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6)
나의 악당들 016화
5—2. 정비(1)
평소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다.
퇴근하자마자… 어, 퇴근? 오늘 출 근을 했나? 주말인가?
모니터 속에선 쪼렙 혈기사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제멋대로 움직 이며 적을 죽이고 피를 마시며 부르 르 떨어대는 모양새였다.
미친 것 같네.
딸깍딸깍, 탁탁.
키보드와 마우스를 아무리 두드려 보아도 여전히 혈기사는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뭐야, 이거?
뭔가 문제가 있나 싶어서 마우스를 들어 뒷면을 살피는데.
흡!
놀라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광마우 스 특유의 LED가 끈적거리는 피를 만나 검붉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 다.
자세히 보니, 마우스를 쥔 손은 거 칠고 길며 두꺼웠다. 이건 내 손이 아니잖아? 아니, 내 손이 아니라고?
•••내가 누군데?
다시 보니 내 손이 맞았다. 손은 익숙하게도 피에 절어 있었는데, 거 의 다 남의 것이었다.
그때, 사방에서 터지는 함성소리.
우워어어!
죽음을!
으악, 내가 무슨 잡생각을 하고 있 는 거야? 전쟁 중에!
난 잽싸게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 러곤 손에 가득 묻은 피를 움직여 펄션을 감쌌다.
오, 오오.
요사스러운 빛을 내는 피의 칼날이 점점 커진다. 길어지고, 두꺼워지고, 흉물스러워 진다.
때마침 해적 놈들이 일렬로 줄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정면에서 보면 한 사람인 것처럼, 아니, 한 사람이다. 아니야, 여럿이야.
해적이 아닌데?
엘렌? 뒤에 있는 놈들은 누구야? 인디언, 할리우드 배우, 육상선수, 벌거벗은 말라깽이, 흑백영화 여주 인공, 아이돌, 백발노인, 스님, 대답 이 없네. 어쩔 수 없지.
지평선에 닿을 만큼 길어진 칼날을 내뻗었다. 해적 놈이 웃음소리를 흘 리며 둘로 찢기자 급격한 사정감이 찾아왔다.
김승수는, 나는, 회사원은, 살인마 는, 혈기사는, K-2 410997, K-2 410997, 착한 아들, 핵쟁이새기야, 변태 새끼, 지원이 삼촌, 들풀 부학 회장, 포이닉스는 이를 악물고 억눌 렀다.
억눌렀지만, 실패했다.
사우스하버의 성주는 수백 명의 해 적들을 죽인 것에 고무되어 함대를 출정시켰다. 해적들을 마저 쫓아내 어 해상봉쇄를 푸는 것이 출정의 목 적이었다.
대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적으 로 열세였기에, 성주는 항구에 정박 한 민간 선박들에게도 협조를 요청 했다.
부두가 공격당하며 군선이 많이 불 타고 선원들도 많이 죽었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많은 궁수들과 선원들이 줄줄이 군선에 올라 닻을 올렸다. 뿔나팔과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커다란 돛이 줄줄이 펼쳐졌다.
군선은 스무 척 정도에 불과했지만 나포한 해적선과 징발한 민간선박 서른 척이 더해졌다. 그 외에, 승무 원 서른 이하의 작은 배들도 백 척 가까이 힘을 보태었다.
게임 플레이 중엔 이런 이벤트가 없었기에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함대의 출정을 지켜보았 다.
이대로 봉쇄가 풀려 도시에 평화가 찾아오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와 내 가 아는 시나리오가 어긋나는 것에 대한 걱정이었다.
어쨌든, 해전이 시작되고 처음엔 사우스하버 측이 꽤 유리했다. 마법 사들을 태운 선두의 군선들이 만의 입구를 돌파했고, 함대는 순식간에 진영을 펼쳤다.
성주의 명령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민간선박들은 최후미에서 만을 빠져 나가 좌익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부둣가의 전투에서 용병들에게 좌익 을 맡긴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뭍과 바다의 상황은 천지 차이였다.
부둣가에서의 전투를 떠올려보자 면… 도시가 포위당하여 공격받는 상황이었으니 나를 포함한 용병들, 혹은 상단의 호위병 등은 도망갈 구 석이 없었다.
도망쳤다가 군대가 패하면 해적들 에게 잡혀 노예가 되는 것이고, 군 대가 이기면 성주의 명령으로 감옥 에 갇히는 상황이었으니까.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밖에는 선택 지가 없었다.
그러나 민간선박들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뭍에서와는 달리, 만의 좁은 입구만 빠져나가면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해적의 포위망은 의 외로 헐거웠다.
결국, 몇몇 상선들은 포위된 도시 를 위해 싸우다가 죽는 대신 비겁자 가 되더라도 확실히 살아남는 편을 선택했다.
군선들이 해적선들과 교전을 시작 하자 냅다 서쪽으로 도망쳐 버린 것 이다.
처음으로 도망친 건 두어 척에 불 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함대를 동 요시키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해적들은 영리하게도 도망 치는 상선들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그것을 목격한 다른 민간선박들은 성주가 파견한 연락관을 바다에 던 지고 도망쳐 버렸다.
군선들을 중심으로, 남은 함대도 나름 분전을 펼쳤다. 하지만 결과적 으로 사우스하버의 함대는 거의 괴 멸했고, 해적들의 봉쇄는 여전히 굳 건한 상태였다.
그렇게, 도시의 분위기는 점차 험 악해져 갔다.
“흐읍!”
번쩍 눈을 뜬 나는 간신히 비명을 삼키고 숨을 골랐다. 그 상태로 눈 동자만 굴려 사방을 살폈다.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방 안으로 새 어 들어오는 걸 보니 새벽인 것 같 았다.
침대에서 삐져나온 헝겊과 밀짚, 검게 썩은 나무 바닥, 코를 골며 자 고 있는 용병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 왔다.
언뜻 꿈에서 보았던 장소와는 전혀 다른-낯설고도 익숙한, 뱃고동 여관 4인실의 풍경이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안도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뭐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뭔가 짜릿한 꿈을 꾼 것 같았는 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 옆에 놓아둔 가방을 뒤졌다.
일주일 전에 있었던 전투 때문에 옷을 죄다 목욕탕에 맡겨야 했다. 피에 완전히 절어버려서 아무리 빨 아 봐도 핏물이 계속 나오더라고. 돈도 좀 번 김에 동전 한 푼 내고 맡겼다.
빨래를 맡긴 동안 알몸으로 있을 수는 없었기에 중고의류를 파는 가 게에서 옷을 두 벌 샀다.
모험용으로 입는 튼튼한 가죽옷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천으로 된 옷이 었다.
기왕이면 좀 여러 종류를 사두려고 했는데, 애초에 맞는 옷이 몇 없어 서 선택지가 없더라.
포이닉스의 몸이 평범한 사람들보 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여기의 옷들은 지구에 서 입었던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속옷은 하얀 반바지처럼 생긴 천 쪼가리였는데, 넉넉한 크기의 트렁 크 팬티를 입는다 생각하면 별로 나 쁠 건 없었다.
아니, 아랫단에 조여 묶을 수 있는 끈이 달려 있어서 나름 편했다. 바 지 안에서 말리거나 하진 않았거든.
근데 바지가 조금 골 때리게 생겼 다.
미들월드 전체가 이런 건지, 밀라 놀 왕국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입는 건지 모르겠는데, 양말이랑 바지가 일체형이더라고.
이렇게 설명하면 스타킹을 떠올리 겠지만, 재질은 그냥 천으로 만들었 고, 품이 넉넉해서 나름 편했다.
이것도 발목, 무릎, 허벅지, 허리에 조일 수 있는 끈이 달려 있어서 체 형에 맞게 조절할 수 있었다. 그래 서 입고 벗기는 좀 불편해도 착용감 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상의는 뭐, 허벅지까지 늘어지는 천 옷을 허리띠로 고정시키는 스타 일이었다.
앞섶이 많이 풀어져 있어서 좀 허 전하긴 했지만…… 에이, 뭐 어때. 몸도 좋은데.
그래도 뽀송뽀송한 양말이 없는 건 좀 아쉬웠다.
아, 그리고 상하의 두벌에 속옷, 허리띠 같은 것까지 골랐는데 꼴랑 동전 다섯 푼 받더라.
의류공장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 싸다니 신기했다. 물론 중고품이라서 싼 것도 있겠지만.
그리고 이 싼 옷값 덕에 난 여기 에서 사용되는 화폐의 가치를 지구 와 비교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동안 숙박비, 식대 등을 지불하 며 대충 동전 한 푼에 한화로 얼마 쯤 되나 어림잡아 환산해 보려고도 했는데… 못하겠더라.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치가 내 상식 과는 워낙 차이가 커서 도저히 계산 이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갑옷을 주워 입 던 와중이었다.
“어흐.”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아저씨가 일 어나며 얼굴을 비볐다.
덥수룩한 수염과 크고 작은 흉터로 채워진 얼굴이 숙취에 절어 한껏 구 겨져 있었다.
•••안 그래도 못생겼는데 저러고 있 으니 완전 오크 새끼가 따로 없네.
“크흥, 벌써 일어났냐?”
“좀 더 자요, 아재. 술 냄새 겁나 심하네.”
“•••그래?”
그러더니 아저씨는 입에 손을 대고 제 입 냄새를 맡아보려 킁킁거렸다.
이 술주정뱅이 아저씨의 이름은 ‘길리우스’, 용병이다.
부둣가 전투에서 내가 얼타고 있을 때 옆에서 말 걸어주고 방패로 조금 이나마 가려줬던 그 고마운 아저씨 다.
다른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두 청 년도 길리우스 아재의 동료고. 원래 동료가 하나 더 있었는데 해적의 창 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아재, 상처 나은 지도 얼마 안 됐 으면서 왜 그렇게 살판이 났어요?”
“살판이 나긴? 내가 뭘?”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그렇게 살다 술병이든 매독이든 걸려서 금 방 뒤져요.”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아침부터 시비네.”
아저씨는 고리눈을 뜨곤 씨근덕거 리며 머리맡을 더듬었다.
에휴, 헛손질하는 꼴 하곤.
“아재, 여기.”
아저씬 내가 건넨 수통을 넙죽 받 아 들이키더니 크으- 하며 입매를 훔쳤다.
“오늘도 대장이랑 칼싸움하냐?”
“칼싸움이 아니라 대련이요, 대련. 수련을 위한 대련!”
“참나, 수련이 무슨 소용이냐? 힘 은 곰처럼 센 새끼가. 곰은 곰처럼 싸워야지, 여우처럼 싸우려고 들면 안 된다니까.” “아, 개소리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 고요.”
뭐라 주절거리는 아저씨의 손에서 수통을 낚아채곤 방을 나섰다.
길리우스 아재는 나름 좋은 사람 같았지만, 하는 말의 절반은 헛소리 혹은 술주정이라 이야기를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그대로 뒷마당으로 향하려는데, 건 너편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정수리가 내 명치 부근에 간신히 닿는 조그만 소 녀, 엘렌이었다.
“뭐야. 일어났네?”
“어. 좋은 아침.”
녀석은 눈을 비비며 잠긴 목소리로 인사했다. 얼굴이 퀭한 것이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하품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 녀석의 뒷모습이 썩 걱정스러워 슬쩍 따라 붙으며 물었다.
“야, 너 괜찮냐?”
“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잠 좀 자라.”
녀석은 최근 일주일 동안 명상에 푹 빠져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는 명상은 마법사의 필수 루틴 정도로 취급되긴 하지만, 녀석은 요즘 조금 심했다. 하루에 두어 시간 정도만 자고 나머지 시간 엔 모두 명상을 하는 것이었다.
내 걱정 어린 충고에도 녀석은 반 쯤 감은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보기보단 괜찮아. 그리고 하수도 때문이면, 오늘은 일찍 잘 거니까 걱정하지 마.”
부둣가에서의 전투가 끝난 지도 어 영부영 일주일이 지났다.
나나 엘렌이나 그동안 논 것은 아 니지만, 계획해 둔 하수도 탐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조금 답답한 상황이었다.
내일 하수도에 내려갈 계획이긴 하 지만…… 녀석이 계속 이런 상태라 면 다시 생각해봐야겠는걸.
“하수도가 문제냐? 너 그러다가 몸 져눕기라도 하면 어쩔래?”
“그 정돈 아니라니까.”
녀석은 내 걱정 어린 눈길을 애써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사실 녀석이 무리하는 이유를 짐작 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아마 녀석은 부둣가의 전투에 참전 하지 못한 것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군대에 잡혀갈 뻔했을 때 자신을 마법사가 아니라 학생이라고 속인 내게 조금 삐진 것 같기도 했고.
안쓰러운 마음이 조금 들었지만 나 는 애써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 다.
“하여튼, 괜히 미련하게 굴지 말고 몸 관리 잘해. 나이도 어린 녀석 이……
“아, 또 잔소리. 빨리 가서 몸이나 풀어. 그라니아 곧 나올 것 같던데.”
“어, 그래? 그럼 먼저 갈게.”
나는 녀석의 말에 잰걸음으로 뒷마 당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는데, 엘렌은 졸린 얼굴로 하품을 하고 있 을 뿐이었다.
“너 괜찮지?”
“아이씨.”
“어, 그래.”
괜찮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