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nt Swallowing Magician RAW novel - Chapter 309
49화
실험
길리티는 한참 껄껄 웃다 말고, 갑자기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그렇게 매몰차게 떼어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매일 같이 엘릭 기사를 보면서 이날만 손꼽아 기다렸던 것 같은데. 이래도 정말 괜찮은 거요?”
“괜찮고 말고 할 것까지야. 당연히 괜찮지. 처음부터 그것들이 엘릭을 제자로 삼으려 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오거스틴이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순번이니 뭐니,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정하기나 하고 말이야.
거기다 툭하면 엘릭을 찾는 게 좀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
감히 자신의 제자를 탐내다니.
그래서 골려줄 생각으로 엘릭이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자랑해댔는데, 설마 뒤로 그런 독기를 품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엘릭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그렇게 달려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먼저 엘릭을 만났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그대로 제자를 뺏길 뻔했다.
“그건 나도 동감이오. 원래 맛있는 건 혼자 먹을 때 더 맛있는 거 아니겠소?”
“역시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오거스틴과 길리티는 다시 한번 폭소를 터뜨렸다.
그럴수록.
“에효….”
엘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 *
분위기가 진정됐을 때쯤이었다.
엘릭은 간만에 스승님들을 뵌 만큼 그간의 안부를 여쭈었다.
“스승님들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 나야 요 최근에 바쁜 일이 있어서 정신이 없었지.”
그렇게 말하는 길리티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스쳐 지나가듯이 보면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작은 변화.
하지만 엘릭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자유혁명군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긴. 신경을 아예 안 쓰실 수가 없으시겠지.’
지금이야 황실의 눈을 피해 오거스틴과 함께 지내고 있다지만, 길리티는 과거에 자유혁명군에서도 손에 꼽는 간부였다.
당연히 그곳을 나왔다고 해도 지난 인연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을 테지.
‘휴일란에서도 그랬었고.’
당시 황금사자의 등장으로 자유혁명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바.
그중에서 죽은 제프는 길리티와도 인연이 있었다. 그 때문에 엘릭은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기도 했고.
뒤이어 오거스틴이 입을 열었다.
“마투술을 새로 연구 중이었다.”
“마투술을요?”
그가 말하는 마투술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녹야.
과거부터 휼을 잡기 위해 대대로 계승되던 기술로, 엘릭 또한 그로부터 배운 기술이 있었다.
녹야 계승자들의 숙원인 휼을 잡은 이후부터는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 줄 알았건만.
“최근에 떠오른 것이 있어서 말이다.”
“…더 떠오를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녹야의 숙적이었던 휼이 죽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녹야의 발전도 거기서 그친 줄로만 알았더니.
“제자가 이리도 잘났는데, 스승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야 있나? 그래서 말이다만.”
말끝을 흐린 오거스틴이 슬쩍 엘릭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우리의 숙적, 잘 있느냐?”
휼을 말하는 것이었다.
엘릭은 곧바로 오거스틴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테스트해보고 싶으신 거구나.’
손에 칼이 들리면 뭐라도 썰어보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다.
즉, 오거스틴은 휼과의 전투를 통해 마투술이 먹히는지 시험해보려는 것이다.
‘재미있겠는데.’
순간, 엘릭도 흥이 동했다.
오거스틴이 새로 연구 중인 마투술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지금도 대단한 녹야가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지를 보고 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휼의 사념체가 반응을 한 것은.
크크큭, 나를 찾는다고?
그림자가 길쭉하게 일어나면서 포악한 짐승의 형상을 갖추었다.
휼의 사념체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오거스틴을 노려봤다.
* * *
오거스틴은 휼의 사념체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다소 실망한 투로 중얼거렸다.
“흐음. 기대했던 것보다 많이 약해 보이는데?”
그동안 엘릭이 성장한 만큼 휼 또한 그만큼 힘을 많이 회복하지 않았을까 기대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엘릭의 성취에 비해 휼의 사념체가 풍기는 격은 기대 이하였다.
말 그대로, 사념체(思念體).
아직 ‘진정한’ 휼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모로 많은 점이 부족했다.
크르르!
당연히 휼의 사념체는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송곳니를 잔뜩 드러내는 모습에서 살의가 묻어났다.
…약해 보인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나?
피식!
오거스틴은 가볍게 실웃음을 흘리더니 오른팔을 조용히 뒷짐 졌다.
“당연하다마다.”
한껏 말려 올라간 한쪽 입술 끝.
영락없는 비웃음이었다.
“지금 네 녀석의 상태라면 이 한 팔로도 우습겠다만?”
그동안 참 많이 오만해졌구나. 나에게 감히 그딴 말을 내뱉다니. 과연 그런 자격이 있나 확인해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휼 사념체의 몸이 잔뜩 부풀기 시작했다.
‘…흡!’
동시에 엘릭도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인장이 미친 듯이 그의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쿠드드드득!
휼의 사념체가 단번에 수 미터를 넘어 십여 미터만큼이나 자라나면서 주변을 온통 녀석의 그림자로 뒤덮었고.
크와아앙!
이윽고 하늘을 보면서 거칠게 포효를 터뜨렸다.
우르르르…!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웠던지, 산천초목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세상이 온통 휼의 사념체가 풍기는 살기로 들끓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
오거스틴의 비하와 다르게, 녀석은 이미 충분히 ‘마왕’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 정도는 된 상태였다.
너는 언젠가 나를 죽였었지.
오거스틴을 바라보는 휼 사념체의 두 눈이 차갑게 이글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꾸나.
파아아!
쐐애애액-
그 엄청난 거구에도 불구하고, 휼의 사념체가 보이는 속도는 너무나 날렵했다.
마치 거대한 동산이 무너져 이쪽으로 쏠리는 듯한 모습.
그럼에도 오거스틴은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여전히 뒷짐을 쥐고 있었다.
죽어라!
휼이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다.
콰드드득!
공간이 찢기는 듯한 끔찍한 소리와 함께 다섯 줄기의 벼락이 오거스틴이 있는 자리로 떨어졌다.
하지만 오거스틴은 가볍게 위로 도약하며 공격을 피했다.
쥐새끼 같구나.
파앗, 파앗, 파앗!
쾅, 쾅, 쾅-
우르르르릉!
앞발이 대지를 찍을 때마다 지반이 내려앉고, 격진이 찾아와 주변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뒤이어 날아온 공격도 마찬가지.
공중으로 떠오른 오거스틴을 향해 휼의 사념체가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팟!
오거스틴은 점멸을 시도, 아가리 속에서 나와 어느새 휼 사념체의 코를 밟고 있었다.
촤아아악-
날카로운 이빨이 허공을 찢는 것과 동시에.
오거스틴이 왼손의 중지를 고이 접으면서 앞으로 내뻗었다.
목적지는 휼 사념체의 콧잔등.
그리고.
따악-!
…?!?
그대로 딱밤을 날렸다.
물론, 단순히 평범하게 날린 건 딱밤은 아니었다. 그의 마력과 녹야의 기운이 담긴 딱밤.
퍼어어엉!
휼 사념체의 얼굴이 절반이나 터져나가는 무지막지한 파괴력과 함께 몸뚱이가 수십 미터나 튕겨나고 말았다.
녀석이 쓸려 지나간 자리로 엄청난 고랑이 파이고.
쿠르르르…!
쿵!
한참이나 떠밀리다가 어느 절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와르르르-
잔뜩 균열이 퍼졌던 절벽은 끝끝내 버티지 못하고 휼의 사념체 위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
『…허!』
엘릭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두 눈을 부릅떴고, 메피스토도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 정도셨다고?’
저걸 두고 대체 누가 ‘마투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저건 그냥 농락이었다.
휼의 사념체를 갖고 노는 농락.
물론, 그 속에 담긴 묘리까지 단순한 건 아니었다.
마력의 유동과 수급, 마법의 발동과 증폭… 단순해 보이는 동작 하나하나에 수많은 계산들이 섞여 있었다.
과연 인간의 뇌로 감당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연산량.
그런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낸 오거스틴의 실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진짜 휼이 돌아와도… 전성기 시절의 휼이 온다고 해도 이제는 절대 스승님을 이길 수 없어.’
엘릭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오거스틴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를 딛고 있다는 것을.
쿠쿠쿠쿠!
낙석 더미가 몇 차례 들썩이다가 휼의 사념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부서진 머리는 어느새 다 복구된 상태였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휼의 사념체는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거스틴이 한 손으로만 자신을 상대하는 것도 짜증날 판국인데, 자신이 ‘딱밤’에 당했으니 오죽할까.
차라리 농락을 당하는 게 나았다.
이건 멸시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자네의 힘이 너무 미약한 걸 어쩌겠나? 그에 맞게 대해줘야지.”
오거스틴은 휼을 자극하려는 듯, 비아냥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의 공격이 한 번이라도 내 몸을 스칠 수 있다면… 뭐, 그때는 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정말이지. 시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하긴 너는 원래 그런 놈이었지.
휼의 사념체는 과거 오거스틴과 부딪히던 시절을 떠올리며 으르렁거렸다.
처음 오거스틴이 녹야의 전승자가 되었을 때. 그때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당시에는 지금보다 심했다.
지금은 실력이라도 뛰어나지, 당시에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수습 마법사에 불과했으니까.
-반편이 같은 놈이로군. 이딴 수준을 하고서 내게 덤빈 것이냐? 꺼져라. 물어 죽이는 것도 못 할 짓인 것 같으니.
‘휼(獝)’이라는 존재는 이름만큼이나 항상 광기에 젖어 있다.
그러니 한 번 덤빈 자들을 절대 용서하는 법이 없었지만, 오거스틴만큼은 예외였다.
너무나 보잘 것 없었으니까.
괜히 죽였다간 자존심만 상할 것 같아 손속을 아꼈던 상태였다.
물론, 그냥 보낼 수는 없었으니 녀석의 스승을 통째로 날려버렸지만.
그때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미리 죽여 놓을 것을.
괜히 여흥을 부린답시고 내버려뒀다가, 지금 자신이 이런 치욕을 겪고 있는 게 아니냔 말이다.
오냐.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 부릴 수 있나 보자.
휼의 사념체는 자신이 누군지를 떠올렸다.
동대륙의 폭군이자 지배자였던 몸.
또 어떤 곳에서는 신으로 떠받들어지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는 그 위엄을 몸소 녀석에게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파아아앗!
…그것이 휼의 사념체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그 뒤로, 그는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하고, 공격에 성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악해야만 했으니까.
그 어떠한 공격도 오거스틴에게 닿지 않았다.
하나 같이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따악!
“느려.”
따악!
“뻔하고.”
따악!
“지루하군.”
몸집을 키우기도 했고, 모습을 그림자 속에 감춰 그의 뒤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위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주변을 그림자로 포위해 사방에서 일제히 공격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하나.
따아아악!
“너무 약하군.”
오거스틴이 한껏 비웃음을 던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
2부 50화
실험
건방진!
실컷 농락당한 휼이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쾅쾅쾅!
더 짜증나는 건 일부러 자신의 공격을 스치듯 피하는 오거스틴의 움직임이었다.
분명 다 잡은 것 같은데 잡히질 않으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파아아아-
주변이 온통 휼 사념체의 마기향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오거스틴에게 분노한 만큼 마기도 그만큼 거세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금 오거스틴에게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앞발이 허공을 할퀴려는 순간.
오거스틴은 비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부터 여러 개의 마법진이 발동되면서 뇌전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때.
사락!
휼의 사념체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그러곤 오거스틴의 발 바로 아래에서 아가리를 쩍 벌린 채로 나타났다.
마치 수면에 있는 먹이를 낚아채는 상어를 보는 것 같았다.
텁!
그러나 이번에도 허망하게 입 다물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따아아악!
또다시 딱밤 소리와 함께 휼 사념체의 형체가 일그러지면서 그림자 저 깊숙한 곳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크아아악! 젠장!
같은 부위만 계속 맞아서일까.
다시 밖으로 튀어나온 휼의 사념체는 고통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땅에 마구 비벼댔다.
뭘 해도 잡질 못하니.
휼의 사념체로서는 정말이지 복장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 * *
“이야. 아예 뼈를 못 추리네.”
엘릭은 오거스틴의 움직임을 보는 내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스승의 날렵한 움직임은 경이로웠으니까.
『과연 동부의 대악마를 어떻게 잡았을까 싶었었는데. 확실히 그럴 만하구나.』
오죽하면 메피스토도 칭찬할까.
정갈하면서도 딱 필요한 만큼의 움직임.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군더더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적재적소에 부여하는 마력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마법의 연속까지.
저것이야말로, 마투술(魔鬪術).
마법과 무예의 조악한 조합 따위가 아닌 예술적인 합치였다.
엘릭은 오늘 처음으로 저것이 바로 자신이 다다라야 하는 녹야의 끝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거스틴은 이미 휼의 공격을 모두 예상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힘을 제대로 쓰지 않는데도 이 정도일 줄이야.
[지금 드는 생각인데요.]『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스승님과 황금사자, 두 사람이 부딪치면 누가 이길까요?]『흠.』
또 엘릭이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할 줄 알았던 메피스토는 제대로 대답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민은 잠시.
『사자 놈이다.』
[…스승님을 이길 수 있다구요?]엘릭은 믿기지 않는 얼굴이 되고 말았다.
황금사자와 오거스틴. 두 사람 모두 이 대륙에서 우위를 가리기 힘들 만큼 뛰어난 고수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우열을 판단할 수 있다고?
물론, 황금사자가 신의 영역을 엿보고 있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거스틴 역시 녹야의 새로운 경지를 엿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황금사자와 견줄 정도는 될 줄 알았던 것이다.
『때때로 느끼는 거지만, 너는 ‘신(神)’이라는 것에 이따금 감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더구나.』
[그건….]『신은 필멸자의 시선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멸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끝끝내 초월에 초월을 거듭하여 법칙의 이명(異名)까지 손에 넣은 것이 바로 신이다. 사자 놈은 그러한 신의 영역에 한 발을 걸쳐 반신이 된 자이고.』
[….]『하지만 네 스승은… 그래. 신의 영역을 엿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 이대로 있으면 언젠가 발을 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능히 천하를 발아래에 뒀을, 세계제일인이라는 이름이 아쉽지 않았을 걸물이지.』
엘릭은 메피스토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이 순간만큼은 장난을 칠 수 없었다.
『하지만 발을 들인 것과 들이려 하는 것에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그 차이를 빨리 깨닫지 못한다면, 너 역시 저기까지 다다르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다.』
[….]엘릭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말이 엘릭의 심장을 강하게 짓눌렀다.
메피스토가 매번 겉으로는 틱틱거려도 속으로는 자신의 재능을 인정한다는 사실이 기꺼우면서도.
어서 쫓아가지 않으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경고는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한편으로는 황금사자가 가진 깊이를 모두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깊이가 대체 어디까지 닿아있을지 도저히 짐작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앞으로 황금사자를 뛰어넘어야만 하는 엘릭으로서는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럼 그 신의 영역에 완전히 들어선 사람이 있기는 합니까?]『있지.』
팔짱을 낀 메피스토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네 시조.』
[…!]『초대 메르빙거는 아예 그마저도 뛰어넘어서….』
콰아아앙!
이전보다 훨씬 큰 딱밤 소리가 메피스토의 말을 도중에 지웠다.
『…까지 했다. 너희 메르빙거란 족속들은 그만한 것들이었어.』
엘릭이 더 자세히 캐물으려는데, 오거스틴이 여태 딱밤을 갈기던 자신의 손을 무심하게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확실히 마왕의 힘은 조금씩 찾아가는 것 같군그래?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오거스틴의 시선이 휼의 사념체를 직시했다.
오거스틴의 눈이 휼의 눈과 마주쳤다.
휼의 사념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또 다시 반파된 몸.
그림자를 빨아들여 수복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어느덧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엘릭의 마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인장의 내구도가 닳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때문일까?
휼의 사념체는 지금까지 보였던 모습과 다르게, 이번엔 섣불리 덤비지 못했다.
계속된 실패에 망설이게 된 것이다.
“자, 이제 누가 건방지지?”
오거스틴은 그런 녀석을 보면서 완전히 뒷짐을 쥐었다. 말려 올라간 한쪽 입술 끝이 녀석을 조롱하고 있었다.
네놈!!!!
흠칫.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분노 섞인 포효.
지금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었다.
엘릭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황금사자와 붙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화를 내진 않았었는데?
한편, 오거스틴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반대쪽 입꼬리도 올리면서 한껏 크게 웃고 있었다.
‘설마 일부러?’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츠츠츠츠-
그림자로 이뤄진 휼 사념체의 몸뚱이가 기괴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콰앙!
그는 바닥을 한 번 크게 찍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발로 서니 가뜩이나 큰 몸집에 마치 주변이 온통 녀석의 그림자로 다 가려지는 것 같았다.
파직, 파지지지직!
그리고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마기에서부터 스파크가 크게 튀어 올랐다.
『각성하려나 보군.』
메피스토가 턱을 쓰다듬었다.
[여기서요?]각성이라면 딱 하나였다.
인장의 진화.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닐 텐데?
『저 늙은 마법사가 무슨 수라도 썼나 보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만, 그만큼 오랫동안 싸워왔다면 뭔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휼의 사념체가 갖고 있던 진명은 흉신(凶神).
하지만 오거스틴에게 패해 힘을 잃은 후, 최하위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그 인장이 다시 격을 되찾으려 하고 있었으니!
콰르릉! 콰르르릉!
휼의 몸을 감싸던 스파크는 어느새 검은 벼락이 되어 땅을 강하게 때려대고 있었다.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서 불길이 거칠게 타올랐다.
쿠구구구구!
휼의 사념체 몸집은.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사념체가 아닌 휼,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기존보다 몇 배는 더 커지고, 선명해진 상태였다.
더 커진 주둥이에서는 삼중으로 된 톱니 이빨이 자글자글 했고, 살기가 들끓는 안광은 당장이라도 폭사할 것 같았다.
휘이이이이-
사방이 휼의 마기로 뒤덮여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심지어 등 뒤의 하늘까지도.
그림자가 해일처럼 넘실거리며 휼을 감싸 안았다.
살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살기(煞氣)와 광기(狂氣)가 엘릭의 등골마저 오싹하게 만들 정도였다.
까우우우우-!
휼은 하늘을 향해 길게 포효했다.
엘릭은 어느새 변화를 마무리한 흉신의 인장을 매만지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같은 설화 등급의 인장인데도… 어쩐지 동계의 인장과 흉신의 인장이 주는 차이가 너무 컸다.
뭐랄까?
동계의 인장은 차가워 보이는 이름과 다르게 몸과 영혼을 따스하게 안는 느낌이었다면.
흉신의 인장은 당장이라도 엘릭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흉포함이 느껴졌다.
그릇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느낌.
‘이대로 놔뒀다간 큰일 나겠는데.’
엘릭은 자신이 성장했다는 느낌보다도 우려가 먼저 들었다.
까드드득.
휼이 으스러져라 턱을 갈더니 곧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눈빛에서는 더 이상 녀석이 이따금 보이던 예리한 이성이 느껴지질 않았다.
콰콰콰콰콰-
“…!”
엘릭은 황급히 휼과의 간격을 벌리면서 오거스틴에게 물었다.
“이거, 괜찮은 거죠?”
휼이 각성했다는 건 알겠는데, 상태가 너무 심상치 않았다.
오거스틴은 뒷짐 지던 팔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마다. 이제야 겨우 해볼 만 해졌구나.”
‘해볼… 만?’
대체 이 영감님이 또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걸까.
엘릭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오거스틴이 난데없이 양손을 좌우로 활짝 펼쳤다.
츠츠츠츠!
화아아아-
휼의 힘으로 새카맣게 변한 하늘. 그 위로 새하얀 물감을 흩뿌린 것처럼 얼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백야(白夜)!’
오거스틴의 별칭이자, 그가 탄생시킨 녹야의 완성본이 시작되려 했던 것이다.
얼룩을 따라 수십 수백 개의 실선들이 그어졌다.
그 광경이 마치 별이라도 총총히 박힌 것 같았다.
이내, 그것들이 위아래로 활짝 벌어졌다.
그리고 드러나는 눈동자들.
오거스틴을 찾아, 엘릭을 찾아, 또 휼을 찾아 바쁘게 움직이던 동공들이 한 곳에서 멈췄다.
동시에 갖가지 마법들이 일제히 발동되면서 그림자를 찢어내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
오거스틴의 백야와 휼의 그림자.
서로 상반되는 흑백이 충돌을 거듭했다. 세상이 진동했다. 절벽과 협곡이 붕괴하면서 일대가 변화했다.
“무엇을 하느냐, 휼! 이쪽이다!”
그런 참상을 빚어내면서도.
오거스틴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한껏 웃으면서 휼을 불렀다.
이성을 잃고 날뛰던 휼이 멈칫거리다, 오거스틴을 뒤늦게 발견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오거… 스틴…!
쾅쾅쾅쾅쾅쾅!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매서운 움직임이었다.
쐐애애액-
“오냐! 내가 여기 있다, 와라!”
오거스틴이 포악하게 웃었다.
휼의 웃음을 닮은 미소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