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30
240. 공방전(3)
SJ 증권 본사 트레이딩 룸에 입주해 있는 심정국은 사장실을 방문하려 했다.
비서실에서 전하는 내용은 현재 서하나 사장이 자리를 비우고 있다는 것. 오늘 같은 중요한 시국에 사장이 자리를 비우고 있다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어쨌든 서하나가 없으니 그는 자신의 트레이딩 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심란한 마음에 계단을 이용했다.
계단 중간에서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탁탁.
오늘따라 라이터도 시원찮아 불이 붙지 않았다.
몇 차례 시도를 거듭한 끝에 간신히 불을 붙인 그는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였다.
“후우.”
그의 입에서 나온 담배 연기가 동그란 모양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하루하루를 주식 투자로 먹고사는 그가 최근의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서하나가 곤경에 몰려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가 시기하는 유서준이 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고소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서하나가 고통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는 예전에 서하나에게서 도움을 받았던 많은 시간을 떠올렸다.
서하나가 금전적으로 도와준 적은 없었으나 주식 시황을 통해 그에게 방향을 알려주었던 적은 많았다. 무엇보다 그가 주식으로 돈을 잃고 좌절해 있을 때 많은 위로를 해주었다. 아마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미 그는 파산하여 주식에서 손을 뗐을 것이다.
심정국은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빤 다음 허공으로 연기를 날렸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더니…….”
이 SJ 증권은 삼대는커녕 30년밖에 유지하지 못할 모양이었다.
문득 초기 명동 시절의 서하나 모습이 떠올랐다.
명동 인베스트먼트에서 SJ 투자자문이 살림을 시작했던 시절, 유서준을 따라온 그녀는 그에게 여신이었다.
단순히 그녀의 미모에 현혹되어 찝쩍거리기를 몇 차례, 유서준이 미워 괜스레 시비를 걸어본 것이 몇 차례. 그러다가 정이 들었을까.
그녀의 팬카페에 가입하고 그녀의 팬으로서 쫓아다녔다.
이제 그녀는 행운의 여신이었고 주식에서 수익을 전해주는 주식 여신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파멸로 치닫고 있다.
심정국은 담뱃불을 껐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그녀를 믿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왔다. 오늘도 그녀를 믿고 싶었다.
이성은 하방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감성은 그녀를 배신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래,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위다 위.”
심정국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송예은은 LTCM 지부에서 전체적인 트레이딩을 조율하고 있었다.
이미 전체적인 작전은 내려진 상황. 그녀가 할 일은 이행사항을 점검하고 미진한 부분을 일부 보완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남은 것도 없었다.
반격을 가해오는 매수 세력을 적절하게 무력화시키고 마지막 10분 동안 연기금을 비롯한 LTCM과 각 증권사의 매도 물량을 쏟아내게 하면 끝이었다.
오늘의 목표치는 종합주가지수 2000. 짧게는 마지막 2000선을 밟았던 10년 전, 길게는 처음 2000선에 도달했던 20년 전으로 한국의 주식시장을 후퇴시키는 작업이었다.
예상대로 장이 마감되면 LTCM이 얻는 이익은 무려 10조에 달하고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 반면 SJ가 입은 손실은 15조를 넘어서고 사실상 파산에 이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내 증권사도 일부 재편될 것이다. SJ의 몰락과 함께 대형 증권사 몇의 세력이 위축되고 해솔 증권을 위시한 중소형 증권사 몇 군데가 급격히 부상할 것이다.
박강수 말에 따르면 그것이 금감원의 의지라나.
삐빅-
모니터에 떠 있는 메신저에 다시 보고가 들어왔다.
BH 증권. 풋옵션 매수 진입을 완료했다는 보고였다.
그녀는 포지션 보고를 접수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송예은은 메신저를 통해 들어오는 아군의 메시지에 재빨리 답장하며 주식시장 움직임을 살폈다.
-7%에서 잔잔한 파동을 그리고 있었다.
“해솔 증권이나 BH 증권은 원래 계약된 수량보다 더 많은 포지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송예은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돈의 습성이다. 이익을 볼 것이 뻔한데 머뭇거릴 자는 없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번 작전을 통해 송예은은 개인적으로 매도 포지션을 잡지 않았다. 그가 아는 지인에게도 이런 정보를 알리지 않았다. 뭔가 내부에서 그녀를 강력하게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국가를 배신하지 못하는 마음인지 아니면 유서준을 차마 망가트리지 못하는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오늘이 지나면 그녀의 삶에서 큰 획이 그어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녀의 마음을 붙잡았던 유서준이라는 존재를 완벽하게 떨쳐내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사무실 반대편에서 열심히 모니터를 보고 있는 권대만을 주시했다.
권대만은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권대만이 맡은 분야는 외환시장, 이상하게도 어제부터 외환시장은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주식시장이 망가지면 회복 불가능이 될 것은 마찬가지지만.
“잘 돼?”
송예은이 권대만에게 물었다.
권대만이 한 손으로 머리를 헝클리며 그녀 쪽을 쳐다봤다.
“뜻대로는 안 되지만 예상 범위 안이야.”
별문제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쪽은?”
“여기도. 문제없어.”
송예은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SJ 측의 반격은 언제 시작될까. 그 반격을 LTCM의 자금으로 해결하면 위험 또한 끝이었다. 그녀는 예상보다 손쉽게 승리의 문턱에 닿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무리 SJ 측에서 반격하더라도 치밀하게 준비한 LTCM에 대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비어 있는 박강수의 자리를 향했다.
박강수는 오전부터 금감원과의 협의가 필요하다며 자리를 비웠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박강수는 금감원장 오도욱과 자축연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그녀는 며칠 전 박강수가 어떤 사람과 통화했던 내용이 생각났다. 누군지 모르지만 박강수는 전화상으로 가도건설, 백나희, 서하나 납치 같은 말을 열거했었다.
박강수가 오도욱과 함께 엠퍼러에서 별별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눈치채던 그녀는 오늘 무슨 일이 발생할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서하나를 납치하고 납치한 자에게 넘길 테니 알아서 하라고 했던가. 송예은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자신의 고국을 외환위기로 밀어 넣는 불편함에 더해 서하나에 대한 미안함이 일었다.
여의도 벚꽃놀이 때 처음 만났던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었다. 유서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샘이 나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예은, 전화 받아.”
권대만이 소리쳤다.
상념에 사로잡혀 미처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수화기에서 또박또박 표준 발음의 영어가 들려왔다.
“최종 점검해봐. 어떻게 됐어?”
메리웨더였다. 아마 지금 미국은 한밤중일 것이다. 그런데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나 보다. 당연히 회사의 운명이 좌우되는 시각이니 그럴지도.
송예은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계획대로 진행 중입니다.”
“계속 수고해줘요.”
전화가 끊어졌다.
송예은은 메리웨더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
유서준은 마지막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1시간 전부터 반격할 것인가, 아니면 막판 10분을 노릴 것인가.
어느 것도 쉽지 않겠지만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은 중요했다.
그렇다면 막판 10분이 확실히 유리하긴 했다. 그 경우 일반 투자가의 매수 세력을 유도할 수 없다. 일반 투자가의 도움은 기껏 1조가량일 것이다. 평소라면 큰 금액이지만 오늘처럼 10조 단위의 싸움에선 사실상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기다린다. 선물은 3시 이후, 주식은 3시 20분부터.”
유서준의 머릿속에서 모든 계획이 수립됐다.
2시 30분을 넘어서며 주식시장은 조금 더 밀렸다. 이제 -8% 수준.
유서준 그의 개인 재산으로 매수하는 내용은 사전공시가 불필요하지만 SJ 증권이나 투자은행이 비차익으로 매수할 내용은 사전공시를 해야 한다. 지금 연기금이 매도 공지를 한 것처럼 그들도 매수 공시가 필요했다. 장마감 15분 전까지.
그 시각은 3시 15분이다.
유서준은 모니터를 주시하며 작전을 점검했다.
문득 그의 눈에 HTS 한쪽 옆에 뜬 뉴스 속보가 보였다.
자사주 매입 공시. 시가총액 100위권 정도에 있는 한 기업이 최근 떨어진 주가를 떠받치기 위해 오늘부터 자사주를 매입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유서준이 기다리던 뉴스였다.
그가 전경련 모임에 가서 모두에게 호소했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이제부터 한두 기업이 움직이기 시작하려나…….”
과연 얼마나 많은 기업이 그의 호소에 동참해줄지 아직 미정이었다. 그것도 시간 내에.
**
오후 3시. 2010년대까지 3시는 주식시장 마감시각이었다.
한국의 주식시장 개장 시간은 시기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80년대에는 9시 30분이 개장 시간이었고 중간에 점심시간인 휴장 시간이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점심시간이 사라지고 주식시장 개장 시간은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로 통일됐다. 2016년 8월부터는 마감 시간이 30분 늦춰져 9시 개장, 3시 30분 마감이다.
일반적으로 파생상품 시장은 여기서 15분 후에 마감했다. 정상적인 파생상품 마감 시간은 오후 3시 45분이다.
단 만기일에 해당 월물은 주식시장 마감 10분 전에 마감되고 최종 손익계산은 주식시장 마감지수로 결정됐다.
오늘 12월 만기일의 경우 파생상품 주문 마감 시간은 3시 20분이다. 결제지수인 코스피 200지수는 주식에서 정해진다. 3시 20분부터 10분간 동시호가를 거쳐 최종가는 3시 30분에 결정된다.
오도욱은 득의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3시를 넘어서도 변변한 반격이 일어나지 못하자 급격히 매도세가 늘어나는 것이 보였다.
모든 정황이 필승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서하나를 향했다. 그가 보기에 서하나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서하나는 말없이 모니터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3시가 지나면서 지수가 확연하게 밀리는 것이 보였다.
-8%.
-9%.
-10%.
1분에 1%씩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오늘 LTCM의 목표치가 얼마였는지 생각해내려 애썼다. 종합주가지수 2000. 어제 대비 -15%이고, 11월 만기일 대비는 -25%이며, 9월 만기일 대비는 -42%였던가.
-15%이면 SJ 금융그룹 전체 순손실액은 15조를 넘어설 것이다. SJ 증권은 당연히 감당 불가능이고 SJ 투자은행도 이 규모의 손실을 감당할 여력은 없다.
아마 유서준은 개인 재산도 모두 주가를 떠받치기 위해 베팅할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그 규모는 대략 10조. 이것 역시 오늘이 지나면 모두 휴지로 사라질까.
한때 지금 가진 그 재산으로 한발 물러나 여생을 편안하게 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유서준에게 그런 의견을 꺼내지도 못했다. 한평생 미래에서 날아온 편지에 부담을 느끼고 매진해온 유서준에게 차마 그런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흐흐, 이제 포기하는 게 어때?”
오도욱이 느끼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하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을 하나하나 살폈다.
“조금이라도 건지는 게 좋지 않을까?”
승리를 자신한 오도욱의 표정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환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천장에 부착된 샹들리에의 밝은 빛이 유리 테이블에 그대로 반사되어 번쩍였다.
“벌써 -12%를 돌파하는군.”
오도욱의 말에 서하나의 눈이 모니터로 갔다.
서하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큭큭, 이러다가 목표치보다 더 밀리는 거 아닐까요?”
박강수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