오. 해가 뜨기 전에 당도하려면…….”
하수린이 진천의 말을 잘랐다.
“알아요. 내 경신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걸. 하지만 간단한 대안이 있잖아요?”
진천의 예상대로 하수린이 가린을 가리켰다.
“가린에게 신세를 지면 돼요. 나 하나쯤 얹고 간다고 가린이 힘들어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지, 가린?”
가린이 호랑이 같은 눈을 소처럼 끔벅거렸다. 그가 진천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미루자 하수린의 눈썹이 갈매기를 그렸다. 진천은 그녀가 가린을 압박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경공의 문제가 아니오. 우리가 상대할 이들은 독인들이오. 가린과 나는 독에…….”
하수린이 이번에도 진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입을 열었다.
“독이라면 나도 어느 정도 자신 있어요. 백독불침까지는 아니지만 웬만한 독엔 끄떡없다고요. 잊었나요? 내가 창인에서 절정의 독인 둘을 처치했음을.”
“이번에 상대할 자들은 그들과는 격이 다르오. 용천에 몰려온 자들은 독마류(毒魔流)의 핵심들일 가능성이 농후하오. 초절정의 고수라 해도 자칫 잘못하면 한 순간에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소.”
“위험하지 않은 전쟁터는 없어요. 그리고 정 내가 걱정된다면 마두들은 당신과 가린에게 맡기고 나는 마졸들을 처리하면 되잖아요. 지난번 오양에서도 마졸들은 전부 놓쳤다면서요? 그자들이 민초들에게 끼치는 해악은 마두들 못지않아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에요.”
“하 소저의 말이 옳소. 그러나 모든 일에는 순서와 경중이 있는 법이오.”
즉각 반박하려던 하수린은 한층 엄해진 진천의 표정에 자중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무도한 짓을 일삼는 마인들을 징치하고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하 소저의 의지는 잘 알고 있소. 같은 뜻을 가진 사람으로서 고마울 따름이오. 다만 이번 건은 나에게 일임해주길 바라오. 앞으로 우리는 마련과 힘든 싸움을 치르게 될 거요. 전력이 워낙 열세인지라 투지나 의욕만으로는 그들을 감당하기 어렵소.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최대한 머리를 써야 하오. 하 소저도 머지않아 흉험한 전장에 나서게 될 터요. 이왕이면 더 많은 활약을 펼칠 수 있는 곳에서 역량을 발휘하는 게 어떻소? 더욱이 하 소저에겐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잖소? 마련과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면 늦을 지도 모르오.”
진천이 그녀의 조문을 건드리자 하수린은 고집을 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다음엔 나도 반드시 참전하겠어요. 그럴 거라고 보장하지 않으면 오늘 끝까지 물고 늘어질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어떡할래요?”
고소를 지은 진천이 그녀가 원하는 답을 주었다.
“약속하오.”
“정말이죠?”
“그렇소.”
“그럼 약속의 징표로 입 맞춰 줘요.”
하수린의 기습에 진천이 낯을 붉혔다. 두 사람이 벌이는 실랑이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팽하연이 빙긋 웃었다.
“멋지구나.”
팽하연의 칭찬에 하수린이 그녀답지 않은 수줍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런 그녀를 못마땅한 듯 노려보던 고량이 마무리를 지었다.
“몸조심해라, 천.”
진천이 팽하연에게 포권을 취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가자, 가린.”
진천이 허공으로 몸을 띄우자 가린의 거대한 동체가 뒤를 쫓았다.
용천은 주안에서 서남 방면으로 구백 리가량 떨어진 소도(小都)였다.
밤새 쉬지 않고 달린 진천과 가린은 새벽녘에 용천의 북방을 병풍처럼 둘러싼 백우산(百牛山)에 이르렀다. 백우산은 백 마리의 소가 일렬로 늘어선 듯한 특이한 지형이었다. 좌우의 길이가 이백 리에 달하니 작은 산맥이라고 해도 무방할 크기였지만 최고봉의 높이가 일백 장에도 미치지 못했다.
일출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기에 진천은 수목이 우거진 골짜기에서 지친 몸을 달랬다. 기실 그보다는 가린을 위한 휴식이었다. 일천 리 가까이 쉼 없이 달리고도 진천은 폐가 터지지 않고 멀쩡했다. 세 번의 환생결로 부쩍 불어난 공력 덕분이었다.
체력만이 아니라 속도도 가린을 능가했다. 팔영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경신이 배가된 내공으로 인해 크게 개선된 것이었다.
진천은 수명의 단축이 그리 아깝지 않았다. 한 뼘이라도 무위가 상승하면 그만큼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오래 사는 것보다 강해지는 게 훨씬 중요했다.
“가린은, 괜찮다.”
가린이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진천은 두 가지 주의 사항을 상기시켰다.
“형태를 이룬 독장(毒掌)에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안 돼, 가린.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되고.”
불만인지 가린이 으르렁거렸다. 진천이 그의 허벅지보다도 굵은 가린의 팔뚝을 툭 쳤다.
“한 번은 금세 열 번, 스무 번으로 늘어날 수 있다, 가린. 그러니 처음부터 확고하게 스스로를 단속해야 해. 나를 이길 때까지는 살인과 식인은 꿈도 꾸지 마.”
가린이 길쭉하고 납작한 코에서 황소 같은 콧김을 뿜어냈다.
“가린은, 이긴다.”
“쉽지 않을 거야, 가린. 너한테 먹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가린은, 이긴다. 언젠간.”
가린이 덧붙인 말에 진천이 쓰게 웃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가린. 만약 내가 너보다 먼저 죽으면 어떡할 건가? 그날까지 너한테 지지 않고 말이다. 그러면 나와의 약속이 끝났다고 간주하고 아타족의 ‘사우 오란’일 때처럼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받아 먹어치울 텐가?”
진천의 질문에 가린이 갈등에 빠졌다. 움직일 시간이 되었지만 진천은 답변을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가린의 입이 벌어졌다.
“가린은, 모르겠다.”
진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곳곳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시체가 썩는 냄새였다. 급하게 오는 바람에 용천의 정황에 관해 자세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으나 진천은 삼사 만 정도로 알려진 백성들 중 절반이 독인들의 만행에 목숨을 잃었음을 알고 있었다. 도마류와 검마류에 의해 영흥과 회양에서 벌어졌다는 학살극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마련과의 전쟁을 결심하며 진천은 독마류를 최우선적인 제거대상으로 정했다. 독인들이 범인들에게 끼치는 해악은 마인들조차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일마백일독천(一魔百一毒千)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한 명의 마인이 백 명을 살해하는 동안 독인은 그 열 배인 천 명을 죽였다.
현재는 마도사류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독문(毒門)은 기실 오랫동안 무림의 변두리에서 흑도나 녹림만큼이나 천대받던 부류였다.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독문이 강호의 주류로 편입된 건 백사십 년 전 등장한 백골독귀(白骨毒鬼) 천승우(千乘優)의 공이었다.
독인으로는 사상 최초로 초절정의 경지에 들었다고 평가받던 천승우는 당시 천하제일인의 권좌를 놓고 정사마의 일인자들과 다툴 정도로 막강한 무력을 뽐냈다. 하지만 그는 욕심을 부리는 대신 실리를 택했다.
천무대제 급이 아니고서야 독불장군은 세력을 당해낼 수 없음을 통감한 천승우는 마도의 최강자였던 수라묵수(修羅墨手) 초상(草上)에게 일부러 패한 후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바짝 엎드린 채 후진양성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의 노고는 보답을 받았다. 천승우가 마도에 몸을 담고서 삼십 년이 지난 후 그가 거느린 독마류는 당당히 마도의 주력으로 올라섰다. 독인을 극히 꺼리는 정사 무림의 견제로 대륙의 동부와 남부로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마도 내에서는 검도장(劍刀掌) 삼마류에 필적하는 세력을 이룬 것이었다.
일대독마(一代毒魔)였던 천승우의 사후 꾸준히 초절정의 독군(毒君)들을 배출하며 독마류는 오늘날까지도 탄탄한 성세를 구가했다.
역겨운 시취(屍臭)를 참으며 어스름이 깔린 대로를 질주한 진천은 오각형의 대문으로 쇄도했다.
그의 접근을 알아차린 경비병들이 소리쳤다.
“누구냐?”
진천은 대답 대신 철구를 날렸다. 쇠구슬을 맞은 하급의 독인들이 비명을 토해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진천은 그들을 내버려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독마류가 강점한 이곳은 원래 용천의 지배방파인 구륜회(九輪會)의 터전이었다. 오재승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독인들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표명했음에도 구인회 무인들을 몰살시켰다고 했다.
진천은 용천의 정확한 상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독인들의 수가 얼마인지, 그들 중 경계할만한 강자는 몇 명이나 되는지 같은 기본적인 정보조차 부족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용천은 마련을 떠난 독마류의 새로운 본거지였다.
진천이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소란을 감지한 독인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진천은 소매에 든 철구를 아낌없이 뿌렸다. 대부분은 그의 암기를 피하지 못하고 적중을 허용했으나 일부는 날렵한 몸놀림을 과시하며 빗겨내었다. 진천은 그런 자들에겐 가까이 접근해 타격을 가했다. 그의 팔비수와 원앙각에 독인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러나 진천은 반각도 지나지 않아 퇴각해야 했다. 독장(毒掌)을 뿌리는 강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독기가 담긴 그들의 장공에 맞서지 않고 진천은 전각 사이를 돌며 달아났다. 그러다 일천 평은 됨직한 광장으로 들어섰다. 중앙에 유명한 앙천구주(仰天九柱)가 박혀있었다.
진천을 바짝 쫓던 무리 중 누군가 뒤에서 장공을 쏘았다. 섬뜩한 느낌에 진천은 황급히 비환을 발했다. 푸르스름한 운무가 그의 신형이 남긴 잔상을 훑고 지나갔다.
광장 가운데 우뚝 솟은 아홉 개의 기둥을 향해 달려가며 진천은 방금 전 독장을 날린 인물을 확인했다. 봉두난발에 전라의 괴인이었다. 방사를 치르다 달려 나왔는지 꼴사납게도 남근이 잔뜩 성이 나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 정체를 알기 어려웠지만 독마(毒魔) 연지강(延至强)이 아님은 확실했다. 연지강은 외팔이로 알려져 있었는데 괴인은 양팔 모두 온전했다. 쌍장을 번갈아가며 장공을 퍼붓는 걸로 보아 어느 쪽도 의수일 리가 없었다.
이왕이면 대어를 낚고 싶었던 진천은 다소 실망했다. 하지만 봉두난발의 괴인도 경시하지 못할 강자임에는 틀림없었다. 어쩌면 독마에 이은 독마류 서열 이 위의 독인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전날 삼보장에 쳐들어온 화염장과 동급의 강자였다.
그를 덮치는 독장의 그물을 화연으로 빠져나온 진천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둥에 붙었다. 사방에서 모여든 독인들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다람쥐처럼 능숙하게 쇠기둥을 올라가는 그를 신기한 듯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