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90
89화. 오래된 나각과 낡은 노리개 (3)
고송찬이 스윽 내미는 두꺼운 보고서와 윤혜아의 태평한 차 마시는 소리와 함께 내 위가 사르르 녹는 소리가 들렸다.
반도 안 남은 커피를 탁자에 두고, 보고서를 당겨서 빠르게 훑었다. 종이가 한 장 넘어갈 때마다 고송찬의 안색이 우중충해졌다.
탁. 마지막 보고서까지 확인하고 소리가 나게 내려두자 고송찬의 어깨가 리드미컬하게 위로 튀었다. 평소였다면 살짝 놀려먹으면서 분위기를 풀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되질 못 했다.
‘그러니까 지금 난장판이 됐다는 거잖아.’
강나비와 함께 해결했던 보라색 균열이 하나만 생기진 않을 거라는 것쯤은 예상했다.
풍월주가 바보도 아니고, 자신이 적으로 규정한 협회에 엿을 먹일 수 있다면 어떤 짓이라도 하는 자가 이런 좋은 먹잇감을 그냥 버려두지는 않을 것 아닌가.
더군다나 용왕의 성격을 이미 알고 있었던 풍월주는 나와 강나비가 균열에 입장한 순간부터 자신의 패 하나가 뒤집혔다는 걸 예상했을 것이다.
‘그자가 일방적으로 정보만 내줄 패를 깠겠냐고. 이 시점에 처음 보는 보라색 균열에 협회가 집중했으면 하는 거지. 분명 다른 일을 꾸미고 있고 연막으로 이 패를 내민 거야.’
이런 상황에서 풍월주 측이 다른 대피소의 결계석에 과연 손을 대지 않았을까?
균열 공략이 최우선 과제인 협회에 부정적인 여론을 만들고 싶을 때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대피소의 파괴’인데?
내가 풍월주였어도 온갖 대피소의 결계석에 손을 대고, 보라색 균열을 늘려서 협회의 정신을 쏙 빼놓을 것이다.
‘다만 움직이는 속도가 예상보다도 빨라. 이제 7월이라고. 게임 타임라인 상으로 아직 첫해 여름이 다 지나지도 않았어. 풍월주 쪽에서 이렇게까지 노력을 기울여서 숨길 무언가가 있다는 건데.’
톡톡,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다가 고송찬에게 시선을 던졌다.
물어보기만 한다면 뭐든 대답해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그에게 일단 현재 상황 파악에 가장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보고서 내용으로 봐서는 아직 균열이 열린 곳은 없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결계석이 완전히 깨진 곳은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대피소가 낙후된 곳이 좀 있습니다.”
“대피소의 시설 낙후라면 진작 얘기가 나왔어야 합니다. 매번 지사에서 올라왔던 보고서나 이전에 보안부에서 다녀왔던 현장 보고서에는 그런 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어 올린 고송찬은 굉장히 죄송하다는 듯 쭈그러든 얼굴이 됐다.
단단한 체격만큼이나 단단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은 촌극이 따로 없었지만, 풍월주로 가득 찬 내 머리는 웃음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전혀 없었다.
사죄는 됐으니까 이성적으로 설명이라 하라는 눈으로 고송찬을 빤히 쳐다봤다.
고송찬은 미리 내게 무슨 말을 할지 정해놨던 것처럼 숨을 한번 크게 쉬고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부장님께서 보라색 균열을 확인하신 뒤로 전국의 대피소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감응자 눈에는 특이사항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셔서 고민하다가 휴가를 받았던 직원 한 명이 대피소 근처를 가족과 슬쩍 다녀와 보겠다고 제안했죠.”
보안부는 아무래도 결계를 직접 다루는 부서다 보니까 전원이 감응자라 이런 꾀를 낸 듯싶었다.
휴가까지 받아 놓고 일하겠다는 심보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성실하면 나야 좋다.
아이디어를 낸 직원은, 가족 중 혼자만 감응자여서 일부러 민간인인 가족들을 데리고 대피소 근처로 여행지를 잡고 휴가를 갔다고 한다.
“대피소는 그 지역의 랜드마크인 경우가 많으니까 평소에도 오가는 사람도 많고, 관광으로도 제법 유명하잖습니까. 그 친구도 그런 식으로 갔는데, 처음에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몰랐다고 합니다. 평소 보고서에 올라왔던 대로 시설은 깨끗했고, 결계석도 멀쩡해 보였다더군요. 그런데 그때, 동행했던 동생이 그러더랍니다. 형, 저 문양은 협회에서 새긴 거야? 하고.”
최이안과 신여월의 감각까지 속여넘겼던 풍월주의 문장일 것이다. 어떻게 생긴 문양인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느덧 텅 빈 컵을 내려둔 윤혜아가 다소 갈라진 입술을 문지르다가 팔짱을 꼈다.
“그때부터 기척이 달라지더랍니다. 결계석에 이상한 기운이 섞여든 게 보였고, 대피소도 군데군데 낡은 부분이 보였대요. 은근슬쩍 동생에게 저기 무너질 것 같지 않냐고 낙후된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는데, 요즘 피곤하냐는 대답을 들었다고 했으니까 일반인들 눈에는 문양은 보여도 그 외의 부분은 보이지 않는 게 아마 맞을 겁니다.”
“이미 한번 들은 설명이지만, 정말 이해가 안 된다니까. 문양으로 감응자의 눈을 가리고, 동시에 그 문양으로 일반인들의 감각도 혼동을 일으켰다는 거잖아? 이런 오버 테크놀로지는 아직 우리 연구부에서도 불가능하다고.”
기술부에서도 똑같은 말을 할 거라며 윤혜아가 투덜거렸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대한민국, 아니 세계를 통틀어서 협회의 연구부는 명성이 드높다. 협회장 신여월이 아낌없이 투자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늘이 내린 보물로 불리는 윤혜아가 온 힘을 다해서 실적을 뽑아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풍월주는 정말 ‘규격 외’의 존재라는 것이 되겠다.
윤혜아가 못하다는 게 아니라 풍월주가 수많은 균열을 오가면서 익힌 기술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거다.
“연구부에서도 아직 잘 모르는 기술이라면, 결국 뒷수습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송찬 씨. 연구부 자존심이 있다고요. 당연히 파훼법을 찾아야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건 이번만으로도 충분해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고송찬에게 당당하게 대꾸한 윤혜아는 이내 한숨을 푹 쉬면서 말을 덧붙였다.
“물론 시간은 필요해요. 그동안 보안부가 고생을 해줘야 하는 건 변함이 없죠.”
“방법이 생기면 줄어들 일이니 괜찮습니다. 얼마나 걸리던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요한 부장님이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반드시 알아낼 예정이니까요.”
대신 이 보고서를 정보 차원에서 공유해달라는 말에 바로 넘겨줬다.
기술적인 측면은 내가 본다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중요한 내용은 이미 확인했으며, 고송찬이 더 자세하게 설명해줬기에 윤혜아가 가져가도 상관이 없었다.
윤혜아는 고맙다며 보고서를 제 앞으로 끌고 갔고, 고송찬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걸 보니 긴장을 많이 하긴 했나 보다.
“그래서 우선 대피소의 당장 부서질 것 같은 부분은 저희가 들고 다니는 임시 복구 키트로 해결했습니다만 결계석은 손을 댈 수가 없어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보고서를 제출한다고 자리를 비웠다가는 무슨 일이 더 생길까 봐 무서워서 그렇기도 하고, 전국의 대피소를 전부 확인했고 그중 몇 군데만이 문제라 우선은 있는 인원으로 현상 유지 중입니다.”
“그럼 지금 필요한 건 역시 결계석을 바꿀 수 있는 기술부 쪽 인원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이쪽은 제가 협력을 요청해두겠습니다. 대기팀 중에서 닷새가 넘은 팀이 있다면, 현재 본부에 남아 있는 팀과 교체하십시오. 그리고 윤혜아 부장님. 혹시 연구원도 함께 보내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물론이죠. 이쪽은 감응자와 비감응자 비율이 비슷하니까 하나씩 딸려 보낼게요. 직접 보면 뭐라도 더 건져오겠죠.”
윤혜아의 시원한 대답에 고송찬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나도 편하게 남은 커피를 싹 마셨다. 그새 얼음이 녹아서 밍밍해졌지만 나름 먹을만했다.
고송찬은 식어버린 차를 한입에 털어 넣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우리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전 보안부에 안내 사항을 전달하고 퇴근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 고송찬 씨가 다녀온 곳은 문제가 없었습니까? 보고서가 평소와 같았던 것 같습니다.”
“네! 강원도 전체 대피소를 확인했는데, 괜찮았습니다. 동행은 여기 계시는 윤혜아 부장님하고 민원 업무부의 비감응자 직원 한 명이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퇴근하고 푹 쉬십시오.”
꾸벅꾸벅 인사한 고송찬이 소리도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아직 용건이 남아 있던 윤혜아는 천연덕스럽게 기술부 협력이 원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며 너스레를 떨다가 한순간에 입을 딱 다물었다.
바깥쪽에서 들리던 고송찬의 발걸음 소리가 온전히 사라졌을 때, 내 집무실은 순식간에 정적으로 가득 찼다.
윤혜아는 슬쩍 문 쪽을 눈짓하고는 바닥에 있던 밀봉된 상자를 탁자 위로 올리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보안부장 앞에서 보안부인 고송찬 씨를 못 믿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건 개인적인 부탁이랑 부장으로서의 요청이 섞인 거라서 말이야.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는 말아줘.”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협회가 흉흉한데, 무엇이든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지. 언젠가는 터질 일도 꽤 많았으니까 지금이 과도기려나 싶기도 해.”
눈썹을 찡그린 윤혜아가 호쾌하게 테이프를 뜯었다. 쫙 찢긴 테이프를 돌돌 말아서 휴지통에 던진 윤혜아는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꽤 커다란 함을 꺼냈다.
진한 녹색의 보따리에 감싸인 함은 묘하게 특이한 기척이 서려 있었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난주 일요일, 그러니까 너희가 균열을 해결하고 돌아온 날로부터 나흘째 되는 날이지? 여월 님한테서 먼저 얘기를 듣고 나서 오랜만에 스승님을 뵙고 왔어. 이건 거기서 받아온 거야.”
“스승님? 선배의 스승님은 협회장님 아니셨습니까?”
“그야 전투는 협회장님께 배웠지. 정확히는 마석을 이용한 전투라고 해야 하지만? 그 외의 나머지 부분의 스승님은 따로 계셔. 워낙 두문불출하는 분이시고, 협회에 개입하는 건 싫다고 하셔서 자주 뵐 수는 없었는데 이번에 시간을 좀 냈지. 나도, 스승님도.”
윤혜아는 게임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던 뒷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어놓으며 꽁꽁 묶여 있는 보따리의 매듭을 풀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자개함의 모습이 드러났다.
학과 소나무가 인상적인 새카만 함과 오색으로 빛나는 목단이 가득한 붉은 함, 그리고 손바닥 위에 올라갈 정도의 작지만, 십장생을 자개로 빼곡하게 채워서 화려한 십각 보석함까지 총 3개였다.
윤혜아는 그중 새카만 함의 뚜껑을 활짝 열었다.
“이건….”
“요한이는 처음 보려나? 쉽게 볼 수 없는 거기는 해.”
“실물은 처음입니다. 나각, 맞습니까?”
“응. 꽤 낡았지? 그래도 장물은 아냐. 오래된 건 맞지만.”
푹신해 보이는 붉은 쿠션 위에는 사람 머리보다 큰 소라로 만들어진 나각이 놓여 있었다.
윤혜아의 말대로 쉬이 볼 수 없는 악기였고, 소리가 제대로 날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낡은 태가 났다.
윤혜아가 괜히 스승님의 존재를 말하진 않았을 거고, 아무래도 이 나각의 출처가 그 스승이라는 자인가 본데.
‘이게 나한테 할 부탁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의아한 마음에 나각에서 시선을 떼고 윤혜아를 쳐다봤다. 윤혜아는 그런 내게 가타부타 설명을 추가하지 않고 손목시계만을 한 번 확인했다.
꼭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자세에 내가 말을 떼려는데, 띠리릭 내선 전화가 울렸다. 어서 받아보라는 윤혜아의 눈짓에 책상 쪽으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네, 보안부 부장실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요한 부장님! 1층 카운터입니다. 부장님을 뵙고 싶다는 손님이 오셨는데, 부장님과 약속되어 있다고 하셔서요. 하지만 저희에게는 일정 기록이 없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손님? 인상착의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딱히 찾아올 사람은 없을 텐데? 아, 설마 윤혜아가 부른 손님인가? 일단은 내 이름을 대고 들어오려는 자였기 때문에 침착하게 묻자 또박또박한 대답이 돌아왔다.
-양복에 중절모를 쓴 신사분이세요. 자세가 약간 구부정하시고, 입술이 되게 가느시고요. 케이지를 하나 들고 오셨는데…. 아, 흰 토끼네요. 전반적으로 아이온 반응은 없어요.
인물의 특징을 잘 잡아내는 안내 데스크 담당 직원의 말에 곧바로 떠오르는 이들이 있었다. 등이 조금 굽은 자라, 주오와 토끼 선옥.
의외의 손님에 한숨을 삼키며 올려보내라고 대답하자 윤혜아가 방긋 웃었다.
전화를 건 직원이 손님을 집무실까지 안내해주겠다고 해서 그러라며 부탁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윤혜아의 앞으로 돌아가자 그녀가 그제야 말을 이었다.
“이 나각의 본래 주인은 용왕님이셔.”
아주 오래전, 용왕 대신 윤혜아의 스승이 대신 보관하기로 해서 맡아두고 있었고, 그 물건이 지금 여기에 있는 거라며 그녀가 설명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아마 요한이는 내 스승님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헛웃음이 절로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용왕의 물건을 맡아줄 정도로 친분이 있고, 인간인 윤혜아를 제자로 받을 아량이 있는 존재.
용궁에서 용왕이 말했던 내기를 하는 ‘친구’들과 소설에 스치듯 지나갔던 묘사를 종합하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산군(山君).”
그것도 용왕 못지않게 오래 산 금강산의 터줏대감이자 풍월주의 손에 명을 달리할 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