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35)
35화 전사 (3)
머릿속은 하얗고, 눈앞은 흐릿하다.
통증? 말할 것도 없다.
마치 온몸이 난자당한 상태에서 소금물에 절여지고 있는 듯한 기분.
당장에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싶지만…….
‘지랄.’
나약한 마음을 억지로라도 집어 던진다.
기로에 섰을 때, 인간은 선택해야만 한다.
무엇을 버리고, 그 대가로 무엇을 지킬 것인가.
푸욱!
예리한 무언가가 허벅지를 깊이 찌른다.
괜찮다.
당장 목숨에 지장이 생길 부위는 아니니.
다만, 아무리 찢어발겨도 죽지 않는 사냥감을 보며 부아가 치밀었을까.
“캬아아악!”
뱀파이어 새끼의 움직임이 더욱 포악해진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여전하다.
베이고 뜯겨져 나가 크기가 반으로 줄어든 방패를 들어 올려, 급소만은 어떻게든 보호하는 것.
쩌거걱!
5등급 몬스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방패가 손잡이만을 남기고 뜯겨져 나갔다.
나는 한 치의 고민 없이 방패 대신 팔을 들어 올려 머리를 보호했다.
그 찰나.
쨍그랑!
손톱이 아닌 무언가가 내 머리 위에 부딪쳐 깨지더니, 날카로운 파편들을 쏟아낸다.
「캐릭터의 영혼에 ‘시체골렘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순식간에 무뎌지는 통증.
「고통 내성이 +70 상승합니다.」
한계에 치달은 몸에 깃드는 새로운 활력.
「근력이 +15 상승합니다.」
안개라도 낀 듯 흐렸던 눈앞이 개인다.
가장 먼저 보인 장면은, 머리를 감싼 팔 위로 휘둘러지는 뱀파이어 놈의 날카로운 손톱이었다.
이를 보자마자 무의식중에 통째로 베여져 나가는 나 자신의 팔이 상상됐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전혀 달랐다.
서걱!
손톱은 연약한 살을 너무도 쉽게 파고들었다.
다만, 거기까지가 허락된 전부였다.
카칵!
뼈에 가로막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손톱.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 불가사의한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골강도가 +55 상승합니다.」
「 독내성이 +12 상승합니다.」
「인지력 -5 하락합니다.」
「식욕 +9 증가합니다.」
「체중이 +21 증가합니다.」
「패시브 스킬 [산성체액]으로 인해 캐릭터의 혈액이 산성을 품습…….」
안도감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시체골렘의 정수를 먹인 건가…….’
이걸로 인해 내 육성법은 엄청난 수정을 거쳐야 하게 될 것이다.
다만,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근시안적인 시선으로 현재를 바라보자면…….
몹시 긍정적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타닷!
뒤로 바닥을 굴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통 내성의 효과 덕분일까?
통증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니, 움직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근데 수호자의 정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시체골렘의 정수를 내가 먹었으니, 그건 무효로 되는 건가?’
문득 스쳐간 생각은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런 거야 나중에 생각해도 될 노릇일 테니.
“캬아아악!”
갑자기 싱싱해진 사냥감이 신기한지, 뱀파이어 놈이 열성적으로 달려든다.
이에 내 몸도 피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이후 벌어진 일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야 7등급 정수 하나를 먹었다고, 5등급 몬스터를 압도한다던가 하는 일이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누워서 처맞던 고기 방패가, 일어서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변한 건 딱 그 정도겠지.’
자학적인 자기 평가를 내리면서도 나는 피식 웃었다.
푸욱! 서걱! 카칵!
손톱이 살을 헤집고, 내장을 찢어낸다.
미리 입으로 삼켜 위장에 보관 중이던 포션이 전부 소화됐는지, 재생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상관없다.
소극적이던 마법사도 이제 슬슬 자기 목숨이 위험하단 걸 깨달았는지, 재산을 쏟아붓기 시작했으니까.
쨍그랑!
유리 병 하나가 날아와 깨지더니, 그리고 내용물을 내 몸 위로 쏟아붓는다.
「회복(상) 효과로 인해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설마 상급 포션일까?
암만 봐도 금발이 먹인 포션보다 성능이 좋다.
치이이이이익!
오히려 전보다 빠르게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
나는 아예 적극적으로 놈에게 달려들었다.
살이 베이고, 근육이 찢기면 어떤가.
어차피 몇 초면 다 낫는데.
“캬아아아악!”
“와아아아아악!!!”
뱀파이어 놈에게 밀리지 않도록 함성을 내지른 나는 초접근전을 해나갔다.
그야 선택지가 없었다.
망치는 저 멀리 떨어져 있고, 방패는 고철 뭉치가 되어 버렸으니까.
“캬, 캬악?!”
그라운드 기술을 쓰는 탐험가는 만나보지 못했는지, 매미처럼 등에 매달려 목을 압박하고 있자니 놈이 크게 당황한다.
음, 당황이 아니라 괴로워하는 건가?
“캬아악!”
살이 맞닿은 부분에서 연기가 솟구친다.
치이이이익!
내 피의 묻은 산성이 놈에게 닿으며 생긴 연기인지, 포션으로 내 몸이 치유되며 생긴 연기인지는 정확히 구별하는 게 불가능했지만…….
상관은 없다.
‘둘 다겠지 뭐.’
그렇게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포션 한 병이 더 날아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진다.
「회복(상) 효과로 인해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역시 포션과 산성은 한 끗 차이였구나.
포션이 깨짐과 동시, 목이 졸리던 뱀파이어가 더 큰 비명을 내지르더니 너무도 손쉽게 나를 내던졌다.
여실히 느껴지는 압도적인 근력 차.
하지만…….
“씨바, 별거 아니네 새끼.”
슬슬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이 상태, 즉, 바바리안 불사신 모드라면 이 새끼를 상대로 몇 분이고 버틸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든다.
“비요른! 돕겠다!”
심지어 아이나르마저 다시 전장에 합류했다.
“무라드는?”
“그 짐꾼이 돌보고 있다!”
아이나르의 합류는 더욱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내가 포션을 먹으며 메인 탱커 역할을 맡고, 조금 위험할 때마다 아이나르가 대검을 휘둘러 숨 돌릴 시간을 만들어 낸다.
한층 더 수월해진 전투.
“캬아아악!”
“아이나르! 피해라! 곧 까마귀가 날아들 거다!”
내 외침에 아이나르가 뒤로 크게 물러난 순간.
놈의 몸이 수백 마리의 까마귀로 변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한발 먼저 움직인 우리에게는 닿지 않았다.
“역시 비요른은 대단하다! 이게 올 줄 어떻게 알았나?”
그야 이걸 쓰기 전에 놈이 항상 한쪽 눈을 찡그리더란 말이지.
뱀파이어가 지닌 종족적 특성이라기보단, 이놈에게만 통용되는 습관 같은 느낌으로.
정말로 끝이 보이는 듯하다.
“면목 없구먼! 다들 잘 버텨 주었네! 흐하하핫!”
이내 포션으로 부상을 치유한 난쟁이놈까지 다시 전장에 합류했다.
심지어 운반꾼 놈마저 이끌고 온 상황.
“지금부터는 나도 돕겠다.”
“우리가 옆에서 자네를 보조하겠네!”
메인 탱커 역할은 자연스레 내가 계속 수행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렇다고 다들 몸을 사리는 느낌은 아니고.
정말 그러는 쪽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3년 차 드워프 전사가 2개월 차 바바리안에게 말했다.
“위대한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 자네라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네! 하하핫!”
제 딴엔 칭찬으로 하는 말인 듯하지만…….
‘마지막까지 개같이 굴러야 한단 뜻이군.’
역시 나는 그냥 꿀만 빠는 건 평생 하지 못할 팔자인 건가?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다마는.
“베헬—라아아아아아!”
나를 중심으로 한 진형으로 넷이서 뱀파이어 놈을 상대하고 있자니, 머지않아 사무치게 기다려 왔던 그 기점이 찾아왔다.
[다 됐어요.]만약 저 다 됐다는 말이, 마력 회복을 끝마치고 ‘흑점구’의 영창마저 끝냈으며 ‘속성 강화’까지 완료했다는 뜻이라면…….
드디어 모든 준비물이 갖춰졌단 얘기겠지.
바꿔 말하자면, 이제 이 개같이 길었던 싸움을 끝내고 밖에 나갈 때가 됐단 거겠고.
[언제든 마법을 쓸 수 있어요.]확답이 들려온 순간, 나는 우렁차게 외쳤다.
“무라드! 지금이다! ‘전격 방출’을 써라!”
약속은커녕 한 번의 언급도 없던 지시.
다만 난쟁이놈은 가타부타 하는 일 없이 즉시 내 지시를 수행했다.
지지직, 지지직!
난쟁이놈의 망치 위에 노랗게 빛이 어리더니 스파크가 튀기 시작한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전격]을 시전했습니다.」
7등급 몬스터 일라트렉의 이능.
효능은 신체 일부분에 강한 전류가 흐르도록 해 주는 것.
그 상태로 난쟁이놈이 망치를 낮게 들었다.
마치 올려치기를 하려는 듯한 자세.
“다들 잠시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걸세! 하하핫!”
짧게 경고를 뱉은 난쟁이놈이 힘껏 망치를 허공에 휘둘렀다.
목표물인 뱀파이어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방출]을 시전했습니다.」
[던전 앤 스톤]에서 드문 ‘변환계’ 이능 중 하나인 ‘방출’.효과는 다른 이능을 통해 획득한 ‘기운’을 외부로 ‘뿜어낼 수 있게’ 해 주는 것.
후우우우웅!
망치에 어려있던 전류가, 구체의 형태로 대포알처럼 쏘아지더니…….
단어 그대로 폭발했다.
콰콰쾅!
소리에 비해 물리적인 위력은 낮았다.
바닥에 크레이터가 생긴다거나, 맞은 뱀파이어 놈의 사지다 뜯겨져 나간다거나, 그런 건 일절 없었으니까.
다만…….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가 [기절] 상태에 빠졌습니다.」
애초에 이 콤보의 핵심은 위력이 아니다.
순식간에 5등급 몬스터를 그로기 상태로 만든 난쟁이놈을 뒤로하고, 뒤쪽에 신호를 보냈다.
아주 아날로그한 방식으로.
“레이븐——!!!!”
다행히 신호는 잘 전달됐는지, 즉시 200m가량 떨어진 지붕 위에서 세찬 빛이 응집된다.
나는 서둘러 부츠에 숨겨 둔 아이템을 꺼냈다.
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보석 ‘여신의 눈물’.
그 많은 위기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아끼고 아껴온 그것.
타다닷!
그것을 꼭 쥔 채 달려나갔다.
그리고 놈의 아가리에 그것을 쑤셔 박은 뒤.
퍼억!
있는 힘껏 어퍼컷을 올려쳐 닫았다.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머지않아 놈의 입에서 새하얀 광채가 터져 나왔다.
「여신의 눈물이 파괴되었습니다.」
「파괴 위치에 [은총]이 내려집니다.」
「[은총]에 의해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의 모든 저항력이 일시적으로 봉인되며, 큰 피해를 입습니다.」
뱀파이어 놈의 입가로 피가 미친 듯이 줄줄 흘러나온다.
겉으론 멀쩡하지만, 안으로는 씹창이 난 모양.
새삼 놀라웠다.
역시 이거 하나로는 안 뒈지는구나.
「강한 충격으로 인해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의 [기절] 상태가 [마비]로 조정됩니다.」
기절이 끝났는지, 움찔거리는 놈의 손가락.
‘아직인가? 더 늦으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뒤로 고개를 돌린 순간.
「아루아 레이븐이 6등급 공격 마법 [흑점구]를 시전했습니다.」
마치 새카맣게 일렁이는 눈부신 구체가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콰아아앙-!
아, 씨바 진작 튈걸…….
***
「캐릭터가 [흑점구]의 폭발에 휘말려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가 [고통분담]을 시전했습니다.」
「히쿠로드 무라드가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아이나르 프넬린이 [기절] 상태에 빠집……」
***
삐이이이이-.
애국가가 끝난 지상파 채널처럼 쨍한 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그리고 그 이명 소리를 뚫고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TV 속 만담과도 같은 말투의 대화.
[정육점에서 구운 고기를 팔면 어떡합니까!] [아니에요! 이건 생고기예요!] [아니, 구웠는데 이게 어떻게 생고기야!] [하지만…….]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눈을 떴다.
[살아 있잖아요?]어두컴컴한 하늘이 보였다.
코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느껴졌다.
내 몸에서 나는 냄새인가?
“거허얽…….”
입을 열자 바짝 마른 목에서 긁는 소리가 난다.
귀도 멀쩡하구나.
되도록이면 긍정적인 부분만 생각하기로 했다.
“커허헉! 웩!”
화火 속성과 성聖 속성이 합쳐진 태양 속성을 지닌 공격 마법 ‘흑점구’.
당연히 위력은 동급인 ‘화염구’보다 약하다.
내게 있어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었다.
아니었으면, 진짜 그 자리서 뒈졌을 수도 있으니까.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흑점구’에 휘말려 일시적으로 기절을 했다.
그것은 명확했지만, 현 상황을 이해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나는 왜 아직 치료가 안 됐으며, 주변에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까?
“…….”
진물이 가득한 손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억지로 눈에 초점을 잡으며 앞을 확인했다.
일단, 뱀파이어 새끼가 보였다.
“씨발.”
저게 왜 살아 있어?
물론, 저 새끼도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양팔이 뜯겨져 나갔고, 파헤쳐진 가슴 상단부로는 뼈가 보일 정도.
심지어 의식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의 재생력이 [영생자] 효과로 대폭 상승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처가 아물고 있다.
잃은 체력 비례임을 감안하면 가슴부의 살이 아물고, 뜯겨져 나간 양팔이 다시 자라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터.
“니, 미…….”
주변을 보니 쓰러진 이들이 여럿 보인다.
난쟁이놈, 아이나르, 운반꾼 새끼.
왠지 저 멀리 지붕 위의 마법사도 똑같은 상황일 듯한데…….
혼란스럽다.
이게 뭔 지랄맞은 경우지?
다 잡아 놓고 왜 다들 기절해 있어?
정신을 잃은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보아하니 얼마 지나지도 않은 거 같은데?
온갖 의문이 샘솟지만…….
나는 전부 집어 치우기로 하며 잘 움직이지도 않는 발을 내디뎠다.
터벅.
여전히 상황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딱 하나만큼은 너무도 명확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터벅.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
그것 말고는 답이 없는 상황이다.
아무리 마법사가 부자여도 포션이 무한하지는 않을 테니까. 사실상 아까처럼 포션으로 버티는 전략은 이제 못 쓴다 보는 편이 옳겠지.
터벅.
그래서 비틀비틀거리면서도 걸었다.
고통 내성마저 뚫는 통증?
못 느낀 척 무시하며 스테이크 냄새가 나는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터벅.
고통이란, 살라는 신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반대로 생각했던 시절도 없던 건 아니지만, 일단 지금은 그렇다.
그래서 계속 걸었다.
터벅.
가까이 오니 이 뱀파이어 새끼한테서도 구운 고기 냄새가 났다. 나는 무릎에 힘을 풀며 쓰러지듯 놈의 위에 올라탔다.
“개, 조가트, 새끼…….”
뼈가 보일 정도던 가슴의 상처는 걸어오는 동안에 벌써 살이 꽤나 올라온 상태.
도무지 욕을 안 하곤 배길 수가 없다.
퍽!
그래서 주먹으로 놈의 가슴을 내리쳤다.
뱀파이어의 약점은 심장이니까.
이 새끼들은 뇌가 부서져도 심장만 멀쩡하면 되살아날 수 있다.
‘아, 이 새끼 팔이 뜯겨져 나간 게 그래서구나. 팔로 ‘흑점구’를 막아서?’
뒤늦게 내가 보지 못한 찰나의 상황이 그려지지만, 늘 그렇듯 그냥 흘려보냈다.
퍼억!
주먹을 또다시 내리친다.
어느 때보다 장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 삼켜야 하는 법.
퍼억!
메이스는 어딨는지도 모르겠고, 방패는 진작에 폐기물이 되어 주변에 아무렇게나 투기했다.
물론 아이나르의 대검이나 난쟁이놈의 전투 망치가 바닥에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그걸 주워 올 생각은 못 했네.’
어차피 주울 힘도 없었겠지만.
그렇게 주먹을 내리치던 도중, 구겨지고 구멍 뚫린 하프 아머의 이음새가 뜯겨져나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내 36만 스톤…….’
산성 피에 점칠 돼 여기저기 부식된 하프 아머를 보고 있자니 수리도 힘들 듯하다.
정말로 멘탈을 건드는 건 다른 부분이겠지만.
“씨부랄.”
이건 뭐 밑빠진 독에 물 붓기도 아니고.
아무리 내리쳐도 변하는 게 없다.
갈비뼈가 뭐 이리 튼튼해?
계속 두들기다 보면 부러지면서 심장을 찌르지 않을까 했는데.
‘좋아, 이 계획은 포기하지 뭐.’
나는 항상 플랜 B를 세우는 걸 좋아한다.
왜냐면 A가 성공해 본 적이 거의 없거든.
팔자가 기구해서 그런지, 뭘 하던 항상 마지막에 개같은 일이 터졌다.
‘그나저나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이렇게 하면 되나?
에르웬은 정확히 이미징하는 게 중요하다던데.
‘살점폭발.’
음, 진짜 되네.
퍼엉!
놈의 가슴부에 올려둔 손이 폭발한다.
폭발력은 그리 크지 않지만, 살점과 피에 섞여진 산성 물질로 인해 놈의 가슴부가 조금 파였다.
그마저도 빠르게 재생됐지만…….
‘어차피 한 번으로 될 거라곤 기대도 안 했어.’
연이어 [살점폭발]을 시전했다.
그렇게 한 열 번을 썼을 때일까?
퍼엉! 퍼엉! 퍼엉!
왼손이 아예 씹창이 났다.
골강도가 상승했기 때문인지 뼈대는 멀쩡하고 살점만 사라진 것이, 무슨 스켈레톤이라도 된 거 같다.
아무튼 이제 왼손은 못 쓰겠군.
‘그럼 이제 오른손 차례.’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란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오른손을 놈의 가슴 부에 올린 뒤.
‘살점폭발, 살점폭발, 살점폭발…….’
계속해서 터트렸다.
한도를 모르고 고점을 돌파하는 통증은 최대한 외면했다.
죽을 거 같지만, 죽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거다.
퍼엉!
그렇게 한 8번쯤을 썼을까.
몸이 휘청였다.
딱 몇 번만 더하면 될 거 같지만…….
「경고: 캐릭터의 생명력이 1% 미만입니다. 조속히 치료하지 않을 시, 캐릭터가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더 이상 정신력 따위로는 버틸 수 없는 영역에 도달했다는 것이.
지금이라도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뱀파이어 새끼를 죽이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나 또한 죽게 된다.
그런 직감이 드는 한편, 이성은 판단했다.
‘어차피 그만둬도 죽는 게 똑같다면…….’
멈춰선 안 된다.
동료들을 위해 희생하겠다거나 하는 이유는 절대 아니다.
퍼엉!
누군가에겐 이런 내가 미친 새끼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찰나의 순간 나는 확신했다.
오히려 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건, 이 길이 틀림없다고.
퍼엉!
한 번 더 살점을 터트린 순간.
「경고: 캐릭터의 생명력이 0%에 도달했습니다.」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온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몸이 가벼워지는 그런 기분이라 해야 하나?
머지않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아, 이게 그거구나.
내가 회광반조回光返照라 불렀던 그거.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43/46)」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40/46)」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37/46)」
마치 사신이 등 뒤에 맞닿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나는 재차 살점을 터트렸다.
퍼엉!
한 번 더 놈의 가슴부가 움푹 패였다.
근데 이게 바바리안이 지닌 전투적 직감일까?
왠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앞으로 한 번.
딱 한 번이면 된다.
그러니까…….
‘살점폭발.’
이제 살점이 거의 남지 않은 오른팔 대신, 내 가슴을 놈에게 딱 붙인 채, 한 번 더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와 동시.
「뱀파이어 공작 캠보르미어를 처치했습니다. EXP +5」
뱀파이어 새끼의 몸이 빛의 입자로 화한다.
그래, 너도 죽기는 하는구나.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수호자 처치 보너스. EXP +3」
가슴이 벅차올랐다.
심리적 묘사가 아니라 정말로.
일전에 경험해 봤기에 나는 정확하게 현재 내 상황을 파악했다.
「캐릭터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영혼력이 +10 상승합니다.」
「최대 흡수 가능 정수가 +1 증가합니다.」
레벨이 올랐다.
딱히 기쁘진 않았다.
그럴 때가 됐을뿐더러…….
[던전 앤 스톤]은 레벨이 오른다고 피가 차는 그런 게임이 아니니까.「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16/46)」
과연 내 목숨은 몇 초나 남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길어 봤자 5초 남짓일 것이다.
‘…결국 마지막은 운에 맡겨야 되는 건가.’
역시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맘에 들지 않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인게임에서 수호자가 균열에서 정수를 뱉을 확률은 약 33퍼센트.’
33%.
목숨을 걸기에는 너무도 낮은 가능성.
하지만, 0%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가능성.
‘다시 생각해도 하지 않을 이유가 없군.’
미련을 털어내듯 나는 씨익 웃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쳤다.
그러니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13/46)」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합니다. (10/46)」
「초당 정신력 수치 3을 소모…….」
1초, 2초, 3초.
시간이 흐르며 점점 눈이 감긴다.
‘실패한 건가…….’
실수로 인한 실패는 아니다.
단지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
‘어쩌면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결말일지도.’
흐름에 맡기듯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29세 회사원 이한수로 돌아가 있길 바라며.
“킥.”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캐릭터의 영혼에 [뱀파이어의 정수-수호자]가 스며듭니다.」
「자연재생이 +45 상승합니다.」
「근력이 +15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15 상승합니다.」
「항마력이 +30 상승…….」
…「패시브 스킬 [어둠의 근원]으로 인해 심장이 파괴되기 전까지 캐릭터가 사망하지 않습니다.」
「캐릭터의 재생력이 [영생자] 효과로 대폭 상승합니다.」
「캐릭터의 생명력이 1% 이상 회복됐습니다.」
「카운트다운을 종료합니다.」
「업적 달성」
조건: 카운트다운 후 생존.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10 상승합니다.
「비요른 얀델」
레벨: 3 (New +1)
육체: 199.1 (New +87.7) / 정신: 105.3 (New +10) / 이능: 152.4 (New +129.4)
아이템 레벨: 114 (New -104)
종합 전투 지수: 485.3 (New +201.1)
획득 정수: 시체골렘 – Rank 7, 뱀파이어(수호자) – Rank 5 (New)
.
.
.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입니다.」
「관리자가 해당 캐릭터를 주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