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41)
제 111화
48화. 무명(1)
1796년 9월 4일.
진은 사밀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티칸을 떠나고 벌써 사흘이 흘렀고, 사밀이 위치한 콘 제후국의 남부지방은 완연한 가을.
그 선선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바람이 창가에 기댄 진의 머리칼을 가볍게 흔들었다.
암살자들의 성지로 가는 길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은 속상해 하던 길리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곧 생일이신데, 지금 떠나면 챙겨드릴 수 없으니 너무 아쉬워요, 도련님. 예비 기수로서 요즘 엄청난 전적을 올리고 계시지만, 가끔은 온전히 즐기는 시간도 갖도록 하세요.
이번에 사밀로 떠나기 직전에 길리가 해준 말.
최근 루나와 타이뮨을 보며, 길리에 대해서도 부쩍 생각이 늘었다.
‘길리한테 더 잘해야겠어. 나도 그러고 보면 길리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기도 하고…….’
루나와 타이뮨의 경우와 다르기는 했다. 타이뮨은 루나가 호기심을 갖지 않아 굳이 과거를 말하지 않은 것이지만, 길리는 반대였다.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진이 가끔 과거에 대해 물을 때마다 얼버무리거나 모른 척을 하는 것이다.
‘맥로란 가문 역사상 최고 수준의 천재였다는 소문만 들었지, 길리가 내 유모가 된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니.’
맥로란.
룬칸델의 충신 가문 중 하나이자, 휴페스터 연합국에서 손에 꼽히는 무예명가. 길리는 그곳의 막내딸이었다.
도대체 그런 사람이 왜? 전생에서부터 줄곧 이어진 의문.
어떤 때는 사람을 써서 전말을 알아볼까 고민될 지경이었지만, 그건 길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걸 진은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직접 이야기해주겠지. 전생에선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 이번에 돌아가면 다 같이 여행이라도 한 번 갈까.’
덜컥, 덜컥, 덜컥-.
이내 생각을 정리한 진이 안쪽 창 너머로 마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부치고는 너무 젊은데다 하체 근육이 지나치게 좋아.’
보통의 마부라면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기피할 게 뻔한, 사밀까지의 운행을 흔쾌히 승낙하기까지. 이 마부를 고르기 전에 거절당한 것만 다섯 번이 넘었다.
그래서 진은 아까부터 그를 무명의 생도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예, 손님!”
“얼마나 남았소?”
“두어 시간 더 가야합니다.”
“이 길이 맞소?”
“예, 맞습니다. 걱정 마시고 한숨 푹 주무십시오, 사밀도 사람 사는 곳이라 저 같은 마부도 입구까지는 종종 갈 일이 있거든요.”
진이 확신을 가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도가 맞군. 진짜 무명의 암살자였다면, 이런 허술한 수법 따윈 쓰지 않을 테지.’
도시 주거자 전원이 암살자, 혹은 암살 생도라 할지라도.
주거자 모두가 흔히들 ‘무명’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특급 암살자는 아니었다. 또한 당연하게도 생도 중에는 옥석보다 자갈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무서운 놈들을 상대하는 건 사밀에 입성한 다음부터다. 그리고 마부도 사밀에 도착하기 전엔 절대로 공격하지 않아. 아마도.’
예상대로 두 시간 동안 별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진이 사밀의 입구에 도착한 것은 오후 두 시 무렵.
‘겉보기엔 평범한 도시와 별반 다를 것이 없군.’
적어도 입구 쪽은 그랬다. 적당한 넓이의 진입로가 펼쳐져 있고, 높지 않은 담장 사이 대문에 두 명의 문지기가 서 있었다.
그간 진이 거쳐 온 도시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문지기들이 유백색의 가벼운 천옷차림에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
굳이 위압적인 겉모습을 꾸밀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사밀을 함부로 출입하지 않으니까.
유백색은 무명의 상징이다. 도시 내부에 있는 모든 이들은 생도부터 최고 살수까지 모두 유백색 옷을 입었다. 방문객을 제외한 전원이 말이다.
“마차를 멈춰라.”
문지기가 나지막이 말하자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마차에서 내린 진은 곧장 품속에서 무명패를 꺼내보였고, 문지기들은 잠시 그것을 보며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
“사밀에 찾아온 목적을 밝히겠는가?”
진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또한 위압적인 질문도 아니었다.
“그냥, 경험 삼아 왔소.”
“재미있는 경험이 되겠군. 들어가라. 무명패는 떠날 때 다시 받아서 가면 된다.”
“도시로 발을 들이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지?”
“방문객에게 무명의 법도가 적용되는 것은 당신들이 무명패를 받은 직후부터요, 아니면 내가 도시 안으로 들어선 다음부터요?”
“그건.”
쉬이익!
문지기가 대답하려는 찰나 진의 후방으로 한 자루 단검이 날아들었고, 아까부터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진은 재빠르게 몸을 회전시켰다.
볼 것도 없이 마부다.
진은 회전 반동을 그대로 이용해 뒤쪽으로 몸을 던져, 막 또 다른 단검을 꺼내고 있던 마부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빠각! 진의 발꿈치에 맞은 마부의 허벅지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일었고, 이어서 팔꿈치를 휘둘러 마부의 턱을 때리는 진.
마부가 무너지듯 주저앉자 진이 고개를 저었다.
“전자였나 보군. 당신들도 덤빌 거요?”
문지기들이 커진 눈동자를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린 암살을 익히는 것이지 무예를 익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선수를 친 순간부터 우린 이미 실패한 셈. 편히 들어가라.”
“고맙군. 그리고 이 친구는 아마 퇴출될 테지? 유백색 옷, 무명의를 입지 않은 채 암살을 시도했다 실패했으니 말이야.”
“우리의 질서를 잘 아는군.”
“대단한 비밀은 아니니 모를 것 없지. 너무 낙심하진 말라고 전해주시오. 날 여기로 데려올 때부터 어설픈 것을 보아하니, 다른 쪽 진로를 찾는 게 그에게도 좋은 일 같거든. 진짜 마부가 된다거나.”
팅.
진이 품속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기절한 마부 쪽으로 튕겼다. 조금 뒤에 깨어나면 마부는 아마 좌절할 테지만, 진은 오히려 자신이 그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생각했다.
이런 엉성한 이들이 사밀에서 계속 지내봐야 결말은 개죽음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건 마차 삯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진이 성큼성큼 입구를 지나쳐 도시로 들어가자, 문지기들이 슬쩍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기하고 자비로운 소년이 찾아왔군, 생각하면서.
그리고 도시로 들어선 진 역시 곧장 감탄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오…….’
떠나기 전, 칠색조가 사밀에 대해 여러 정보를 알려주긴 했다. 세인들의 인식과 달리 사밀은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닌 도시라고 말이다.
거리는 작은 오물 자국 하나 찾을 수 없이 깨끗하고, 일정한 규격으로 구획된 건물들도 모두 새로 지은 듯 반듯하다.
무명의를 입은 채 그 속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수행자처럼 조용하며, 함부로 새로운 방문객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 모든 것이 오후의 쨍한 태양빛 아래 유백색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상상했던 것보다도 아름답긴 하지만.’
오소소,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아름다움은 피를 숨기고 있었다. 무명의 상징이 유백색인 이유는, 그들은 흰 옷을 입고도 결코 핏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토록 정갈하고 조용한 도시에서 그 누구에게도 포착되지 않은 채, 오랜 기간 암살 성과를 올리는 생도들만이.
저 멀리 높이 솟아있는 ‘무명관’의 살수가 될 수 있었다.
‘방문객은 그저 특별 훈련 대상일 뿐, 저들은 날마다 서로를 죽인다.’
거리의 생도들은 척 보기에도 마흔이 넘을 것 같은 중년부터, 젊은 청년, 진 또래의 소년은 물론이고.
진보다 네댓 살 어려보이는 아이들까지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분명한 실력격차가 존재하나, 강자가 약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나이, 경력, 출신과 상관없이 더 뛰어난 생도가 상대를 죽여 무명관으로 향할 뿐.
‘어떤 면에선 룬칸델보다도 끔찍한 곳이야.’
이 잔혹한 도시를 거니는 어린 생도들을 보고 있자니 진은 기억조차 희미한 그의 누이, 요나 룬칸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요나 누님도 열두 살 무렵에 이곳으로 보내졌다고 했지…….’
일찍이 요나의 재능을 알아본 시론은 그녀를 비궁으로 보낼지, 사밀로 보낼지 오랜 기간 고심했었다.
비궁과 무명은 둘 다 비슷한 이유로 거대 세력들의 통제를 벗어나 있으며, 같은 이유로 탐나는 땅이기 때문이었다.
둘 중 더 탐나는 곳은 당연히 비궁이지만 시론이 결국 막내딸을 무명에 보낸 이유는 하나였다.
비궁엔 시리스라는 정통 후계자가 이미 내정되어 있고, 무명은 아직까지도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없는 것이다. 요나가 스물셋이 된 지금까지도.
때문에 진은 전생까지 다 합쳐도 요나를 직접 본 날이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전생에서 요나 누님은 끝내 본가로 돌아와, 오직 가문을 위한 살수가 되었다.’
룬칸델의 ‘명예로운 기수’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철저하게 감춰져야 하는 가문의 비공식 기수.
적어도 검의 정원 안에서만큼은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요나는 평소에도 숨어 지내며 스스로 존재감을 지우곤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처지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그런 요나를 보며 진은 한동안 묘한 동질감을 느꼈었다. 전생의 요나는 아마 몰랐을 테지만 말이다.
‘나 역시 늘 구석에 박힌 채 숨죽이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누님과 나의 대우는 정말 많이 달랐지만.’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 혹은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만나서 직접 하면 될 터였다. 만독주를 얻고 싶다는 다소 뻔뻔한 부탁과 함께.
진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묵을 방을 찾아야 했다.
사밀은 중소도시다. 방문객이 적어 다른 중소도시에 비해 여관이 적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진은 이번엔 여관을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여관은 암살 위협에 대한 노출도가 너무 높아. 여관주인과 직원은 물론이고, 다른 투숙객까지 매일, 매순간 신경 쓰다간 며칠 못 버텨.’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는 코스모스의 각축장에서 이미 겪어보았다. 그때는 암살 훈련을 받지 않은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는데도 하마터면 버티지 못할 뻔한 것이다.
‘차라리 적당한 수준의 생도들 중 하나를 골라 방을 빌리는 게 낫다.’
그러면 아까 마부 정도의 잔챙이들은 집주인이 두려워 함부로 진을 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진은 언제나 집주인 생도에게 목숨을 위협받겠지만 말이다.
‘잘 골라야 해. 나를 언제든 죽일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내게는 절대 안 될 수준의 생도를.’
* * *
한편, 콘 제후국 중부의 선착장.
베라딘과 단테는 연회가 끝난 이후 줄곧 진을 추적하고 있었다.
“거기, 너. 응, 너 말이야. 잠깐만 나 좀 도와줄래?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 봤어?”
“흠흠, 이렇게 생긴 사람 본 적 있소? 있으면 사례하겠소, 아주 많이.”
그들은 하이란가의 권력을 이용해 비먼트와 제후국의 최근 이동 관문 사용 내역을 모두 뒤져 ‘진 그레이’라는 이름을 마흔다섯 개나 찾았고, 벌써 열 명이 넘는 진 그레이를 만났다.
하이란과 지플의 모든 인력을 총동원하면 훨씬 수월하게 추적하겠지만, 그래서는 비밀 여행의 의미도 없어지고 자칫 셋이 뭉칠 기회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두 사람은 그렇게 판단했다.
“이쪽도 진 그레이가 한 명 찾아온 것은 확실하건만…… 콘 제후국의 진 그레이도 그 친구가 아니면 어쩌오?”
“어쩌긴, 다음 동네 가봐야지! 마흔다섯 중에 하나는 그 녀석일 거야, 분명.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찾는다!”
범인들이 가질 만한 집념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