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34)
434화 막장도 이런 개막장이 없네.
해적 여왕이 누구던가.
이름 그대로 바다를 지배하는 철의 여왕이다.
그녀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해역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다만 그 악행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약탈은 기본이요 필요하다면 납치와 살인도 수시로 벌이는 게 해적이었다.
그러한 해적의 여왕이니 기본적인 성향은 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전대 세르닐 왕은 어떤가.
‘공명정대. 근검절약. 성실함의 아이콘이지.’
성군(聖君)이다.
세르닐 왕국에 있어선 빛과 소금 같은 존재였다.
그런 왕이 해적 여왕과 눈이 맞아서 이 소년을 낳았단 말인가?
“······ 왜 아무런 말도 없는 거지? 그러고 보니, 왕성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소년왕이 나를 의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본다.
생존 퀘스트를 진행할 당시 이 녀석의 이름은 분명히 ‘디트리히’였다.
“해적 여왕 벌룬티.”
“······!”
“해적의 자식이 어떻게 왕의 피를 이었지?”
“너··· 네놈, 누구냐.”
생각보다 의젓하고 의연하다.
크게 당황한 기색은 없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지랑이 공방에서처럼 정체를 숨겨야 할까?
“스스로를 ‘팬텀’이라고 떠들고 다녔다지?”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내가 팬텀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다. 팬텀은 한 명뿐이니까.”
확정하듯 이야기하는 내 말에 순간 디트리히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디트리히가 가슴을 폈다.
“어디서 뭘 듣고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팬텀’이다.”
“그래? 이상하군.”
“대체 뭐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 역시 ‘팬텀’인데 말이다.”
*
디트리히는 이맛살을 구겼다.
돌연히 찾아온 남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출생의 비밀을 폭로하더니 대뜸 자신이야말로 팬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디트리히야 말로 팬텀이다.
디트리히는 최근 ‘모든 기억’을 각성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팬텀의 영혼이 들어오는 기억이었다.
기적을 발휘하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최강자 팬텀.
그러니 자신이 팬텀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디트리히가 세르닐 왕국으로 향한 건 기억을 각성한 직후였다.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자!
그리고 창고로 이동되는 ‘반려검’을 보며 온몸을 떨었다.
저 검이야말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줄 보검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봤다.
‘뭐, 뭐지?’
한데 왜일까.
남자의 눈빛이 묘하게 눈에 익다.
어디선가 만나본 사람처럼 기시감이 있었다.
“설마······.”
아니다.
그럴 리 없다.
“허락도 없이 내가 만든 검에 손을 대고 왕이 됐더군. 그로도 모자라 내 이름을 사칭하면서. 기분이 어떻지?”
“······!”
디트리히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검을 만든 제작자 장본인이라고?
심지어 그게 팬텀이라면, 왜 본능적으로 그 검에 끌렸는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게 운명이었던 것이다.
디트리히가 숨을 죽인 채 물었다.
“정말··· 정말 팬텀이십니까?”
“그리 말했을 텐데.”
“그럼······.”
디트리히는 마음먹었다.
이곳에 와서 원하는대로 왕이 되었으나 허울뿐이 없었다.
이대로면 머지않아 쫓겨날 것이다.
쫓겨나지 않아도 제스스로 내려오게 만드리라.
툭!
디트리히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꼭 이 왕국의 왕이 되어야 합니다.”
*
디트리히의 사연은 꽤 기구했다.
알려진 적은 없지만, 해적 여왕 벌룬티는 과거 전대 세르닐 왕이 해역에 나갔을 때 납치한 전적이 있었다.
막대한 몸값을 부르고 풀어줄 생각이었으나.
전대 왕의 성심을 보고 반하여 구애를 시작한 것이다.
머지않아 둘은 맺어졌고, 여왕은 전대 세르닐 왕을 그냥 풀어주었다.
몸값도 받지 않고서.
왕은 해적 여왕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말하며 대신 약속의 의미로 반지 하나를 주었는데, 이후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왕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해적 여왕은 죽어가고 있었다.
“약속해놓고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얼굴을 보였다면 어머니께서 그토록 크게 상심하시지도 않았을 텐데.”
전대 세르닐 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쯤 되자 의문이 생겼다.
“증표로 반지를 주었다고 하지 않았나?”
다른 것도 아니고 반지다.
성군이라 이름이 자자한 전대 세르닐 왕이 무려 반지를 주었다면 그 의미가 절대 작지는 않을 터였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반지였습니다. 궁의 입구에서 반지를 보이니 다들 저를 미친놈 취급하더군요. 왕가의 상징인 반지이니 이 반지를 보이면 자신을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 했다는 데도.”
“왕가의 상징도 아니었나?”
“예. 모두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전대 세르닐의 왕이 공명정대한 성군이라는 이야기는 지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왕이 되기로 결심한건가?”
“그럼 전대 왕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목적은 이뤘나?”
“아니요. 이루지 못했습니다.”
디트리히는 이를 갈았다.
자신을 낳아놓고, 약속을 어기고, 끝까지 숨어만 있는 다니.
어머니는 죽어가고 있다.
스스로 죽어가는 걸 택했다.
애당초 디트리히의 목적은 왕이 되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저 어머니께 얼굴 한 번만 보여달라는, 그 부탁을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그거 하나면 됐는데.”
이루지 못했다.
무엇 하나.
목숨을 걸고 찾아왔는데도!
거지처럼 방랑하며 단 한 번만 얼굴을 보길 바랐다.
그 작은 바람조차 전대의 왕은 들어주지 않았다.
디트리히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알고 있었을 겁니다. 제가 찾아왔다는 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수호 성검의 선택을 받은 지금까지도, 전대 왕은 제게 얼굴을 보이지 않습니다.”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오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청렴함의 상징과 같았던 전대 왕.
그에게 ‘사생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겠지.
“저는 왕이 될 겁니다. 완전무결한 왕이 된다면 더 이상 전대 왕도 숨어있지만은 못하겠지요. 그의 다른 자식들보다 제가 뛰어남을 증명할 겁니다.”
“왕위 후보자들이 버젓이 살아있다. 전부 불태워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말인가?”
“예. 필요하다면······!”
디트리히의 의지는 확고했다.
바람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당신이 정말 팬텀이라면, 저를 왕으로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막장도 이런 개막장이 없다.
물론 내 아바타가 세르닐 왕국의 왕이 된다면 그야 나로서는 좋은 일이다.
안 그래도 세르닐 왕국과는 좀처럼 접점이 없었으니까.
판게니아에서 세 번째로 큰 국가.
이곳에 나의 영향이 미칠 수만 있다면 ‘판게니아의 평화’라는 내 취지에 걸맞은 강력한 우군이 되는 셈이다.
미궁 도시와 전면적인 교류를 통해 세를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강제로 앉혀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제가 왕의 재목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군주의 재능을 갖고 있다.
그것도 엄청난 등급의 재능을.
당연히 세르닐 왕국을 더욱 번성시키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아직은 못 믿겠다. 그러니 내 시험을 통과하면 왕으로 만들어주마.”
나는 디트리히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그러자 디트리히의 눈이 반짝였다.
“시험이라 하시면?”
“우선······.”
시험이라고 해봤자 그 내용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수호 성검’을 내 앞에 가져오는 것부터 시작하지.”
*
수호 성검.
왕국의 보물인 그 검은 오직 왕만이 만지고 다룰 수 있다.
“잠시 궁으로 들고 가겠다.”
“··· 안 됩니다.”
“나는 성검의 선택을 받은 자다.”
“그래도 안 됩니다.”
삼엄한 감시 속.
병사들이 디트리히를 만류했다.
아무리 선택받은 왕이라지만 궁에 있는 모두가 디트리히를 인정하지 않았다.
“분명히 말했다. 성검을 잠시 가져가겠다고.”
“분명히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막아보거라.”
디트리히가 막무가내로 몸을 들이밀자 병사들이 일렬로 디트리히를 막아섰다.
심지어 몇몇은 디트리히의 몸을 억지로 잡기까지 했다.
“무엄한 놈들! 어찌 일개 병사 따위가 왕의 옥체에 손을 댄단 말이냐!”
“······!”
병사들이 움찔했다.
그 기세를 몰아 디트리히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특별한 사유 없이 왕의 옥체에 함부로 손을 댄 자, 3년의 감옥행에 처한다. 해칠 의도가 있다면 그 목이 잘려나가도 할 말이 없을 터! 그대들은 무법자인가? 왕국의 지엄한 법을 무시하는 건가!”
“그, 그건······.”
병사들이 입을 꾹 닫았다.
세르닐 왕국의 법전에 적혀있는 문구였으니까.
게다가 디트리히의 말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마치 진짜 왕처럼.
하지만 이제 고작 십대 중반인 소년이 어찌 이런 위압감을 보인단 말인가.
“수호 성검은 오직 성검의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만질 수 있다. 나는 성검의 선택을 받은 왕이다. 그런데도 나를 막을 건가?”
“아, 아무리 그래도 역대 어느 왕께서도 아무런 이유 없이 수호 성검을 가져가진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건······.”
“나는 잠시 궁으로 들고 가겠다고 말했을 뿐, 이유 없이 그냥 가져가겠다는 소린 하지 않았다. 당연히 중요한 이유가 있으나 왕인 내가 일개 병사인 너희들에게 그 이유를 일일이 설명해야 한단 말이냐?”
“그, 그건 아닙니다만······!”
“정히 불편하다면 나와 함께 가면 될 일 아닌가? 차라리 감시를 하거라.”
“아, 아닙니다. 궁 내에만 계신다면······.”
병사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자 디트리히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검을 쥐었다.
그리고 당당히 궁으로 걸어 돌아갔다.
“······ 마, 막아야하는 거 아닙니까?”
“그, 그렇긴 한데······ 별일 있겠어······?”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병사들은 가만히 멀어져가는 디트리히의 등을 바라봤다.
*
“가져왔습니다.”
“······ 제법이군.”
전혀 기대도 안 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가져올 줄이야.
이곳에서 디트리히의 편은 없으니, 당연히 성검을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을 터다.
‘확실히 군주의 재목이긴 한가 보군.’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이윽고 디트리히가 말했다.
“그럼 이제 저를 왕으로······.”
“시험이 하나 더 있다.”
“시험이 두 개라는 말은 안 하지 않았습니까?”
“한 개라고도 안 했다.”
“······ 남은 한 개의 시험은 뭡니까?”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디트리히가 망설였다.
“선택을 받지 않은 자가 수호 성검을 만지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괜찮다. 줘봐라.”
“······.”
머뭇거리던 디트리히가 내게 수호 성검을 넘겼다.
내가 수호 성검을 쥐자마자.
부르르르!
수호 성검이 검신을 흔들더니, 이내 얌전해졌다.
“허······!”
그 모습을 보며 디트리히가 감탄을 흘렸다.
이제 마지막 관문만이 남았을 따름이다.
원래라면 혼자서 가지고 갈 생각이었으나.
‘디트리히. 이 놈 꽤 물건이군.’
마음이 바뀌었다.
“자, 이제 가지고 튀자.”
“예······? 지, 지금 뭐라고?”
“도망치자고 했다. 자, 내 손을 잡아라. 그럼 왕의 자격을 손에 넣게 해줄 테니.”
나는 창가에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히든 퀘스트의 진행을 꼭 혼자 하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디트리히.
내가 생존 시킨 캐릭터인 건 맞았다.
그러나 의아했다.
‘내 기억상 디트리히의 성별은 여자였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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