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of the Fox RAW novel - Chapter 16
16화
“미쳤어.”
이야기를 하는 내내, 말을 하는 당사자인 나조차도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어수선하고 요지 없는 긴 얘기가 끝나자 애리가 한 말은 딱 저 한마디였다. 그것도 매우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얼굴로.
“백여운. 정신 나갔어, 너?”
사람의 마음이 오직 한 가지 감정만으로 가득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00%좋음. 100%싫음. 100%분노, 뭐 등등…….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또 그러한 행동의 바탕이 되는 감정이 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텐데.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더니, 남의 속은 그렇다 쳐도 지금 나는 내 속마음조차 모르고 있었다.
“딱 보면 몰라? 걔, 지금 너 갖고 노는 거야.”
애리는 나처럼 우유부단하지 않다. 고민에 대한 해답도 빨리 내는 편이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꽤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편이었다. 나조차도 혼란스러운 이런 상황에 대한 해답을 못 구하고 오랜 고민 끝에 그녀에게 설명하자 애리는 저렇게 결론지었다. 그녀의 성격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생채기라도 난 것처럼 아려왔다.
“정신차려, 백여운. 너 지금 어린 애한테 휘둘리는 거라구. 그냥 한번 찔러보는 거야, 그거.”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 애리 말대로 원지호가 그냥 날 한번 찔러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나를 찔러보다 말고 다시 제자리를 찾을 정도의 가벼운 마음. 나 역시 이쯤에서 녀석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끝낼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마음.
“원래 다 그런 마음 있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이성에 대한, 괜한 동경 같은 거. 특히나 10대는 더 그래. 자긴 아직 미성년잔데 상대방은 어른이야. 또래 여자애들보다 훨씬 예쁘고 성숙해 보이는 어른. 얼마나 매력적이겠어? 꼬셔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지.”
애리의 말은 전반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동경을 가지며 살아간다. 나 역시 그랬다. 하물며 ‘나이’에 있어서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여태껏 짝사랑이든, 뭐든 나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은, 그래서 나보다 생각하는 것도 한층 더 성숙할 것 같은 연상의 남자가 아니면 좋아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원지호는 계산 미스였다. 두 살 연하. 고등학생. 심지어 동생의 친구.
“좋아하는 건 아니야…….”
“신경 쓰고 있잖아.”
“그래.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인데, 좋아하는 건 아니야.”
분명히 좋아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혜준 오빠를 좋아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원지호 여자 친구라고 소개한 윤희수가 진짜 녀석의 여자 친구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도 이상했고, 여자 친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 따윈 다신 안 하겠다는 나에게 돌직구를 날려대는 원지호도 혼란스러웠다. 계속해서 그런 녀석이 신경 쓰이고 기대고 싶어지는 나의 심리도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가장 혼란스러운 건, 그런 녀석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변명거리를 찾고 싶어 하는 내가, 꼭 내가 아닌 것만 같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누군가에게 신경을 쓰는 사실 자체가 모순적이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워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걔가 너한테 특별한 존재라는 말이야.”
인정할 건 인정하라는 듯, 애리는 딱 잘라 말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았다.
“특별한 존재라니…에이, 말도 안 돼. 혜준 오빠랑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좋아 죽던 이혜준과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내게 ‘특별한 존재’가 생겼다는 말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 백여우, 너 말 잘했다. 너 이혜준이랑 끝난 지 얼마 안됐어. 어떻게 끝났는지 벌써 잊었어? 걔가 바람나서 끝난 거야. 권미라랑 눈 맞아서 너 버리고 간 거라고.”
“…….”
“그런데 그 배신감이 어떤 건지 아는 네가, 이제 와서 임자 있는 다른 남자랑 눈이 맞는다고? 남이 하면 불륜, 네가 하면 로맨스. 뭐, 이런 심보야?”
단호한 애리의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런데 이 욱신거림이 원지호에 대한 내 마음을 꼬집혀서인지, 믿었던 이혜준의 배신에 대한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내가 볼 땐, 너 아직 걔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혜준 때문에 힘든 와중에 자꾸 들이대니까 한번쯤 기대고 싶어지는 거라구. 그런데…이 이상은 위험해. 너도 알지?”
나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마음 굳게 먹고 내가 선을 긋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다가는 모두에게 상처만 남길 것이라는 것도 역시 알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실연의 상처도 나 혼자 극복하는 게 맞는 것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알고 있는데 자신이 없었다. 피해야 하는 걸 아는데 피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너한테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한참을 망설이던 기색의 애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혜준 선배가 나한테 몇 번 연락 왔었어. 너 전화번호 바뀌었냐구…바뀐 전화번호 가르쳐달라고.”
“…….”
“안 가르쳐줬어. 그런데 그 선배가 그러더라. 권미라랑 끝냈대. 너한테 꼭 사과하고 싶다더라. 용서 구하고 싶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입안이 마르기 시작했다.
“반성도 많이 한 것 같았고…너한테 미련 남은 것도 같았어.”
“…….”
“난 솔직히, 글쎄다. 너랑 이혜준 다시 합치는 거 내키진 않아. 그런데 그 고딩보다는 이혜준이 나을 것 같다.”
이혜준에게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를 완전히 잊은 것도 아니었다.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벌써 그를 잊어버리기엔 그간의 좋았던 추억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너 아직 이혜준한테 감정 남아있으면….”
“…….”
“다시 시작해.”
난 왜 이 와중에 자꾸 원지호의 얼굴이 떠오를까.
* * *
“오랜만에 재신이 얼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죽겠네.”
“그러니까 자고 가라니까…….”
“아, 몰라. 나도 자고 가고 싶은데 어제도 외박해서…엄마한테 죽어.”
아까의 심각했던 분위기는 날려버린 채, 애리는 평소처럼 웃어보였다. 그런 애리를 향해 나 역시 웃어주고 싶은데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리를 부른 것이었는데 어째 더 머릿속이 복잡해진 탓이었다.
“표정 펴, 기집애야.”
심란한 맘을 들킨 건지, 날 흘겨보던 애리는 내 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아직은 안 늦었어. 맘 정리할 수 있을 때 확실히 정리해. 알지?”
“으응.”
“어떤 쪽을 선택하든, 네가 많이 아프지 않을 쪽으로 선택해. 어찌 됐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은 너의 몫이야.”
평소엔 철없어 보이다가도 이럴 땐 꼭 언니 같았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애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을 때 골목으로 들어선 택시 한 대가 대문에 서있는 우리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방금 부른 콜택시가 벌써 도착했나, 하고 놀란 것도 잠시, 택시 안에서 내리는 낯익은 인물들로 인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 여운 언니! 안녕하세요.”
제일 먼저 내린 희수. 희수에 말에 택시에서 내리다 말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재신이. 맨 마지막에 내린 지호까지.
“백여우. 밖에서 뭐해?”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연습을 다녀온 건지, 지호와 재신의 머리카락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학교 갔다 온 거야? 난 애리 배웅해주러 잠깐 나왔지.”
“아…안녕하세요.”
그제서야 내 옆에 서있는 애리를 발견했는지, 재신이는 시큰둥하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 한마디도 감격스러운지, 애리는 연신 싱글벙글 웃어댔다. 잠시나마 어색한 정적이 이어지고 재신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희수가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지호가 들어가다 걸음을 멈췄다. 나를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이 잠시나마 느껴졌지만, 애써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호까지 들어가자 대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야…백여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애리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고갤 돌려보면 그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채였다.
“설마…쟤야?”
“응?”
“혹시 네가 오늘 말한 고딩. 그 재신이 친구가…아까 걔냐구.”
느릿느릿 말을 잇는 애리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입을 다물지 못 하는 유애리.
“야…미쳤다. 끝짱난다, 진짜.”
“뭐?”
“겁나 쌔끈하잖아!”
좋아하는 연예인을 바로 앞에서 본 소녀팬마냥, 유애리는 꺅꺅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애리가 엄청난 외모지상주의라는 것을.
“야, 진짜 장난 아니다! 아까 눈 마주쳤는데 설레서 죽는 줄 알았어.”
아까 단호한 얼굴로 고민을 들어주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는지, 애리는 발까지 동동 굴리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몸도 좋던데…하긴, 수영 선순데. 그치? 저게 바로 체대 옴므라는 건가? 아니지, 아직 고딩이면 체고 옴므!”
그 사이, 아까 부른 콜택시가 어느덧 우리 앞에 섰다. 클락션을 빵빵 울려대는 택시 기사 아저씨의 신호가 들리지도 않는지 유애리는 계속해서 ‘체고 옴므’타령을 해댔다. 귀가 얼얼해질 정도로 소리를 지르는 애리를 겨우 진정시키고 택시 뒷자리에 태웠다.
“야, 여운아. 아까 내가 한 조언은 없었던 걸로 해. 저 정도 비주얼이면 얘기가 또 달라지지. 다음에 자세히 얘기하자. 알았지?”
아직까지 흥분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소리를 질러대던 유애리는 택시가 출발함에 따라 나에게 손을 흔들어댔다. 참으로 밝디 밝은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대는 애리로 인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여튼, 유애리…….
* * *
“언니, 아직 밥 안 드셨죠? 와서 볶음밥 드세요.”
애리의 배웅을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오면, 좀 전까진 나지 않던 고소한 냄새가 거실에 진동했다. 어제는 냉면을 만들어먹더니, 오늘은 볶음밥인 모양이었다. 며칠간 우리 집에 머무르고 있는 지호의 덕에 우리 남매는 매일매일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요리라고 해봤자 몇 가지 종류 되지 않는 찌개가 전부인 나와 달리, 희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요리에 굉장히 능숙한 편이었다.
지호가 우리 집에 머물기 시작한 날부터 매일같이 우리 집에 와서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는 희수로 인해 내가 부엌일을 할 게 없다는 건 분명 편한 일이었지만, 내 공간에 낯선 이방인의 손길이 이리저리 닿는다는 게 사실 조금 꺼림칙한 일이기도 했다.
“아니야. 난 배 안 고파서. 맛있게들 먹어.”
연습을 끝내고 이제야 늦은 저녁을 먹는 듯, 식탁에 희수, 지호, 재신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러지 말구 같이 드세요. 양도 많이 해놨어요.”
“그래. 누나가 볶음밥 좋아한다고 해서 윤희수가 만든 거야. 와서 좀 먹어.”
만든 사람 성의를 무시한다는 듯, 나를 나무라는 백재신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식탁에 앉았다. 밝게 웃으며 접시 가득 볶음밥을 떠주는 희수. 냄새만 좋은 게 아니라 모양까지 꽤 그럴싸한 볶음밥을 내려다보다 숟가락을 들었다.
“언니. 어때요? 괜찮아요?”
“으응, 맛있네.”
맛있었다. 사실 볶음밥만큼 맛없기도 힘든 음식도 없지만, 냉장고에 남은 재료를 싹쓸이해서 대충 볶아먹는 볶음밥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나는 음식의 맛을 음미하기보단 그저 삼키는 차원으로 접시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야야. 누나, 배 안 고프다더니…많이 고팠구나? 천천히 먹어. 접시까지 씹어 먹겠다, 아주.”
걸신들린 사람처럼 빠른 속도로 밥을 삼키는 나를 향해 백재신이 놀리 듯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해서 빠르게 내게 할당된 몫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언니. 볶음밥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다음에 또 해드릴게요. 아, 내일은 뭐 해드릴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으세요?”
말없이 밥을 먹어치우는 내 모습에 윤희수가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그런데 희수야, 너 요즘 여기서 지내는 거 부모님이 아셔? 며칠째 집에 안 들어오면 걱정하시겠다.”
아무런 의도가 없던 질문이었다. 단순한 궁금증의 시작이었다. 어제는 냉면. 오늘은 볶음밥. 내일은 어떤 메뉴를 먹고 싶냐며 태연하게 묻는 희수의 말에 그저, 요즘 계속해서 우리집으로 출퇴근을 하는 희수의 근황을 부모님이 알고 계신가 하는 노파심에 가볍게 물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을 잘못한 것이었는지, 아까까지 웃고 있던 윤희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불어 말없이 수저를 움직이던 원지호까지도.
“…너 왜 쓸데없는 걸 묻고 그래.”
계속되는 정적 가운데 입을 연 사람은 재신이었다. 나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핀잔을 주는 녀석으로 인해 덜컥 당황스러워졌다.
“저 혼자 살아요.”
아무래도 내가 실수를 한 것 같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을 풀며 희수는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아빠는 돌아가셨고…엄마는 재혼하셨거든요…….”
“아, 미안.”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이 아이의 상처를 건드려버린 것 같다. 당황스런 마음에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했다. 나의 말을 끝으로 식탁엔 정적이 맴돌았다. 낮게 한숨을 내쉬는 재신이. 말없이 고개를 숙인 희수. 그리고 무표정의 지호까지. 가시 방석에 앉은 듯,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아니에요, 언니. 언니가 왜 미안해요.”
“…….”
“언니가 우리 아빠 죽인 것도 아닌데.”
희수의 말을 끝으로 다시 한 번 정적이 찾아왔다. 계속되는 어색한 분위기. 당황하는 나를 위로하려 하는 말치고는 묘하게 가시가 돋친 뉘앙스의 말투에 의아해지기도 잠시,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원지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담배 사러 나갔다 올게.”
피곤한 얼굴의 원지호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집안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 희수와 그런 희수를 말없이 쳐다보는 재신이. 어느덧 집을 나간 지호까지. 이상하게도, 묘하게 틀어진 기분.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