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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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鬪神)
사사삿
무화가 등장함과 동시에 나머지 여덟 여인들이 산개(散開)해서 흡사 진법과 같은 대형을 잡았다. 진법에 익숙하고 달통해 있는 천무대제는 보자마자 그녀들이 펼친 진법의 현묘함을 알아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 귀문사천진(鬼門四天陣)? 저게 아직 남아 있었군.”
무이궁의 궁주인 천무대제가 모를 수가 없는 진법이었다.
[ 천무대제. 네가 알고 있는 진법인가.]” 당신은 오랜만에 깨어나서 모를 테지만, 귀문사천진은 근 오백여년 내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진법 중에 다섯 손가락에 드는 절예(絶藝). 진법 자체의 현묘함은 대단치 않으나 연계되는 오행(五行)의 변화가 종잡을 수가 없소.”
천무대제의 말에 적멸존자는 스윽 눈을 들어서 여덟 여인이 밟고 있는 방위를 보았다. 태극, 양의, 삼재, 사상, 오행, 육합, 칠성, 팔괘, 십간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떼어놓고 보면 천무대제의 말대로 오행의 변화가 두세 번의 움직임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오행의 상생과 상극이 태극과 얽힌다.
유장한 흐름이 움직임 속에 맴돌기 시작하면 진법은 격하게 무서워진다. 잠시동안 머릿속에서 요동치는 변화를 음미하던 적멸존자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귀문사천진이 어째서 무서운 진법인지 실감했기 때문이다.
한 순간이지만 자기보다 하수들 사이에 갇혀서 69초만에 피를 뿌리고 나가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버렸다.
천무대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음기(陰氣)만으로는 귀문사천진이 완전하지 않을테니 말이오. 4명이 남자고 4명이 여자였다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었을 것이오.”
[ 흐흐, 그것도 서로 호흡을 맞추고 내공수위가 적절할 때의 이야기겠지…]” ……”
언덕 위에서 조용히 천리지청술로 팔왕끼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구천현녀 무화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천무대제와 적멸존자가 농담하듯이 툭툭 대화하는 가운데 스며들어 있는 현기와 지식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눈에 무림 십대진법의 하나로 손꼽히는 귀문사천진의 위력과 단점을 파악해 냈다.
‘ 최강의 술법사들이란 소리가 허튼 소리가 아니구나. 마교(魔敎)의 잔당 따위는 댈 것이 아니다.’
원래 구천현녀 무화와 여덟 여인들이 귀문사천진을 펼치면 천겁혈신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하은천의 신위(神威)를 직접 눈으로 본 데다가 상대방의 실력을 확인하고 나니 구천현녀 무화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생각외로 팔왕들은 어마어마한 거물들이었다.
그리고 무화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닥에 쓰러져서 피기침을 토하는 유천영을 바라보았다.
‘ 저 아이는 팔왕과 맞서서 여태까지 싸워왔단 말인가? 정말 대단한 근성이구나…’
그 때 하은천이 무화 앞에 한 걸음 나서서 공손하게 포권했다. 정확히 중원의 예법에 따른 절제있는 인사였다.
” 반갑소. 나는 동방 십이율 만하령문의 봉황을 다스리는 23대 하백, 하은천이라고 하오. 그대는 무신마 갈중혁의 아내인 구천현녀 무화입니까?”
하은천은 연배상으로 자신보다 훨씬 위인 무화나 갈중혁을 상대로도 존대를 하지 않았다. 얼핏 예의없는 행동으로 보였으나 무화는 하은천의 말을 납득했다. 왜냐하면 하은천은 중원무림에 뒤지지 않는 동방무림의 지존(至尊). 아무리 무신마의 배분과 위명이 높아서 단체의 수장으로써 숙이고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렇다. 본녀가 구천현녀 무화이다.”
” … 허면, 그대께서 제 손에서 8초를 버티겠단 말씀이신지.”
하은천의 물음에 무화는 조용히 손을 들어서 자세를 잡았다. 현의(玄衣) 아래에서 강대한 구천현현신공(九天玄玄神功)의 기세가 흘러 나왔다. 주변에서 관전하고 있던 팔왕들은 묵빛으로 대기에 번져나오는 기(氣)에 저도 모르게 반 걸음을 물러났다.
흠칫
혈관음은 속으로 놀랐다.
‘ 무화의 공력은 예전에 나보다 못했는데… 이제는 나보다 강대한 저변을 지닌 것 같구나. 구천현현신공은 세월에 따라서 점차 가속도가 붙는단 말인가?’
혈관음의 천마신공 또한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절세신공이지만 구천현현신공도 뒤지지 않는다. 일맥(一脈)을 이루어서 마교에서 갈라져 나갔을 정도이니 나름의 장점이 있는 것이다. 회복력이나 속도에서는 천마신공이 단연 뛰어나겠지만 안정성과 양에 있어서는 구천현현신공이 훨씬 나았다.
무화는 제사천(第四天), 북명현해신공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 동방의 맹주여! 이 자리에서 꼭 어린 싹을 꺾어야겠는가? 군마(群魔)를 다스리는 팔 인(八人)의 왕이라고 보기엔 비겁한 처사같네만!”
” ……”
하은천은 무화의 말에 망설였다. 방금 전까지는 유천영의 목숨을 당연한 듯이 끊어버리려고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유천영은 아직 살아있는 게 쓸모가 많았다. 싸우기 전에도 적당히 봐주면서 싸우려고 했는데, 어느 새 유천영과 진심으로 투기(鬪氣)를 끌어올리며 비등점을 끓어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 왜 그랬지? 나답지 않군…’
문득 하은천은 스스로 깨달았다.
유천영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진심이 되어버리고 만다. 유천영이 진심으로 천하제일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싸우면서 느끼기 때문에, 어떻게든 쓰러뜨리고 싶다는 즐거운 호승심이 끓게 되는 것이다. 하은천 뿐만 아니라 지금껏 그와 싸웠던 많은 강적들이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잠시 눈을 감아버린 하은천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유천영을 지금 죽이는 건 현명한 짓이 아니다. 하지만 무(武)의 길을 가는 한 명의 무인으로써 어떻게든 쓰러뜨리고 싶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하은천은 유천영에게 진심으로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무림인들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매우 냉철한 이성을 지니고 있다. 혹자가 무림을 냉혈무정(冷血無情)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왠만큼 강호를 겪은 사람들은 협의(俠義)는 커녕 무인의 호승심마저도 손이득에 따라서 이성으로 억누르게 된다. 하물며 팔왕이나 천무삼성같은 초고수들은 당장 천지가 뒤집어지는 한이 있어도 머리 한켠은 냉정하게 손이득을 분석할 수가 있다.
극한의 쾌검과 생사결을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간단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친혈육이 찢겨죽는 순간에도 차분하게 승산을 생각하고 최적의 공격로를 찾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 노강호들을 대상으로 마음 속 깊은 곳의 투지를 끓어오르게 하는 원동력. 그 원동력은 단순히 혈기 끓는 청년에게 부여되는 성질이 아니다. 노강호들은 애송이들을 마음속으로 깔보고 경원시한다.
도리어 평생동안, 아니 까마득한 시간동안 이해득실을 잊은 채 순수한 노력의 경지에 매달려 있는 ‘바보천치’를 볼 때 느끼곤 하는 감정이다.
” 세월(歲月)…”
놀라운 일이었다. 하은천은 순간적으로 유천영에게서 무려 100여년 이상 가는 연륜, 갈고닦여 온 강철같은 투지를 느껴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이해불가의 천재’로 치부하고 넘어갔던 유천영의 본질을 제일 처음으로 깨달은 게 하은천이 된 것이다.
” ……?”
뜬금없는 말에 무화가 호기심을 느낄 때, 하은천이 고개를 저었다.
” …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지금은. 결례를 범해서 미안하오.”
” 본녀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 좋소. 그대가 8초를 마저 받아낼 수 있다면 유천영과의 내기는 성립된 걸로 치겠소.”
차르릉
하은천의 구절편이 영롱한 소리를 흘리며 손에서 풀려나왔다. 하은천은 유천영을 상대할 때처럼 얼음장같은 눈으로 무화를 바라보았다.
” 나는 손을 쓸 테니 그대는 준비하시오.”
무화는 잠시동안 하은천의 실력을 눈어림으로 재 보았다. 그리고는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에 나타나기 직전, 하은천과 유천영의 격돌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입장에서 상대방이 얼마나 강한지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 힘들다. 8초라도…’
유천영의 영겁회귀(永劫回歸)는 구천현녀 무화가 평생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완벽한 반격기였다. 무화 본인이 현천묵검(玄天墨劍)을 들고 최절초를 뿌린다고 해도 제대로 당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武)의 극점을 밟고 있는 무공이다.
하지만 하은천은 영겁회귀를 상대로도 전혀 물러나지 않고 도리어 유천영을 자멸시켜서 쓰러뜨려버린 것이다. 그 동작의 완벽함과 현묘함은 무인들이 평생 꿈꾸는 경지였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은 도박해서 딸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무신마가 와야 어떻게든 승산을 바랄 수 있는 괴물. 석년의 천겁혈신 위천무라고 해도 백여 초까지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초강자. 무화는 약해지는 자신을 추스르면서도 유천영에게 눈길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 아이야. 살아남는다면 이 구천현녀의 이름을 걸고 네게 도움을 줄 것이다…’
” 오게.”
자신보다 고수에게 선제를 양보 –
무림에서 필패(必敗)를 부르는 행동이었지만 무화는 개의치 않았다. 하은천의 경지인 천의무봉이 무엇인지는 대충 파악이 끝난 상태. 절대적으로 완전한 동작을 취하며 무조건 상대방 동작의 약점을 꿰뚫어보는 괴물을 상대로는 도리어 후공이 유리하다. 방어를 전제로 운용하면 적어도 2초를 더 버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부웅하고 하은천의 은하구절편이 고요한 암흑처럼 허공을 끊어냈다. 말 그대로 차원을 선째로 잘라버리는 듯한 뜬금없는 참격(斬擊)에 구천현녀 무화는 현천묵검을 들어서 최절초를 펼쳐 내었다.
구천현현신공(九天玄玄神功)
제팔천(第八天)
구천현녀지검(九天玄女之劍)
묵린현현(墨燐玄玄)
일렁인다. 구천현녀는 천천히 현천묵검을 뒤로 뺐다. 매우 느릿한 동작이라 지켜보던 팔왕들에게 그녀의 한 동작 한동작이 그들의 눈에 각인되듯 박혔다. 구천현녀 무화는 뒤로 뺐던 검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어느새 묵도의 주위에는 검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현천묵린강기가 일으키는 조화였다. 검은 강기를 감싼 현천묵검의 검끝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은하구절편을 향해 다가왔다.
관전자들은 너무나 느려서 보고 있는 게 지칠 정도의 일검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일초를 절대로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특히 쾌검의 제일인자인 팔왕 혈관음은 묵린현현의 전개를 지켜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 강… 하다! 아광(亞光)을 써야 대등하겠구나.’
묵린현현에 감춰진 현천묵린강기는 시전과 동시에 시전자를 금강불괴보다 더한 강기구름 속으로 집어넣는다. 유독 검천의 무공이 무겁고 느려보이는 이유는, 조용해 보이는 일검 속에 막대한 거력(巨力)이 담겨 있어서 상대방을 패기만으로 주눅들게 하기 때문이다.
지잉!
미세하게 요동치는 현천묵검의 검극으로부터 검은 불꽃이 폭발하듯 확장됐다. 순간, 하은천의 눈앞이 새카만 암흑으로 뒤덮였다. 하늘이 검은 장막으로 둘러져진 듯했다. 어디서 검초가 날아오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 흐음.’
모든 것이 새카맸다. 세상에서 마치 빛이 사라진 것 같았다.
아득하고 심원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어둠의 심연만이 주위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하은천은 절초를 펼치던 중에 갑작스레 흑암이 찾아오자 아주 잠깐 놀라워했다. 그리고는 유천영의 영겁회귀를 맞이했을 때처럼 슬며시 웃었다.
‘ 이거, 나를 너무 얕봤군… 구천현녀.’
동방이문(東方夷門)
정진정명(精進正明)
십이율에 속해있지 않은 동방의 전설적인 문파.
혹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불리는, 수호의 일족.
주작영검(朱雀靈劍)
봉황비천(鳳凰飛天)
스으으
은하구절편이 하은천의 손에서 두어 번 튕기더니 절반으로 나누어졌다. 허공에서 두 자루로 변한 은하구절편을 잡아챈 하은천의 손은 흐름을 타고 원을 그렸다. 그 순간 하은천의 호흡이 강신(降神)한 것처럼 격렬해 지더니, 두 눈에서 붉은 기운을 강렬하게 뿜어내기 시작했다.
비검(秘劍)
팔쌍익(八雙翼)
투쾅!
구천현녀는 검천 묵린현현의 기세에 따라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하은천의 기세를 짓밟으려고 들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하은천은 초장부터 최절초를 펼쳐낸 구천현녀의 공격을 섣불리 받지 못하고 약간 물러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구천현녀 무화는 눈을 크게 떴다. 하은천의 두 손에서 어느 새 명동(鳴動)하는 두 개의 원이 그려지는 걸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펼쳐지는 하은천의 동작은 더할 나위없이 유려하고 깔끔해서 눈을 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 세상에 어찌… 이런 고수가…!!’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그건 무화의 묵린현현이 하은천을 짓밟아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하은천의 양 손에 들린 구절편이 마치 날개를 달고 있는 주작과 같이 격렬하게 휘둘러지면서 구천현현신공을 옆에서 사그라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뢰(白雷)처럼 덮쳐오는 제각각의 공격은 딱히 큰 변화가 없었지만 속도와 강력함이 무시무시할 지경이었다. 구천현녀의 공력도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엄청난 것이지만 은하구절편과 현천묵검이 부딪힐 때마다 생살이 에리는 느낌이 들었다. 은하구절편이 뛰어난 무기이기도 하지만 하은천의 공력이 구천현녀를 뛰어넘는다는 증거였다.
까가가강
4번까지의 공격은 무난히 막아내었다. 그러나 비슷한 공격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한 번 퍼부었고, 자세가 흐트러졌을 때 또다시 남방에서 치고 올라왔다. 무화는 고작해야 3초의 교환에 지나지 않았는데 숨이 턱턱 막히는 걸 느꼈다.
사뭇 흰 여름의 고사리를 떠올리게 했다. 무화는 어느 새 하은천이 만들어 낸 팔괘(八卦)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없이 구천현현신공의 모든 절초를 동원하면서 저항하고 있었고, 하은천은 무화가 막거나 피할 틈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공세를 퍼부었다.
” 아… 저럴수가…!!”
귀문사천진을 구성하며 포위하고 있던 팔선자들은 눈 앞의 믿기지 않는 대결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들의 하늘이나 다름없는 무화가 지는 일 따위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둘째인 홍련선자 단혜와 셋째인 빙련선자 사란을 제외한 팔선자들은 단 1초의 공방에 어떤 교환이 오고가는지 눈동자에도 비치지 않는 상황! 말 그대로 인간을 초월한 대결을 보면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켜보던 단혜와 사란 또한 초조해져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들의 무공 또한 강호에서 초절정 이상이었지만, 그녀들의 안목에도 지금 상황은 명백히 구천현녀 무화가 밀렸다. 도리어 아까 유천영이 상대할 때가 나았다고 보일 정도로 처참하게 뒤로 밀리고만 있었다. 하은천이 양 손으로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팔쌍(八雙)의 마검(魔劍)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꽈과광!
마침내 견디지 못한 무화가 최후의 한 수를 내놓았다. 지금까지도 전력을 다해 왔지만 이건 목숨이 위험할 때가 아니면 쓰지 않는 최종비기였다.
구천현현신공
제구천
천양묵월(千陽墨月)
제구천에 속하는 막강한 비기들은 하나하나가 구천현현신공의 전수자가 평생을 가도 익히기가 힘들 정도로 난해했다. 전설적으로 어렵다는 육맥신검(六脈神劍)만큼이나 고되고 구차한 과정이었다. 무화는 구천현현신공의 역대 전수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비기를 3개나 습득했는데, 그 중에서도 천양묵월은 생사대적을 맞이하지 않으면 절대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천양묵월을 쓰는 순간 구천현녀는 죽거나 적을 죽이거나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정도로 극단적인 힘을 얻게 된다. 그 순간에 적이 천양묵월 초식의 약점을 노리고 들어가면 죽음을 절대 피할 수가 없다. 싸우다 죽는 건 상관없으나 구천현현신공의 전수가 끊기는 건 피하고 싶었던 역대 사부들은 천양묵월의 사용을 극도로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무화는 지금이야말로 써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눈 앞의 하은천은 틀림없이 무림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절대자다. 무림 최강을 논하는 괴물 앞에서 목숨을 아껴봐야 부질없는 짓이라고 본능적으로 판단해버린 것이다.
부그르르
여태껏 막강한 패기를 뿜어내던 현천묵검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포가 떠올라서 허공에 흩어졌다. 기포라기엔 검고 묵직하게 공간에 존재감을 드리우는 기체들은 사실 하나하나가 고도로 정제된 검환(劍丸)이었다. 보통은 초절정고수가 평생을 가도 검환 하나를 만드는데 내공을 모두 소모한다고 하는데, 지금 떠올린 갯수는 수백 개가 훨씬 넘어갔다.
하나만 맞아도 금강불괴가 걸레처럼 찢겨나간다!
” 하아아아아…!!!”
천양묵월의 무식함을 깨달은 하은천의 움직임이 약간 느려졌다. 하지만 구천현녀는 방심하지 않고 평생동안 쌓아 온 내공을 모아서 기합을 내질렀다. 공력으로 천지를 꿰뚫는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듯, 그 한 번의 사자후로 종남산 전역이 크게 지진이라도 난 마냥 요동쳤다.
쿠르르릉
팔왕들은 동요하지 않고 금새 중심을 찾았지만 다른 일개 무인들은 달랐다. 지진의 요동이 일어나기에 앞서서 구천현녀가 뿜어낸 가공할 패기 때문에 다들 전신을 벌벌 떨며 기절하거나, 반쯤 미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당금 강호에서 천무삼성을 능가하는 고수가 전력을 다한다는 건 천재지변을 일으킨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혈관음은 자신의 애도(愛刀)를 붙잡으며 차분하게 구천현녀를 노려보았다.
‘ 무화여… 넌 그간 많이 강해졌구나…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저 놈은 동방 최강이다.’
하은천은 자신을 향해 마치 탄막처럼 쇄도하는 수백 개의 검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나하나가 음속을 훨씬 넘어서는데다가 무화의 의지대로 유도되어서 적을 관통하기 때문에 피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처럼 팔쌍익으로 때우려고 해도 그 전에 꼬치구이처럼 뚫린 후에 강기때문에 폭발해서 죽으리라.
하은천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중얼거렸다.
” 2초 남았군.”
슈캉!
그리고 거짓말처럼, 구천현녀의 제구천 천양묵월을 펼칠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은하구절편은 제자리를 찾아서 원래의 기다란 형태가 되었다. 왼 손에 은하구절편을 거머쥔 하은천은 쭉하고 세로로 크게 일자를 그리며 공간을 베었다.
‘ 거… 짓말…?’
구천현녀는 천양묵월을 펼쳐내어서 전신의 기력이 다 빠진 순간에도 하은천이 펼쳐내는 광경을 믿지 못했다. 하은천이 가볍게 허공에 일참을 휘두른 것 뿐이었는데, 마치 빨려들듯이 구천현녀의 천양묵월 강환이 모조리 [지워졌다].
마치 시공간 그 자체를 베어버린 것 처럼!
퍼걱
구천현녀는 자신이 버텨낸 공방이 고작해야 6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해 하면서도, 자신의 왼팔에 크게 박혀든 은하구절편을 힐끔 곁눈질해 보았다. 하은천이 사정을 봐 주었는지 뼈까지는 파고들지 않아서 중상이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패배를 인정하기엔 충분했다.
하은천이 말했다.
” 천무삼성을 제외하고도 그대같은 강자가 있을줄은 몰랐군. 아마 화산지회에 오르기 전이었다면 좋은 승부였을 것이오.”
” ……”
구천현녀는 한 손으로 어깨에 박힌 은하구절편의 쇄를 붙잡으며 생각했다.
과연 이 상태에서 나머지 2초를 버텨낼 수 있을까?
아니다. 절대 불가능하다. 지금도 하은천이 일 초만에 쳐죽일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사정을 봐 준 것이다. 이 상태에서 다시 반항한다면 그 때는 회피불가능한 진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무인의 본능은 절대 불가능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결국 무화는 하늘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 유구무언(有口無言)일세. 한 가지 부탁이 있다만.”
” 말씀하시오.”
” 팔선자를 무사히 돌려보내 주시게.”
하은천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켜보던 팔선자들은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는 모습에 이성을 잃고 뛰쳐나갈 뻔 했다. 하은천이 그대로 구천현녀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구천현녀 무화의 어깨에 박혀 있던 은하구절편은 가볍게 뽑혀 나갔다.
그 모습을 보자 제일 냉정한 빙련선자 사란이 생각했다.
‘ 오늘 이 자리는 종남파의 멸망으로 끝내겠다는 건가. 아직은 부군과 정면승부를 하고싶지 않다는 거군…’
하은천이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 몰려온 구천현녀와 팔선자를 모조리 저세상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은천은 그 정도로 독한 사람이 아닐 뿐더러 분노한 무신마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의 최종목표는 중원의 제압일 뿐, 원한을 사는 게 아니므로 하은천은 절대 구천현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옆에 서 있던 홍련선자 단혜도 구천현녀 무화를 부축하며 생각했다.
‘ 어쩔 수 없구나. 종남파 따위를 위해서 대부인과 팔선자들의 목숨을 모두 버릴 수는 없다…’
잔혹한 생각으로 보였지만 그녀들에겐 당연했다. 원래부터 흑백양도로 적진으로 대립하던 사이다. 팔왕을 막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오기는 했지만 목숨까지 걸어 줄 의리는 전혀 없는 것이다.
팔선자가 물러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적멸존자가 괴이하게 웃었다.
[ 크크크… 이 자리에서 다 죽여도 상관없는 것을… 무얼 그리 신경쓰는 것인가.]하은천은 적멸존자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적멸존자는 흠칫하고 얼어붙었다. 유천영과 무화를 연속해서 쓰러뜨리고도 하은천은 전혀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눈 앞의 동방지존이 얼마나 강한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 모두들, 이 자리는 내 뜻에 따라줘야겠다.”
[ 흠, 그리할 수밖에…]적멸존자를 포함한 3인의 팔왕은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하은천의 신위를 눈앞에서 봤으니 반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젠 팔왕이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로 인간의 경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 때였다.
” 아직 난… 죽지 않았소.”
” ……”
하은천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서서히 일어나는 혈인(血人)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마지막 순간에 전신의 혈맥을 열 개도 넘게 터뜨렸고, 세맥까지 몇백 군데나 한올한올 터뜨렸다. 주요골격의 뼈가 거의 분쇄되어서 이제 정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어나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은천이 처음으로 냉정을 잃고 말했다.
” 유천영. 무엇이 너를 싸우게 만드는가?”
피에 젖은 머리카락이 적막 속에서 영원처럼 나부꼈다. 유천영은 종남파 소속, 검사, 천하정세 따위를 모조리 잊어버린 채 ‘자신’을 느꼈다. 아무런 사회적 관계에도 이어지지 않은 채 존재하는 자기(自己)에 함몰되어 있었다.
그래… 무엇이 유천영을 싸우게 하는가?
그 질문은 지금까지의 팔십여 년 동안, 유천영이 계속해서 검을 잡아오게 만들었다.
비틀거리면서 검을 중단세로 잡은 유천영은 하은천을 바라보았다.
… 눈 앞에는 노력하는 천재가 있다.
노력하는 범재와 노력하는 천재, 비교할 것도 없다.
과정이고 결과고 다를 바 없이 노력하는 천재 쪽이 압도적이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받은 것처럼 보이면서 – 노력마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도리어 즐기면서 더욱 빨리 배워나간다.
어떻게 이기란 말인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이 압도적인 불합리(不合理)를… 도대체 무슨 수로 극복하란 말인가?
방법 따위는 없다.
견해 따위는 없다.
이상 마저도 없다.
범인(凡人)이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노력’이라는 열쇠마저도 아무렇지도 않게 부정당해 버린다. 이건 정말로 너무하다.
노력하는 범재 주제에 여기까지 왔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제 천하에서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강해졌으니 손을 놔도 되지 않는가? 천년검로 따위는 불가능한 게 아니었는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태연하게 이상과 현실을 비교하면서 빠르게 체념해가기 시작하곤 한다.
보통은 말이다.
” 나는…”
그럼에도 나는 검을 손에 쥔다.
그래서 나는 검을 손에 쥔다.
그리고… 검을 손에 쥔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밖에는 할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 따위는 없다.
‘최고’가 되고싶어하는… 누구나 지니고 있는 근원적이고 압도적인 갈망.
자신의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면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남의 손으로 되지 않는다면 비겁한 수를 써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해서라도 발버둥친다.
추해 보인다고?
그게 어떻단 말인가?
다시 일어서서, 다시 도전한다.
차이가 벌어질 뿐이라도 영세억겁(永世億劫)동안 앞만 보고 달릴 것이다.
내가 멈추지 않는다면 –
” 내가… 유천영이니까.”
내 신념은 영겁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