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70
169화. 망각의 도시 (9)
이세환은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박호승과 김요한은 무슨 생각으로 구석에 꼭꼭 숨어 있는 소심한 저와 친구를 하려고 했던 걸까.’ 하는 약간은 자조적인 생각.
아마 이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낸다면 두 사람 모두 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느냐며 타박하면서도 서로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호승이는 내가 너랑 친구를 하고 싶었으니까 한 거지 거기에 무슨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없다고 하겠지?’
그러면서 짓궂게 눈을 찡긋거리며 덧붙일 것이다.
헉, 설마 나랑 친구가 되는 게 싫었던 거야? 그런 거라면 호승이는 너무 슬퍼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호승이도 몰라!
그리곤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하게 만든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를 것이고, 질색하는 김요한에게 등짝을 한 대 얻어맞을 것이다….
‘호승이는 심각한 일도 그렇지 않게 만드는 데에 일가견이 있어.’
막내를 애지중지하는 부모님과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동생을 아끼는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박호승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유쾌하고 밝았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기운을 사방으로 퍼뜨렸고,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베풀 줄 알았다.
그리고 남이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를 잘 알고 발랄함의 탈을 쓰고 다정하게 말하는 재주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딜 가나 분위기 메이커였고, 말로는 부담스럽다면서 살살 피하지만 리더 역할도 곧잘 해냈다.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이세환은 그런 박호승이 꽤 멋진 친구라고 생각했고, 가끔-김요한이 짜증 내는 걸 즐거움으로 삼을 때-는 신기했다. 김요한의 손은 의외로 매운 편인데 설마 맞는 게 좋은 건가 싶어서.
박호승이 알았더라면 내 취급이 대체 왜 이러냐며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짜낼 법한 생각이었지만, 이세환은 거기까지 상상하지는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자신의 또 다른 절친한 친구에 대해 생각의 방향을 돌렸을 따름이다.
‘요한이…. 요한이는 뭐라고 말하려나? 음…. 아마도, 짐작이지만, 내가 너를 친구 삼은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친구로 삼아준 거라고 할 거 같아.’
매사 시큰둥한 얼굴로 주변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김요한은 외양과는 다르게 항상 기민하게 주위 사람들을 살폈고, 당연하다는 듯이 챙겨주는 편이었다.
박호승은 김요한이 쑥스러워서 티를 안 내는 거라고 말했지만, 이세환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그건 그냥…. 다정한 거야. 요한이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말이야….’
셋 중에서 가장 생일이 빠른 김요한은-날짜로만 따지면 이세환이 더 빠르지만, 빠른년생이라 그의 생일은 제 두 친구보다 1년이 늦었다-딱 그만큼 제 친구들보다 어른스러웠다.
흔히들 표현하는 ‘철이 들었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김요한은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게 다정한 배려를 할 줄 알았다.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세심하게 기억해두고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써줬다.
이세환은 그런 김요한이 좋았지만, 동시에 남들을 돌보는 만큼 자신을 돌보지 않아서 걱정스러웠다.
‘호승이도 비슷한 얘기를 했으니까….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거야….’
어지간해서는 김요한이 하는 일에 방해는 되지 않으려고 했던 그들답지 않게 억지를 부리다시피 해서 ‘망각의 도시’에 오게 된 것도 그 걱정의 연장선에 있다.
김요한은 과할 정도로 자신에게 평가가 박했고, 주변인들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친구의 입장에서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던 거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틈만 나면 고민하던 두 사람이 진예신의 연락에 반색하고 긍정 표시를 보낸 건 당연한 일이었단 얘기다.
‘감응자이기만 했어도 진작에 협회에 함께 등록했겠지만….’
어쩌겠는가. 김요한이 감응에 성공했던 그 흑색 균열을 함께 목격했지만, 박호승과 이세환에게는 인연이 닿지를 않았는데.
낮은 등급이어도 좋으니 전투원이 되고 싶었던 박호승의 실망도 작진 않았지만, 균열에 관심이 많아서 연구원을 목표로 하는 이세환이 그보다 조금 더 실망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의 모든 시간을 같이 보내던 삼총사가 각자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내게 되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실망을 감출 길이 없었다.
‘부협회장님이 연락을 주셔서 다행이었지…. 요한이가 나중에 또 화를 낼 거 같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줬던 진예신을 떠올린 이세환이 습관적으로 가슴께를 꾹 눌렀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은 약간의 편법-백호 그룹과 협회 사이에 몇 장의 계약서가 오가는 정도-으로 김요한의 보호자 자리를 두 사람이 꿰찼을 때나 진예신이 망각의 도시에 김요한을 이끌고 방문하는 작전을 제시했을 때와 비슷한 템포로 두근거렸다.
지금 상황이 제법, 아니 사실은 아주 많이 긴장된다는 뜻이다.
“거기 대충 앉아있어. 할머니는 곧 오실 거야.”
“할머니와 친하신가 봅니다, 정찬희 씨.”
“작은 마을이라서 그래! 서로서로 다 아는 거지. 게다가 난 또래가 마을에 없어서 어릴 땐 어르신들이 놀이 친구를 해주셨거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아주 조금? 더 친해. 아, 할머니는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따라오라는 말에 넙죽 쫓아가는 김요한에게 정말 괜찮냐는 질문을 던지지도 못하고 그의 뒤를 쭐레쭐레 따라붙은 이세환은 마당에 감나무가 댓 그루 심겨 있는 집에 들어서면서도 연신 눈을 굴렸다.
자신을 정찬희라고 소개했던 남자도 같이 가자며 냅다 따라붙은 것이 마음에 걸렸고, 집주인인 할머니가 저희 셋만 남겨두고 자리를 비운 것에 손이 떨렸다.
집주인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자리를 권하는 정찬희의 모습에 입도 바짝바짝 마를 정도였다.
정찬희가 손짓하는 대로 방석에 앉았지만,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요한이는 긴장도 안 되는 걸까….’
양손을 꽉 부여잡은 이세환이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김요한과 정찬희를 슬쩍 봤다가 시선을 돌렸다.
사교성이 몹시 뛰어난 박호승은 물론이거니와 친하지 않은 사람과 있으면 기가 빨린다고 하면서도 초면인 사람과 편안하게 대화하는 김요한을 보고 있노라면 꼭 자신이 못난이처럼 느껴져서 이세환은 친구들과는 다른 제 소심함을 탓했다.
그러다가도 간혹 생각하곤 했다.
‘내가 소심한 것도 맞지만, 너희들의 친화력이 좋은 게 아닐까 싶고….’
지금도 김요한은 정찬희와 호칭 따위로 사사로운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아, 너무해라! 동생들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그냥 형이라고 불러주면 안 되는 거야?”
“죄송합니다. 제가 낯을 많이 가려서 형이라는 호칭은 익숙지 않습니다, 정찬희 씨.”
“와, 낯을 가린다고?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지금도 충분히 가리고 있습니다, 정찬희 씨.”
“꼬박꼬박 씨라고 붙이는구나…. 너, 의외로 굉장히 성깔 있네.”
넉살 좋은 박호승이었다면 형이라고 부르겠다고 털털하게 말했을 거고, 평범한 사교성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어떤 호칭이 더 좋으냐고 물었을 텐데 남다른 철벽을 두르고 있는 김요한은 단호했다.
어쩐지 귓가에 저거 완전 고집쟁이라며 쯧쯧 혀를 차는 박호승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이세환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툴툴대는 남자의 모습에서 저와 김요한에게 자주 엉겨 붙는 박호승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이세환이 슬그머니 눈을 비볐다.
그러자 떨떠름하게 남자를 보면서도 꼬박꼬박 대꾸하고 있던 김요한이 눈에 뭐 들어갔냐면서 자연스럽게 이세환의 손목을 잡아 내리곤 빤히 응시했다.
이세환이 어설프게 웃으면서 그냥 잠깐 간지러웠던 거라고 우물거렸고, 김요한이 의심스럽다는 듯 게슴츠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세환이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고, 남자가 너희 정말 친해 보인다며 부러움을 담아 말하는 순간 집주인인 할머니가 문을 벌컥 열고 나오셨다.
“쯧, 찬희 이눔아, 넌 가서 일 안 하냐? 여기서 노닥거리면 화담댁이 나헌티 뭐라 하잖어!”
“에이~, 할매. 나랑 있으면 좋아하면서 그런다~! 글구 오늘은 좀 쉬어두 되어. 특별한 손님이 왔으니까. 글치?”
“귀인인지도 몰렀으면서 말하는 거 보소. 니가 그러니께 아직 애인 거여. 얼렁 가서 일해, 이눔아! 니가 예서 할 일은 없으니께!”
자기한테 너무 매정한 거 아니냐면서 징징거리는 남자를 할머니는 가차 없이 집 밖으로 쫓아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따라오지 말라고 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 생각을 이세환만 한 것은 아닌지 남자도 질질 밀려나면서 들여보내 줬으면서 너무한다고 목청 높여 반항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팽하니 코웃음을 치고는 잠깐 말동무했으면 일 끝난 거니까 빨리 나가라며 남자의 엉덩이를 뻥- 걷어 차버렸다.
이 나이 먹어서도 이렇게 쫓겨나야 하냐면서 남자가 입으로만 엉엉 울었고, 할머니는 다시 한번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훌륭하게 남자를 제압했다.
“어휴, 정신 쏙 빠진 놈 같으니라구. 노인네가 한마디 하면 척하구 듣는 꼴이 없지, 아주!”
“그래도 두 분, 아주 친밀해 보이셨습니다. 사이 좋은 조손처럼 보입니다.”
“에잉, 손주는 무슨. 저눔아가 요만할 때부터 다 같이 키워서 버릇이 없어서 그렇수다. 귀한 분 모셔놓고 철딱서니 없는 꼴만 보여드려서 미안하구랴.”
“저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고, 그리 귀한 사람도 아니니 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습니다, 할머님.”
오…. 어린 학생인데도 무려 S급 감응자인 사람을 평범하다고 하는 게 옳을까?
원래도 한 뻔뻔함 했던 친구지만, 감응자가 된 이후로는 더 입에 발린 말을 잘도 하는 느낌이 들어서 이세환이 멍하게 김요한을 쳐다봤다.
김요한은 어른들을 상대할 때 자주 짓고는 하는 표정, 그러니까 신뢰감이 느껴지는 단정한 미소와 총기 넘치는 눈빛을 하고서 스몰 토크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 들고 계신 게, 제게 보여주실 물건입니까?”
“그려. 자네들이 찾는 보물 지도랑은 딱히 관련이 없지만서두.”
할머니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두더니 거침없이 풀어헤쳤다.
직접 만든 것처럼 보이는 조각 보자기가 싸매고 있던 건 값이 꽤 나갈 것처럼 보이는 나무함이었다. 화려한 자개가 상자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옅은 전등 빛 아래에서도 반짝반짝했다.
할머니는 상자를 김요한 쪽으로 밀면서 열어보라 말했고, 잠시 상자를 응시하던 김요한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상자를 열었다.
그 짧은 사이 초록빛이 점멸했던 눈동자가 김요한의 신중함을 드러냈기에 이세환은 살짝 입이 썼다. 예전보다도 훨씬 힘든 생활을 하는구나, 요한아.
“이건….”
상자에 곱게 담겨 있는 건, 이세환의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나무 새였다.
조각이 서툰 사람이 만들었는지 여기저기 조금 모났지만, 푸른색이 꼼꼼하게 칠해진 나무 새는 그럭저럭 괜찮게 생겼다.
이세환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나무 장식품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가 하얗게 질린 김요한의 뺨을 보고는 흠칫 굳어버렸다.
‘세상에….’
이세환이 다급하게 김요한의 손을 잡았다. 굉장히 차가운 손은 아주 오래전, 김요한이 과도한 스트레스로 쓰러졌을 때와 비슷해서 이세환은 괜히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