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54
제153화
봉천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주안에 당도하기도 전에 날이 저물었다.
어둠에 잠긴 웅보로(熊步路)로 접어들며 진천이 노미현에게 주안이 가까웠음을 알렸다.
“이제 곧 주안에 들어가오, 노 소저.”
마차 안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온 종일 마차 안에만 있었더니 너무 갑갑해요. 바람을 쐬고 싶어요.”
진천은 노미현의 청에 따라 마차를 갓길에 세웠다. 마차에서 나온 노미현은 그의 예상과 달리 소피를 보러 풀숲으로 들어가지 않고 길가의 낮은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진천은 마부석에서 내려와 그녀 곁으로 갔다.
달빛을 받은 노미현의 안색이 병자처럼 파리했다. 심하게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사흘 내내 달렸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강민에게 급작스럽게 점혈을 당했던 후유증도 상당할 터였다. 삼보장으로 돌아가면 바로 앓아누울지도 몰랐다.
진천의 걱정을 읽었는지 노미현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괜찮아요. 이래 뵈도 제법 단단한 몸이랍니다.”
진천은 노미현의 옆에 앉았다.
“다행이구려.”
진천을 지그시 바라보던 노미현이 봉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무사히 탈출했을까요?”
뚱딴지같은 질문이었지만 진천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도화각이 거느린 삼백의 특급기녀들 중 열 명만이 오른다는 금봉황(金鳳凰)이었다. 금봉황은 무림에 비견하자면 천하십대고수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문자 그대로 황금을 낳는 봉황이었다. 한 명의 금봉황이 어지간한 상단(商團)보다 많은 부를 거둬들인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반 시진 전 봉천에서 일어났던 소동은 예진(芮珍)이라는 이름의 금봉황이 갑자기 사라진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를 담당하는 기모(妓母)와 호화나찰들은 개점 점호 시 그녀가 처소에 없음을 인지하고는 크게 당황했다. 상부에 보고를 올리기 전 은밀하고도 신속히 그녀의 행방을 알아보았지만 성과가 없자 그들은 망연자실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의 신변에 이상이 있으면 모조리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진천의 대답이 늦어지자 노미현이 말을 덧붙였다.
“그녀가 안전한 곳으로 달아났으면 좋겠어요. 그녀에겐 도화각이 뇌옥이었을 테죠. 자신의 의사에 반해 어딘가에 갇혀있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거예요.”
노미현이 그녀의 강가 생활에 빗대 행방불명 된 금봉황을 동정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진천은 입맛이 썼다. 그렇지만 노미현의 생각처럼 예진이라는 여인이 자유를 동경해 도화각을 탈출했을 지는 의문이었다.
“그녀는 이미 봉천을 빠져나갔을 거요. 하지만 조만간 성주 성가의 그물에 걸려들 가능성이 크오.”
“짐작하는 바가 있군요. 들려줄래요?”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고 해도 그녀가 혼자 힘으로 측근들은 따돌리고 모습을 감추었을 거라고는 믿기 어렵소.”
“조력자가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소. 여인이 도화각에 드나들 리는 만무하니 틀림없이 사내일 테고 십중팔구 상당한 무력의 소유자일 거요. 경비하는 이들이 자각하지 못하게 일시간만 정신을 잃도록 수혈을 짚었을 터이니.”
“그자가 누구일까요?”
“모르겠소.””혹시 그녀는 그자에게 납치된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소. 그러나 나는 그녀가 그를 부추겼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오. 납치든 구출이든 성주 성가의 코털을 뽑는 행위이니 그로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을 터이지만 그녀는 설사 잡힌다고 해도 감시만 더 철저해질 뿐 생사를 염려할 필요는 없소. 그러니 시도해볼 만하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싶소.”
“두 사람은 연인이겠죠?”
“그녀는 어떨지 모르겠소.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홀려있음은 거의 확실하오.”
“홀렸다고요? 왜 그런 표현을 쓰는 거죠?”
“그녀의 조건 상 두 사람이 장기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교제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오. 아마도 그는 최근에 그녀를 처음 보았을 거요. 어쩌면 한두 번만 만났을 지도 모르오. 그녀를 깊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했으니 홀렸다고 봐도 좋을 것 같소만. 절세미녀가 사내를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당신은 예외일 것 같은데요?”
“…….”
“어쨌거나 당신 말은 그자가 도화각에 손님으로 왔다가 그녀에게 빠져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다는 거군요?”
“단정할 순 없소만 그랬을 개연성이 높소.”
“그들이 조만간 성주 성가에 잡힐 거라고 예상하는 까닭은 뭔가요?”
“아무나 금봉황과 어울리지는 못하기 때문이오. 신분과 재력이 확실한 자들만 그녀들을 부를 수 있다고 알고 있소.”
“아! 알겠어요. 성주 성가는 근래 그녀를 끼고 놀았던 자들의 명단을 검토하고 유력한 용의자를 추려내겠죠? 식은 죽 먹기겠네요. 고강한 무공에 대단한 배짱을 가진 자들이 흔치는 않을 테니.”
“그보다 더 쉬울 거요.”
“왜요?”
“후보군 중 오늘 사라진 자만 찾으면 되니까.”
“잠깐만요. 혹시 그가 그녀를 자기 처소에 숨겨둔 건 아닐까요? 며칠 더 기다렸다가 소란이 가라앉으면 유유히 그녀를 데리고 도화각을 떠날 요량으로 말이에요. 물론 그녀는 야무지게 변장한 상태겠죠. 남장을 했을 거라는데 내 목걸이를 걸 수도 있어요.”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만 이 경우에는 맞지 않을 것 같소.”
“어째서죠?”
“도화각 내부에서 은신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소. 후각이 뛰어난 탐지견들이 있기 때문이오. 특정한 약물을 쓰더라도 그녀가 남긴 자취를 완벽하게 지우는 건 불가능하오. 개들은 그녀의 냄새를 금방 찾아낼 거요. 그녀를 데려간 자가 그 점을 모를 리 없을 테니 그로서는 최대한 빨리 도화각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라 판단했을 듯싶소.”
“……그래서 처음에 그녀가 이미 봉천을 빠져나갔을 거라고 했던 거군요. 그러면 성주 성가의 입장에서 아까 그 난리는 다 헛짓이었네요.”
“봉천에 배치된 성주 성가의 수뇌부는 사태를 보고받은 초기에 두 가지 사실을 알아냈을 거요. 하나는 그녀를 빼돌린 자의 정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붙잡기엔 늦었다는 것이오.”
“그걸 알면서도 그 법석을 떨었다는 건가요?”
“성가는 그 일을 빌미로 부리는 이들의 기강을 잡고자 했을 성싶소. 한편으로는 떠들썩하게 판을 벌여 보상의 크기를 키우려는 속셈도 있었을 테고.”
“보상이라뇨?”
“좀 전에 그 미지의 인물이 일을 결행함에 있어 목숨을 걸었다고 했는데 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소.”
“무슨 소리죠?”
“나중에 성주 성가에 덜미를 잡히더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인사일 수 있다는 말이오. 예컨대 오대세가에서 나름 비중을 지닌 자라면 설사 성주 성가의 그물에 걸린다고 해도 배가 갈리는 참사는 당하지 않을 거요. 그녀를 돌려줘야할뿐더러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겠지만.”
“실망이네요. 나는 첫눈에 반한 여인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탈주를 감행한 멋진 사내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도 있소. 내 말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오.”
“그럴 것 같진 않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틀렸으면 좋겠네요.”
노미현이 바위에서 일어섰다.
“내 질문들에 성의껏 답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즐거웠어요. 하지만 여흥이 끝났으니 이제 그만 가 봐야겠죠?”
진천도 몸을 일으켰다.
“그럽시다.”
마차를 향해 걷던 진천은 세 걸음 만에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노미현이 따라오지 않아서였다. 바위 앞에 서서는 한 발짝도 떼지 않고 있던 노미현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천은 일순 아찔했다. 달빛이 드러내는 노미현의 미모는 인세의 것이 아니었다.
“날이 쌀쌀하네요. 날 안아줄래요?”
진천은 천하제일미로 불려 손색이 없을 여인의 봉목을 직시했다. 어떤 보석도 견주지 못할 아름다운 눈동자에 담긴 갈망을 헤아린 진천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노미현이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진천이 포옹을 풀려고 하자 노미현이 그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더요.”
진천은 차마 노미현을 밀어내지 못했다.
“약속해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다시는 어리광을 부리지 않을 게요.”
“…….”
“그거 아나요? 그저께 갑자기 내 방에 들이닥친 그가 혈도를 찍고는 옷을 찢어버렸을 때 나는 치욕스럽거나 두렵기보다는 두근거렸어요.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지 직감했기 때문이었어요. 내 예상대로 당신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요. 나는…….”
진천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노미현의 등을 아이 달래듯 부드럽게 토닥였다.
노미현이 고개를 들어 진천과 시선을 맞추었다.
“당신이 내 사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당신의 여자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안 되나요? 그럴 순 없나요?”
진천이 엄지를 들어 노미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벗이잖소? 나에겐 그 이상의 관계는 없소.”
간절한 눈빛으로 진천을 바라보던 노미현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래요. 그거면 돼요. 그걸로 충분해요.”
노미현이 분홍빛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부자연스러운 미소였으나 그마저도 숨 막힐 듯 아름다웠다.
“이제 그만 가요. 다들 보고 싶어요.”
뎅뎅뎅…….
진천이 모는 마차가 주안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웅장하면서도 은은한 종소리가 그를 맞이했다. 유시(酉時)을 알리는 종소리는 열 번을 울리고도 미련이 남았는지 여음(餘音)을 남기며 허공을 맴돌았다.
죽립을 눌러 쓴 진천은 익숙한 거리를 내달렸다. 이각 후 그와 노미현을 태운 마차는 삼보장에 이르렀다. 정문을 통과하자 말 울음소리를 들은 고량과 차소영이 백와옥에서 나왔다.
마차에서 내리는 노미현을 본 차소영이 한달음에 달려가서는 그녀를 얼싸안았다. 청와옥에서도 여상구와 팽하연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과 거의 동시에 가린과 대웅, 그리고 하수린도 지하연무장에서 올라왔다. 차소영의 품에 안긴 노미현을 발견한 대웅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마차로 오지 않고 쭈뼛거렸다. 진천은 여드레 만에 귀환한 그를 반기는 친인들을 두고 대웅에게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가 대웅과 얘기를 나눌 겨를을 주지 않고 권왕이 그를 불렀다.
“왔으면 후딱 오거라, 아우야.”
진천은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대웅의 손을 잡아주고는 죽림으로 날아갔다.
빽빽한 대나무 숲 한 가운데 아이 머리의 땜빵처럼 자리 잡은 공터의 뾰족 바위 끝에 말을 타듯 걸터앉아 있던 권왕이 진천을 보자마자 물었다.
“소 형은 언제까지 오기로 했느냐, 아우야?”
경과와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검왕의 도래를 기정사실로 여기는 권왕의 언사에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날짜는 정하지 않았습니다, 큰 형님. 아마 사나흘 후에는 당도하실 듯싶습니다.”
“정맹의 일은 어찌 되었느냐? 참, 소 형의 제자는 어떻더냐? 제대로 했으면 네 삼초지적도 안 됐겠지?”
고소를 지은 진천은 권왕의 세 번째 질문에 답했다.
“저는 그녀에게 패했습니다.”
“뭣이?”
누가 엉덩이를 찌른 듯 권왕이 뾰족 바위에서 튀어 올랐다.
“그녀라니? 그 아이가 여아였단 말이더냐? 그리고 패했다니? 봐 준 게 아니고 정식으로 겨뤘는데도 졌다는 게냐? 그런데 어떻게 소 형을 이리로 오도록 만든 게냐?”
권왕의 질문 공세에 진천은 순서대로 차근차근 대답했다.
“검왕 어르신의 후인은 여자가 맞습니다. 이름이 명이라고 하더군요.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스물은 넘은 것 같습니다. 그녀와의 비무는 생사투에 가까웠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나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검왕 어르신을 설득한 것은…….”
진천의 말을 진득하게 듣지 않고 권왕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잠깐,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네가 스물 어림의 여아에게 깨졌다니. 지금의 너는 팔대무왕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하다. 소 형의 제자가 어미 뱃속에서 무공을 익혔다면 모를까, 아니 그렇다고 해도 너를 이긴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괴물이 아니고서야.”
진천은 감탄했다. 소 뒷발에 쥐가 걸린 격이었지만 권왕이 말미에 덧붙인 중얼거림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