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134)
“황녀님, 식사하고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좋죠! 으히히.”
실기시험을 치렀던 듀크관을 나선 뒤, 메를린 아스트레앙의 식사 제안에 황녀 스노우화이트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뭐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화이트는 아카데미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이나 즐기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 어차피 이 빌어먹을 현실을 잊고 식사나 즐기는 편이 나으리라. 모든 건 미래의 자신이 알아서 해 줄 테니까.
그리 듀크관 주위에 몰려 있는 많은 수험생을 가로지를 무렵.
문득 네 명의 수험생이 메를린의 눈에 들어왔다. 모두 황녀 화이트 또래의 10대 후반 수험생들. 그들은 따로따로 떨어져 교정 이곳저곳에 자리 잡은 채였다.
메를린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훑었다.
“…….”
아스트레앙 가문에서, 메를린이 황실 기사단에 입단할 때 검성 제랄드 아스트레앙이 강조하던 말이 있었다.
매 순간 주위를 살피고 분석하는 습관을 길러라. 그러면 위기의 반절은 예방할 수 있다.
네 명의 수험생이 메를린의 눈에 띄었던 건, 그들의 몸에 각각 규칙적인 표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르핀관 필기시험에서 듀크관 실기시험까지, 줄곧 화이트와 다니면서 수험생들을 눈여겨 살피다 보니 절로 깨달은 것.
메를린은 예리한 시력으로 그 표식들을 모조리 살폈다. 모두 트럼프 문양이었다.
그들은 메를린의 시선을 눈치챘으나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메를린은 그 사실을 알아채고 다시 눈을 정면으로 돌렸다.
‘저들 만큼은, 화이트 황녀님이 계시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어.’
화이트는 이 황국의 황녀다. 어느 수험생이건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내비쳤으나.
유독 트럼프 표식을 지닌 수험생 네 명은 황녀에게도, 무녀에게도, 성녀에게도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저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메를린은 영문 모를 께름칙한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 마족이 수차례 나타났던 곳 치고는 꽤 멀쩡하네요. 솔직히 오기 전까진 폐허를 연상했거든요. 그리고 현수막 같은 게 큼직하게 걸려 있을 줄 알았어요. ‘우리 아카데미 정상운영합니다’라고 적혀 있는?”
설마 그렇겠습니까, 황녀님….
화이트의 말에 간단히 맞장구쳐주며, 메를린은 트럼프 표식을 지닌 4명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
“미야 님!!”
전속 호위 마법사는 급박하게 교정을 뛰어다녔다.
무녀 미야가 여우불만 남기고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효력이 끝나는 분신술이었다. 이미 진작 미야의 본체는 다른 곳으로 떠나 있었던 것.
“흐윽, 미야 니임!! 또 어딜 가신 겁니까!!”
이제 화봉국 호위병들이 지키고 있는 마차에 돌아갈 때가 되었거늘, 대체 이 무녀님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전속 호위 마법사는 울먹이며 무녀 미야를 찾아다녔다. 만에 하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은 모가지가 날아갈 테니.
* * *
나비 정원 구석.
나는 느티나무에 기대 앉은 채 오른손에 [서리불꽃]을 피워 올렸다.
오늘은 신입생 입학시험 날이라 훈련장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나비 정원 구석에서 단련하기로 했다.
다만,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었기에 지금은 [천리안]으로 아카데미를 살피고 있었다.
‘주역과 조연은 문제없고.’
순백의 황녀, 스노우화이트 폰 카이로스 에펠토.
하찮지만 그나마 정상인. >메르헨의 마법 기사> 2학년 파트의 핵심 주역. 배드 엔딩을 막으려면 무조건 이 녀석이랑 엮여야 한다.
홍련의 무녀, 미야.
성능캐라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곧잘 써먹었던 죽창 딜러였지. 차별주의적 성향을 지닌 소시오패스라 성격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참고로 성씨가 없는 건 ‘신녀’에게 한 인간에게서 출생했다는 의미를 붙여선 안 된다는 종교적 의미 때문이다.
주신의 대리인, 비앙카 앙투라제.
얜 그냥… 웬만해선, 진짜로 불가피할 때 말고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 외에도 반가운 조연들은 모두 문제 없이 입학시험을 잘 치른 듯한데.
역시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크게 어긋난 것이 하나 있었다.
“팔라딘….”
「앨리스 토벌전」의 중간보스.
앨리스 캐럴의 트럼프 군세 중 최고위 병사, 팔라딘 4인방.
그들이 메르헨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르러 왔다.
내가 알고 있던 >메르헨의 마법 기사> 시나리오하고는 완전히 동떨어진 광경이었으나.
‘예상했어.’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변수가 생길 것쯤은 이미 예상했으니까.
내가 알고 있던 게임 시나리오는 로또 예상 번호처럼 고려 요소만 되었을 뿐이다. 온갖 변수를 따져보는 건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앨리스는 신중을 기해 검은 괴물을 찾아내고 암살해야 하는 처지. 거기다 학생회장으로서 다음 학기 학사 일정은 모두 꿰차고 있다.
즉, 아카데미 내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면서 학사 일정을 수행하며 기존 학생들과 엮일 수 있는 아군. 동시에 수족처럼 부릴 수 있으며, 강하기까지 한 존재라면….
역시 팔라딘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이 속인 건 양심에 안 찔리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쟤네들이 외형이랑 나이 속인 건 좀 선 넘은 것 같다. 나랑 쟤네는 수십 살 이상 차이가 난다고.
참고로 팔라딘은 종족이 인간이다. 지금부터 [대 인간 전투력]에 스탯을 퍼붓는다 해도 「앨리스 토벌전」까지 무력으로 놈들을 이길 스펙이 갖춰질지는 잘 모르겠다.
애당초 [대 마족 전투력]도 최고치까지 찍어야 효과를 극대화해주는 [멸악자]를 얻는 것이었다. [대 인간 전투력]도 스탯 100을 찍지 않는 이상 극적인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다.
거기다 천족과의 싸움도 대비해야 하니 [대 인간 전투력]에만 신경 쓸 순 없었다.
이제 팔라딘 4인방이 앨리스와 합류한 직후부터는, [천리안]을 추적할 수 있는 괴묘-체셔가 있기에 섣불리 감시할 수 없게 된다.
오늘 [천리안]으로 아카데미를 감시하는 건 옳은 선택이었던 것.
[천리안]을 풀고 주먹을 쥐어 [서리불꽃]을 사그라뜨렸다.앞으로 팔라딘까지 데려온 앨리스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대비책을 생각해야….’
“이봐, 말 좀 물을게.”
“음?”
별안간 순한 목소리가 내 생각을 끊었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도화살 화장. 흑옥빛 머리칼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녀, 미야였다.
Lv : 155
종족 : 인간
속성 : 불
위험도 : X
심리 : [ 당신을 조금 잘생긴 버러지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
‘얘가 왜 여기서 나와?’
잠시 놀랐다.
미야의 사역마인 구미호라면 [천리안]을 느꼈겠지만, 뇌제나 괴묘처럼 쫓아올 기량은 못 된다. 그래서 아까는 그냥 안심하고 지켜봤던 건데….
구미호가 있을 미야의 오른쪽 검지 손톱 쪽에 자연스레 눈동자가 돌아갔다가, 얼른 눈길을 그녀의 얼굴 쪽으로 돌렸다. 구미호한테선 최대한 시선을 피하는 편이 좋겠지.
“여기가 어디야?”
‘아, 얘 길치였지.’
무녀 미야의 특징이 떠올랐다. 그래선지 호위 마법사는 어디다 팔아 두고 온 건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미야는 곧잘 전속 호위 마법사를 따돌리고 혼자서 나돌아다니곤 했다. 길이라도 잘 찾으면 모르겠는데, 틈만 나면 미아가 되곤 해서 호위 마법사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리도 미야 다웠다. 쟤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보면 버러지라고 여기고 관심도 갖지 않으니까.
리제타가 약한 자의 말을 듣지 않는 것보다 훨씬 극적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약한 자를 버러지라고 생각하진 않잖아.
어쨌든.
방금 전까지 난 [천리안]을 사용하느라 마력을 발산 중이었을 테고, 저 녀석도 내 마력을 느꼈으리라. 내가 자기보다 훨씬 약하다는 걸 알아챘겠지.
“여긴 나비 정원인데. 혹시 길 잃었어?”
상냥한 미소를 연기했다. 상대가 동방국의 무녀라고 굳이 존대하고 싶진 않았다. 사람이 가오가 있지.
그래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제대로 못 배운 가난한 평민이고, 자립해서 입시 공부만 한 놈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너 선배지? 네가 뭔데 나한테 반말해?”
이 새끼…. 자기가 무녀라고 싸가지가 자취를 감추었다.
다행히 표정은 일그러지지 않았다. 나는 조금 곤란하다는 미소만 지었다.
“네가 먼저 반말했잖아.”
“오호라, 납득 되는군. 여기가 아카데미란 사실을 망각했다. 여긴 여기만의 관습이 있을 테지.”
어휴.
“그리고, 내가 왜 네 선배야?”
“나 여기 입학할 거야. 확정사항이라 문제 될 말은 아니잖아?”
네 말엔 문제가 많아, 멍청아.
그래도 입학은 확신할 만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쟤가 신입생 수석이었거든.
“그것보다, 너랑 얘기 나눌 때가 아니야. 우리 낭군님의 시선을 느꼈는데….”
“낭군님?”
“이름 없는 영웅님이지. 분명 날 지켜보고 계셨어…!”
“아, 검은 괴물. 그걸 네가 어떻게 알…?”
“버러지가.”
무녀 미야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급격한 태세 전환. 순했던 눈매가 좁아지고, 잠깐 애교가 담겼던 목소리가 단숨에 고압적으로 변했다.
“누구 보고 괴물이란 추잡한 단어를 쓰는 건가? 참으로 어리석은 사내로다.”
“…….”
동방국에서 무녀로서 내뱉었던 권위적인 어투였다. 쟨 화가 나면 저런 말투를 쓴다. 입에 뱄으니까.
“…표현은 미안하게 됐다. 낭군님이라는 거 보니까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흥, 좋다마다. 마족들을 일망타진하고, 부유섬까지 홀로 쓰러뜨린 그 강인함은 단연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것. 감히 괴물 따위로 불러도 될 분이 아니란 말이다.”
내가 부유섬을 쓰러뜨린 이후, 이름 없는 영웅의 추종자가 우후죽순 생겨났다고 들었다.
애당초 ‘이름 없는 영웅’도 인류를 지킨 자를 ‘검은 괴물’ 따위로 불러선 안 된다고 생겨난 명칭이니, 추종자들이 뭐라 부르는 걸 선호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미야도 이름 없는 영웅의 추종자였구나. [심리 간파]를 써 보면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심을 엿보는 듯했다.
“하, 됐다. 의도치 않게 나와 오래 대화하는 영광을 안겨 버렸구나. 기왕 처음으로 만나 뵐 선배라면 루체 엘타니아 님이나 화록청의 마법사님 정도를 기대했건만. 이런 남자가 내 처음이라니…. 운이 없어.”
“그러냐….”
화록청의 마법사는 카야를 뜻한다. 식물 속성을 깨우치며 화록청의 요정, 실피아의 명맥을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그런 별칭을 얻게 되었다.
루체도 흑해 여제라는 별칭을 얻게 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현재, 루체와 카야는 꽤 유명인이었다.
메르헨 아카데미가 화제의 중심지가 되면서, 이름 없는 영웅에 이어 아카데미에 속한 인재들의 활약이 전 세계의 입담에 오르내린 까닭이었다.
오늘 입학시험을 치르러 온 수험생 대부분도 그녀들에게 동경심을 품고 있으리라.
“이런 거 말고 우리 낭군님 얼굴이라도 뵙고 가면 좋겠는데에. 헤으응.”
미야는 이름 없는 영웅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콩닥거리는지, 순해 보이는 두 눈을 감고 접힌 검은 부채를 뺨에 가져다 대며 낯부끄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남 눈치 안 보는 건 여전하긴 했지만….
‘…일부러 저러는 거네.’
내가 찾는 건 너 같은 보잘것없는 놈이 아니라 강인무적최강 이름 없는 영웅이다, 라는 걸 어필하는 것이리라.
새삼 느끼지만, ‘티 없이 아름다운 인형’이라는 표현이 절로 어울리는 녀석이긴 했다.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그러다 미야는 나를 보더니 기분 나쁘게 한숨을 내쉬곤.
“그럼.”
그리 말하고서 발걸음을 옮겨 갔다.
“하, 참.”
어이가 없었다.
* * *
[미야.]“왜?”
노을빛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무녀 미야가 아이작에게서 떠나간 뒤, 이름 없는 영웅이 어디 있는지 고심하며 발을 옮기던 중이었다.
성숙하고도 신비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아까 청은발의 소년과 마주쳤을 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느냐?]“버러지한테 느낄 게 뭐 있는데?”
[처음에 내가 있는 쪽을 보았지. 그 후로 시선을, 일부러 내게서 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느니라.]미야의 사역마, 구미호는 미약한 마력체의 형태로 그녀의 오른쪽 검지 손톱 안에 있었다.
웬만한 마나 감지력으론 감지하기 어려운 형태였다.
“고작 그 정도 마력밖에 없는 버러지가 네 위치를 어떻게 알아?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듯한 느낌? 기분 탓이겠지. …설마 지금, 그게 내 낭군님이라고 할 셈인가?”
미야는 살벌한 눈빛으로 자기 검지 손톱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손톱에 자그마한 파란색 불꽃이 일렁이며 붉은 안광을 보였다.
“내 낭군님은 냉철한 인상에 머리칼은 짧고 키는 190 이상, 터질 듯한 근육을 가진 완전히 남성스러운 마초남이야. 목격자가 그렇게 증언했대잖아. 아까 봤던 그런 순해 빠져 보이는 비실이하고는 급이 다르다고, 급이.”
[아아….]“하으응, 낭군님. 그 엄청난 팔근육을 한없이 만져 봤으면…. 할짝거리고 싶어….”
가라앉았던 목소리가 삽시간에 애교스럽게 변했다. 미야는 자주 맥락 없이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들곤 했다.
구미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녀 생활 탓에 남자 경험이 없는 미야는, 숱한 망상으로 이미 이름 없는 영웅의 이미지를 고착화시킨 상태였으니. 무슨 말을 해도 이름 없는 영웅을 직접 목도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상상이 깨지지는 않을 터였다.
단지, 구미호는 청은발의 소년을 기억하기로 했다.
여태 자신이 느껴온 위화감이 헛됐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