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55
제154화
진천이 단도직입했다.
“그녀는 반인반괴(半人半怪)입니다, 큰 형님.”
권왕의 일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뭐라?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그 아이의 동공이 붉은 색이었다고? 아니면 녹색이었더냐?”
“둘 다 아닙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반인반괴라고 단정하는 게냐? 가장 뚜렷한 특징이 없는데.”
“그녀는 맹인입니다. 단순히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안구가 아예 파였습니다. 그래서 동공의 색깔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정황들로 미루어 보건대 반인반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녀는 비무 초반에 검왕 어르신의 무공을 쓰지 않고 오직 신체능력과 본능적인 움직임만으로 저와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저에게 크게 밀리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검왕 어르신의 절학을 구사하면서는 저와 대등해졌습니다. 짐작컨대 그녀는 검왕 어르신의 검공을 전수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성싶습니다. 그녀의 화후가 조금만 깊었더라면 일방적인 승부가 되었을 공산이 큽니다.”
넋이 빠진 듯 귀를 기울이고 있던 권왕이 급히 물었다.
“네 절멸도가 그 아이의 껍질을 뚫지 못했더냐?”
“그렇진 않았습니다. 절멸삭은 생채기를 남기는 정도에 그쳤으나 절멸참은 살을 갈랐습니다. 절멸비도 꽂혔고요.”
맥이 빠졌는지 권왕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난 또. 그러면 그녀는 천무대제와 같은 족속이 아니라 빙인(氷人)이었겠구나.”
“빙인은 아닙니다. 피부가 하얗지도 않고 금발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천무대제의 후예라면 네 절멸도가 통했을 리가 없지 않으냐? 천무대제에 대해 전해지는 바가 사실이라면 소 형의 검이나 강 맹주의 칼도 반인반괴의 갑피에는 지푸라기나 다름없었을 텐데.”
“천무대제는 반인반괴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라고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더냐?”
“제 고향의 지인 중에 그 방면으로 지식이 해박한 분이 계십니다. 그 어른께 들었습니다.”
“그래? 나도 그쪽으로는 나름대로 상당한 정보를 갖고 있다만. 어디 네 것부터 풀어놔 보거라.”
진천은 ‘공 할아버지’의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창인의 의원 노릇을 하는 공 노인에겐 진천만이 아는 비밀이 있었다. 그는 선인(仙人)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약선(藥仙)이었다.
공 노인에겐 두 가지 숙원이 있었다. 하나는 불로초를 찾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만병통치약을 제조하는 것이었다. 전자를 위해 공 노인은 팔십여 년에 걸쳐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다고 했다. 중원은 물론이고 북해와 남국들, 서방과 동영에 이르기까지 안 가본 데가 없었다며 공 노인은 수십만 리에 걸친 발품에도 결국 불로장생을 이루게 해준다는 영초를 찾지 못했다고 한탄하곤 했다.
만병을 고치는 영약을 빚겠다는 꿈도 접은 지 오래라고 했다.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염왕을 뵈러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옹이 되었다며 씁쓸히 웃던 공노인의 모습이 진천의 기억에 생생했다.
공 노인은 창인에 흘러든 대부분의 외인들과는 달리 중원이나 하남 무림이 아니라 밀림 이남에서 북상하다가 그곳에 정착한 특이한 경우였다.
진천과의 첫 만남도 밀림에서였다. 진천은 칠 년 전 맹수에게 쫓겨 죽기 일보직전이었던 그와 인연을 맺었다. 공 노인은 당시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듣고 얼른 나무로 피신했는데 그의 기척을 감지하고 달려든 맹수가 하필이면 원숭이만큼이나 나무 오르기에 능숙한 표범이었다. 그가 매달린 가지까지 올라온 얼룩덜룩한 무늬를 보고는 공 노인이 비명을 지르자 마침 근처를 지나던 진천이 달려와 표범을 쫓아버리고 그를 구했다.
공 노인은 진천이 일백하고도 쉰여덟 번째 생명의 은인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진천은 나중에 그의 회고담을 듣고는 그 말이 터무니없는 허풍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공 노인은 말하자면 지독히도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반드시 귀인이나 기연을 만나 기사회생하고는 했던 것이었다. 공 노인은 그것이 선맥(仙脈)의 선조들이 쌓아놓은 무량의 음덕 덕분이라고 했다.
공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상기하며 진천이 입을 열었다.
“제 지인은 천무대제와 간접적으로 연이 닿아 있습니다. 천무대제가 무림에서 활동할 당시 그와 막역한 관계였던 무선(武仙)의 직계 후인과 지인의 오대조(五代祖) 뻘 되는 이가 절친한 벗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천무대제에 관한 남모를 사실들을 여럿 들었답니다. 그 내용들이 대대로 전해져…….”
콧방귀와 함께 권왕이 진천의 말을 끊었다.
“흥, 사돈의 팔촌의 옆집에 놀러온 아낙까지 끌어들이는 격이구나. 그렇게 따지면 나도 천무대제와 아주 무관한 사이가 아니다, 이 녀석아. 최소한 네 지인이란 자보다는 더 가까울 게다. 내 권공의 기원이 어딘지 아느냐? 삼백 년 전 초인시대에 마도의 이인자로 군림하던 권마(拳魔) 하후만(夏候慢)이다.
이인자라고 하지만 권마는 다른 시대에 났으면 능히 천하제일인의 권좌에 올랐을 절대강자였다. 그가 아직 각성하기 전의 천무대제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 아깝게 패했다는 걸 아느냐? 그 일전으로 폐인이 되었지만 권마는 여생을 무학의 궁구에 바쳤다. 그가 거둔 이는 그가 창안한 제왕십팔권(帝王十八拳)을 구현할 무재가 아니었으나 요체를 잘 간직해 후대에 전했다.
하지만 권마가 남긴 절학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무려 팔대(八代)를 기다려야 했다. 권마 사후 이백여 년이 지나고서야 그의 유학은 진정한 후계자를 만났다. 공주(公州) 옥천(玉川) 태생의 천재 소년이었지. 불세출의 기재라 할 그 소년이 누군지는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 테지?”
“아!”
진천은 탄성을 터뜨렸다. 비로소 무림의 십대 수수께끼 중에 하나로 꼽히는 권왕의 내력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일 갑자 전 보영 대첩에서 강호에 첫 선을 보였을 때 태진광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인물이었다. 단숨에 일권무적이라는 별호를 얻은 신흥강호는 자신의 사문을 일천 년의 전통을 가진 신비문파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 점에 생각이 미쳤는지 권왕이 헛기침을 했다.
“허흠, 전날 내가 강호 동도들에게 밝힌 건 하도 나를 키운 문파가 어디냐며 귀찮게들 굴어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게다. 이미 입에서 떨어진 다음엔 주워 담기도 뭐해서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자기들 마음대로 살을 갖다 붙이더구나. 그렇다고 내가 아주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아우야. 너도 알다시피 만무(萬武)의 시초는 권공이 아니더냐? 그러니 일천 년의 역사를 가졌다는 말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게야. 그렇지 않으냐?”
동의하기 어려운 억지였지만 진천은 의형제 간의 의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큰 형님.”
괜히 진천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가 본전도 못 찾은 권왕이 재빨리 화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네 지인의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얘기나 계속해 보거라, 아우야.”
집안이 아니라 선맥이었지만 진천은 권왕의 오해를 수정하지 않고 넘어갔다.
“선가(仙家)에는 반인반괴를 두고 오랫동안 전해져오는 말이 있었다는 군요.”
“어떤 말?”
“반인반괴는 인세의 구원자 아니면 파괴자가 될 운명을 지닌 괴물이라는 말이랍니다. 실제로 무림 태동 이전에 반인반괴가 두 번 출현한 적이 있다더군요. 첫 번째 반인반괴는 요괴들의 총 발호로 인해 대륙 전역이 혈해에 잠길 뻔했던 환란에서 스스로를 희생해 세상을 구한 반면 두 번째 반인반괴는 문자 그대로 중원을 시산혈해로 만들었답니다. 그를 절곡에 봉인하느라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선가는 한꺼번에 수백의 선사(仙師)들을 잃는 참화를 입었답니다. 선맥은 다시는 그때의 피해를 회복하지 못했고요.”
“흠, 그럴 듯하구나. 천무대제는 천마(天魔)를 처단해 세상을 구하지 않았더냐? 만약 그가 반대편을 선택했더라면……. 상상하기도 싫구나. 인세는 꼼짝없이 종말을 고했을 게야. 누가 있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그를 막을 수 있었겠느냐?”
“그렇습니다, 큰 형님. 천하를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요. 그런데 그가 파괴자가 아닌 구원자가 된 것은 천운이나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좀 전에 말씀드린 무선이 그가 악으로 기울지 않고 선인(善人)이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아직 원력을 개방하기 전의 햇병아리 시절이었던 천무대제와 조우한 그분은 갈등했답니다. 그의 목을 꺾어 미래의 화근을 없애야 할지 아니면 좀 더 두고 봐야 할지를 두고 말입니다. 그분으로서는 위험 부담이 상당한 도박이었습니다. 만약 천무대제가 급속도로 성장해 그분을 능가하는 무력에 도달하면 제어할 방도가 없었으니까요.
무선은 천무대제와 늘 붙어 다니며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했답니다.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전무후무한 절대무존이 탄생했습니다. 인세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음에도 무선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정의로운 이들을 도왔던 무신(武神)이었지요. 무성(武聖) 소구가 연 태평성대는 그의 친우였던 천무대제의 후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업적입니다.”
권왕이 잡초처럼 아무렇게나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무선이 천무대제와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면 몇 개의 다리를 건너 전해진 이야기라도 제법 신빙성이 있겠구나. 그래, 대충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천무대제가 반인반괴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는 설을 풀어 보거라.”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진천이 물었다.
“적안(赤眼)을 지닌 반인반괴가 굉장히 희귀한 존재라는 건 아시지요?”
“물론이지. 시쳇말로 천년에 하나 날까 말까한 변종이라면서. 당연한 이치니라. 그런 괴물들이 수시로 튀어나온다면 천하가 남아나겠느냐?”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말을 이었다.
“제 지인에게 전해진 비사에 따르면 삼복 날의 고드름보다도 보기 힘들다는 반인반괴가 셋이나 동시에 출현한 적이 있답니다. 천무대제가 성장하던 무렵이었지요.”
예상을 했으면서도 권왕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정말이냐? 어째서 그런 엄청난 일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거기엔 몇 가지 사정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중원이 아니라 서방의 어느 외딴 섬에서 나오는 바람에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고 다른 한 명은 여인이었는데 본격적인 강호 행을 앞두고 급사했다는군요.”
권왕이 일자로 붙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어째 그녀의 죽음에 천무대제가 관련이 있을 듯싶구나.”
“맞습니다, 큰 형님. 그녀뿐만이 아니라 서방의 반인반괴도 천무대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답니다. 천무대제는 그들을 죽인 후 그들의 원력을 취득했다더군요.”
권왕이 오므라든 입술을 활짝 벌렸다.
“허어, 하나만 해도 세상을 파멸하네 마네 하는 괴물들을 둘이나 집어삼키고 그들의 힘을 취했으니 그가 그런 초초괴물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구나. 더욱이 천무대제는 무학의 경지마저 하늘에 닿았다고 하지 않더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와 같은 신인(神人)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게야.”
진천은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천무대제의 별칭인 영세제일인(永世第一人)을 그에게서 뺏어갈 이는 영원히 출현하지 않을 것이었다.
“최초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제 절멸도가 명이라는 여인의 갑피를 자를 수 있었던 건 그러한 연유에서입니다. 그녀가 반인반괴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그녀는 천무대제와 같은 절대적인 금강불괴지체는 아닌 게지요.”
진천의 설명을 이해한 권왕이 왜소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큼직한 머리통을 연신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