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31
241. 공방전(4)
3시 7분.
현재 시각 종합주가지수는 전일 대비 -280포인트가량 떨어진 2077.17. 전일 대비 -12% 하락한 상태.
변변찮은 반등도 없이 주가는 죽죽 밀리고 있었다.
짝짝.
서하나의 맞은 편에 앉은 백나희가 손뼉을 쳤다.
한참 넋을 잃고 바라보던 서하나의 정신이 다시 되돌아왔다.
“이봐, 서 사장, 그러다가 전 재산 다 날리는 거야. 평생 호의호식하던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옷 벗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냐. 눈 찔끔 감고 하루만 수모당하면 돼.”
조언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는 백나희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녀는 맞은 편에 앉은 백나희를 바라봤다.
투명한 유리 테이블이라 백나희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진한 푸른색 원피스의 짧은 치마. 맞은 편에 앉은 그녀의 눈에 짧은 치마 속 붉은 팬티가 그대로 들어왔다. 갑자기 그녀가 업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도 모르게 스커트를 끌어내리고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옆에서 박강수가 키득거리며 거들었다.
“하하, 서 사장님! 이곳에 들어올 때 이미 아셨겠지만, 오늘 몸 성히 이곳을 나가지 못합니다. 큭큭, 아까 전 그 가도건설 사장 아들 있죠? 그놈이 머리 똑똑한 년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협박일까. 서하나는 박강수를 노려봤다.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때 학과 선후배랍시고 알고 지내던 사이 아니었던가.
박강수가 오히려 그녀를 향해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빨리 결정해야 할 겁니다. 30분 넘으면 아무 의미 없다는 거 아시죠? 우리도 지시 내리고 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지금도 이미 시간이 부족해요. 그러다가 재산 다 날리고 몸도 버리고 그렇게 될 겁니다. 그나마 재산을 건지는 게 낫지 않나요?”
혐오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듯이 분노가 들끓으면서도 서하나는 갈등을 잠재우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재산이라도 일부 건지는 게 옳을까. 그 재산이란 게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조 단위의 재산이다. 자신의 몸값이라 보기에 지나치게 많은 금액이 맞다.
박강수의 말을 듣다 보니 예전에 보았던 다이어리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 다이어리에 따르면 애초에 김현아는 박강수에게 수모를 당해 자살을 했고 자신은 가도건설 사장에게 수모를 당한 후 오도욱에게도 버림받았다.
그게 원래 자신의 운명이었다.
그 운명이 다이어리 덕에 바뀌었다. 그날 가도건설에서 당했어야 할 그 수모가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더 심한 모습으로.
지금 자신이 항복선언을 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자신에 대한 저들의 목표치는 분명해 보였다. 아마 강제로라도 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수모를 안길 것이다.
그다음 오도욱이나 박강수가 자신을 건드릴까? 젊었을 시절이라면 필연적인 수순이었겠지만 지금은 알 수 없었다. 거기에다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믿고 있는 가도건설 사장 아들도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몸을 향한 그의 복수는 피할 재간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본다면 항복 요구를 받아들이든 아니든 바뀌는 것은 SJ 그룹과 관련된 일부분뿐이고 자신의 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을까.
이런 삶은 살고 싶지 않았는데…….
예쁜 것도 죄였나 보다. 이런 더러운 운명을 도무지 피할 재간이 없으니.
이게 원래의 운명이라면 기꺼이 감수하고 유서준에게 몇 푼이라도 남겨주고 싶었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서하나는 몸을 감싸고 있던 하얀색 외투를 벗어 소파 옆에 놓았다. 짙은 붉은 빛의 정장이 밖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움직임에 모두가 반색했다.
서하나는 딱딱하게 안색을 굳힌 채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앉은 채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치마 안으로 손을 넣어 스타킹을 벗었다.
오도욱과 박강수의 눈길이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유리 테이블이라 조금은 보였으려나?
백나희가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었다. 그녀의 눈은 ‘도도하던 네년도 별 수 없구나’란 빛을 띠고 있었다.
서하나는 벗은 스타킹을 슬쩍 들어 상대에게 보이고는 벗어놓은 외투 위에 놓았다.
“흐흐, 올라가서 벗지?”
오도욱이 흐뭇한 미소를 띠며 유리 테이블을 두드렸다.
갑자기 수치심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왕 결심한 것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서하나는 천천히 소파 위로 올라간 다음 한쪽 발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겉옷과 맞춰 입은 붉은색 힐이 유리 테이블에 선명했다.
그녀의 눈에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 모니터가 들어왔다.
시세가 급박하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8%.
조금 전에 -12%였었는데?
그녀의 눈이 모니터에 고정됐다.
**
유서준은 매수 주문을 넣었다.
선물 매수, 콜옵션 매수. 상방향 풀 베팅이었다.
동시에 프로그램 사전매매 공시에 SJ 증권과 투자은행의 프로그램 매수 물량을 공시했다.
공시 총 규모는 10조. LTCM 연합군의 22조 매도 공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 그래도 오랜만의 매수 공시에 시장 투자가가 반응했다.
유서준의 무차별 매수 주문에 지수는 빠르게 반등했다. -12%에서 -8%로.
하지만 그뿐이었다.
상승하던 지수는 다시 벽에 부딪힌 것처럼 주춤했다.
그때 각 기업의 전자공시 게시판 글이 빠르게 올라갔다.
유서준이 기대했던 자사주 매입 공시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
– 삼성전자. 앞으로 3개월간 2000만 주 자사주 매입 공시. 최근 폭락한 주가를 부양하여 주주가치를 제고하기 위함.
– 현대자동차. 앞으로 2개월간 2000만 주 자사주 매입 공시. 현재의 주가는 글로벌 5인 회사 위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발표.
– SK하이닉스. 앞으로 6개월간 2000만 주 자사주 매입 공시. 유입된 해외자본으로 주가 부양할 듯.
– LG화학. 앞으로 1개월 내 600만 주 자사주 매입 공시. 주가 회복 때까지 계속 매입하겠다고 발표.
*
전경련 모임 때 유서준이 호소했던 마지막 승부수가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난관은 있었다. 자사주 매입 물량 중 과연 오늘 얼마나 매수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오늘이 아닌 내일부터라면 사실상 유서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늘 매수할 수량은 마감 동시호가를 지켜봐야 알 것이다.
상장회사의 자사주 부양조치에 일반 투자자가 화답했다.
주춤하던 상승세가 다시 탄력을 받았다.
-8%에서 -4%로 순식간에 하락 폭을 좁혔다.
유서준은 자신의 개인 자산 계정에서 무차별로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주식가격 상승에 따라 선물지수도 따라서 움직였다.
급격하게 움직이는 매수매도 세력 변화에 종합주가지수와 선물가격, 옵션 가격이 제각각 움직였다.
3시 20분.
마감 동시호가가 시작됐다.
선물과 옵션은 거래가 중지됐다.
운명의 10분이 시작됐다.
**
유리 테이블에 한쪽 발을 올렸던 서하나의 동작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모니터에 나타난 3시 20분의 종합주가지수는 2354.62. 사실상 어제와 같은 수준.
-12%까지 떨어졌던 주가지수가 보합까지 불과 10여 분 만에 끌어올려 진 것이다.
그녀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실내에 있던 세 사람 모두의 안색이 확 변했다.
이제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서하나가 아니었다. 모두 모니터의 주가지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서하나는 슬그머니 발을 내리고 다시 원래의 자리에 앉았다. 한순간이었지만 굴복했던 자신이 미웠다.
마감 동시호가 10분.
마감 예상 종합주가지수가 표시됐다.
사전에 예고되었던 프로그램 매도 물량 가운데 일부가 쏟아졌다. 순식간에 -6%로 다시 지수가 내려앉았다.
해솔 증권을 비롯한 중소형 증권사에서 사전 공시한 프로그램 물량이었다.
당황했던 오도욱이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SJ의 반격이 제법이지만 승부는 결정 났어.”
그는 주가지수가 다시 LTCM의 목표치로 움직일 것을 의심치 않았다.
박강수 역시 승부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연기금 물량이 제대로 퍼부어지면…….”
그는 미소를 지으며 서하나를 슬쩍 봤다.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서하나를 보며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박강수의 바람과 달리 곧바로 프로그램 매수 물량의 반격이 있었다.
하락 폭이 -4%로 줄었다.
그다음에 수조에 해당할 것으로 보이는 주식 매수 물량이 다시 집중됐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이것은 이영호의 개인 자산 물량이었다.
곧이어 유서준 개인 재산에 해당하는 매수 물량이 들어왔다.
주가지수는 플러스로 반전됐다.
이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장사의 자사주 매수 물량. 종목별로 주가가 천장을 뚫을 듯 치솟으며 예상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예상 종합주가지수도 점차 상승했다.
3시 23분. 마감 예상 종합주가지수는 2550을 넘어섰다. +8%로 이틀 전 종합주가지수를 회복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박강수였다.
그는 황급히 휴대폰을 들어 송예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송예은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SJ의 마지막 반격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그녀가 쥐고 있는 매도 주문은 22조. 사전공시된 물량 22조는 그녀의 매도개시 지령 하나면 폭포처럼 쏟아질 것이다.
그 22조의 절반은 LTCM의 매도 물량으로 사실상 그녀가 직접 엔터를 쳐서 주문 내야 하는 물량이고 나머지는 각 운용사에 배당되어있는 물량이다.
모니터 화면의 메신저에서 문의가 폭발하고 있었다.
대부분 매도 실행을 언제 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녀의 매도 지령이 없으니 사전공시된 연기금 물량을 매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송예은의 손가락이 몇 번이나 매도개시란 글자를 쳤다가 다시 지웠다.
며칠 전부터 갈등하던 심경이 막판에 한꺼번에 몰려왔다.
“후욱-”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유서준을 망가트리면 속이 시원할까. 서하나가 망가지면 유서준의 가정이 깨지고 그녀에게 돌아올까. 나의 욕심을 위해 국가를 외환위기로 밀어 넣어도 될까.
LTCM에 입사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국가에 해가 되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 역시 한국의 금융산업 발전을 위해 기꺼이 리먼 브러더스 인수에 동참하고 도움을 주었다.
지금 그녀가 메신저로 매도 지령을 내리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삶은 바뀔 것이다. LTCM은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으로 올라서고 그녀는 그 은행 내에서 손에 꼽히는 실권자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유서준이 돌아올까. 돌아온다는 게 말이나 되나? 단 한 번이라도 유서준과 연인관계였던 적이 있었던가.
송예은은 자신의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서 그녀에게 온 편지 하나가 모습을 내밀었다.
발신인 김현아. 수신인 송예은.
며칠 전 받았던 편지였다.
그녀의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아주 오래전 유서준에게 과외를 배울 때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
“흐음, 전 미국으로 유학 가고 싶어요. 일단 국내에서 학부 과정을 마치고 대학원 과정은 미국으로 갈 거예요.”
“왜?”
“뭐랄까요, 미국 가면 선진 학문을 배울 수 있잖아요, 그곳에서 새로운 이론을 배워 국내로 돌아와 우리나라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어요.”
“좋은 생각이네.”
*
그 유학 목적이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것이었나.
자신의 삶에 대한 자책이 일었다.
사실 그녀가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목표처럼 학문적으로 뭔가를 성취한 것도 아니었다.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기껏 했다는 것이 외국 투기자본을 도와 국가를 망치는 일이었나.
삐빅-
메신저에서 그녀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휴대폰 벨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흘낏 본 휴대폰 창에는 박강수라고 떠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요란한 휴대폰 소음에 권대만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전화 안 받아?”
송예은은 고개를 저었다.
권대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 일에 열중했다.
3시 27분.
3분 전이었다.
송예은은 모니터를 껐다. 그녀는 키보드를 한쪽으로 치우고 엎드렸다.
조용하게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