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68
167화. 망각의 도시 (7)
여기를 봐도 사람이 있고, 저기를 봐도 사람이 있다. 대개의 균열 안에는 자아를 가진 생명체는 몇 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이건 도떼기시장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사람이 많다.
‘사람인지 마수인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상기된 뺨을 문지르면서 가판대를 구경하고 있는 이세환을 보고 있으려니까 그저 균열에 휘말린 평범한 마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든다.
인간형 마수를 죽여본 적 있는 경험 때문에 인간 자체를 경계하게 된 감응자처럼은 안 됐으면 하니까.
“요한아!”
“어어, 간다, 가.”
손을 붕붕 흔들면서 재촉하는 이세환에게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아무래도 신기한 물건 내지는 의심스러운 물건을 찾은 모양새였다.
균열이라고는 해도 민간인들은 약간의 기억 상실을 제외하면 전혀 피해가 없었기에 비교적 이세환이 자유롭게 놀 수 있게 했던 건데, 이세환은 놀고만 있을 수는 없다며 할 일을 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최대한 위험하지 않을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곳과 어울리지 않아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물건이나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면 좋겠다고 했더니 저렇게 의욕에 차서 가게란 가게는 다 들어가 보고, 노상 가판대도 살피는 거다.
박호승이라면 신나게 노느라 여기가 균열이라는 것도 잊을 텐데 성실하기도 하지. 어서 오라는 듯 이제는 발도 구르고 싶어서 움찔거리는 이세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뭔데 그래?”
고개를 쓱 들이밀며 묻자 이세환이 가판대의 중간에서 약간 오른쪽 부근을 가리키며 파닥거렸다.
푸근한 인상의 주인이 들고 봐도 좋다며 관대하게 허허 웃었다. 그러자 이세환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자그맣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거! 엄청 오래된 거야…!”
“등? 아니다, 모양으로 봐선 괘등(전각이나 누각의 천장에 매다는 등.)이네. 확실히 오래되긴 했다. 칠이 좀 벗겨진 거 같은데.”
“으응, 그리고 여기…. 나무도 살짝….”
양손으로 육각 괘등을 든 이세환이 턱짓으로 윗부분을 가리켰다. 고리가 있는 부근과 그 주변이 유달리 사람 손을 많이 탔는지 반질반질했고, 그보다 조금 밑부분의 나무가 약간 바스러져 있었다.
오래되긴 했지만 화려하게 칠이 된 등을 보아하니 실내용은 아니었고, 얼핏 봐도 종이도 누렇게 변한 것이 사용감이 있어 보였다.
빠르게 괘등을 확인하고, 가판대의 다른 물건이 어떤지 훑었다. 향낭, 벼루, 비녀, 노리개, 가락지, 옛날 자물쇠…. 옛날 물건들이긴 한데, 낡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다른 건 새것인데 하나만 옛것이면 사연이 있다는 뜻이지.’
잘 찾지 않았느냐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이세환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어쩐지 흐뭇하게 우릴 보고 있는 주인에게 눈을 돌렸다.
주인은 괘등을 보면서 어린 친구들이 보는 눈이 좋다고 말하더니 은근한 기대를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나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거지. 어때, 혹시 살 생각이 있니?”
“오래된 물건이니 값이 꽤 되어 보이는데, 사용한 흔적이 많은 걸 감안해서 싸게 주신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런, 그 외투를 입고 있길래 가격엔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더니만, 학생, 의외로 쪼잔하구먼?”
협회 소속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두루마기, 그중에서도 허리께를 동여매고 있는 새카만 세조대와 옥패를 눈짓하는 주인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내 등급이 무엇인지까지 알아보는 눈썰미를 지닌 사람에게 할 말이야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나.
“사연 있는 물건을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비싼 값을 치르고 들이는 건 지양하는지라.”
“어리고, 강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겁이 많구먼그래?”
“기왕이면 신중하다고 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느릿하게 눈을 굴려 주변을 탐색했다.
탁 트인 광장에서 다소 구석진 골목길로 들어와야 보이는 노점상. 오늘의 손님은 진예신이 이 마을의 출입 권한을 통째로 빌려서 우리밖에 없을 것이고, 이곳은 제법 어둡고 외진 곳이라 마을 주민이 올 확률이 낮다.
즉, 여기서 이런저런 얘기를 살짝 소리높여 말해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안절부절못하며 나와 주인을 번갈아 보던 이세환에게 턱짓했고, 이세환은 재빨리 괘등을 가판대 위에 올려뒀다. 그리곤 총총걸음으로 내 뒤쪽에 잽싸게 붙었다.
혹시라도 불안한 일이 생긴다면 내 뒤로 바짝 붙으라고 했던 조언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훌륭한 태도였다.
“아저씨의 말대로 제가 어리고, 강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그만큼 위험한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숨 한 번 쉬는데도 온 신경이 곤두서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거참 피곤하겠구나. 하지만… 그래, 이 마을에 찾아온 사람 중에서 감응자는 진실로 손님이 처음이라서 나도 마음이 급했지 뭔가. 내가 많이 수상해 보인다는 건 아는데, 어찌, 수상한 노점상 아저씨랑 잠깐 얘기 좀 할까?”
제 입으로 수상하다는 사람은 대체로 무고한 사람이다. 물론 예외는 어디나 있고, 내 판단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지만….
초조한 건지 침착해지려고 하는 건지 연신 양손을 비비면서 우리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노점상 주인이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이곳에 들어온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내 감각에 잡히는 이상한 것은 없었고, 이세환이 찾은 것도 이게 처음이라서 대화할 용의가 충분히 있다.
내 신분증이나 다름없는 옥패를 한 번 매만지고는 고개를 끄덕여 대화를 승낙하자 노점상 주인이 반색하며 허리를 숙였다.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찾던 주인은 앉은뱅이 의자를 세 개 꺼내서 자신이 하나 챙기고, 우리에게 나머지를 건넸다.
꽤 긴 얘기가 될 모양이지? 계속 서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호의를 무시하기엔 사소한 것이라 선선히 의자를 받아 이세환과 나란히 앉았다.
“그래….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까….”
바투 깎은 손톱과 두툼한 손가락이 인상적인 손이 깍지를 낀 상태에서도 계속 움찔거렸다.
군데군데 어떻게 생겼는지 의아한 짙은 흉터가 그때마다 움직였는데, 그걸 보던 이세환이 하얗게 질린 낯을 감추려 애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적당히 진정하라고 이세환의 팔뚝을 토닥여주면서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 전에 제 질문에 먼저 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 당신께서는 이 마을의 토박이십니까?”
“응? 오, 그렇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마을에서 살았어.”
“관리인인 담홍도 씨가 말하기를, 이 마을을 이렇게 새로 만드는 데에는 모든 마을 사람이 함께했다고 하던데, 그럼 당신께서도 참여하셨겠습니다.”
“그래, 그랬지. 마을이 좀 더 활기차지기를 바랐거든. 홍도, 그 친구가 먼저 제안했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모두 함께했어. 아, 그런데 진짜 모두는 아냐. 마을이 작긴 해도 오래된 곳이어서 절대 바꿀 수 없다고 한 사람도 있었거든.”
물론 마지막에는 설득에 넘어가 줘서 마을이 이렇게 바뀌었다며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마을 일은 만장일치가 아니면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득에 꽤 공을 들였다는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덧붙인 남자는 내가 채 다음 질문을 하기 전에 손을 가판대 쪽으로 뻗어 괘등을 잡아 내렸다.
내 쪽이 먼저 가벼운 신원조사를 했고, 자신은 신실하게 답했으니 이번엔 이쪽이 할 말을 하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이 괘등도 마을과 함께 세월을 보낸 귀한 거야. 내 동생이 관리하던 거기도 하지. 그 앤 손재주가 좋았거든. 이것저것 만드는 걸 잘했는데, 그보다도 고치는 걸 더 잘했어. 마을 사람 중에서 그 애의 도움을 안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달칵. 괘등의 고리에 왼손 검지를 끼워 대롱대롱 든 남자가 채색이 화려한 종이 부근을 오른손 검지로 가리켰다.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밖에 거는 용이야. 이게 걸려 있던 건물이 우리 마을에 있어서 아주, 아주 의미가 있는 곳이거든? 내 동생은 그 건물 자체를 관리하면서 이 괘등도 늘 걸어뒀는데, 마을을 바꾸기로 하면서 그 건물도 약간의 수리를 하게 됐거든. 그래서 이 등을 내가 맡아두기로 했었어.”
“그…, 그렇게 귀한 거면…. 저어, 팔면 안 되는 게 아닌가요…?”
맡아둔 거라면서요, 하고 이어지는 이세환의 말에 나 역시 긍정했다.
마을에 상징적인 건물이고, 괘등을 걸어두는 곳이면 제법 연식이 있는 한옥일 것 아닌가. 마을을 재구축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지만, 내부에 있는 건물 중 절반은 기왓장이 올라간 건물이니 전체적인 미감에 반하지도 않을 테고, 그러면 괘등이 걸리던 곳도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괘등은 제자리를 찾아가야지, 이런 가판대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처량한 신세가 되진 않을 거다.
“그렇지. 내 동생이 마을을 완전히 떠나지만 않았어도 난 이걸 다시 걸어뒀을 거야.”
“동생분이…, 떠나셨다고요…?”
“정확히는 홍도 그 친구랑 같이 바깥일을 하기로 했었어. 홍도랑 동생이랑은 친한 친구였기도 하고, 재료 보는 눈이 좋았거든. 그런데 마을이 재건되기 전에 갑자기 동생이 이사한 거야. 평생을 여기서 살았는데 뜬금없이, 그것도 이사한 주소도 안 알려주고.”
오른손 검지를 까딱거리면서 알록달록하게 채색된 꽃 그림을 톡톡 건드린 남자가 받아 가라는 듯이 내게 괘등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괘등을 받으며 정문의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전신에 기민하게 두르고 있던 아이온에 집중했다. 언제나 내게 충실한 아이온은 이 괘등은 그저 ‘낡은 것’이고, 그 외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범한 물건임을 알려줬다.
“그 후로 동생의 연락은 뚝 끊겼고, 내게 남은 건 이것뿐이 됐거든. 기왕이면 오래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너희가 왔으니까 말이다. 아깝다고 들고 있는 것보다는 도박하기로 한 거야.”
“도박이면 어디에 무엇을 건 건지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 마을의 존속을 네게 맡기는 것. 난 그게 ‘옳다’에 거는 거야.”
첫인상부터 푸근했던 남자는 그에 어울리는 넉살 좋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들어올 때, 안내소에 들렀겠지?”
“예, 일반 관광 지도와 보물찾기용 지도를 받았습니다.”
이세환이 주섬주섬 자신이 챙겼다며 지도 두 장을 주머니에서 꺼내자 남자가 허허 웃으며 보물찾기용 지도를 가리켰다.
“그걸 완성하면 돼. 괘등의 값은 그걸로 받으마.”
“저희가 완성하지 않고 나가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글쎄다…. 아마 하고 싶지 않아도 하게 될 거 같기는 한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눈썹을 치켜세우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느긋하게 의자를 회수했다. 덩달아 나와 이세환도 일어서서 의자를 건넸고, 남자는 가판대 아래 빈 곳에 의자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검은 패가 실패한다면, 우리에겐 가망이 없으니까 말이다.”
검은 패.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S급 감응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눈앞의 남자를 아저씨라고 지칭하긴 했어도, 신여월과 비슷한 연배가 아니면 잘 쓰지 않아서 거의 사장된 표현인데 보기보다 나이가 있는 건가?
“여하간 이 마을을 돌아보면 알게 되는 게 많을 거란다. 마을 사람들끼리의 약속이 있어서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이게 다야.”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더 묻지는 않겠습니다만, 담홍도 씨께서 안부를 여쭤달라는 말은 있었으니 그것만 묻겠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는 것, 맞습니까?”
내 말에 남자가 재미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쾅! 저 멀리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렸고, 나와 이세환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담홍도 그 친구에게는 이보다 좋을 순 없다고 전해주면 돼. 특히 오늘처럼 소란스러운 건 처음인데, 정말 좋았다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