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37)
나의 악당들 237화
48. 예술가(4)
예술가의 숨이 끊어진 직후, 기이 한 일이 일어났다.
“……어?” 괴물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칼날을 통해 내게 흡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뭐지? ‘약탈’ 때문인가?
얼른 혈기를 거두니 흐룬팅을 감싸 고 있던 피의 칼날이 순식간에 흩어 졌다. 하지만 괴물의 검은 피는 여 전히 손끝을 통해 흘러들어오고 있 었다.
X팔, 이건 또 뭐야?
당황하여 몇 걸음 물러섰지만 검은 피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이젠 단 순히 역류하여 흘러드는 정도가 아 니라, 마치 들끓듯 부글거리며 흐룬 팅과 흐룬팅을 쥔 오른팔을 집어삼 켜 버렸다.
“이런 젠장!”
거두었던 혈기를 다시 일으켜 피를 통제해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괴물이 살아 있을 땐 얌전히 내 통 제에 따르던 피가 놈이 죽은 뒤에야 제멋대로 날뛰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걸로 끝나 지 않았다.
츠츠츠.
달군 팬에 올라간 버터처럼, 예술 가의 시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나를 빼닮은 괴물이 검은 피와 뒤섞 여 형체를 잃어가는 광경은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섬뜩했다.
혼란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무언 가가 내 안을 채우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곳, 꿈의 영지에 처음 들어섰을 때 소중한 무언가가 뜯겨 나가는 것 을 느꼈다. 그때 잃어버렸던 무언가 를 지금 되찾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 무언가는 바로 영혼 의 조각이었고, 동시에 예술가로서 의 자아였다. 나의 어둠으로 빚어낸 잔인하고 추잡한 자아.
그것이 얼마나 어둡든, 또 얼마나 더럽든, 그것 역시 ‘나’였다. 그렇기 에 되찾은 자아를 가슴 속에 소중히 품었다.
내게 죽음을 맞은 탓일까? 예술가 의 자아는 작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아마 앞으로는 제멋대로 날뛰지 못 할 것이다.
영원히 고통받고, 허덕이며, 불만족 속에서 존재를 이어가겠지. 내 안에 서 말이다.
예술가와 그를 녹여낸 검은 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내게 흡수되었다.
그 와중에 찝찝한 점이 하나 있었 다. 본래 우윳빛이던 흐룬팅의 칼날 이 검게 물든 것이다. 예술가의 피 를 한껏 머금은 듯, 검은 칼날은 미 약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영문 모를 일이었지만, 음, 아마 큰 상관은 없겠지.
한편 스스로 완전해짐을 느끼는 동 시에, 난 이 준차원의 주인이 되었 음을 깨달았다. 예술가가 구축한 꿈 의 영지는 이제 온전히 나의 것이었 다.
그때 였다.
아홉 번째 방인 이곳, ‘보육원’에 정체 모를 거대한 침입자가 들어섰 다. 준차원의 주인이 된 덕에 느껴 지는 감각이었다.
구구구구-
이어서 아무런 맥락도 없이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벽돌 건물들을 깔아뭉개며 내게 다가온 그것의 정체는, 혀를 날름거리는 뱀 이었다.
공기가 떨리며 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랜만이구나, 후손아.”
“……당신은.”
강철같은 비늘에 불타는 눈, 대지 를 휘감을 몸통과 바다를 더럽힐 독 니.
“종말의 사도. 피를 마시는 뱀.”
아칸쿠 카라멕과 전투를 벌이다 목 숨의 위기를 맞았을 때, 나의 내면 세계에서 만났던 그 뱀이었다.
내 중얼거림 때문인지, 아니면 다 른 이유 때문인지 맹렬한 불길에 휩 싸인 세로 동공은 썩 흡족한 기색으 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젠 영혼이 제법 굳고 실해졌구 나. 장하다”
‘굳고 실해졌다’라니. 할머니가 쓸 법한 표현인데…….
나는 그리 생각하며 뱀을 마주 보 았다. 물론, 뱀이 워낙 거대했기에 눈을 맞추려면 20층짜리 아파트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한껏 목을 꺾어 야 했다.
“당신, 진짜 내 선조인 겁니까?”
“왜 그리 생각하느냐?”
“방금, 음, 내 분신 같은 놈을 죽 였는데, 인간이랑 도마뱀을 반씩 섞 어둔 괴물이었습니다.”
“인간과 도마뱀이라.”
“꽤 징그러웠죠. 이제 보니 비늘 모양이 당신이랑 좀 닮은 것 같습니 다.”
뱀은 잠시 침묵했다. 아무런 소리 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난 잠시 뱀을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벌써 두 번째 만나는데, 이제 슬 슬 용무를 말하시죠.”
“용무?”
“네. 원하는 게 뭡니까?”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어렵긴 뭐가 어렵습니까? 여기 나 타난 이유가 뭔지 묻는 건데.”
“익숙한 내음에 이끌렸을 뿐. 이유
는 없다.”
이유가 없다고? 뭐지, 이 얼빠진 할머니는?
“배를 곯으며 기다리는 게 내 일이 고, 이렇게 후손을 돌보는 건 내 소 일거리다.”
뱀은 알쏭달쏭한 소리를 하더니 내 손에 쥐어진 흐룬팅을 내려다보았 다.
“그 아이도 자랐구나.”
“……어, 조금 길어졌죠? 생긴 것 도 꽤 변했고.”
뱀은 잠시 혀를 날름거렸다. 뭔가 고민을 하는 듯했다.
“좋다. 부화를 허락하마.” “……부화? 그게 뭔 소립니까?”
“자. 준비가 끝났다.”
내가 재차 되물으려는 찰나, 뱀이 쩍하니 아가리를 벌렸다. 난 순식간 에 그•녀에게 삼켜지고 말았다.
암흑공간으로 돌아왔다.
다른 일행은 여전히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사지를 허우적거리고 있었 고, 근처에 있던 헤일라는 눈을 동 그랗게 뜬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 다. 눈치를 보아하니 내가 사라진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던 모양이다.
나를 향해 헤엄치듯 팔다리를 휘저 어대는 헤일라를 향해 마주 손을 뻗 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목을 붙잡아 잡아당겼고, 그녀는 전처럼 내 팔에 안겨들었다.
이어서 꿈의 영지를 조종하기 시작 했다. 아홉 방이 모두 무너지고 이 젠 암흑공간만 남아 있었던 터라 구 조가 아주 단순해졌다. 마법에 문외 한인 나라도 쉽게 조종할 수 있을 만큼.
우우웅.
어디선가 떨림이 시작되었고, 뒤이 어 공간이 접혔다. 그렇게 우리는 꿈의 영지를 벗어났다.
옥좌가 발동되어 포이닉스를 포함 한 여섯이 사라진 뒤, 지하의 알현 실에 남은 인원은 열한 명이 전부였 다. 그나마도 어린아이인 알레나와 포로인 사이츠를 제외하면 전력은 고작 아홉에 불과했다.
철문과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둔 입 구 앞에서, 말총머리 프리츠가 사납 게 고함을 질렀다.
“불! 불 가져와!”
“이 미친 새끼, 너구리굴 만들 일 있어! 불은 안 돼!”
“흡혈귀에게 물리느니 숨 막혀 뒈 지는 게 나아! 그러니 닥치고 불 가 져와, 이 X새야!”
쇠뇌수 기돈은 ‘오, 주여’로 시작하 는 욕지거리를 몇 마디 지껄인 뒤 횃불을 건넸다.
화르륵. 미리 기름을 뿌려둔 덕에 잡동사니 들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퉤, 하고 가래침을 뱉은 프리츠는 왼손에는 횃불을, 오른손에는 쇠도리깨를 쥔 채 뒤로 물러섰다.
빡빡이 스티드먼은 주근깨 미라, 베테랑 컨휘어, 중장병 데르비쉬, 중 검사 움베르타와 함께 대열을 이루 었다. 그는 도끼로 연방패를 두드리 며 기세를 돋우는 중이었다.
“일단 선두를 틀어막은 다음, 그대 로 1층까지 밀고 나간다! 토펠린인 가 뭔가 하는 우두머리만 죽이면 끝 이야!”
개소리 였다.
들려오는 발소리로 짐작해 보건대, 흡혈귀는 적어도 수백은 될 터였다. 아홉 명이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이를 뻔히 알면서도 용병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퇴로는 애당초 없었다. 그렇다고 흡혈귀에게 항복을 할 수도 없는 노 릇이었다. 마지막까지 무기를 휘두 르다 죽음을 맞는 게 그들에게 남은 운명이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논쟁을 벌일 시간 에 숨을 고르며 전투를 준비하는 것 이 나으리라고, 용병들은 생각했다.
타닥, 다다다다-
더러운 맨발이 차가운 돌계단을 밟 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에 당도한 흡혈귀들이 지하를 향해 진격해 오 는 것이었다.
“El scischa, urio(찢어발기고, 불태 움으로써)……
장검을 뽑아 든 애꾸눈 시모스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흡혈귀들 의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주문은 더 빨라졌고, 그녀의 왼손은 어느새 푸른빛으로 물들어 불티를 튀기고 있었다.
마침내 불빛이 일렁이는 계단에서 헐벗은 사내가 나타난 순간, 시모스 는 왼손을 뻗으며 고함을 질렀다.
“……Judio-cium(징 벌하라)!”
빠지직! 수백 장의 종이가 한꺼번 에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시모스가 최근에 깨우친 주문인 ‘화 살 번개’였다.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크기의 빛줄 기는 말 그대로 벼락같은 속도로 쏘 아지며 길쭉한 잔상을 남겼다. 화살 번개는 헐벗은 흡혈귀를 관통하며 휘어져 돌벽에 튕겼고, 그걸 시작으 로 나선형 계단 안에서 제멋대로 날 뛰기 시작했다.
“끄어어-!”
화살 번개가 그랬던 것처럼, 비명 역시도 돌벽을 타고 요란하게 메아 리쳤다.
흡혈귀 열댓 마리가 쓰러졌고, 그 뒤를 이은 수많은 놈들은 앞선 흡혈 귀들에게 걸려 넘어지거나 구르며 알현실로 쇄도해 왔다. 마나를 적잖 이 소진한 시모스는 얼른 뒤로 물러 섰다.
퉁!
시위가 튕기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기돈이 쏜 기다란 쇠뇌살이 흡혈귀 둘을 꿰뚫었다.
“끼얍!”
움베르타는 기성을 내지르며 포이 닉스가 남겨둔 투창을 집어 던졌다.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한 흡혈귀가 배 에 감싸 쥐며 쓰러졌다.
중장병 데르비쉬는 쥐고 있던 도끼 를 던져 어느 중늙은이를 주저앉혔 다. 그리고 얼마 전에 얻은 마법검 을 뽑으며 고함을 질렀다.
“태양의 기수여, 나를 살피소서!”
수호성인의 가호를 빈 그녀는 방패 를 내밀며 마법검을 휘둘렀다. 완만 하게 흰 칼날은 방벽을 넘던 흡혈귀 의 등허리를 깊숙이 갈랐다.
“놈들이 넘어온다! 도로 불길 속에 처넣어!”
그녀의 옆에 있던 컨휘어는 두툼한 히터실드로 흡혈귀를 밀어낸 뒤 칼 을 내리찍었다. 각진 참수검이 단박 에 머리통을 쪼개었고, 컨휘어는 발 을 들어 그 시체를 걷어찼다. 죽은 흡혈귀는 뒤로 나뒹굴어 잡동사니의 불길에 휩싸였다.
그 순간, 방벽 한 귀퉁이가 우르르 무너졌다. 수십 마리의 흡혈귀들이 한꺼번에 밀려든 탓이다.
그렇게 터진 구멍에서 흡혈귀 열댓 마리가 불길을 뚫고 기어 나오자, 스티드먼은 경악하여 고함을 질러댔 다.
“막아! 에손, 성수-!”
“지금 간다!”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퉁퉁한 에 손이 팔을 크게 휘둘러 성수를 뿌렸 다.
“끼에에에엑!”
불이 붙은 채로 맹렬히 달려들던 흡혈귀들은 성수를 맞고 처절한 비 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검고 흰 연 기를 뿜으며 쪼그라들었다.
뒤이어 구멍을 틀어막은 것은 미라 와 프리츠였다.
주근깨 미라는 그녀 특유의 가벼운 몸놀림으로 흡혈귀들과의 거리를 조 절하며 칼을 내질렀다. 그녀의 장검 은 마법이 깃든 탓에 일반적인 칼보 다 몇 배는 날카로웠다. 덕분에 가 볍고 빠른 검격만으로도 흡혈귀들을 쉽사리 쓰러뜨릴 수 있었다.
“이리 와, 이 저주받을 새끼들아! 대가리 내밀어-!”
프리츠는 겔란어로 고래고래 고함 을 지르며 흡혈귀들 사이로 뛰어들 었다. 그리고 횃불과 쇠도리깨를 마 구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박살 내고 부수었다. 그러다가 주변을 둘러싼 흡혈귀들이 몸을 날려 덤벼들면 갑 주를 이용해 흘려내거나 팔꿈치나 무릎으로 얼굴을 찍어버렸다.
용병들의 선전은 한동안 이어졌으 나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흡혈귀를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입구를 막고 있던 철문이 압력에 못 이겨 통째로 넘어졌다. 활활 타오르는 잡 동사니 더미를 덮치며.
아련한 피 냄새에 이성을 잃은 흡 혈귀들은 불길에 달아오른 철문 위 로 몸을 날렸다.
“젠장……. 에손, 성수!” 뒤편에서 에손이 폴해머를 휘두르 며 ‘진작에 다 썼어! 끝이라고!’라고 외치자 스티드먼은 이를 갈아붙였 다.
“제, 기랄-!”
그는 방패를 내던지며 매달린 흡혈 귀를 떼어낸 뒤 도끼로 다른 놈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두개골에 도끼 날이 박혀 옴짝달싹도 하지 않자 그 대로 자루를 놓으며 물러섰고, 허리 춤에 걸어둔 ‘참살의 언월도’를 뽑 아 들었다.
“으랴아압-!”
무게가 6킬로에 달하는 칼을 양손 으로 꼬나 쥔 스티드먼은 우렁찬 고
함과 함께 힘을 짜냈다.
써컥!
경쾌한 피륙음과 함께 허리를 기준 으로 두 동강이 난 흡혈귀 둘이 바 닥을 나뒹굴었다.
“젠장, 젠장.”
잡동사니를 깔아뭉갠 철문은 흡혈 귀들이 연달아 넘어오며 더 평평하 게 기울어져 갔다. 자연히 방벽을 뛰어넘는 흡혈귀의 숫자도 급격히 늘어났다.
용병들이 절망에 빠진 그 순간.
알현실 안쪽에 놓여있던 옥좌가 산 산이 부스러졌다. 뒤이어-
우우우웅.
-쇠구슬이 은쟁반 위를 굴러가는 듯한 기이한 금속성과 함께 검은 원 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설마.”
스티드먼이 입을 반쯤 벌릴 즈음, 꿈의 관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 왔다.
“꺄아앗!”
제일 먼저 튀어나온 것은 엘렌이었 다. 세차게 바닥을 구른 그녀의 뒤 로 뭉치와 콜, 우테콰이가 나타나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 로, 헤일라를 품에 안은 포이닉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포이닉스, 님.”
스티드먼의 떨리는 목소리에 답하 듯, 포이닉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나도 안 죽었네? 장하다, 이 새 끼들.”
평소와 같은 사나운 미소에, 스티 드먼은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으 ” 丁그•
성큼 걸음을 옮긴 우테콰이가 기둥 에 기대어져 있던 ‘슬론헤의 마울’ 을 집어 들었다.
뭉치는 ‘운검’과 은을 바른 단검을 빼 들었고, 콜은 활시위에 기다란 화살을 걸었다.
“……하으, 짜증 나. 이 연기는 또 뭐야?”
엘렌은 발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부 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커다 란 고깔모자를 고쳐 쓰더니 주문 한 마디 없이 춤의 정령을 소환했다.
후웅!
조그만 바람정령이 춤을 추자 연기 와 화염을 휘감은 소용돌이가 계단 을 향해 솟구쳤다. 난데없이 불길에 휩싸인 흡혈귀들이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 댔다.
“슬슬 내리지?”
“……응.”
느릿한 동작으로 포이닉스의 품에 서 내려선 헤일라는 장갑을 고쳐 끼 며 계단 쪽을 돌아보았다.
방대한 마력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혈기가 들끓었다. 새까만 눈이 검붉 게 물들었고, 이어서 그 시선이 닿 은 흡혈귀들이 펑! 터져 나가기 시 작했다.
“그건 무슨 기술이야? 처음 보는 데.”
“흡혈귀는 고유한 혈원(血原)이 없 어서 피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
“……설마, 놈들의 몸 안에서 피보 라를 터뜨린 거야?”
“맞아. 조금만 연습하면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알현실 입구에 바글거리던 흡혈귀 들은 헤일라의 시선을 받고 피떡이 되어갔다. 두어 호흡 만에 수십 마 리가 터져나가자, 놈들과 맞서던 용 병들은 입을 쩍 벌린 채로 뒷걸음질 쳤다.
엘렌은 새파란 눈으로 헤일라를 노 려보다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속사포 같은 중얼거림에 회색 완드 가 불꽃을 피워올렸고, 알현실 입구 를 막고 있던 불길이 그녀를 향해 몰려들었다.
화르륵!
사방에서 끌어들인 화염이 엘렌을 감싸 안으며 꽃처럼 피어났다. ‘화 염 망토’ 주문이었다.
“Adobit’sche (불태 워라)!”
낭랑한 고함과 함께, 화염 망토가 날개를 펼쳤다. 맹렬한 화염이 날개 를 타고 뻗어 나가 계단을 휩쓸었 다.
“으억, 뜨거!”
“X팔, 물러나!”
강렬한 열기에 용병들이 허겁지겁 물러나는 사이, 막 흡혈귀들 사이로 뛰어들려던 우테콰이는 ‘일을 덜었 다’ 하고 중얼거리며 돌메를 내려놓 았다. 뭉치와 콜 역시 맥빠진 얼굴 로 무기를 회수했다.
불길이 계단을 휩쓰는 모습을 지켜 보던 헤일라는 문득 포이닉스를 돌 아보았다.
“유혈.”
“ 응?”
“단검 유혈. 돌려줘.”
그녀의 요구에 포이닉스는 눈썹을 긁적이다가 바닥을 나뒹굴던 배낭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을 잠시 뒤 지더니 고급스러운 칼집에 꽂힌 단 검을 꺼내 들었다.
“고마워.”
헤일라는 받아든 단검을 곧장 뽑아 들었다. 철 대신 투명한 보석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모습을 드러내자마 자 벽면과 바닥에 난자해있던 흡혈 귀들의 피가 그녀에게로 모여들었 다.
‘혈왕의 영토’를 두른 헤일라가 천 천히 걸음을 옮겨 지상으로 향했다. 이에 질세라 엘렌도 검게 그을린 계 단에 발을 디뎠다.
검은 미니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새 까만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금 발의 소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것도.”
두 여인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둘을 지켜보 던 포이닉스는 쓴웃음을 짓더니 그 녀들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900마리에 조금 못 미치는 흡혈귀 들은 망토를 두른 두 여인에 의해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놈들을 이끌고 온 고위 흡혈귀 토 펠린은 도망을 치다 투창에 맞았다. 그녀는 턱을 떨며 목숨을 구걸했으 나 검게 물든 흐룬팅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흐음.”
지상에 올라선 포이닉스는 짙은 안 개 속에서 희미한 존재감을 뽐내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꿈의 영지에서 비롯된 안개는 그 주인의 명령에 따라 스르르, 녹아내 렸다.
“••••••해다.”
“정말이군. 해야.”
뒤늦게 올라온 일행들이 가을 하늘 을 올려다보며 입을 헤 벌렸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맑은 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