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566)
제 555화
147화. 흑해의 왕, 글리엑(11)
‘이게 무슨……!’
사방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거북한 어둠만이 가득했다.
대빙원이 부서지며 일어났던 날카로운 굉음도, 난데없이 돌변한 상황에 대응하며 소리치던 이들의 목소리도, 파편과 검기, 마법이 부딪치던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인지할 새도, 거부할 틈도 없이 세계로부터 유리되었다는 감각이 온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으나 느껴지는 것은 이 검은 공간 특유의 공허한 기운뿐이었다.
진은 일순 자신이 죽었다는 착각마저 들었으나 평정심을 붙잡았다.
‘아무래도 글리엑의 아공간 속으로 끌려온 것 같군.’
손을 들어 검을 바라보았다. 칠흑 속에서 본래의 색감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진의 몸뚱어리와 소지품이 전부였다.
예전에도 진은 이와 거의 흡사한 공간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솔더렛의 아공간과 거의 똑같다. 확실히, 영기와 혼돈의 힘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진한 연관성이 있어. 불쾌할 만큼 유사해.’
글리엑이 형성한 어둠은 그림자의 아공간과 닮아 있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모든 게 똑같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공간이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가, 적의를 갖고 있는가.
솔더렛의 아공간에서는 묘하게 낯설고 편안한 느낌이 가득했으나, 지금의 어둠은 형용할 수 없이 거대한 적의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적의는 진을 그냥 응시하고만 있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섬뜩하고 차가운 어떤 힘이 전신으로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큽!”
얼어붙은 칼날이 살을 에고 뼈를 찌르는 듯했다.
반사적으로 주먹이 오그라졌고 악다문 입 사이로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혼돈.
진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글리엑의 의지를 품은 혼돈이었다.
그 힘은 그간 진이 견뎌온 수많은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한참이나 상회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사선을 뛰어넘으며 단련해온 강인한 정신이 없었다면, 진은 채 5분도 버티지 못하고 까무러쳤을 것이다.
“허억, 카하악…….”
진으로서도.
공포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이 어두운 공간엔 그를 도울 수 있는 아군이 없으며, 도저히 이곳을 홀로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앞서 싸워온 황제군은 물론이고 지플의 대군을 상대할 때도 떠올린 적 없는 감정이 진을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손이……!’
불현듯 진이 소스라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검을 쥔 자신의 손끝이, 혼돈에 검게 물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겪어본 적 없는 일이나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끔찍한 변색은 혼돈에 잠식되고 있는 결과라는 사실을.
등허리가 오싹해지며 피가 식는 것 같았다.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니, 검지 한 마디를 물들인 혼돈의 기운이 점점 커지는 모습이 보였다. 애벌레가 기어가듯이.
게다가 잠식은 손가락 끝에서만 시작된 게 아니었다.
손가락처럼 유독 고통이 심한 곳은, 모두 잠식이 이루어지는 지점이었다.
잠식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직감적으로 다다른 결론은, 자신이 글리엑의 일부가 되는 미래였다. 단테가 그렇게 된 것처럼.
이겨내야 했다.
‘크기와 깊이가 다를 뿐, 언제나 극복해온 절망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어떻게든 잠식을 막고, 여길 빠져나갈 길을 찾는다.’
고개를 들고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고꾸라졌고, 그러기를 다섯 번.
진은 이 상태로 걷는 게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누구도 다리가 절단된 채로는 걸을 수 없듯이, 진이 지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의지만으로는 결코 거역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진은 자리에 앉았다.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가좌를 틀고 정신을 집중했다.
영기 해방.
우선 몸속으로 번지는 혼돈을 그것으로 밀어내야 할 것 같았다. 혼돈에 잠긴 그림자들이 진의 영기 해방을 따라 떠오르고 있었다.
다행히도, 효과가 있었다. 해방된 영기가 맑은 물처럼 혼돈을 씻어내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 보였다. 창성의 힘을 갖지 못한 자라면, 글리엑의 아공간 속에서 이런 식으로 탈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건 오직 그림자의 계약자뿐이었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고통 때문에 평소만큼 안정적으로 영기 해방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
폭포처럼 쏟아져야 잠식을 완전히 끝장낼 수 있건만, 그림자의 힘은 미약하게만 반응하고 있었다.
둘째는 영기 해방이 시작되자마자 벌어진 또 다른 현상이었다.
밀려나지 않은 혼돈들이 영기와 ‘섞이려’ 하는 것이다. 마치 원류로 회귀하는 물줄기처럼 말이다.
‘이 빌어먹을 전쟁과 싸움은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게 없군.’
혼돈과 섞인 영기는 진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또한, 강해졌다. 1차전 당시 현현한 솔더렛의 의지를 제외하면 진은 이제껏 그보다 더 강렬하게 요동치는 영기를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영기가 오러와 마력에 섞여 그것들을 강화할 때와 비슷했다. 성난 짐승처럼 제어하기가 어려울 뿐.
영기 해방은 미약하고, 혼돈과 섞인 그림자는 폭발적이다.
위험하더라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이조차 글리엑의 또 다른 함정일지 모르지만, 어차피 다른 수는 없다. 영기 해방의 순수한 영기만으로는, 잠식을 늦추는 것밖에 되지 않아.’
진의 선택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거친 탁류에 몸을 내던지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자신감이 차올랐다.
영기를 강화하는 혼돈의 속성.
어쩌면 이 또한 그 원리를 만든 존재의 안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신, 솔더렛의 뜻일 것이다.
이 힘을 나의 것으로 만든다.
영기가 진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저 막연히 살아남기 위해 혼돈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이라는 이정표가 생기자 흐름이 빨라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거칠어진 영기는 짓누르고, 그저 강해지기만 한 덩어리들은 움켜쥐었다.
혼돈의 반발에 목구멍으로 쉴 새 없이 핏물이 차올랐고, 때때로 의식이 희미해졌으나 진은 확신하고 있었다.
고통에 짓밟혔던 몸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단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불안정하기는 하나 그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솟구치고 있는 것이다.
그때쯤 진은 영기가 아닌, 자신에게 내재된 또 다른 힘이 혼돈에 반응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피.
인정받는 것을 넘어 진 룬칸델이라는 인간의 물리적 본질 일부를 형제들과 같도록 만들어준, 투신혈이 혼돈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포식은 네놈에게만 허락된 게 아닌 모양이군, 글리엑!’
프즈즈즉……!
영기와 혼돈 사이에 뇌전이 섞였다. 반의 피는 잠식이 두렵지 않다는 듯, 오히려 붙잡히는 혼돈을 모조리 광심장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내 진이 가좌를 풀며 꼿꼿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 물속에 갇힌 듯 어깨가 무거웠으나, 천천히 걸음을 떼니 한결 고통이 가셨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혼돈과 섞여 요동치던 영기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렇게 일곱 걸음을 걸었을 때, 진은 자신이 이 아공간의 첫 번째 시련을 극복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잠식은 멈췄고, 진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영기와 뒤섞여 그토록 사납게 날뛰던 혼돈은 반송장의 맥처럼 희미하게 움찔거렸다.
그리고 긴 싸움에 잔뜩 지쳤던 육신에는, 이제 전쟁이 시작되기 전보다도 강렬한 힘이 가득했다. 세상에 베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혼돈을 극복하며 일시적인 성장을 이룬 건가? 아니면…… 일종의 부작용 같은 것인가.’
얼른 가늠이 되질 않았다.
신체 곳곳에 변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보아, 어느 쪽이든 대가가 따르기는 할 터였다.
또한 진은 자신의 투지가 지나치게 타오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는 그의 뜻과 정반대였다.
‘완전히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위험한 힘이다. 육체의 잠식이 멈췄으니, 이번엔 정신을 망가뜨리려는 것 같군.’
혼돈이 잠식하려는 대상이 육체에서 정신으로 넘어갔다, 진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자신의 막냇누이, 요나가 그랬던 것처럼.
또 이겨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영기 해방도, 투신혈도 정신을 직접적으로 보호해줄 수는 없을 테니까.
최대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때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바깥 상황은 둘 중 하나였다. 진을 구하려 하고 있거나, 글리엑과 전투를 펼치고 있거나.
걱정되기는 하나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심마처럼 차오르는 투기와 살의를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여전히 앞은 컴컴하고, 들리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숨소리와 투신혈에서 퍼진 뇌기가 일으키는 작은 소음이 전부였다.
브라다만테에 강화된 영기를 둘러 휘둘러보았다. 베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확신이 무색할 만큼, 아공간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 따라서 진이 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저 다른 무언가가 나올 때까지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진은 막막히 펼쳐진 아공간 속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어둠과 다른 무언가를 마주하게 되었다.
‘사람……!?’
흐리고 어둡게 보이기는 했으나, 저 멀리 어둠 한편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진은 미친 듯이 걸음을 내달렸고,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론 경!”
다른 누군가가 이 아공간으로 잡혀 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론은 그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진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론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진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우뚝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광기에 찬 적의.
처음 글리엑으로부터 느꼈던 원념만큼이나 짙고 깊은…… 론의 증오가 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론 경! 진 룬칸델입니다.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는…….”
“어째서.”
론이 진의 말을 끊었다.
그 찰나에 진은 론의 눈동자가 기름처럼 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이유가 아까 전까지 자신을 짓이기던 혼돈, 그것에 잠식된 형태라는 것도.
론은 일어서며 이렇게 뒷말을 이었다.
“이 괴물이 노리는 것은 너인데…… 어째서, 어째서 내 손자가 너를 대신해 놈의 먹이가 되었지? 알려다오, 왜 네가 아니라 그 아이가 희생된 것인지…….”
론이 말을 끝맺었을 때, 검게 물든 그의 라시드는 이미 진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