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85)
85
엘카탄은 호넷과 어깨를 견주는 대상단이지만, 호넷과 다르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근거지가 테루아의 수도라는 사실 외에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덕분에 어느 외국 귀족들의 연합이다, 하얀 그림자의 부속 상단이다 등…… 온갖 억측이 난무했었다.
에드릭도 상단을 건립하며 그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장차 거래를 틀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정체가 덴카르트가 오랫동안 감춰온 상단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곧 있으면 알아서 물려받을 것을, 조무래기를 만들어 일을 벌이나 했지.”
“…….”
“그래도 소꿉장난치곤 즐거워 보였다니 다행이고.”
엘카탄의 숨겨진 상단주, 알렉시스 덴카르트의 말에 에드릭은 험하게 눈을 빛냈다.
그는 부친이 정체를 숨겼다는 사실보다, 다른 것에 분노했다.
애초에 공작은 로벨이 속한 상단의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고 있었다.
알면서 지켜보기만 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직접 개입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유가 있을 터.
에드릭은 당장 화를 표출하는 대신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신경을 집중했다.
한편, 마시던 차를 내려놓은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 상단을 가신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비로 설립한 내 조부가 내게 가르쳤다. 거래하기 전에는 상대가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는지부터 파악하고, 그 이상을 빼앗아오라고 했지.”
에드릭은 케케묵은 과거 얘기 따윈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특히 일찍 죽은 선대 공작들의 이야기는 더욱더 그러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로벨과 그녀가 속한 상단의 안위였다.
“로벨은…….”
“그 간 큰 시종에 대한 건 네가 차차 알아갈 문제다. 너와 내게 지금 당장 필요한 화제는 아니야.”
그는 시가를 입에 하나 물고 불을 붙였다.
어린 자식을 앞에 두고 하는 짓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에드릭은 호흡 하나 변하지 않고 아비를 응시했다.
공작은 그런 아들을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자들이 참으로 어리석었더군. 아무리 급했어도 일 처리를 그렇게 하면 쓰나.”
“세상에 자기 자식이 사라졌는데, 멀쩡한 부모는 없어. 적어도 제대로 된 상식을 가진 부모라면 말이야.”
에드릭은 로벨 부모의 모욕에 자기 일보다 더 감정적으로 되받아쳤다.
예상은 했어도 아직 미숙한 아들의 모습에 공작은 미간을 좁혔다.
“많이 배웠다더니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태도는 배우지 않았나 본데.”
“결론부터 말해.”
“그 시종의 상단은 이제 망했다. 그 집 장자가 너만큼이나 겁이 없어. 능력은 여동생보다 더 없고. 그런데도 일을 꽤 많이 벌였다지.”
“…….”
“이대로 버려두면 다 죽을 거다. 그쪽에는 평생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빚이 생겨버렸거든.”
에드릭은 숨을 느릿하게 뱉었다.
공작의 태도로 그가 로벨의 일들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
아침에 마지막으로 봤던, 로벨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공작의 심복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급하게 로벨의 상단을 다시 찾아갔었다.
건물 근처에서 마차를 세우고 본 로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다른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로벨을 가장 많이 닮은 그녀의 오빠가 가장 절망한 낯이었다. 이후 있을 큰 고난을 예견한 듯했다.
에드릭 역시 불안해졌지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결정된 바는 없었다.
“베네스 무역 때문이라면…… 손해를 봤다 해도 무마할 방법이 있어.”
“정말 그게 다라고 생각하나.”
공작의 질문에 에드릭은 반론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자는 자신이 알기도 전에 이미 로벨의 정체를 알아냈고, 모든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로벨의 상단과 베네스와의 거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치명적인 거래 또한 알고 있으리라.
“에드릭 덴카르트. 그들을 지키고 싶겠지.”
황가의 하사품인 최고급 등잔에 담배를 지져 끄며 공작이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나.”
* * *
내가 없는 사이 우리 상단에 큰 위기가 닥쳤다.
과거에는 기미조차 없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리석게도 하나도 대비하지 못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뜩이나 돌아버릴 것 같은데, 로베르는 한시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동생아, 귀를 크게 열고 잘 들어. 네가 오랜만에 와서 잘 모르나 본데, 너 지금 괜한 과민 반응이라고.”
그렇게 주절거리던 로베르는 내 싸한 침묵에 눈치를 봤다.
“얘, 로베르.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 않니. 로벨리아의 말처럼 확인하는 편이 나쁘진 않지.”
“아니, 그게, 이렇게 불쑥 찾아가면 그쪽에서 싫어할 텐데요. 이번 거래처는 엄청 까다롭거든요. 저번에 제가 계약할 때도 직접 가니까 엄청나게 싫어하던 눈치라서…….”
“얘 좀 봐. 고작 눈치 때문에 상단의 위험을 감수하라는 소리니?”
“그래, 로베르. 네 어머니 말이 옳다. 앞에서 기다려라. 마차부터 준비하마.”
부모님의 엄한 말씀에 로베르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로베르가 직접 거래까지 했던 계약자의 거처로 찾아갔다.
우리 도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부유한 관광 도시였다.
그런데 마차가 움직이는 내내 로베르는 입을 삐죽거렸다.
“이렇게 찾아가면 싫어할 텐데……. 아, 제가 직접 봤다니까요. 그 저택에 처음 보는 호화로운 진품들이…….”
“로베르. 그건 가서 직접 확인하자꾸나.”
불행하게도 내 불길함과 어머니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저택만 남아있고, 그 안의 물건들은 싹 비워진 상태였다.
“어…… 어……. 이상…… 이상하다……. 왜…… 아무도 없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한 우리보다도 로베르가 제일 당황했다.
오라버니는 몇 번이나 저택을 헤매고 다니다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여기도…… 저기도…… 다…… 다…… 사라졌네? 왜…… 다 사라졌지??”
“여보. 이 일을 어쩌면 좋죠?”
“중도금은 남았으니 괜찮아. 돌아가서 차차 생각해보자.”
나는 부모님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회생 불가는 아니다.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침착하자. 집에 돌아가서 다시 방법을 찾아보면 돼.’
그러나 불행은 어깨동무하고 온다고 했던가…….
로베르가 벌인 일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흑마석 경매까지…… 따로 더 했다고? 이 얘기를 왜 이제 꺼내!”
“그게…… 저번에 너무 성공적으로 거래해서…… 조금 더 사뒀어. 똑같은 거로. 응? 봤잖아, 너도.”
“그래서 그걸 빚까지 내면서 산 거야?!”
“야, 야. 로벨리아, 왜 이렇게 흥분을 하고 그래? 진정해. 이건 정말 문제없어! 몇 번이나 거래한 곳이라니까? 전에 샀던 것과 똑같은 걸로 준다고 했다고!”
로베르는 오히려 나를 나무라듯이 말했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사들인 흑마석은 교묘하게 만들어진 가짜였다.
경매 이후 로베르와 친분이 생겼다던 상인에게 추가로 대량 구입한 물건이었다.
물론 그 상인 역시, 현재 연락이 닿지 않았다.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결과는 뻔했다.
“오라버니 바보야? 이제껏 거래를 잘 했다고…… 다음번에도 제대로 된 물건을 주는 건 아니잖아! 일 처리를 이렇게 하면 어떡해!!”
부모님 앞이라서 자중하려고 했지만 더는 참을 수 없어서 화를 내고 말았다.
두 번이나, 아니 자질구레한 것까지 따지고 보면 몇 가지나 더 사기를 당해버린 것이다.
내 눈총에 자기가 서명한 것들을 한참 살펴보던 로베르는 졸음 때문에 서명을 실수하기도 했다며 내게 이실직고를 했다.
로베르도 이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눈치챘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나…… 나 때문이야. 내가 다 망쳐버렸어.”
“……아니야. 화내서 미안. 이건 내 잘못이기도 해.”
나는 죄책감에 펑펑 우는 오라버니를 달래주며 반성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 부모님께서 상단을 제대로 운영하셨을 것이다.
중간에 찾아가거나, 편지를 더 보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으리라.
그러니 어떻게든 내가 내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나는 먼저 사기꾼들을 잡기 위해 길드와 기사단에 사건을 의뢰했다.
또, 두 번째로 문제 되는 우리 상단의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부모님과 곳곳에 발품을 팔았다.
그러나 이미 벨리칸에는 우리 상단의 소문이 쫙 돈 후였다.
“아아아……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몇 대에 걸쳐 거래했던 상인들이 우리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흑마석 건으로 피해를 본 자들도 로베르를 포함해서 한둘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작정하고 두세 번까지 제대로 납품을 하고서 그 후에 사기를 친 것이다.
이 악랄한 사기에 당해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친 상인들이 꽤 있었다. 거기엔 부모님이나 나와 로베르의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벨리칸의 분위기는 점점 어두워져 갔다. 이맘때쯤이면 추수제로 들썩이던 도시가 조용했다.
‘……내가 떠난 뒤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절망한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호넷에 돌아간 이보에게 부탁을 해야 하나. 아니면…… 도련님께……. 아니지. 미쳤어. 이건 아니야.’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고개를 급히 저었다.
양심도 없지. 절대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도련님이 지금껏 날 찾지 않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인 일이다.
내가 여자인데도 시종 일을 했던 게 들통 나면…… 아마 지금보다 큰 배상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쓰게 웃다가, 도련님을 떠올렸다.
‘도련님은…… 어쩌고 있을까. 이제 내가 그만둔 걸 알았을 텐데.’
지금 남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니긴 하지만…… 잘 지내고 있는지 못내 걱정이 되었다.
씁쓸함을 참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대로 무력하게 있을 순 없어.’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는 심정으로 은행에 다시 가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선 길에서 나는 도련님을 마주쳤다.
정확히는 멈춰 선 덴카르트의 마차 앞이었다.
다른 마차들보다 두 배는 더 크고, 화려하고 장엄한 검은 마차는 덴카르트의 상징이었다.
“……어?”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