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444)
EP.445)
445 – 인간
몰아치는 격통에 눈을 떴을 때.
나는 황량한 사막에 내던져져 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고 모래가 퍼석한 사막 말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바위나 모래 뿐.
내가 어째서 이런 사막에 놓여 있는 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생물의 본능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소리친다.
“하….”
마른 숨결이 입술 사이로 세어 나오고 이마로 땀이 흘러내리는 와중에 지독한 갈증이 느껴졌다. 이 뜨거운 열기를 피해 내 혀를 서늘히 적셔줄 한 모금의 물이라도 있었다면.
필사적으로 물의 흔적을 찾아 걷는다.
하염없이.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다 마침내 어느 바위 아래에 이르러 나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땅을 파는 짐승처럼. 두 손으로 바위 밑의 모래를 판다.
파스삭 파스삭.
그러자 건조하게 메마르기만 했던 땅에 약간의 수분기가 느껴졌다. 한참 더 파내자 작은 웅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졸졸 뿜어지는 것이 보였다.
“됐어!”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치고 말 만큼 기뻤다. 사막에서 마실 물을 기적적으로 겨우 찾은 것이니까 기쁜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도 누군가 들었을 지 모른다 생각하니까 부끄러워졌다. 주변을 슥슥 둘러보자 보이는 것은 내가 모래에 남기고 온 발자국 뿐이었다.
휘오오-.
그것도 바람이 불어오자 모두 사그러지고 만다. 이 넓은 사막엔 오직 나뿐이다. 적적한 공허함이 가슴이 적시기 시작했기에 나는 한 번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모래에 집중했다.
“물이 있어.”
바위와 모래 사이에 숨겨져 있던 작은 웅덩이를 내가 어떻게 발견했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본능처럼 수분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반요정이라서…?
반요정.
그래, 나는 반요정이었다. 살인적인 더위와 타들어가는 갈증 때문에 머리가 잘 돌아가고 있지 않았지만 작은 물로 몸을 적시자 조금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나는 반요정이었고.
모두와 함께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어.
…모두?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있었나?
무언가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황량한 사막을 그저 정처없이 돌아다닐 뿐이다.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이 가라앉아 밤이 오고.
정체모를 괴생물들을 마주하고.
끝없는 굶주림과 갈증이 이제는 내 친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 사막의 달을 올려다보고 있던 나는 문득 서랍장을 열어 발견한 옛날의 편지처럼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게는 가족들이 있었어.”
영애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그 목소리와 온기들이 하나하나 생생히 떠오른다. 마치 죽어있던 나의 신경과 뇌리에 뒤늦게 생수가 부어진 기분이었다.
바짝 말라있던 기억과 감성들이 빠르게 되살아나고 나는 급격한 정서적 갈증을 느껴 큰 고통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들, 어떻게 된 거지…!?”
우리는 거신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거신이 내게 보여준 거짓된 환상에 속아있었고. 그것을 겨우 자각했을 때 내 눈앞에는 부상당한 아내들이 쓰러져 숨을 몰아쉬었다.
심지어 미르나와 나르미 쌍둥이 아가씨나 스텔라 교수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될 지는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위험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전부 사그라지고 말 것이 확실했으니까.
그녀들을 얼른 찾아 도망쳐야 한다. 상처를 치료해야만 한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사막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주변에는 내 몸을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모래 그리고 바위와 태양뿐이다.
부드러운 온기도 나를 깨우는 목소리나 손가락의 간지럼도 없다.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본다. 언제나 그렇듯이 모래의 언덕에는 나의 발자국조차 바람에 사그라진다.
여기는 대체 어디─.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수많은 질문들이 손에 쥔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그냥 걷는다.
발을 앞으로 뻗어서 발끝부터 천천히 뜨거운 모래에 얹는다.
그럼 발끝부터 발목에 이르는 모래지반의 감각이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오른다. 그럼 나는 반대쪽 발을 똑같은 방법으로 앞을 향해 뻗는다.
한 걸음.
열 걸음.
백.
천.
만.
내가 걷는 걸음을 헤아리면 조금 기분이 나아진다. 오직 그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금방이라도 방심을 하고 만다면 깨진 유리창 너머로 밀려들어오는 물살처럼 수많은 걱정거리가 내 안을 차고 돌았기에 나는 오직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걸음을 헤아리는 것조차 멈췄다. 아무리 걸음을 세어봤자 이 사막은 끝을 보이지 않겠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나는 이 사막에서 벗어날 수 없다.
뜨거운 태양이 나의 머리 위에서 언제나 타오르고 있을 뿐이겠지.
그래도 낮을 걷는 건 좀 나았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면 나는 끝없는 외로움이나 후회와 싸워야만 했다.
모두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들이 어딘가 아직 살아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녀들의 온기나 목소리 같은 것들이 느껴졌으니까.
그렇기에 후회가 쏟아지는 비처럼 나를 적신다.
“아아아아━─!!!”
오래 전의 나는 이미 모든 걸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것을 손에 쥐려 팔을 뻗었기에 내 손바닥 사이로 모든 것이 빠져나가버리고 말았던 거야.
매일 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린다. 그들을 다시 손에 잡을 날들을 떠올리며 잠에 빠진다.
*
*
*
오랫동안 나를 거슬리게 만들었던 신발이 끝내 터져버렸다. 몇 년은 더 사용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나는 녀석을 모래 언덕에 잘 묻어준 뒤에 명복을 빌어주었다.
“잘 가라.”
사르르르.
녀석이 없으니 발가락 사이로 모래들이 빠져나간다. 근처에 떠돌아다니는 괴상한 벌레를 붙잡아 그 껍질을 발에 대어본다.
끈으로 묶어두면 그럭저럭 쓸 만하겠어.
얼마 전에 깨달은 것이지만 이 사막에는 나를 제외하고도 꽤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었다. 끔찍하고 기괴하게 일그러진 생물들.
놈들은 나를 갈기갈기 찢을 수 있을 정도로 뾰족한 껍질이나 뿔 그리고 이빨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호락호락하게 죽어줄 수는 없는 법.
죽어있던 놈들의 시체를 발견한 나는 그 부산물로 단검이나 창, 망토 따위를 만들었다. 괴물의 시체라는 건 이외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뼈, 발톱, 근육, 힘줄, 살코기.
“우윽.”
살코기의 맛은 걸레를 짜먹는 것처럼 끔찍했다.
그래도 운이 좋으면 가끔 새우 맛이 나는 벌레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사실 진짜 새우 맛이 어땠는지는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불에 구우면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
괴생물의 등껍질 위에서 끓는 물을 보고 있노라면 빨간 국물이 떠오른다. 질리도록 먹었던 라면. 이제 맛은 떠오르지 않지만. 모두가 행복하게 먹었다는 사실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이나 목소리는 떠오르는 바가 없다.
이 사막을 걷고 있노라면 몸을 스며드는 모래처럼 기억과 감정들이 건조하게 나를 스쳐지나가기 때문이다. 문득 끓는 물에 비춰지는 내 얼굴이 궁금해졌다.
붉어졌던 머리는 어느덧 검게 물들었다. 내 안의 붉은 마나가 모두 사라졌기에 머리도 그 빛을 잃고 검은 빛으로 그을려버린 것이겠지.
“누구냐, 너.”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낯선 얼굴이었다. 얼굴엔 반요정에 어울리지 않는 수염이 거뭇하게 자라나고 얼굴과 턱선도 오랜 굶주린 끝에 앙상하게 드러난다.
나의 얼굴이 낯설다. 이제 내게서 옛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다.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거울을 볼 때는 언제나 낯설었다. 지금은 떠오르지도 않는 옛 내 모습. 고통 속에서 때때로 행복하게 웃었던 시간들도 생소하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곧잘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누구를 만났을 때 어떤 말로 대화를 나누면 좋을지도 알 수가 없다.
“아.”
타들어가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괜히 한 마디 뱉어내본다.
역시.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낯설어지고 말았다.
“내일은 모래 언덕을 넘어갈 거다.”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였기 때문일까.
꼭 다른 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덕은 큰 괴물이 지키고 있어. 가까이 붙어서 상대해선 내게 승산이 없다. 멀리서 투사할 수 있는 종류의 무기가 있다면 좋겠는데.”
좋은 생각이야.
*
*
*
“인간을 움직이는 건 무엇인가 고찰해본다.”
수분? 단백질? 근육과 뇌의 긴밀한 상호작용?
그것들도 이유가 되겠지만 나는 감정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 느끼는 바가 없다면 움직일 이유도 없이 바위처럼 늘어져 있을 뿐이다.
“나는 감정으로 움직인다.”
지금 내 다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온 감정뿐이다. 그것은 일종의 복수심이었다. 나를 이 까마득한 사막에 쳐 넣은 누군가에 대한 복수심.
그게 누구였는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놈의 웃는 낯짝에 송곳을 박아 넣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다. 오직 그 감정만이 나의 마음을 용광로처럼 태워 다리를, 팔을 움직이게 만든다.
나를 이 기나 긴 고통으로 몰아넣은 악한이 있다.
악당이 있다.
놈들의 심장에 말뚝을 쑤셔 넣을 때까지 나는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이 사막을 빠져나가야만 하겠지.
“그래도 방법은 얼추 감을 잡았어.”
나라고 이 무료하고 영원하게만 느껴지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걸어오기만 하고 있던 게 아니다. 이 사막은 무언가가 쉴 새 없이 흘러들어오는 곳.
위대한 존재가 되려했으나 끝내 되지 못한 낙오자들이 버려지는 장소라고 한다.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알고 싶은 곳은 이 장소에서 나가는 것이니까.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알아낼 수 있었다. 내 오랜 기억 속 한 구석에 잠들어 있던 문구가 나를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문 앞에서 보았던.
모두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글자들이었다.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선 갖고 있는 걸 잃어야 한다.”
이곳에서 나가고자 한다면, 나는 이곳을 잃어야한다. 새로운 것을 얻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잃어야만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내게는 잃을 것들이 잔뜩 있었다.
오랜 시간, 필사적으로 지켜왔던 소중한 추억들 같은 것. 그것을 전부 잃고 내가 누군지조차 하얀 백지처럼 물들게 되고나서야 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내 기억을.
추억들을.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던 과거를.
내 모든 것을.
“바친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기억이 아닌 감정이다. 감정은 나를 움직이게 만들어 오랜 시간의 끝에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만들었다.
“인간을 움직이는 건 말이야.”
━히오옹….
어딘가 묘하게 낯이 익은 거미를 손에 올려본다. 기묘한 소리로 우는 녀석이었지만 그 이상 떠오르는 건 없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감정이다. 그러나 내게는 필요 없지.”
나는 화살이다.
화살은 활시위를 떠난 순간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저 날아가 꽂히는 것만 하면 될 뿐이다. 그래서 나는 거미를 바닥에 다시 잘 내려준 후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사막에서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왔던 송곳니.
잘 갈아왔던 칼날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번쩍이는 금발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무언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하지만. 외면한다.
“당신은….”
“악당의 사냥꾼.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 나는, 단검을 꽉 붙들고 달린다. 달리고 또 달려 과거 거대하게만 느껴졌던 몸과 머리의 위로 뛰어올라 그 이마에 역수로 쥔 내 오랜 시간의 고통을 때려 박는다.
“하지만 내 칼날은 상당히 아플 거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발자국을 사막에 찍어왔던 나날들. 수많은 밤 떠올렸던 순간이었다. 나는 오직 지금 날을 위해 살아남았다.
내 복수심을 역수로 쥐고 있는 힘껏 놈의 머리에 꽂아 넣는다.
파아아아악-!
『━━───!!!』
거체가 벽력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흔들린다.
“운명은 바뀐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