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100th Regression of the Max-Level Player RAW novel - Chapter 407
만렙 플레이어의 100번째 회귀 후일담 31화
31. 민주리의 세계선
징조는 없었다.
하지만 류민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세계선이… 붕괴한다.’
뭐라 설명은 할 수 없지만 느껴졌다.
시간의 권능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잘못하면 나도 휘말린다.’
그저 지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천계도, 마계도.
한 차원에 속한 모든 것이 사라진다.
차원의 소멸이 지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당장 피해야 해.’
낌새를 느낀 류민은 재빨리 시공의 틈새를 열었다.
몸을 숨기고 얼마 뒤 시간의 권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안상철의 세계선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결국엔… 지키지 못했구나.’
지키려고 부단히 애썼으나 결국 시드들을 모두 제거하지 못했다.
‘통솔자 시드가 명령을 내린 게 분명해. 당장 붕괴 작업을 시작하라고.’
의외로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자기들 힘으론 막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이렇게 과감한 결정을 내리다니.
‘다른 세계선으로 갈 수밖에 없겠어.’
갑자기 갈 곳을 잃은 신세가 된 류민이 다음 세계선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 * *
인턴 생활 때 사귀었던 선배와의 연애를 마지막으로, 민주리는 더 이상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내과 전문의가 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지금, 설렘이라는 감정은 그녀에게 있어서 사치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민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예상치 못한 류민의 고백이 죽은 줄 알았던 민주리의 연애 세포를 다시금 일깨웠다.
일터에서도 넋을 놓을 정도로 민주리는 요새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 민 선생님?”
“아, 네!”
“대기 환자가 너무 많아서 일찍 마감 쳐야 할 것 같아요.”
“네. 그러세요.”
개원한 지 1년도 안 된 개인병원은 소위 말해 대박이 났다.
매일 환자가 끊이질 않았고 그럴수록 민주리는 화장실 갈 시간도 아끼며 진료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나 혼자선 감당 안 되겠어. 선생님 한 명 더 구해야지.’
일이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개인 시간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류민 : 퇴근 시간이지? 밖에서 간단하게 치맥 할까??] [민주리 : 어… 좋아.]답장 쓸 때 이모티콘을 붙일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엔 관뒀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돼, 민주리. 주도권을 잃는다고…….’
34살.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
그렇기에 민주리는 류민과의 관계를 성급하게 이끌어가고 싶지 않았다.
가볍게 연애하기보단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었다.
그러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아직도 고백을 받아주지 못했지…….’
불과 며칠 전.
류민이 자신에게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당시엔 노또라도 당첨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었다.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나도 좋아한다고, 예전부터 짝사랑해 왔다고 고백하고 싶어. 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 왜일까?
어째서 그 순간 ‘나도 널 좋아해’라고 말하지 못한 걸까?
그랬다면 지금처럼 썸타는 사이가 아니라 당당히 사귀는 사이로 발전했을 텐데….
그리고 결혼까지 바라볼 수도 있었을 텐데….
‘내 마음에 죄의식이 있어서인가…?’
민주리는 소원을 빌었다.
아버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그리고 그 소원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의사 딸을 둔 아버지의 어깨는 올라갔으며 생존게임도 끝나 더 이상 딸의 생사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소원이 제대로 적용됐나 확인차 물어볼 때마다 아버지는 행복하다고 말해왔었다.
이제 딸만 시집가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사족을 붙이긴 했지만….
‘어쩌면 민이가 날 좋아하게 된 게 소원 때문일 수도 있어. 내 행복이 곧 아빠의 행복이라고 한다면 말이지…….’
원래는 감정이 없었는데 소원 때문에 감정이 생겨난 것일 수 있다.
민주리가 원하던 일이었으나 막상 상황이 닥치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왠지 꺼림칙해. 감정을 이용하는 것 같잖아….’
소원으로 사람의 감정을 샀다는 데에 대한 불쾌감인 걸까?
민주리는 류민의 고백을 받아주기가 왠지 껄끄러웠다.
‘일단 지금처럼 친구 사이는 유지하자. 이 정도만 되어도 난 행복하다고.’
친구 관계에서 만족하기로 하고 호프집에서 류민을 만났다.
물론 류민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주리야. 왜 모른 척해?”
“응? 뭐, 뭐가?”
“전에 내가 한 말 들었잖아. 왜 답이 없어?”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하.하.”
목이 타는 기분에 민주리가 맥주잔을 들었다.
“내가 고백했잖아. 너 좋아한다니까?”
깊숙한 돌직구에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그만 마시고 말 좀 해봐. 너는 나 안 좋아해?”
“어, 그, 그야 좋아… 하지.”
“친구로서야? 아니면 이성으로서야?”
“그건…….”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류민에게 마음이 있는데도 죄책감 때문인지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다.
“어? 치, 치킨 왔다. 먹어볼까? 진짜 맛있겠는걸?”
“…….”
민주리는 결국 말을 돌리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주리야. 나 지금 진지해.”
“어…?”
류민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우리 나이도 이제 30대 중반이야.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지. 그래서 신중한 거라면 이해는 하겠어. 하지만 우리에겐 이제 시간이 없잖아? 언제 연애하고 언제 결혼할 거야?”
“…….”
“우리 나이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내 주변에도 연애한 지 3개월 만에 결혼한 사람도 있고 그래. 20대 후반인데 서로 잘 맞아서 바로 식장 잡았다더라고.”
또다시 목이 타는지 맥주를 홀짝이며 듣기만 하는 민주리였다.
“우리도 그런 케이스를 본받아야 하지 않나 싶어. 솔직히 네가 날 좋아한다는 것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응? 아,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나한테 속마음의 룬이 있었는데.”
“속마음의… 룬?”
“이왕 말하는 거 다 말해줄게. 어차피 지금은 능력도 없어졌으니까. 속마음의 룬이란 건…….”
듣던 민주리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놀라운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생각을 읽는 룬으로… 내 마음을 읽었다고? 예전부터……?’
그렇다면 전부 알고 있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자신의 첫사랑이 류민이었고, 그로 인해 그동안 전전긍긍해 왔다는 걸.
“주리야. 괜찮아?”
“…….”
민주리는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갑자기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 이제야 말해서. 당시엔 네 마음을 알고도 모르는 체했어. 중요한 건 파이널 라운드를 공략하고 생존게임에서 벗어나는 거였으니까.”
“몰랐어… 네가 알고 있을 줄은…….”
“지금이야 플레이어의 능력이 사라져서 네 마음이 어떤지는 몰라. 하지만 내 마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어. 너에게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다는 걸.”
“그럼 혹시…… 소원에 대해서도 알아?”
“응? 소원이라니?”
“소원의 방 말이야. 기억 안 나?”
“소원의 방? 공략할 때 그런 게 있었나?”
혹시나 물었지만 역시나 몰랐다.
류민은 소원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 날 좋아하게 된 이유가 소원 때문인 것도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민주리는 참았다.
진실을 말해서까지 이 관계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첫사랑이 자신을 좋아하는 이 상황이 달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으니까.
‘그럼, 뭐라 말하지? 이제 어떻게 해야…….’
대답을 꼭 들어야겠는지 류민은 어느 때보다 진중한 눈빛으로 민주리가 말하길 기다렸다.
“왜 대답이 없어?”
“…….”
“나와 사귀기엔 아직 확신이 안 들어서 그래? 아니면 전과 같은 감정은 이제 없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그게 아니면 고민할 게 뭐 있어?”
“…….”
여전히 대답이 없자 류민은 강경책을 쓰기로 했다.
“안 되겠다. 나 먼저 일어날게.”
“응…?”
“난 너와 잘되고 싶은 마음뿐인데 너는 그렇지 않은가 보네.”
“아, 아니야. 나도 너한테 마음이 있어!”
“있는데 왜 대답을 못 해?”
“꼭… 들어야겠어?”
“어.”
류민은 확고했다.
“오늘 자정까지 답을 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우리 관계를 지속할지 안 할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
“나 먼저 갈게. 자정 전에 연락이 오지 않으면…… 마음이 없는 거로 알게.”
류민은 미리 계산을 마친 뒤 그 길로 호프집을 나섰다.
“하아…….”
민주리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호프집을 나선 뒤.
민주리는 정처 없이 밤거리를 걸었다.
‘뭐라고 말하지? 민이가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데…….’
조금 강경했지만, 류민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상대가 고백했는데 모호하게 대답도 하지 않고 줄타기만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말할 수가 없는걸.’
자정이 되기 전까지 류민에게 답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관계는 깨지고 말리라.
‘어쩔 수 없어. 솔직하게 전부 말하는 수밖에는…….’
파이널 라운드 이후에 소원의 방이 있었다는 것도.
내가 소원을 이룸으로써 너의 기억이 지워졌다는 것도.
네가 날 좋아하게 된 건 아마도 소원의 힘일 거라는 사실도.
전부 밝히기로 했다.
류민도 자신에게 속마음의 룬이 있었다고 밝히지 않았던가?
‘전화로 하긴 그렇고 만나자고 하는 거야. 지금.’
문자를 보내기 위해 핸드폰을 두들기던 민주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저벅저벅-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려봤다.
남자 셋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가는 걸까?
그렇다기엔 이곳은 인적이 없는 골목길이다.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날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아니겠지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일단 뛰었다.
그러자.
“X발, 잡아!”
설마 했는데 남자들이 쫓아온다.
정신없이 뛰는데 하필이면 막다른 벽이 나왔다.
“큭큭, 막다른 길이네?”
“냅다 뛰는 거 봐라.”
“눈치 한번 빠르네.”
남자들의 시선은 명백히 민주리를 향해 있었다.
“다, 당신들 뭐예요? 저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그냥 지나가다가 예뻐 보이길래 대화 좀 하고 싶어서 그래요.”
“예. 그런 의미에서 번호 좀 줄 수 있어요?”
남자들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불순한 의도임을 직감한 민주리가 주머니에서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저게 뭐야? 스프레이?”
“아이고 무서워라. 가까이 가기 겁나는걸? 큭큭큭.”
“빨리 기절시키고 차에 싣자고. 시간 끌어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그래야지.”
조롱하던 남성들의 눈빛이 흉흉하게 변했다.
스프레이가 있는데도 무서워하기는커녕 거리를 좁히는 그들을 보며 손아귀에 힘을 주려는 그때였다.
툭-
“아아악!”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한 남성이 어깨를 감싸 쥐었다.
“왜 그래? 헉…!”
“X발, 뭐, 뭐야?”
떨어진 건 남성의 팔이었다.
당황하는 사이 다른 두 명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서걱! 서걱!
“아악!”
“끄하악!”
어깨부터 깔끔하게 잘리며 셋 다 외팔이 신세가 됐다.
곧 팔을 잃은 그들 앞에 낫을 든 그림자가 나타났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으, 으아아악!”
사신을 마주한 그들은 잘린 팔을 챙길 생각도 못 하고 줄행랑을 쳤다.
민주리 또한 도망치고 싶었으나 공포심에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민주리.”
“……!”
순간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민주리의 떨림이 멎었다.
“겁먹지 마라. 나니까.”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상대.
그는 다름 아닌 류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