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American Dirt Spoon Gang Village RAW novel - Chapter (101)
미국 흙수저 깡촌에서 살아남기-101화(101/280)
작별인사 2
― 훌쩍. 훌쩍.
코 들이키는 소리가 요란해질 즈음 내 몸에서 헤나의 팔을 떼어 냈다.
“일단 들어와.”
“아냐. 갈래.”
“그래. 휴대폰 확인해. 말할 거 있으니까.”
“어.”
고개도 들지 못한 헤나가 그대로 도망친다.
처음엔 진짜 너무 슬퍼서 누군가와 슬픔을 나누기 위해 튀어온 거지만 포옹을 하고 있다 보니 좀 그래진 거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오묘하고 뭐 그런. 쩝.
아무튼 헤나가 눈물과 콧물로 적셔놓은 셔츠를 갈아입은 후 휴대폰을 들었다.
공부방 놈들이 그룹채팅방에서 나름의 충격과 슬픔을 표현하고 있었다.
― 미스터 커나스 조카 기억나니? 에드라고 했던 분.
― 기억남.
― 우리한테 악보 주셨던 분?
― 맞아. 이번 주 일요일, 미스터 커나스 캘리포니아 가실 때 우리가 연주해 주길 바라셔. 다들 할 거지?
― 당연.
― 두말하면 잔소리. 알바 째고라도 간다.
― 나도.
― 그럼 곡 정해서 알려 줄게. 화, 목에 연습하게 다들 집으로 와. 옷은 검정색 위아래로…
.
.
.
우리는 오랜 시간 연주에 대한 의견을 공유했고, 틈틈이 미스터 커나스를 애도했다.
늘 ‘아직도 엉망’이라며 우리를 놀리던 미스터 커나스.
마지막 가시는 길엔 엄지가 척 들려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 * *
수요일.
미스터 커나스의 일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지만, 우리는 또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Bob’s Garden에 출근하는 첫날이다.
원래는 방과 후 크로스컨트리에 참석해야 하지만 코치에게 양해를 구했다.
시간당 20불이나 되는 돈을 받으면서 얼렁뚱땅할 수는 없는 법.
일단은 체력을 비축할 필요가 있었다.
알바를 해 보고, 두 개를 병행할 수 없다면 알바를 택할 생각이었다.
엄마는 아직 일하러 가셔서 돌아오지 않았다.
요즘엔 엄마 얼굴 보기가 어찌 이리 어려운지.
먹고 사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거다.
든든하게 밥을 챙겨 먹고, 엘리를 보러 갔다.
엊그제부터 목을 가눴다고 하니, 꼭 봐 줘야지.
“왔어?”
“네. 엘리는요?”
“와아. 조카.”
“네?”
“그래도 사이사이 삼촌이나 내 안부도 좀 묻고 그래라. 너무 엘리만 찾는 거 아니냐?”
“아. 잘 지내셨죠?”
“으이구. 엎드려 절받기지. 근데 너. 괜찮아? 이야기 들었어. 동네 애들이 전부 우울해해서 어른들이 걱정이 많아.”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 마세요. 엘리 보러가도 되죠?”
“그럼. 방금 수유하고, 기저귀까지 갈아서 기분 좋은 상태야. 가 봐.”
“안아 봐도 돼요?”
“안 떨어뜨릴 자신 있으면?”
“…얼굴만 보고 갈게요.”
“하하. 그래.”
너무 작아서 안기는 좀 무섭다.
내가 얼굴을 들이밀자 방긋방긋 웃는 엘리.
나보고 웃는 거 맞다니까.
“에구. 안 되겠다. 이리 와봐.”
숙모가 엘리를 들어, 내 팔에 안겨 준다.
와아.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다.
몸뚱이를 다 합해도 내 한쪽 팔 길이도 안 되는 것이 엄청 포근하다.
우울했던 마음에 폭신한 감정이 스며든다.
조막만 한 머리통을 들어 나를 쳐다보는 엘리.
입을 오물거리는 것이 너무 귀엽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덩치가 좋아서 그런가? 어떻게 그렇게 안정적으로 아기를 안아?”
“제가 그래요?”
“어. 완전 딱 들어가는데? 리암도 처음엔 무서워서 제대로 안지도 못했어. 하하. 엘리도 기분 좋은가 봐. 이제 진짜 가끔씩 부탁해도 되겠는데?”
“언제든지 맡겨만 주세요. 달려올게요. 기저귀도 잘 갈 자신 있어요.”
“하하. 너 약속했다. 내가 그 카드 꼭 써먹을 거야.”
“그럼요.”
“오늘부터 밥스 가든에 일하러 가지?”
“네.”
“얼른 가봐. 거기까지 자전거 타고 가려면 지금부터 달려야지.”
“네.”
“웃으니 좋네.”
미스터 커나스의 죽음으로 아직은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동네 꼬맹이들이 모두 내 눈치만 본다.
다들 마음이 힘들 텐데, 내 걱정을 제일 많이 하는 거다.
6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의 12월 초에 처음 만났던 선생님.
처음부터 널싱홈에서 만났기에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닥치니 마음 추스르기가 힘들다.
숙모가 그런 나를 위해 엘리를 들이밀며 위로를 해 준 것이다.
고마웠다.
자전거로 30분을 달려 밥스 가든에 도착했다.
20대 후반의 청년 한 명이 남아 기다리고 있었다.
“딱 제시간에 왔네? 안녕. 나는 딜런. 반갑다.”
“반가워요. 아직 라이언은 안 왔어요?”
“안 오긴. 1시간 전부터 와서 너 언제 오나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요? 어디… 으헉! 뭐. 뭐냐. 너? 어우. 내 심장.”
“심장 아파?”
“놀라서 그래. 놀라서. 와. 너 진짜. 뭐냐고?”
심장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는 소리였는데, 어릴 때 심장이 안 좋았다는 걸 기억하는지 놀라 되묻는 검은 머리의 라이언.
한쪽에 찌그러져 있어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갑자기 일어서니 놀란 것도 있지만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나타난 놈 때문에 더 놀란 거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가 묘하게 잘 어울린다.
“아. 이거? 심심해서 그냥 해 본 거야.”
“그… 너 혹시… 큼. 나는 그쪽 아니다. 스트레이트다.”
“뭐래. 나도 스트레이트거든? 그리고 스트레이트 아니고 게이라 한들 내가 널 좋다할까 봐. 우웩.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너 하는 꼬라지가 이상하니까 그러지. 좋은 말 할 때 머리 제자리로 돌려 놔라.”
“뭐래. 염색하는 건 내 맘이거든? 그리고 세상에 검은 머리가 너 혼자냐? 학교 가 봐라. 80%가 검은 머리다. 도끼병이냐?”
그래.
도끼병으로 하자.
그래도 왠지 라이언의 변명이 찝찝하다.
“베티한테는 고백했냐?”
“내가 먼저? 미쳤냐? 이 잘난 얼굴이 있는데 뭐하러.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남자가 먼저 자존심 접어 가면서 고백하고 그러는 거 아니다. 그냥 끊임없이 내가 너한테 관심이 있다 정도의 여지만 주면 되는 거야. 너 연애 안 해 봤냐?”
말을 말자.
미친놈이 확실하다.
“자자. 잡담들은 그만하고. 오늘은 둘 다 첫날이니까 안전 교육부터 받자. 옷은 편하게 입고 와. 뭐. 지금도 편해 보이긴 하지만.”
“그러게. 제이든. 그런 옷은 도대체 어디서 사는 거냐?”
“성당 야드세일. 1년에 한 번씩 한다. 와 봐. 별거 다 있으니까.”
“오. 거기 좋지. 나도 매해 가는데. 라이언. 너도 금요일부턴 옷 편한 거 입고 와. 작업하다 보면 금방 옷 망가져.”
“어.”
“그럼 너희들 할 일 알려 줄게. 나가자.”
20대 청년 딜런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내가 민망할까 봐 슬쩍 편을 들어주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돌린다.
그리고 거의 1시간에 걸쳐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안전 수칙들을 알려 주었다.
오늘 우리의 임무는 회사 뒤쪽의 넓은 언덕에 듬성듬성 심어놓은 파인 트리(Pine Tree)에 거름 주는 것이었다.
11월 말부터 판매가 시작되는 크리스마스트리용 나무다.
한쪽에 쌓여있는 거름을 작은 수레에 가득 싣고 파인 트리 아래에 끼얹는 거다.
수레 2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냄새가 지독하다.
싸구려 거름인 것이 확실하다.
조용히 삽으로 거름을 퍼 담는데, 옆에서 라이언이 미친 듯이 삽질을 한다.
상대하지 말자.
신경 끄자.
묵묵히 내 일만 하자.
주문을 외며 상대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보란 듯이 나 한번 힐끔 보고, 삽질하고.
정말 거슬린다.
작은 거라도 이겨 보려고 용쓰는 모습이 짠해서 모르는 척했다.
아직 반 정도 찬 내 수레.
여전히 거름을 담고 있는데, 픽― 비웃듯이 웃어 주고는 달려가듯 수레를 끌고 가는 라이언.
“라이언!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고 했지!”
― 퍽. 콰당.
이윤을 중시하는 조경 업체다.
거름 자체는 좋은 건 아니지만 저렇게 버릴 만한 것도 아니다.
거기다 양은 또 얼마나 욕심을 부렸던지 수레 가득이었다.
딜런이 머리를 짚으며 고함을 지른다.
“야! 라이언! 밥 아저씨가 너 하는 거 봐서 잘라도 된다고 했거든! 너 해고야!”
“으악. 아냐아냐. 잘할게. 딜런. 한 번만 봐줘라. 응? 이거 하나도 안 남기고 다 주워 담을게. 어?”
― 으하하하.
나도 모르게 박장대소가 튀어나왔다.
남의 불행을 보고 비웃는 그런 캐릭터 아닌데.
며칠간 우울했던 마음이 한 방에 날아가 버린다.
“같이 해.”
“됐어. 안 도와줘도 돼!”
“입에 거름 들어가니까 입은 닥치고. 이그. 뭘 또 이렇게나 욕심을 부렸대?”
“…….”
비웃은 게 미안해서 내 수레를 잠깐 내려놓고, 라이언을 도왔다.
끝까지 ‘고맙다’ 소리는 못 들었지만, 그 뒤로 라이언은 조금 얌전해지긴 했다.
경쟁심이 큰 건지, 나에 대한 미움이 큰 건지.
알 수가 없는 놈이다.
어쨌든 우리는 힘 좀 쓰는 14살, 16살짜리들이다.
제시간에 그날의 할 일을 모두 마쳤다.
“와. 일들 잘 하네. 밥 아저씨가 왜 제이든을 콕 집었는지 알겠다. 자. 여기.”
“일당을 바로 줘요?”
“어. 이번 주까지만. 오늘 일하는 거 봐서 정식 고용할 건지 결정한다고 했거든. 담주 수요일부터는 정식으로 고용계약서 쓸 거니까 그렇게 알고.”
“네.”
“금요일에 보자.”
“딜런이 계속 나와요?”
“어. 내가 여기 막내라 니들 교육 맡았어. 계속 보게 될 거야.”
“네.”
인사를 하고, 컴컴해진 길을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다.
9월 중순이라 8시쯤 되니 캄캄하다.
안전을 위해 자전거 휠에 반사재를 달아야 할 것 같다.
* * *
일요일 널싱홈.
우리는 모두 흰 셔츠에 검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검은 바지를 입었다.
가지고 있는 옷으로 최선을 다해 꾸민 것이다.
널싱홈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은 흔한 일이다.
미스터 커나스만 특별하게 챙겨 줄 수는 없는 일.
우리는 오늘 야외무대를 준비했다.
미스터 커나스의 관이 운구차에 실리고, 차의 창문을 모두 열어 둔 상태에서 우리는 연주를 시작했다.
총 3곡의 연주.
미스터 커나스가 만들고, 가장 아끼는 곡이었다는 ‘Variations on a Korean Folk Song’과,
우리의 연주를 듣고 웃음을 멈추지 못했던 클로드 드뷔시‘Clair de Lune’,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는 ‘석별의 정’이라고 불리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Auld Lang Syne’.
연주는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까지는 괜찮았다.
우리 모두 이제는 제법 연차가 쌓여 들어 줄 만한 연주단이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곡에서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만 헤나.
그 바람에 크리스틴이, 마크가, 오디와 알렉스, 마커슨이….
미스터 커나스가 보았다면 호통을 쳤을까? 아님 껄껄거리며 웃었을까?
나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모두가 흐트러진 상태에서 나라도 정신을 부여잡아야 했으니.
내 연주에 흐느끼던 아이들이 금방 진정하며 다시 연주를 이어 나갔다.
그 바람에 ‘석별의 정’은 두 번을 연속해서 연주했다.
“고맙다, 얘들아. 우리 삼촌이 많이 좋아했을 거야. 잘들 지내라.”
“멀리 가시는데,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간간이 연락하자.”
“네.”
에드와의 인사를 끝으로 차가 출발했다.
‘고마웠습니다, 미스터 커나스. 편히 쉬세요.’
내 인사는 미스터 커나스에게 닿았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카피 캣과 와일드 캣
월요일.
모든 수업이 끝나고 마지막 홈베이스 시간.
알렉스가 은밀히 어깨를 부딪혀온다.
대놓고 ‘빅뉴스’라 떠들 수는 없는 주로 남의 험담을 할 때 하는 제스처다.
물론 대부분 그 출처가 명확하고.
“왜?”
“내가 웃긴 이야기 해 줄까?”
“안 궁금해.”
“라이언 이야긴데?”
“…뭔데?”
“걔 머리 색이 원래 금발이 아니래. 연한 갈색이래.”
“뭐?”
“걔가 좀 잘난 사람 따라하는 그런 게 있대. 취미도 아닌 것이 무슨 심리 어쩌고 하던데. 카피캣이지. 카피캣(Copy Cat). 크리스도 너처럼 어릴 때부터 유명 인사잖아. 풋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암튼. 초딩 때부터 크리스하는 건 다 따라했대. 여자애들한테 집적거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크리스는 여자관계 깨끗했다더라. 옆에서 아무리 눈길을 줘도 모른 척했다던데.”
“니가 몰라서 그렇지. 크리스도 소문은 무성했어. 암튼 라이언도 따르는 여자애들은 엄청 많은데, 진짜 사귄 애는 없었대. 대부분 처음 몇 번 만나다가 쫑 났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바람둥이로 소문이 난 거지만. 나중에 크리스가 제시카랑 사귀고, 프러포즈까지 했다는 거 알고는 완전 충격받았다던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번 타깃은 너라는 거지. 검은 머리로 염색하자마자 걔 엄마가 누군지 데려오라 그랬대.”
“넌 그런 걸 어디서 듣는 거야. 도대체?”
“영업 비밀이다. 그런 거까지 알려고 하지 마라.”
― 드르륵. 탁.
“얘들아! 난리 났어! 빅뉴스야. 빅뉴스.”
곱슬머리 여자아이, 린다가 튀어 들어오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어? 저건 알렉스 멘튼데?
알렉스의 표정이 묘하다.
‘뭐지?’
평소 같으면 왜 남의 멘트 뺏어 가냐고 벌떡 일어나 고함부터 쳤을 놈이 고개만 살짝 틀어 여자애를 쳐다본다.
슬쩍 미소도 나오는 거 같고?
“왜? 무슨 일인데?”
“지금 밖에 그 애… 그래. 마커슨! 마커슨이랑 라이언이랑 붙었다고.”
“뭐?”
나와 알렉스가 동시에 튀어 나갔다.
장소가 어딘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오자마자 알았다.
꺾어지는 복도 쪽에 아이들이 휴대폰을 높이 들고 몰려있다.
“마커슨!”
일단 소리를 질러놓고 튀어갔다.
아이들이 나와 알렉스를 보고는 길을 터 준다.
우리가 항상 붙어 다니는 걸 아니까.
라이언과 마커슨이 대치 중이다.
주먹까지 쥔 걸 보니 뻗기 일보 직전이다.
“마커슨, 스탑! 무슨 일이야?”
“캡틴.”
제이든이 아니고 캡틴이라 불렀다.
내가 캡틴으로서 해결해야 할 정도로 억울한 일이 생겼다는 뜻.
어느 순간 오디도 튀어와 우리 옆에 섰다.
마커슨을 내 등 뒤로 두고 라이언을 쳐다보았다.
“라이언. 무슨 일이지?”
“내가 아니라 니 꼬붕한테 물어봐야지.”
“말 가려서 해. 라이언. 그리고 말해. 무슨 일인지.”
“…저 새끼가 먼저 내 머리로 시비 걸었다고.”
“뭐?”
“아냐. 제이든. 저 새끼가 먼저 인종차별했다고.”
“인종차별을 해?”
“하! 미친 거야? 너네는 인종 말고는 내세울 게 없냐? 뭘 뻑하면 인종차별이래! 야. 말은 바로 해야지. 니가 먼저 왜 검은 머리로 염색했냐고 했잖아, 시키야.”
“물어보지도 못하냐? 금발을 검은색으로 염색하니까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거잖아!”
“나도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머리카락이 그렇게. 귀엽게. 브로콜리처럼 자라는데 왜 머리를 싹 밀어 없애냐고!”
― 허억.
― 미친 거야?
― 라이언이 잘못했네.
.
.
.
주변에서 쑥덕거린다.
흑인에게 머리카락에 대한 언급은 금기어다.
선천적으로 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짧을 때는 두피를 파고들고, 길 때는 브로콜리처럼 위로 솟아오른다.
그래서 남자들은 대부분 머리를 밀어 버리고, 여자들은 그 머리를 펴기 위해 엄청난 금액을 쏟아붓는다.
흑인이 다른 인종들의 머리카락을 부러워하는 건 사실이다.
라이언.
나에게도 ‘아시안 주제에 캔디를 많이 받는다’라며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더니 급기야 사고를 치고 말았다.
나야 똑같이 되돌려 줬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는 걸 몰랐던 건가?
“뭐야? 거기 무슨 일이야!”
급기야 선생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커슨과 라이언이 서로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휙 달아났다.
엄청난 긴장감이 흐르던 공간이 순식간에 해산되었다.
학생들이 사사삭― 사라지자 선생님들도 잠시 복도를 지키고 서 있다가 각자의 홈베이스로 들어갔다.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다.
괜히 일 만들면 퇴근만 늦어진다.
나와 알렉스도 교실로 돌아왔다.
친구들이 힐끔거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뒤늦게 들어온 미스터 칼이 분위기를 살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마커슨도 순수하게 물은 건 아닐 것이다.
염색한 라이언에게 도발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나중에 물어보자.’
그리고 생각에서 지웠다.
* * *
― 면담 요청. 잠깐 보자. 우리 집 뒷마당.
오늘의 할 일도 모두 끝냈다.
크로스컨트리도 했고, 집에 와서 밥도 먹고, 샤워 후 엘리도 보고 왔고, 줌을 켜 두고 공부방 놈들과 함께 숙제도 끝냈고.
같은 골목에 사는 놈들은 와서 공부하다 갔지만 다른 동네에 사는 알렉스나 오디, 매튜와 크리스틴은 오지 못했다.
그렇게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마크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다.
― 오케이.
“이 밤에 어디 가?”
“엄마, 아직 안 주무셨어요?”
“어우. 숙제가 너무 많다. 지난주부터 실습도 나가잖아. 지금 아니면 시간이 없어.”
“그래도 건강이 제일이라는 거 아시죠?”
“네네. 근데 어디 가냐고?”
“마크 좀 보고 올게요.”
“왜?”
“상담할 거 있나 봐요.”
“야, 아들.”
“네?”
“상담료 받아. 이눔 시키들이 내 아들을 너무 부려 먹어.”
“하하. 부려 먹긴요. 제가 캡틴이에요. 걱정 마세요.”
“…다녀와.”
“네.”
요즘 들어 걱정이 많아지는 엄마.
밥스 가든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반대했었다.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줄 테니 말만 하라고.
어느 순간부터 너무 어른이 되어 엄마에게 기대지 않는다며 서운해했었다.
그게 서운해할 일인가 싶지만, 부모 마음은 또 다른가 싶기도 하고.
마크네 뒷 마당으로 갔더니 마크 혼자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기다리고 있다.
본인 건 작은 마시멜로가 잔뜩 들은 핫코코아, 내 건 따뜻한 녹차.
“뭔데 이렇게 폼을 잡아? 차까지 준비를 다 하시고. 무슨 일 있어?”
“내 일 아니고, 마커슨.”
“마커슨 이야기를 왜 니가 해?”
“말 좀 잘 해 달래. 자기는 부끄러워서 못하겠다고.”
“허얼. 우리 사이에? 혹시 오늘 일 때문에 그래?”
“어. 자기 진짜 인종차별 한 거 아니래. 믿어 달래. 그냥 뭐랄까. 말하는 거 들어보면 딱 질투인데. 질투는 아니라며 펄쩍 뛴다.”
“질투? 뭔 소리야?”
“왜. 그런 거 있잖아. 본인은 처음 만남부터 너한테 빚진 게 있고, 우리 공부방에서도 알렉스나 오디보다 자기가 제일 처진다고 생각하는 거지. 뭐. 사실이니까. 공부든 악기든 젤 처지긴 하잖아.”
“뭐래? 걔가 달리기는 우리 중 제일 잘하는데. 요즘엔 컴퓨터도 젤 잘 다루잖아. 프로그래머 되시겠다고 자바까지 손대는 거 같던데?”
“그렇지. 너는 그렇게 말하는 녀석이지.”
자꾸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말을 빙빙 돌려 할 줄 모르는 녀석인데, 어쩌다 보니 중간에 끼어 하고 싶은 말을 확 지르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냥 말해. 뭔데?”
“그니까 라이언이 너랑 가까워지는 게 무서웠나 봐. 라이언이 카피캣이라는 거 아는 사람은 다 알거든. 후우. 그래. 나도 모르겠다. 내 생각엔 말야. 마커슨이 안 그래도 공부방에서 본인 입지가 제일 쳐지는 거 같은데, 라이언까지 끼면 더 밀려나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든 거 같아. 한마디로 수컷들끼리의 서열 경쟁에서 밀리까봐 시비 한번 걸어 본 거지.”
“허얼.”
서열 정리.
잘 알지.
전생에서 수없이 본 거다.
조금이라도 싫증 나면 시계든, 옷이든, 가방이든 옆에 있는 놈들에게 던져 줬었다.
그렇게 물 쓰듯 돈 쓰는 내 옆에 붙어 하나라도 얻어 보겠다 아귀다툼하는 놈들을 봐 왔었다.
그 당시 내 옆에 있던 놈들은… 뭐랄까?
나와 비슷한 처지이거나 급(?)이 좀 떨어지는 놈들뿐이었으니까.
진짜인 놈들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나한테서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마크가 내 표정을 읽더니 한숨을 내쉰다.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데. 후우. 야. 그거 그럴 수 있는 거다. 내가 좋아하고 동경하는 친구한테 인정받는 거. 그거 남자들의 로망이야. 이미 알렉스나 오디가 니 양쪽 옆자리 딱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잘난 라이언까지 끼게 되면 자기는 어떻게 되겠냐?”
“라이언은 나 싫어하는데?”
“평소엔 눈치 백 단인 놈이 오늘따라 왜 이래. 그놈. 이미 너 따라 하고 다니잖아. 지난 토요일 풋볼 연습에선 갈색 서클렌즈까지 끼고 나타났다더라.”
“히익. 진짜?”
“지금 같은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와일드 캣이 카피캣한테 자리 뺐길까 봐 불안해하고 있는 정도? 그래도 오늘 니가 딱 마커슨 편 들었다며? 마커슨이 혼자 엄청 감격한 모양이던데. 암튼 사내새끼들이 뭐 하는 짓들인지. 상황이 그렇다고.”
아.
이놈의 인기.
날이 갈수록 점점 멋있어질 텐데 어쩐다.
“아. 그건 그렇고. 우리 헤나는 어쩔 거야?”
“귀여운 동생.”
“알았다.”
마크의 물음을 바로 알아들었고, 내 대답에 마크 역시 더는 묻지 않았다.
마커슨이 왜 마크한테 이런 일들을 털어놓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요즘 들어 마커슨이 좀 심란해 보이기는 했다.
나처럼 미스터 커나스의 일로 충격을 받아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친구에 대한 동경과 우정, 질투.
어느새 내가 그런 것들의 가운데에 있었다니.
인간의 감정을 읽는데 능숙한 편인데도, 이렇게 순수하게 다가오는 감정들은 좀 어렵다.
알렉스는 늘 내가 베스트프렌드라며 표현을 해 대니 모를 수가 없지만 깔끔한 편이고, 오디는 시니컬하지만 정 붙일 곳이 없어 우리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
시니컬한 성격도 조금씩 변하는 중이고.
마커슨은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먼저 든다.
15년밖에 안 살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정말 많은 일들을 경험한 친구.
때마침 만난 우리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지 가늠이 안 되는 인생이다.
게다가 얼마 전 출소한 아빠가 양육권 소송을 걸어 요즘 엄마와 아빠가 한창 법정 다툼 중이다.
잘해 줘야겠다.
* * *
다음 날.
원래 어제부터 클럽위크(Club Week)가 시작되었었다.
아침에 미스터 커나스의 장례 일정이 정해졌다는 이메일을 받고는 정신을 반쯤 빼고 하루를 보냈고, 마지막엔 마커슨의 일까지 겹쳐 클럽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잊었다.
아침 홈베이스 시간부터 알렉스가 촐싹거린다.
“제이든. 어쩔 거야?”
“뭘?”
“클럽.”
“디베이트 들어가야지.”
“나도. 나도 갈 테니까. 뉴스페이퍼 클럽에도 이름 넣자.”
“그래.”
“앗싸. 오디가 HOSA에도 이름 넣어 주래. 그럼 우리 꺼에도 이름 넣겠다고.”
“이름만 넣는 게 무슨 소용이야. 활동을 해야지.”
“할 거야. 그리고 지금은 무조건 한 명이라도 이름 넣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잖아. 이사회에서 스포츠클럽에 지원금 다 돌릴 생각한다고.”
“오케이. TSA는? 마커슨은 그쪽이라며?”
“오호. 기억하고 있었군. 그쪽에도 당연히 우리 넷 이름 다 들어가지.”
“그래. 그럼… 벌써 4개나….”
― 드르륵.
문이 열리고 인도 여자애가 들어온다.
“어? 미아네? 미아! 우리 홈베이스엔 웬일이야?”
“제이든 보러.”
‘나?’
지나가면서 본 적은 있는데 말을 해 본 적은 없는 친구다.
내 앞에 성큼 나타나는 미아.
종이 쪼가리를 내민다.
“너 이거 만들어라.”
“이게 뭔데?”
“클럽 파운데이션 신청서. 니가 회장하고, 내가 부회장. 어때?”
“너랑 나랑 클럽을 만들자고?”
“어. 제안서는 내가 대충 만들었는데. 확인해보고 연락 줘. 연락처도 거기 있어.”
그리고는 쿨하게 나가 버린다.
고개를 내려 종이 쪼가리를 보았다.
제목이 ‘입양인 클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