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Temptation of the Iceworld RAW novel - Chapter 8
7장. 귀여운 여자.
“언니….”
영숙은 침대를 정리하다 말고 방문 앞에서 망설이며 선 현수를 바라보았다.
“왜?”
어디가 불편한 듯 현수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왜? 무슨일인데?”
“저기….음…..화장실요….”
“화장실? 화장실이 뭐?”
생뚱맞게 화장실을 운운하는 현수의 말에 영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저….사람이 꽉 차서….”
아하. 화장실에 사람이 꽉 차서 볼 일을 못 보는군. 영숙은 알겠다는 미소를 지었다.
“본관동에 잇는 화장실 가.”
“거기도 가봤어요. 거기도 사람들이…”
“뭐?”
하긴. 어젯밤 그렇게 술파티를 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전 아침식사 시간에도 월동대원 뿐 아니라 하계연구원들까지 속이 쓰려 죽을상을 하며 억지로 식사를 했었다. 그러니 기지 내 화장실이란 화장실은 모두 대원들이 꽉 차 있는 것이리라.
“저쪽 숙소동 가봤어?”
“네…”
저럼. 쯧쯧. 영숙은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젊은 아가씨가 얼마나 급하면 기지 내 건물이란 건물은 모두 찾아다녔나 하는 생각에 영숙은 현수가 가여워졌다.
“그럼 연구동은?”
“거긴 아직…”
“왜? 거기 가보지 그랬어? 연구동은 주로 연구원들만 쓰는 공간이라 빈 화장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게다가 지금쯤이면 연구원들은 연구 활동 나갔을 테고. 숙소동이나 본관보다는 거기가 비었을 확률이 더 크지.”
현수는 영숙의 말에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조금 전에 강 박사님이 들어가셔서….”
“어디? 연구동 화장실에?”
“아뇨. 연구동으로 들어가시기에 전 그냥….”
“아니, 왜? 연구동 들어간다고 화장실 가는 건 아닐 텐데?”
영숙은 순간 현수가 더욱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살풋 웃음을 머금었다. 오호. 내외하시는군. 큭큭큭. 이것 보라지. 윤 선생이 유독 강 박사만 피하는 걸 보니 확신이 들었다. 두 사람간에 뭔 일이 있는 것이다. 아니, 일은 없어도 무언가 감정의 선이 그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사람이 서로를 이렇듯 의식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윤 선생은 태훈을 피하고 태훈은 윤 선생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난리고. 큭큭큭. 분명 둘이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내가 같이 가줄까?”
“네?”
“아니, 난 윤 선생이 강 박사를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내가 같이 가주려고.”
현수는 영숙의 배려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언니. 부탁드릴게요. 저 지금 무지 급하거든요.”
영숙은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서는 급하다 말하는 현수가 깨물어주고 싶도록 귀여웠다. 이런 여동생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어디, 이번 기회에 외사촌 올케 한번 만들어봐?
“아무도 없네? 윤 선생. 아무도 없어.”
“그러네요.”
현수는 영숙의 뒤를 따라 쭈뼛쭈뼛 화장실로 들어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좌변기실이 두 군데였고 남자들이 서서 볼일을 보는 변기 세 개가 벽에 나란히 서있었다. 현수는 벽에 서있는 변기들을 보며 마치 남자 화장실에 침범한 여자처럼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어서 들어가서 볼일 봐.”
“저기. 언니. 제가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알았어. 내가 여기 서있을 테니 윤 선생은 마음 놓고 볼일 봐.”
현수는 영숙의 넓은 아량에 더욱 고마운 미소를 지어보이고 좌변기가 놓인 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 푹 놓고 볼 일 봐. 내가 여기서 지키고 섰을 테니.”
“네에.”
현수는 문 밖에서 들리는 영숙의 목소리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바지를 내렸다.
“윤 선생. 보기보다 너무 숙맥이네.”
영숙의 목소리에 현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화장실 문너머에서 그녀가 볼일을 볼 때까지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는 일은 고등학교 때 이후로는 처음이지 싶었다. 왠지 단발머리 여고생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났다.
“시커먼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틈에서 적응하기 힘들지?”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대학 때도 여학생들이 별로 없었는걸요. 게다가 레지던트쯤에는 거의 남자들 틈에서 지냈어요.”
“그래? 참. 외과 전공이랬지?”
“네.”
“그런데 이렇게 부끄럼을 타? 남자들 틈에서 생활했으면 이정도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생각하기로 여의사들은 아무데서나 방귀도 붕붕 뀌고 그럴 줄 알았는데….”
현수는 영숙의 짐작에 ‘킥킥’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제 여자 동기들은 거의 다 그래요. 언니 말처럼 남자 동기가 있든지 말든지 방귀도 뀌고 트림도 하고 ….근데 전…하하하. 잘 안 되더라고요. 동기들 말로는 제가 감수성이 많이 예민하다고.하하하.”
“그래. 그럴 수 있지. 뭐. 사람이라도 다 똑같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지. 그리고 사실 아무리 사람 몸 헤집는 게 일인 의사라 해도 여자는 여자인거지. 윤 선생이 이상한 게 아니야. 윤 선생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아무리 백날, 천 날을 남자랑 부대껴 살아도 여전히 그런 쪽으로는 예민하더라고. 내 친구 중에는 결혼한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남편 앞에서 방귀도 못 뀌고 트림도 못하는 친구도 있어. 게다가 밤에 잘 때도 꼬박꼬박 잠옷 챙겨 입고 잔다더라. 그러니 윤 선생도 이상할 거 전혀 없지.”
현수는 자신을 위로하는 영숙의 말에 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소소한 이런 일에 예민하게 신경 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좋게 생각되지만도 않았었다. 여자 동기들 중에는 예민하고 몸을 사리는 그녀에게 내숭이라는 둥, 너무 민감한거 아니냐며 비꼬기도 했고, 남자 동기들은 그런 그녀의 앞에서는 행동을 조심해야 했기에 그녀를 편하게 대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저렇듯 그녀를 이해해주는 영숙이 현수는 고마웠다.
“이차. 이런…”
현수는 문 밖에서 들리는 영숙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문을 쳐다보았다.
“왜요?”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음식 상한 걸 반찬 통에 그대로 담아놓고 그냥 왔네. 혹시 누가 집어먹지나 않았나 몰라. 윤 선생. 아직 멀었어?”
“아뇨. 다 됐어요. 먼저 가세요. 저 지금 나갈 거에요.”
“그래. 그럼 먼저 갈게.”
“네에.”
현수는 벽에 걸린 휴지를 말아내며 영숙의 급한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었다. 변기에서 일어나 바지를 입고 변기통에 달리 핸들을 살짝 돌렸다. 그리고 바지의 단추를 잠그고 옷을 정리했다.
쿠렁.크렁.
현수는 갑자기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변기 안을 내려다보았다.
“오. 이런 젠장. 안 돼…”
현수는 저도 모르게 옥설이 튀어나왔다. 시원하게 빠져나가야 할 변기물이 도리어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장을 통해 배설된 이물까지 함께.
“하필이면….”
아. 오늘 일진이 왜 이래. 현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 화장실 내 어딘가에 고무 압축기라도 있을 것이다. 그래. 당연히 화장실에는 고무 압축기가 있어야지. 여자 숙소 건물 화장실에도 압축기가 있는데 여기만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꼭 있어야 했다.
현수는 변기물이 더 차오르지 않고 찰랑거리며 경계선 수위를 넘어서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에 살며시 귀를 가져다 대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영숙 언니는 조금 전 본관 건물로 건너갔고 이 곳 연구동에는 그녀 혼자뿐인 것 같았다. 최소한 여기 화장실에는 그녀 혼자만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현수는 문에 달려있는 걸쇠를 조용히 풀로 문을 살며시 열어 밖을 살폈다.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이 지금을 두고 하는 말이네.”
현수는 혼잣말을 속삭이며 문을 열고 살며시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 입구로 재빨리 걸음을 옮겨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연구동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다시 몸을 돌려 화장실 안을 둘러보던 현수는 화장실 맨 구석 칸에서 삐죽이 보이는 밀대걸레를 보았다.
‘오케이. 저기야.’
현수는 환한 미소를 짓고 곧장 청소 용구함으로 보이는 칸의 문을 열어젖혔다. 밀대걸레. 빗자루, 쓰레받기, 그 외에도 잡다한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정작 그녀가 찾고 있는 고무 압축기는 없었다.
‘안 돼. 제발. 제발 있어야 하는데….’
현수는 여러가지 용구들을 파헤치며 다시 한 번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그녀가 찾는 것은 없었다. 그때였다.
“야. 이승규. 복도 한 번 밀라니까 뭐하는 거야?”
“저 이제 아침밥 먹었습니다. 선배님. 지금 밀게요.”
“복도하고 휴게실하고 같이 밀어.”
현수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췄다. 이 목소리는 강 박사와 이승규 연구원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수는 황급히 청소 용구함 문을 닫고 문제의 변기가 있는 카으로 재빨리 들어가 문을 잠갔다.
“용호는?”
“곧 올 겁니다. 장 박사님이 시키신 일이 있어서 엑셀 작업 중입니다.”
“용호, 그 일 끝나면 같이 연구실 청소 좀 하라고 해.”
“네.”
현수는 자신의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으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한사람이 그녀가 있는 칸을 지나쳐 청소 용구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누가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거야?”
“어. 전 아닌데요? 아까 제가 걸레 갖다놓을 때만 해도 잘 정리되어 있었는데 이상하네.”
“됐어. 밀대걸레 가져가서 복도부터 밀어. 난 여기 정리 좀 할테니.”
“예.”
그리고 이승규 연구원이 밀대걸레를 가지고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현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쥐며 죽은 듯 서있었다. 하필 강 박사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필이면 저 강태훈 박사라니. 여기서 들키면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숙소동 화장실을 놔두고 그녀와 별로 상관도 없는 연구동 화장실까지 와서 변기까지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게다가…..현수는 눈길을 내려 그녀의 흔적이 둥실둥실, 떠있는 변기 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내려갈 기미가 없는 변기물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뚜벅.뚜벅.쏴아.
뭘 하는지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는 그의 발소리가 들렸고 간혹 물소리도 들렸다. 그러다 그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을 벗어나는 그의 발소리에 현수는 얼른 귀를 문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그가 없음이 확실시 되자 재빨리 문의 걸쇠로 손을 가져갔다. 걸쇠를 풀려는 순간 현수의 동작이 멈추었다. 이대로 도망가면…? 현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물속에 떠도는 그녀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몰래 도망가면 누구 짓인지 모르기는 하겠지만 그녀의 죄책감은….. 아니. 아냐. 누군가 뚫겠지. 누가? 갑자기 현수는 그 누군가가 강 박사일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다른 것도 아닌 그녀의 숨기고 싶은 흔적을 그가 정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어떡해.어떡해.어떡하지?
현수는 아무리 바쁘게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다시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년 황급히 문에서 멀어졌다.
뚜벅.뚜벅.뚜벅.뚜.
현수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추었다. 그녀가 있는 칸 앞에서 발소리가 멈추었다. 누군가 문 건너에 서있었다. 현수는 심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제발 강태훈 박사만 아니기를. 제발 그가 아니기라도 해라. 그녀는 자신이 왜 강태훈 박사에게만은 이 상황을 들키고 싶지 않은지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빌기만 하고 있었다.
“누가 있나?”
빌어먹을. 젠장. 제기랄. 그였다. 현수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백지상태였다.
뚜벅.
“누가 있습니까?”
그가 한걸음 다가서자 현수는 얼른 문에서 한 발짝 더 멀어졌다.
똑.
“거기 누굽니까?”
현수는 입술을 꼭 깨물고 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젠 그가 아예 문을 열기라도 할 듯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뭐야? 문이 잠겼나?”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가 다시 손잡이를 잡고 흔들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문과 함께 그녀의 심장도 내려앉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 위쪽으로 손 하나가 쑥 올라왔다. 현수는 그 손을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안 돼요!”
금방이라도 문 위로 그의 얼굴이 나타날 것 같아 그녀는 소리를 빽 질렀다.
“거기 누구요?”
“…저예요…”
“…의사 선생?”
“네에…”
“거기서 지금 뭐하는 겁니까?”
“그게 저…”
“뭐 하냐니까!”
다시 그가 그녀의 대답을 독톡하자 그녀는 빽 소리를 질렀다.
“화장실에서 뭘 하긴 뭘 하겠어요!”
“….”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현수는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그가 그녀의 상태를 눈치 채고 조용히 물러가 주기를.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돌아가서 영숙 언니를 보내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뭐 문제 있습니까?”
이런 벽창호 같으니! 하긴 저 인간한테 뭘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현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작은….문제가 있어요.”
“무슨 문제?”
“….아주 사소한 문젠데….”
“그러니까 그 사소한 문제가 뭐냐니까?”
“저기, 그러지 말고 가서 영숙 언니 좀 불러주세요.”
“후….이것 봐요. 의사 선생. 그냥 나한테 말해요. 무슨 문제인지 모르지만 다 큰 성인이고 나도 여자나 남자에 대한 차이점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냥 말해도 됩니다. 게다가 지금 조리사님은 본관에 없어요. 조금 전에 중국 기지 방문하는 팀에 합류해서 고무보트 타고 나갔습니다.”
아….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영숙 언니가 와주기만을 바라던 현수는 이제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이제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저 강태훈 박사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수밖에는.
“변기가…”
“뭐?”
그녀가 작게 속삭이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그가 다시 커다란 목소리로 되묻고 있었다.
“….변기가…막혔어여.”
“…..”
그녀는 재빨리 말을 뱉어내고 눈을 꼭 감았다. 곧이어 들려올 그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꼭 감은 채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큰 것, 작은 것?”
“네?”
“의사 선생이 본 일이 큰 겁니까? 작은 겁니까?”
아아….현수는 이대로 땅이 꺼져 사라지고 싶었다. 너무나 창피했다.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큰 거지. 작은 거에 변기가 막히겠어?
“….큰…..”
“알았습니다. 우선 이 문부터 열어요.”
“아뇨. 그냥 고무 압축기만 가져다주시면 제가 해결할게요.”
“그러지 말고 내가 할 테니….”
“아뇨! 제발요….”
이 정도는 아니어야 했다. 그녀도 자신이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련의 과정에서 더럽고 불쾌한 것에는 모두 익숙해진 그녀였다. 그런데 유독 지금 자신의 분비물을 그에게 보이는 것을 이렇게 부끄러워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의사로서가 아니라 감수성 예민한 여자로서 창피함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애원과도 같은 부탁에 그가 침묵했다. 누가 알겠는가? 그에게 자신의 이런 치부를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그녀의 심정을.
“알았어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요.”
그리고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어디 다른 건물 화장실에 있을 압축기를 가지러 가는 것이리라. 현수는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벽에 힘없이 기대섰다. 찰나의 휴식이었다. 그가 문 너머에 있는 내내 그녀의 몸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벌을 서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그가 돌아왔다. 그녀는 문에 바싹 귀를 대었다.
“문 열어요.”
“혼자죠?”
“….혼자요.”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오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져왔어요?”
“가져왔으니 문 열어요.”
“아뇨. 그냥 위로 건네주세요.”
“이봐요. 윤 선생….”
“제발요. 그냥 따지지 말고 해달라는 대로 좀 해주면 안 돼요?”
“나 참. 도대체….. 자. 받아요.”
뭐라고 투덜거리던 그가 불쑥 문 너머로 검은색 고무 압축기를 내밀었다. 현수는 까치발을 하고 압축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들릴 듯 말듯 속삭였다.
“고마워요….”
그가 들었는지 어쨌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현수는 곧장 변기를 향해 돌진했다. 예전에 엄마가 집의 변기가 막혔을 때 이걸로 막힌 변기를 뚫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았었다. 둥그런 부분을 변기에 집어넣고 아래위로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어? 왜 안 되지? 현수는 다시 한 번 압축기를 변기통에 집어넣고 아래위로 들었다 올렸다 했지만 변기 물이 빠지기는커녕 그녀의 흔적들이 마구 흘러넘치려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었다.
“됐습니까?”
“잠,잠깐만요.”
현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식은땀을 흘리며 압축기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압축기를 힘껏 밀어 넣기도 하고 힘껏 빼보기도 했지만 도대체가 어떻게 된 것인지 물은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합니까?”
드디어 그도 기다리다 지쳤는지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있었다. 현수는 한숨을 푹 내쉬고 허리를 폈다. 이젠 방법이 없었다.
“잘 안 돼요.”
그녀는 말을 함과 동시에 문에 이마를 콩 박았다. 이젠 포기였다. 이 일이 해결된 후에도 오랫동안 저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리라.
“문 열어요.”
그의 말에 옅은 웃음이 배어있었다.
“웃지 말아요.”
“안 웃을 테니 문 열어요.”
현수는 쭈뼛거리며 문의 걸쇠를 열고 살며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신발만 노려본 채 속삭였다.
“이 일을 아무한테도 말 안한다고 맹세해줘요.”
“맹세씩이나?”
이젠 아예 대놓고 웃음이 짙게 배인 그의 목소리에 현수는 고개를 홱 치켜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웃지 말아요!”
“이제야 평소의 의사 선생이시군. 사람이 다 똑같지. 변 안 보는 사람있나? 그리고 의사 선생 변은 무슨 기밀사항입니까? 왜 안 보여주려고 기를 쓰는 거요?”
변, 변, 꼭 저렇게 그 단어를 입에 담아야 하나? 현수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다시 푹 숙였다. 당신 같은 벽창호가 어찌 여자의 여린 감수성을 이해할 수 있겠어? 다 내 잘못인 거지.
그리고 그녀에게 커다란 고민을 안겨주었던 변기는 그의 손에 들려진 고무 압축기에 의해 뻥하고 뚫렸다. 시원하게 내려사는 물소리를 끝으로 그가 허리를 펴는 것이 보였다. 그가 그녀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보았다는 사실에 현수는 그와 눈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저놈의 압축기가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그는 되고 그녀는 되지 않은 것인지 이해불능이었다.
“그러다 땅 파고 들어가겠군.”
현수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그의 웃음기 실린 말에도 대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픈 생각뿐이었다.
“고마워요. 전 이만 가볼게요. 의무실을 너무 오래 비워둬서……”
현수는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화장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막 화장실을 벗어나려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뭐 별로 특별한 것도 없고 혐오감을 준 것도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저것도 위로랍시고! 하여튼 그냥 모른 체 넘어가주면 어디가 덧나나? 결국 저렇게 그녀의 흔적을 입 밖으로 내는 그가 너무 미웠다.
태훈은 화장실 밖으로 급히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아냈다. 저렇게 창피해하며 도망치듯 달아나는데 그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어간다면 더욱 화가 나리라. 하지만…..쿡쿡쿡. 웃음을 참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나가셨어요?”
태훈은 그녀가 들었던 칸의 옆 칸에서 삐죽 고개만 내미는 승규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러자 승규가 문을 활짝 열고 나오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웃음 참느라 죽을 뻔했네. 아니, 저렇게 다 큰 여자가 이렇게 웃겨도 되는 겁니까? 진짜 윤 선생님 너무 귀엽습니다. 하하하하하.”
태훈은 승규의 웃음에 마주 미소를 짓다가 그의 마지막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귀여워? 그래. 귀엽긴 귀여웠다. 그런데 그 말을 승규가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그녀가 귀여운 여자라는 것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괜찮고 승규가 말 하는 것은 기분이 나쁜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엽기 뭐가 귀여워? 여자가 칠칠맞지 못하게…..”
“에이. 선배님. 그건 아니죠. 윤 선생님이 변기를 막히게 하고 싶어서 했겠습니까? 본래 저 변기가 신통찮았어요. 오늘 아침에 제가 볼일 볼때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더라고요.”
어쭈. 이젠 아주 편까지. 저 자식이 근데….
“이승규. 아침에 그런 기미가 보였으면 당장 손을 봤어야 할 것 아니야!”
“억. 헉. 아이고! 왜 이러세요. 선배님. 치우세요. 더러워요.”
승규는 태훈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고무 압축기를 그의 얼굴에 정면으로 들이대자 기겁을 했다.
“뭐가 더러워? 네가 그렇게 귀엽다고 하던 여자의 흔적을 처리한 건데 얼굴이라도 비벼야지.”
“으악! 노땡큐입니다.”
태훈이 다시 압축기를 들이대자 펄쩍 뛰며 승규는 화장실 밖으로 재빨리 달아나버렸다. 태훈은 승규가 사라지고 화장실에 혼자 남았다. 문득 눈길을 들어 그녀가 갇혀있던 문 너머를 바라보자 조금 전, 볼을 발갛게 붉히고 고개를 숙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승규가 옳았다. 그녀는 분명 귀여운 여자였다. 떠올리는 것만을도 기분이 상당히 좋아질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