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08
제207화
자줏빛 노을이 회색 하늘 가득 깔렸다.
정맹을 떠난 지 하루 반나절 만에 주안에 이른 진천은 삼보장으로 직행하지 않고 북운상단에 들렀다. 대문에서 그가 다가오는 걸 본 경비무사들이 부산해졌다. 하지만 예전처럼 허둥지둥 대지는 않았다. 경험은 노련함을 낳는 법이었다.
진천과 명이 북운상단에 들어서니 뜻밖의 사람이 질풍처럼 달려 나와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게나, 아우님.”
여상구가 진천의 팔을 잡았다. 진천은 처진 눈을 올렸다.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야 아우님 때문에 왔지. 삼보장에 죽치고 앉아 오 단주가 아우님의 근황에 대해 전해주기를 기다리느니 여기서 바로 받아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장왕은 왔는지요?”
“그제 왔다네. 실은 그 때문에 모두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네. 아우님이 지정한 날짜보다 이틀이나 늦지 않았는가? 아우님에게 변고라도 생긴 줄 알고 간이 졸아들었다네. 나하고 장마가 열락궁으로 가려는 걸 권왕 어르신께서 말리더구먼. 아우님을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면서. 그 어른을 뿌리칠 힘이 없으니 우리로선 따를 수밖에 없었네. 하지만 이틀이 지나자 그 어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열락궁 행을 선언했다네. 우리가 막 삼보장을 뛰쳐나가려는 찰나 오 단주가 아우님이 보낸 전서구를 들고 찾아왔다네. 그가 조금만 늦었어도 길이 엇갈려 열락궁까지 달려갈 뻔했지 뭔가.”
여상구의 장황한 설명에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형님.”
“그런 말 말게. 나야말로 대륙을 종횡하며 고군분투하는 아우님에게 미안한 마음뿐일세. 하지만 이제 내외상도 거의 아물었으니 나도 탕마멸사의 대업에 다시 동참하겠네.”
진천은 여상구에게 다른 과제를 맡기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아우님? 장왕이 권왕 어르신께 전한 말로는 아우님의 열락궁 도착 자체가 늦었던 모양이던데.”
진천은 명을 흘깃 보았다.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그제야 주위에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음을 인지한 여상구가 입을 다물었다.
마침 오재승이 뒤늦게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시오, 진 공자.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밤쯤 오시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얼추 들어맞았구려.”
진천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오재승이 명에게 시선을 내렸다.
“이 소저가 검후 어르신의 제자이겠구려.”
진천은 문득 외조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필시 중요한 정보를 고하지 않고 떠난 그의 처사에 노발대발하고 있을 터였다.
진천은 유일하게 명의 정체를 아는 성대진에게 그가 정맹을 떠날 때까지는 그 사실을 함구해달라고 요청했었다. 오대세가의 명숙들을 면담하는 데 적잖이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명의 신분을 알면 그들의 관심이 온통 그녀에게 쏠렸을 것이었다.
질투심에서 비롯된 처사는 아니었다. 명은 다중을 상대할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진천은 자신이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그녀가 보고 배우기를 바랐다.
“그렇습니다. 명이라고 합니다.”
진천의 대답에 명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오재승은 그녀가 속이 텅 빈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오싹해졌다. 마치 그녀가 그를 응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허겁지겁 시선을 올린 오재승이 진천의 등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무엇이오, 진 공자?”
여상구가 질문을 보탰다.
“서궤(書櫃) 아닌가, 아우님?”
“맞습니다, 형님. 오 단주께 신세를 져야 할 물건을 잔뜩 담아왔습니다.”
오재승은 진천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아! 그렇다면…….”
주변을 의식한 오재승이 말끝을 흐렸다.
오재승의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일다경가량 담소를 나눈 진천은 그에게 서궤를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빽빽하게 말린 두루마기가 가득 찬 서궤는 어지간한 장정 둘이 맞잡고 들어도 버거워할 만큼 무거웠다.
진천은 서궤 말고 따로 두 겹으로 접은 종이를 오재승에게 건넸다. 진천의 양해를 구한 오재승이 쪽지를 펴자 여섯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진천은 상운의 정보망을 이용해 그들의 소재를 알아봐 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진천 일행은 걸어서 삼보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재승이 내준 마차에 올랐다. 명을 위한 배려였다. 평범한 면상이지만 진천은 몰라보기엔 너무나 유명한 인사였다. 그가 저자를 지나면 행인들의 시선을 모조리 끌어당길 것이었다. 주안의 평민들은 정맹의 무인들과는 달리 진천을 그리 어려워하지 않을 터였다. 진천은 그에게 쏠리는 수많은 눈길과 수군거림이 예민한 명을 자극할까 우려했다. 명에게는 세인들의 관심과 뒷말에 익숙해지기 위한 연습이 필요했다.
마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명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상구 때문에 입을 열지 않았고, 여상구는 말없이 진천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속을 읽은 진천이 쓰게 웃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형님.”
“누누이 말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 우형에게 사과할 필요 없네, 아우님.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노심초사했다네. 아우님에게 완벽한 계획이 있으리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상대가 장왕이 아닌가. 그가 아우님이 이른 날짜에 오지 않아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네.”
진천은 거듭 사과를 하려다 의형의 당부를 상기하고는 그만두었다.
“아우님이 정공법으로 장왕을 낚았음을 알고는 심경이 복잡해졌다네. 오늘 아침 아우님이 정맹에서 북천도왕과도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네. 다들 아우님의 성취와 쾌거에 놀라고 환호했지만 이 우형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네. 오히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네. 아우님은 그 이유를 알리라 믿네.”
진천은 마음이 쓰렸다. 어찌 모르겠는가. 의형은 그의 무력의 비약적인 상승이 염왕전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아는 극소수의 친인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이일 터였다. 만약 남은 수명을 나눠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의형은 서슴지 않고 자신의 여생 전부를 줄 사람이었다. 진천은 의형의 진정성에 관해 무조건적으로 신뢰했다. 의형이 그에게 그런 것처럼.
여상구가 명을 보며 턱짓을 했다.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도 진천의 비밀을 알고 있음을 안 여상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얼마나 남았는가, 아우님?”
진천은 망설였다. 하지만 차마 의형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올해를 넘기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 순간 명이 내지른 비명성이 여상구가 토해낸 한숨소리를 반으로 갈랐다.
진천은 울먹이는 명을 달랬다. 마차 안의 공기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마차가 삼보장에 진입하기 전에 창문을 열고 뛰어내린 진천은 곧장 지하연무장으로 내달렸다.
예상대로 권왕과 장왕이 격렬하게 치고받으며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단순한 비무라고 보기엔 분위기가 사뭇 험악했다. 진천은 두 사람의 자존심이 격전을 촉발시켰으리라 짐작했다.
진천의 등장으로 비무는 급작스럽게 종결되었다. 장왕이 한 발 양보한 탓이었다. 권왕의 주름투성이 얼굴은 화롯불에 담근 인두처럼 시뻘게져 있었다. 진천은 그가 지하연무장에 들어서기 전 권왕이 장왕에게 밀리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진천을 본 장왕은 인사도 생략하고 도망치듯 우측의 동굴로 들어갔다. 후원의 별채로 이어지는 동굴이었다.
권왕에게 다가간 진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큰 형님?”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느라 권왕의 답이 두 박자 늦게 나왔다.
“그럼. 설마 내가 막가에게 당하기야 하겠느냐? 물에 퉁퉁 부은 돼지 같은 늙은이쯤이야 한 주먹만 써도 충분하느니라.”
큰소리를 쳤지만 권왕의 눈빛이 찰나지간 흔들렸다. 진천은 모른 체 했다.
권왕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용케도 막가에게 코뚜레를 걸었구나, 아우야? 너한테 단단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던데. 대체 어떻게 한 게냐?”
장왕의 기운이 권왕과의 대화를 엿듣지 못할 만큼 멀어졌음을 확인했지만 진천은 권왕처럼 나지막하게 말했다.
“비무를 하자고 해놓고 저는 죽일 듯이 싸웠습니다.”
권왕의 일자 눈이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완벽하게 납득한 권왕이 감탄했다.
“하아, 그렇게 간단한 수법이었다니. 나나 소 형에게라면 절대로 통하지 않았을 수지만 막가라면 그게 먹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 과연 내 아우다, 아우야.”
진천은 그저 쓰게 웃었다.
“그제 강 맹주와의 치렀다는 일전도 들었다. 한 달여 만에 급성장한 네 무력에 무지하게 당황했을 테지?”
“조금 놀라셨던 듯합니다.”
“조금이라니? 장담컨대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을 게다. 아쉽구나. 그 장면을 내 눈으로 보았어야 했는데.”
“…….”
권왕이 별안간 정색했다.
“근데 열락궁엔 왜 그렇게 늦게 도착한 게냐? 네 걱정에 애가 다 닳아버렸다, 이 녀석아.”
쓴웃음을 지은 진천은 지연사유를 설명했다. 명의 발작에 대해 듣더니 권왕이 인상을 썼다.
“그 조그만 아이가 왜 그렇게 문제가 많은 게야?”
권왕에게 그의 추론을 들려주려던 진천은 이어진 그의 말에 뒤로 미루기로 했다.
“다들 네 녀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만 올라가 보거라. 나하고는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진천은 권왕이 평소보다 훨씬 빨리 그를 놓아주는 이유를 짐작했다. 권왕은 방금 전 장왕과의 비무에서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체면 때문에 내색을 하지 않고 있지만 얼른 운공에 들고 싶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큰 형님. 밤에 죽림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권왕에게 포권을 취한 진천이 몸을 돌렸다. 그가 몇 발짝 가기도 전에 그의 등에 권왕의 질문이 날아왔다.
“하나만 물어보자, 아우야. 언제 거사를 치를 작정이냐?”
진천은 즉답하지 못했다. 그의 속을 읽은 권왕이 재촉했다.
“내 상태는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원래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시일을 말해 보거라. 어서 이실직고하렷다.”
진천이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내일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큰 형님. 하지만 며칠 더 늦춰도…….”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잘랐다.
“그럴 것 없다. 갈비뼈가 약간 뻐근할 뿐, 싸우는 데는 아무 지장 없으니 네 뜻대로 하자꾸나.”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진천은 지하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청와옥 다연실의 큼직한 원형 탁자에 오남오녀(五男五女)가 둘러앉았다.
진천은 늘 그의 옆자리에 앉았던 대웅의 부재가 허전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그에겐 대웅이 그랬다. 대웅은 누가 뭐래도 특별한 친구였다. 진천은 아직도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낭떠러지 아래에서 손을 섞으며 느꼈던 희열감을 잊지 못했다. 그런 경험은 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치열하면서도 황홀했던 그 한 번의 승부로 진천은 대웅이 근본적으로 그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사내임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대웅은 둘 다 생명체를 해하는 일에 태생적인 거부감을 가진 족속이었다. 타고난 무인이라 할 하수린이나 고량과는 상극의 유형이었다.
벽력도문으로 돌아간 친우를 떠올리며 진천은 그와의 재회가 머지않았음을 상기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이르면 모레, 늦어도 글피 후면 그를 보게 될 것이었다.
대웅의 자리에 앉아있는 명을 일별한 진천은 상념을 털어버리고 그를 주시하는 친인들과 한 명, 한 명씩 차례로 눈을 맞추었다. 의형인 여상구를 마지막으로 눈인사를 끝낸 진천이 지난 이레 동안 그가 수행했던 일들을 간추려서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조만간 강호에 상전벽해에 준하는 대변화가 몰아닥칠 겁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두어야 합니다. 전체적인 윤곽을 먼저 잡아본다면 대륙은 삼등분 될 듯싶습니다. 차후 복잡한 조정의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정맹과 월교가 중원의 북남을 통치하고 세평회가 중앙을 떠맡는 구조가 정착될 공산이 큽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거칠게 뭉뚱그리면 정맹과 월교가 각각 마련과 사벌의 영토를, 그리고 세평회가 이전의 중립지대를 차지하는 그림이 나옵니다.”
숨죽인 채 진천의 설명을 듣고 있던 좌중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