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392)
EP.393)# 4
393 – 친구 # 4
한참 뛰다가 서늘한 바람에 땀을 식히는 시간.
우리들은 다 같이 그늘에 앉아 물을 마시거나 미리 챙겨두었던 샌드위치를 먹거나 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기 때문인지 배고픈 몸에 들어가는 음식이 꽤 맛있었다.
스텔라가 말했다.
“옛날 생각난다. 지금은 몇 년 전인지 계산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마음만은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야. 우리 다음은 이제 뭐하고 놀까?”
우리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고 사회 경험이 잔뜩 있다만, 엘프 특유의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인지 스텔라는 어린아이의 동심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다만 벽에 등을 기댄 미르나는 숨을 몰아쉬기 바빴다.
“체력이 넘친다는 건 부러워할 만한 일이네요. 다들 힘들지도 않나요? 뛰어 노는 것보다, 차 한 잔 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그에 스텔라가 쯧-혀를 찼다.
“요즘 애들은, 밖에서 뛰어 노는 법도 모르고. 집 안에 틀어박혀서 책이나 인형만 갖고 놀고 말이야. 그럼 건강에 안 좋아.”
그렇게 한참 모두가 조잘조잘 이야기를 떠들고 있을 때 나는 엘가를 바라봤다. 그녀도 꽤 몸을 움직였었지.
“덥다, 더워. 여름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훔치고 있는 것 같기에 나는 인벤토리에서 수건을 하나 꺼내 엘가에게 내밀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이 정도로 무리는 뭘. 내 어린 시절에는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아무렇지 않았어. 오히려 그럴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몸은 모닥불처럼 불탔었지.”
엘가는 어렸을 적부터 괄괄한 성격 탓에 또래 남자애들도 기를 못 펼 정도로 대단한 골목대장이었다고 했다.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남자들도 때려눕혔었다고.
“그런데, 역시 조금은 지치긴 하네. 어린 시절에는 어떻게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뛰어 놀았던 건지 모르겠다. 이대로 씻고 낮잠 자면 딱 좋을 것 같은 기분이야.”
느으읏-하고 기지개를 켜는 엘가.
그 옆에 앉은 아이라는 손끝에 앉은 나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손가락에는 형형색색의 나비들이 마치 반지처럼 앉아 있었으니까.
그것뿐만 아니라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슴과 토끼들도 그 주변에 앉아 낮잠을 자듯 새근거리고 있다. 그 모습이 꼭….
“무슨 동화 속 공주님 같네.”
나르미가 말한 걸까? 나 역시 나르미의 말에 동의했다.
일찍이 아이라가 어떠한 공주로 왕궁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건지 그것을 조금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의 눈은 내가 챙겨왔던 건빵 자루를 비우고 있는 임프에게로 향했다. 녀석은 메마르고 건조한 건빵들을 마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처럼 먹고 있었다.
“맛있다. 매일매일 이것만 먹으라고 해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거야!”
그 모습은 제법 행복해 보인다. 그래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몸은 이제 현실에 생생한 사람보다는, 홀로그램에 가까울 정도로 흐릿해져 있었다.
“…….”
다리는 발목 부분부터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녀석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삶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줄고 있기 때문이려나.
내가 물었다.
“어때, 재미있게 시간 잘 보냈어?”
“그런 거야! 내일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다 같이 노는 거야! 시간도 금방 지나가고, 이렇게 매일매일 보내다보면 주인님이 금방 돌아….”
무어라 말하다가 입을 다무는 임프. 녀석은 곧 자신의 주인인 이사야 가스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떠올린 듯했다.
덕분에 살짝 침울해지는 분위기.
어느새 새들이 까악까악 울어 저물어가는 노을이 보인다. 시간은 이제 네 시, 혹 다섯 시 정도 되었을까?
그 정도 되면, 보통 열심히 뛰 놀았던 것도 다 정리하고, 딱지와 카드 같은 것들도 다 챙기고 하나 둘 집에 돌아갈 채비를 했었다.
아이들은 시장을 보고 놀이터에 들렸던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그런 녀석들을 어딘가 부러운 눈으로 봤었지.
손에 한 아름 쥐고 있던 딱지도, 학종이도 친구들이 사라지고 난 후의 놀이터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값어치도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도 다 추억인가. 다만, 이제는 그때의 기억과 감정들도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때 임프가 말했다.
“그럼, 오늘 정말 재미있었던 거야! 내일도, 내일 모래도, 그 다음날도 매일 오늘 같으면 좋을 것 같은 거야…!”
녀석은 무척 기뻐보였다. 동시에 한 편으로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이제 모두 노을 아래로 하나 둘 사라질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방금까지 한참 떠들고 있던 영애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서로의 눈을 바라보거나 눈치를 살피거나 할 뿐. 이제 슬슬 임프를 성불시키고, 그 항아리를 파괴할 때가 왔다는 걸 알게 된 것이겠지.
“임프 양.”
그때 미르나가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은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을 때. 흐릿해진 임프의 눈동자가 그 짧고 뾰족한 귀가 미르나를 향했다. 이것으로 끝나는 건가.
“저기.”
나는 무심코 입을 열고 말았다.
“하나만 더 합시다.”
내가 말해놓고도 깜짝 놀랐다. 어쩌면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아쉽다는, 어린 동심이 무심코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아직 해가 저물지도 않았으니까요. 하나 정도는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술래는 제가 할 테니까.”
나는 임프를 바라봤다.
임프의 표정은 몹시도 밝았다.
“그럼, 숨바꼭질 하자! 나 임프는, 숨는 걸 제일 잘하는 거야! 이 성에서, 스무 번 넘게 겨울 동안 숨어 지냈는데. 누구도 찾지 못했을 정도로 잘했던 거야!”
* * *
“그럼, 5분 드릴 테니까 다 숨으세요.”
나는 마지막 놀이의 술래가 되었다. 모두가 각자 5분의 시간동안 하나 둘, 숨고나면 나는 눈을 뜬 후 찾으러 돌아다닌다.
간단한 놀이였다.
그리고 임프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놀이라고도 했다.
“음.”
“으응….”
다들 할 말이 있는데, 내켜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의 눈치를 본다. 그에 나는 그저 기둥에 고개를 대고 천천히 숫자를 셀 뿐.
“하-나.”
이렇게 숫자를 셀 때는 조금 길게 호흡을 늘어뜨려 세는 것이 특유의 맛 같은 게 있다. 그런 느낌으로 열, 백, 어느덧 삼백의 숫자를 전부 셌을 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찾는다!”
눈을 뜨자 훈련장은 꽤 황량했다. 마치 모두 부모의 손을 잡고 돌아간 운동장이나 놀이터 만큼이나 쓸쓸하다. 물론 그녀들은 돌아간 게 아니고 숨은 것이다.
이 넓은 성채 어딘가에 내가 찾아야 할 사람들이 잔뜩 있겠지.
내 변덕으로 주장한 마지막 놀이에 그래도 다 잘 어울려줬다는 것에 약간의 감격마저 느껴졌다.
“이제 정말 찾을 겁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본다.
여기저기 찍혀 있는 발자국이 언제 생긴 건지 분간하기 어렵다.
다들 어디에 숨었으려나? 막상 시작하고 보니 이 넓은 장소에서 사람을 찾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체감이 확 느껴졌다.
“그런데, 왜 엘가 님은 안 숨었나요.”
나는 내가 기대고 있던 기둥 뒤에 삐져나온 엘가의 금발 머리칼을 발견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전법을 사용한 걸까?
흠칫.
바르르 떨며 천천히 기둥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엘가.
“…리오네스의 영애는 숨거나 도망치지 않아.”
“그런 것 치고, 아까 술래잡기 때는 잘 도망 다니셨잖아요.”
“그거랑, 그거랑은 달라.”
흥-하고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엘가. 자신이 벌써 발각된 것에 토라진 듯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부러라도 모른 척 해줄걸 그랬나?
아니, 그게 아냐.
엘가는 그런 뜻으로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다.
“엘가 님은, 제가 가장 처음 찾아주길 바랬던 모양이네요.”
“뭐?”
“다른 사람들보다, 가장 먼저 찾아주길 바래서 일부러 들키기 쉬운 곳에 있었던 것 아닙니까?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도. 엘가 님을 가장 먼저 찾았을 것 같긴 하지만요.”
“흥, 뭐라는 거야. 내가 진심으로 숨으면, 너는 나 절대 못 찾아.”
그렇게 말하는 엘가는 짓궂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기분은 꽤 좋아보인다. 내가 그녀의 숨겨진 마음과 진의를 찾아냈기 때문이겠지.
어찌 됐든 한 명 찾았다.
이제 남은 것은 여섯인가.
그때 성채 훈련장 근처에 위치한 건물을 하나 가리키는 엘가.
“야, 미르나는 아까 저쪽으로 가더라. 내가 알려줬다고는 하지 말고.”
“…….”
알려주는 건 반칙 아닌가. 하지만 뭐, 미르나 아가씨가 잘 되는 꼴을 용납하지 못하는 게 엘가답기는 했다.
그래서 엘가가 가리켜준 곳으로 향해서 낡은 문을 열자, 그 안에는 낡은 십자 모양의 장신구와 깨진 모자이크 창문들, 그 밑으로 의자들이 잔뜩 있었다.
예배당인가?
가르가타 성채에 예배당이 있었을 줄이야. 솔로몬은 의외로 신실한 자였던 걸까.
“으흠.”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한 후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고요하고 적막한 내부에는 뿌연 먼지가 떠다닌다. 돌이라도 맞은 건지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잔뜩 깨져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멀쩡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에 빛나는 형형색색의 빛 무리가 바닥을 장식하는 게 꽤 아름답다. 멋진 곳이야. 낡은 곳이지만 신앙심 생길 것 같다.
이런 곳에 미르나가 숨어있을 곳이라면….
내 눈은 구석에 기이하게 놓인 상자 같은 방을 바라봤다. 고해 성사 실 같은 건가? 그 근처로 다가가자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미르나 아가씨, 여기 계십니까?”
그에 안쪽에서 흠칫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알았죠?
어떻게 알기는, 엘가가 알려주었으니까 알았지. 하지만 엘가가 비밀로 해달라 했던 것이 떠올랐기에 나는 짐짓 연기하기로 했다.
“미르나 아가씨께서 어디로 가실지, 무엇을 하실지 정도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삐걱.
낡고 버려진 고해성사실의 문이 열리고 미르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이지, 태오 경은 당해내지 못하겠네요. 저에 대한 걸 그렇게나 자세히 알고 계셔서는….”
마지못한 느낌으로 말하는 미르나.
“당연히, 저 미르나를 가장 먼저 찾은 것이겠죠?”
그런 그녀의 표정은 꽤 기뻐 보이기도 했다. 엘가도 미르나도 내가 자신을 금방 찾아낸 게 기뻤던 건가? 술래에게 찾아졌으면 분한 마음이 드는 놀이가 아니었던 건가.
어쩌면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반요정에게 빨리 찾아지는 쪽일수록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음을 증명하는 놀이’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지도 모를 일.
남은 여성들도 얼른 찾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마음에 나는 슬쩍 입술을 열었다.
“미르나 아가씨, 혹시 다른 아가씨들이 어디 계신지 모르십니까?”
“글쎄요. 하지만 나르미라면….”
미르나는 대답하는 것 대신 예배당의 뒤쪽 출입구를 바라봤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됐다.
“그럼, 미르나 아가씨는 먼저 훈련장 모닥불로 돌아가 계세요. 저는 나머지 아가씨들을 더 찾아야 하거든요.”
예배당 문을 열고 나선 나는 곳곳에 솟은 비석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동묘지라도 되는 걸까.
그러고 보면, 나르미와는 묘지에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지.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나는 나르미가 묘지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장소에 숨은 걸 보면 아주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나.
그래서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여기저기 놓인 관들을 바라봤다.
으스스하네.
오랫동안 방치되어 낡고 풍화되고 썩은 관들 어딘가에 나르미가 숨어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수가 총 스물 가까이 되어서 일일이 열어보는 건 꽤 시간이 걸릴 듯 보였다.
그래서 천천히 다가가 그 하나의 뚜껑을 열어보려고 할 때였다.
“왁-!”
옆에 있던 관 뚜껑이 열리고 무언가 나를 향해 튀어나온다.
“히에엑…!”
덕분에 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몸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돌려보니 나르미가 고개를 숙인 채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는다.
“태오야, 깜짝 놀랐지? 내가 이겼다!”
“…나르미 아가씨, 이건 그런 놀이가 아니에요.”
“그래? 난 숨어 있다가 놀라게 해 주는 놀이인 줄 알았는데. 옛날에 묘지에 묻혀 있던 삼촌들이랑 꽤 자주 했었거든. 아무튼 내가 이겼으니까, 내 소원 하나 들어줘!”
나르미는 멋대로 놀이 내용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 명랑한 모습은 꽤 귀여웠다. 나르미의 삼촌들도 이런 기분을 느꼈겠지.
“무슨 소원을 들어드릴까요?”
“나한테 뽀뽀해 줘.”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나르미. 나는 주변을 둘러본 후 누가 볼 새라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댔다.
쪽.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나르미와 했지만 어째선지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마치 낯을 가렸던 어린 소년 시절로 돌아온 기분.
아무튼, 이제 남은 것은 스텔라와 아이라 그리고 임프인가. 다들 어디에 숨었을까.
그들이 어디에 숨었을지, 내가 그녀라면 어떤 생각으로 어디로 갔을지 떠올려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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