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87)
나의 악당들 187화
43. 발버둥(7)
말로리 남작이 생환했다고?
하, 이게 대체 무슨 골 때리는 상 황이야…….
발걸음을 재촉하여 도착한 영주관 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상인으로 위장을 하고 있다가 관문에서 정체를 밝히셨다는군.”
“용병들과 함께 오셨던데.”
“왜 인제야 나타나신 거지……
수군거리는 병사들과 분주한 하녀 들을 지나쳐 커다란 문을 활짝 열어 젖힌 홀 앞에 섰다. 한바탕 난리를 겪고 있는 바깥과는 달리, 홀은 적 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홀 안 을 훑어보았다.
문장관 톨러미와 청지기 에디타를 비롯하여 아니그 가문의 가신들이 홀의 왼편에 모여있었다. 그 반대편 엔 단단히 무장한 험상궂은 인상의 용병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어서 낮은 단 위에 있는 고리십 자가의 좌(座)를 올려다볼 즈음 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슬쩍 돌아보니, 나타난 것은 랭볼 트 경과 아리아드 경이었다.
“울카르의 기사가 셋이나 있다니.”
나는 쉰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 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 롱빌의 영 주관에.”
뿌옇게 흐려진 눈동자와 허옇게 센 머리칼, 주름진 얼굴에 성마른 인상 을 한 노인, 아니, 겉늙은 중년인. 말로리 남작이었다.
그는 거친 가죽옷을 입고 있었는 데, 오른쪽 무릎 아래가 휑했고 왼 손엔 엄지와 검지만 붙어 있었다. 아누파드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끄응.”
말로리 남작은 웬 장한의 부축을 받아 상좌에 앉았다.
본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다이 오네아는 왼뺨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너덧 걸음쯤 물러나 있었다……. 내가 어두운 초록빛 눈동자를 마주 보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는 동안, 노기사 아리아드 경이 한 걸음 앞으 로 나섰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작 님.”
“……늙은 살무사로군. 일전에 만 난 적이 있지.”
“예. 벌써 3년 전의 일이지요.”
말로리 남작은 팔걸이를 손으로 더 듬으며 냉소를 터뜨렸다.
“그래. 그때도 울카르 왕자는 말썽 을 불러일으켰지. 포로 신세였지만 왕도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피부로 전해질 지경이었어.”
“……그런 일이 있었지요.”
아리아드 경은 허허, 웃으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남작님의 귀환을 진심으로 축하드 립니다. 롱빌이 진정한 주인을 되찾 았으니, 광명의 주께서 돌보신 게 틀림없습니다.”
……뭐야, 저 배알도 없는 말은.
나는 아리아드 경을 휙 돌아보았지 만, 노회한 기사는 낯빛 하나 변하 지 않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굽은 등을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말로리 남작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 술을 꿈틀거렸다.
“세 치 혀를 놀려 호의를 살 생각 이라면 당장 그만두시오. 그대들이 롱빌에 재앙을 몰고 왔음을, 내 이 미 알고 있으니.”
“……남작님, 그게 무슨.”
아리아드 경은 남작의 늙고 쉰 목 소리에 적의가 가득 담겨 있다는 것 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그가 말 을 고르는 사이 랭볼트 경이 조금 성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남작님의 영지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헌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말로리 남작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대답했다.
“그대 역시 기억하오, 은왕자의 첫 번째 기사여.”
회백색으로 흐려진 눈동자가 형형 한 빛을 내었다.
“밴과 윕스턴, 칸달로사. 하나같이 훌륭한 기사들이었는데, 그대의 칼 에 목숨을 잃었지.”
랭볼트 경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 만, 남작은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쏟아내었다.
“그런 그대가 내 영지를 지키기 위 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하!” 점차 언성을 높여가던 남작은 숫제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질러대기 시 작했다.
“그대들이 강요한 싸움에 휘말려 영민들이 수백이나 죽었소! 먼 옛날 내 선조께서 반석을 깔았던 웅장한 관문은 한낱 돌무더기가 되어버렸 고!”
“싸움을 강요했다니요, 당치도 않 습니다! 저희는-”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내 겁많은 가신들이 감히 대영주에게 맞섰겠 나! 내 골 빈 아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겠느냔 말일세! 그대 들로 인해 롱빌에 전쟁이, 재앙이 닥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랭볼트 경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자, 상좌 아 래를 지키던 용병들이 긴장한 기색 으로 무기에 손을 얹었다.
“우리가 싸우지 않았더라면 이 영 지는 이미 도일의 손아귀에 떨어졌 을 것이오!”
“랭볼트 경!”
아리아드 경이 몸을 던져 만류했지 만, 랭볼트 경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상황에서 남작께서 돌아오셨던 들 영주좌를 되찾을 수 있었겠소! 목숨이나 부지하면 다행이지!”
“무엄하다! 일개 기사 나부랭이가 영주의 위엄을 훼손시키려 하는가!”
말로리 남작은 팔걸이를 쾅, 두드 리며 몸을 일으켰다. 한쪽 다리가 없어 비틀거리기도 잠시, 그는 의자 에 몸을 기대어 선 채 우리를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긴말할 것 없다! 이곳에 너희, 울 카르의 기사들이 쉴 자리는 없을진 저-”
“고정하십시오, 남작님! 저희는,” 아리아드 경의 말을 끊으며, 남작 은 피를 토하듯 고함을 질렀다.
“롱빌의 영주로서 명령한다! 지금 당장 내 땅에서 꺼-져!”
순간 홀의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 았다. 고요한 와중에 말로리 남작의 숨소리만 가쁘게 이어질 뿐,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침묵이 얼마쯤 이어졌을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이닉스.”
홀긋 돌아보니 팔짱을 낀 우테콰이 가 문설주에 기대어 있었다.
다시 보니 홀 바깥에는 열댓 명의 용병들이 차가운 눈빛을 흘려대고 있었다. 그들은 금세라도 홀 안으로 뛰어들 기세였지만, 우테콰이의 커 다란 덩치가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탓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눈치 였다.
“신중하게 행동해라.”
우테콰이의 조언에 난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내 크고 거친 손아귀가 흐룬팅의 손잡이를 움켜쥐 고 있었다.
뭐, 어쩌려고?
여기 있는 용병들을 모조리 회 쳐 버리고 남작의 목이라도 자르려고?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남작님의 명령을 듣지 못하셨 소? 어서 물러나시오!”
그렇게 호통을 친 것은 장년의 사 내 였다.
수렵제 동안 오며 가며 얼굴을 본 기억이 있는 놈이군. 이름이 에드윈 이라고 했나. 대화를 나눈 기억은 없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귀에 익다. 지금 보니 언뜻 말로리 남작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내 빤한 시선에 에드윈의 턱을 따 라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의 부하들 역시 내게 시선을 못 박은 채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다이오네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상좌 근처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처진 눈매가 처연하게 흔들렸고, 배꼽 즈음에서 마주 잡은 두 손이 잘게 떨렸으며, 붉어진 왼뺨은 조금쯤 부풀어 있었 다.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거기 멈추시오!”
채챙-!
여기저기서 금속음이 터졌다.
에드윈의 고함과 함께 용병들이 무 기를 들자 랭볼트 경도 기다렸다는 듯 칼을 뽑았다.
엘렌의 중얼거림에 따라 마나가 요 동쳤고, 어느새 쇠뇌에 살을 건 뭉 치가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났다.
창문을 통해 안뜰이 보였다. 아미 아스 패거리가 에드윈의 부하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포이닉스 경-”
입안으로 속삭인 작은 비명을, 내 예민한 청각이 잡아채었다. 다이오 네아는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 를 내저었다.
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말로리 남 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물들 즈음, 난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갔다.
“자, 착하지.”
푸르릉, 투레질을 하는 점박이를 두어 차례 쓰다듬은 뒤 안장을 올렸 다. 이어서 고삐를 채우는데 옆에서 콜의 목소리가 들렸다.
“포이닉스 님.”
콜은 헤일라가 타고 온 검은 전투 마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그는 내 시선을 받곤 마구간 입구 쪽을 눈짓 했다.
« o ”
거기엔 다이오네아가 서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단정한 머릿수 건과 소매가 넓은 하얀 커틀, 연두 색 튜닉을 걸친 채였다.
나는 콜에게 점박이의 고삐를 건네 었다.
“먼저 가 있어.”
“……예, 짐을 싣고 있겠습니다.”
콜이 두 필의 말을 이끌고 마구간 을 떠나자, 잠시 옆으로 비켜서 있 던 다이오네아가 천천히 다가왔다.
“왜 나오셨습니까? 남작님께서 좋 아하실 것 같진 않은데.”
염려 섞인 말에 그녀의 얼굴이 묘 하게 일그러졌다.
“절 원망하시나요?”
“……원망이라됴.” “제가, 경께 손을 뻗길 바라셨나 요?”
내가 입을 다물자 다이오네아는 아 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고 싶었지만, 정말로 그 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다이오네아.”
“피를 보고 싶지 않았어요. 경께서 죄를 짓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구 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해합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 나 봐요. 데이지처럼 한 철 피어난 뒤 영원히 저버릴 운명.”
“다이오네아, 아닙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다이오네아가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녀를 감싸 안으며 입술을 맞추었다.
얼마간 입맞춤이 이어진 뒤, 다이 오네아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 다. 그러곤 마구간 한쪽에 매여있던 말의 고삐를 풀어 내게 내밀었다.
“……이건?”
“‘헤오아드’에요. 북부의 말로 ‘봄 바람’이라는 뜻이죠.”
갈색 털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말 이었다. 긴 다리와 생기 넘치는 근 육, 풍성한 갈기가 인상적인 명마.
“노던셔를 떠나 여기로 올 때 타고 온 말이에요. 경이 데려가 주세요.”
“다이오네아.”
“부탁이에요.”
어두운 초록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 다. 그 일렁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지구에서 보았던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안 됩니다.”
헤오아드의 고삐를 도로 그녀의 손 에 쥐여주었다. 다이오네아는 금방 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얼굴로 속삭였다.
“포이닉스 경.”
“제가 이 말을 데리고 떠나면 말로 리 남작이 미쳐 날뛸 겁니다. 전 그 걸 바라지 않아요.”
“제발, 이것만은 받아주세요.”
“아뇨. 차라리 다른 걸 주십시오.”
“……다른, 거라면?” 어느 이야기 속의 키 큰 기사가 붉은 과부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난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뒷머리를 조금 잘라 다이오 네아에게 쥐여주고, 그녀의 머리칼 을 조금 잘라 손에 쥐었다.
다이오네아는 검은 머리칼을 쥔 채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포이닉스 경.”
“이거면 충분합니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머리칼을 품에 갈무리하며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 다.
“언젠가 봄바람이 불어와 꽃이 새 로 필 무렵에.”
다이오네아는 내 머리칼을 양손으 로 꼭 쥔 채 눈물을 흘렸다.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 물을 닦아준 뒤, 짧게 입을 맞추었 다.
영주관으로부터 뻗어 나온 돌길의 양옆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옛 영주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감히 환호를 하지는 못했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기도를 해주거나 서너 송이의 꽃을 길 앞에 던져줄 뿐이었다.
고요하지만 뜨거운 배웅을 뒤로하 고, 우리는 롱빌을 떠났다.
9월의 마지막 날,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