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60)
나의 악당들 260화
51. 진실, 이별(2)
우리가 묵는 숙소는 본래 연금술 길드의 회관이었다. 1층에 바를 겸 한 접수처와 몇 개의 사무실, 창고 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처음 이 길드홀에 발을 들 였을 때, 엘렌은 창고부터 뒤졌더랬 다. 값진 약재가 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으 로 ‘하늘오름꽃! 일각수의 뿔!’ 운운 하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하지만 찾은 거라곤 엉겅퀴와 방아 초, 질경이 따위가 전부였다. 창궐하 는 흡혈귀를 피해 도망치는 와중에 도 귀한 물건들은 모조리 챙겨간 모 양이다.
결국 잡동사니만 가득한 창고는 간 이 감금실이 되었다. 거실 비스무리 한 공간을 중심으로 두꺼운 문에 가 로막힌 작은 방이 여섯 개나 딸려있 었기에 감금용으론 그야말로 안성맞 춤이었다.
여섯 개의 작은 방 중 가장 왼쪽 방엔 ‘무기재료 – 금속’이라는 팻 말이 붙어있었다.
물론 지금 그 안에 든 것은 금은 이나 쇳가루 따위가 아니었다. 젊은 노인, 주문도둑 사이츠였다.
“어이, 이보시오!”
나와 내 부하들이 낸 인기척을 들 었는지 그는 우당탕, 문을 두들겨댔 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죽 을 듯 골골대더니, 어느 정도 기운 을 차린 모양이다. 엘렌이 자신을 위해 증언해 주면 ‘시간의 엘릭서’ 를 주겠노라 맹세한 덕에 희망을 얻 은 거겠지.
“뭐야?”
“……그 목소린? 피투성이- 아니, 포이닉스 경이로군!”
사이츠는 두터운 문 너머에서 분개 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대었다.
“난 온당치 못한 처사를 받고 있 소!”
“……온당치 못한 처사?”
“그렇소! 궁전의 주인이 될 분을 섬기겠노라 맹세한 나를, 이런 골방 에 가둬두는 게 옳은 일이란 말이 오?”
마음 같아선 ‘도둑놈이 한 맹세를 어떻게 믿냐?’ 하고 쏘아붙이고 싶 지만…….
아니, 안 되지. 엘렌의 누명을 벗 길 열쇠를 쥔 놈■이잖아? 어느 정도 달래줄 필요가 있다.
“……주변이 워낙 혼란스러워서 보 호하는 차원에서 가둬두는 거야.”
“보호? 보호라고 했소?”
“그래.”
“이런 냉골에 가둬두는 게 보호라 니, 그런 헛소리가 어디에 있소?” 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차라리 냉골이 나을걸.”
“뭐요?”
“널 쫓느라 고생한 걸 떠올리면 주 먹이 부들부들 떨리거든. 마음 같아 선 지금이라도 줘패주고 싶은데, 엘 렌 때문에 참는 거야.”
“밖에서 돌아다니다가 괜히 눈 마 주쳐서 한 대씩 얻어맞는 것보단 그 냥 거기 얌전히 짱 박혀 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사이츠를 적당히 달래준 뒤, 난 부하들 쪽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유기재료 – 괴물F 팻말 이 달린 방으로 다가간 콜이 열쇠로 문을 열었다.
어쩐지 비린내가 감도는 방 안엔 한 인영이 널브러져 있었다. 가슴에 붕대를 감고 양손이 등 뒤로 묶인 사내였다.
이틀 전에 있었던 습격에서 우린 현상금 사냥꾼 일곱과 마법사 하나 를 처치했다. 권법가인 일진과 비전 사냥꾼인 아슈르를 포함하여 잔당은 모두 도망쳤고, 엘렌에게 극심한 부 상을 당한 마법사 하나만 붙잡을 수 있었다.
그 마법사가 바로 지금 눈앞에 사 내 였다.
스티드먼이 나서 입에 물려 있던 재갈을 풀어주자, 마법사는 ‘크흐’ 하고 신음하더니 피 섞인 침을 바닥 에 탁 뱉었다.
“마스터 하그니.”
“……피투성이 검사.”
언뜻 보기에 마법사는 30대 초중 반 정도로 보였다. 엘렌에게 듣기로, 화염과 대지 계열 마법에 재능이 있 어 젊은 나이에 마스터 칭호를 받은 사내라고 했다.
“몸은 좀 어때?”
내가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자 하그니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목숨은 건진 것 같군.”
“그래, 다행이네.”
하그니의 짙푸른 눈동자를 빤히 바 라보다가 쯧, 혀를 찼다.
“이렇게 보니까 엘렌이랑 같은 집 안사람이란 걸 알겠네.”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여자애를, 그것도 같은 집안사람을 죽이려고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이 마법사의 풀네임은 ‘하그니 라 다칼-아에른’이었다.
라다칼린 가문이 대마법사 라다칼 린의 적통이라면, ‘라다칼-아에른’은 그 방계 집안이었다. 한마디로 마스 터 하그니는 엘렌의 친척이라는 뜻 이다. 대충 10촌쯤 된다나.
“나이나 가문은 상관없다.”
꿈틀거리며 벽에 등을 바로 기댄 마스터 하그니는 눈매를 좁혔다.
“에레나르는 은혜를 모르는 배신자 이자, 살인자이며, 도둑이다. 그런 여자를 처단하는 일이니 혈연을 신 경 쓸 이유가 없다.”
“건너편 방에 갇힌 노인이 땍땍거 리는 걸 들었을 텐데? 엘렌의 스승 을 죽이고 금서를 탈취한 건 저놈, 사이 츠야.”
하그니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엘렌에게는 들었어. 네놈, 갈나르 의 최측근이라며? 엘렌의 스승, ‘제 마르’ 님이 죽어가는 모습도 지켜봤 다고?”
“그럼 제마르 님을 죽게 한 상처도 봤겠지. 가슴이 패여 죽었다며. 주문 하나 다루지 못하는 열일곱 살짜리 소녀가 낼 수 있는 상처는 아니었 지.”
“……에레나르는 평범한 소녀가 아 니다.”
“개소리. 궁전에 있을 때 엘렌은 평범한 소녀였어.”
그는 메마른 입술을 적시며 신음하 듯 말했다.
“금서를 이용해 마법을 깨우쳤겠 지. 대마법사의 피가 그걸 가능케 했을 것이다.”
“궁전에서 마법을 깨우쳤다면 그걸 다른 사람들이 몰랐을까? 그랜드마 스터들을 포함한 수백 명의 마법사 들이 죄다 눈깔도 없는 허수아비였 다고?”
“……아니면 마도구를 썼겠지. 그 랜드마스터 제마르 님의 마도구를 훔쳐서-”
“엘렌이 스승님에게서 물려받은 거 라곤 완드와 모래시계, 은화 몇 닢 이 다였어. 사람의 가슴을 짓이질 만한 마도구는 없었지.”
사우스하버에 머물 때, 울카르 왕 자는 내게 성약을 하사하는 동시에 어떤 첩보를 전해주었다. 라-팔라이 스 궁전에서 엘렌을 쫓을 추격자를 보냈다는 첩보였다.
당시 왕자는 놀란 나를 달래며 이 런 말을 했다.
-너무 절망할 것 없다. 엘렌 양이 명백한 살인자였다면, 수십 명의 마 법사들이 추격자가 되어 쏟아져 나 왔겠지.
한마디로, 라-팔라이스 궁전 내부 에도 엘렌이 결백하다고 믿는 무리 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하그니에게 늘어놓은 정황이 바로 그 신뢰의 씨 앗일 터였다.
하그니가 입을 다물자, 난 씩 미소 를 지었다.
“정황증거는 둘째치고, 진범이 자 백을 했다니까? 저 건너편에 있는 주문도둑 사이츠가 제마르 님을 죽 이고 금서를 훔친 놈이라고.”
“도둑놈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 이냐?”
“도둑놈 말을 믿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어차피 놈을 궁전으로 끌고 가면 진실을 밝힐 수 단은 무궁무진하다며?”
마스터 하그니가 침묵으로 수긍하 자 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말을 덧 붙였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엘렌에겐 권리가 있고 네겐 의무가 있다는 거 야.”
“권리와 의무?”
“그래. 먼저, 엘렌에겐 궁전으로 돌 아가 진실을 밝힐 권리가 있어. 녀 석에게 그 정도의 권리는 있잖아.”
“……그렇다. 에레나르는 티린 멜 에서 태어난, 대마법사의 적통이니 까.”
좋아. 영 말이 안 통하는 놈은 아 니군.
“다음은, 네 의무야.”
“넌 갈나르에게 속아 엘렌을 죽이 려고 했지. 근데 녀석의 자비 덕에 목숨을 건졌잖아?”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지.”
“……어떻게 말이냐?”
“협조해. 엘렌이 궁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리 말하며 옆으로 손을 내밀자 주근깨 미라가 주섬주섬 어떤 물건 들을 꺼내어 내게 건네었다.
“여기, 네가 갖고 있던 물건을 활 용해서 말이야.”
권법가 일진과 비전사냥꾼 아슈르 의 습격을 막아내며, 우린 전리품을 몇 개 얻었다.
일단 가장 귀한 것으로는 일진이 땅에 박아놓았던 고리 아홉 달린 석 장, 구환장이 있었지만……. 이건 당 장 쓸 곳이 마땅찮았다. 게임 속에 선 권법가의 전용 장비였고, 현실에 서도 무기로 쓰기엔 너무 무겁고 거 추장스러웠던 탓이다.
다음으로 무기 몇 자루와 갑옷 몇 벌을 얻었다. 유명한 현상금 사냥꾼 패거리인 ‘검은 늑대들’의 소지품답 게 나름 쓸만한 품질의 물건들이라 일행에게 골고루 분배했다.
‘땅의 통로’를 통해 길드홀을 습격 했다가 뭉치에게 목이 찔려 죽은 마 법사는 마법서 한 권과 조그만 보주 (寶珠)를 가지고 있었다. 꽤 귀한 물건들이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 진 마법사, 마스터 하그니가 가지고 있던 것에 비하자면 손색이 있었다.
“여기 새겨진 마법진, ‘차원문’이라 며?”
“……그렇다.” 내가 마스터 하그니에게 내민 건 그가 가지고 있던 황금 판과 유리병 이었다.
황금 판은 말 그대로 A4용지만 한 크기의 얇은 판이었다. 통짜 황금으 로 되어 있어 그 자체로도 값비싼 물건이었으며, 기묘한 모양새의 마 법진이 음각되어 있어 더욱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유리병엔 끈적한 액체가 들어있었 다. 엘렌이 말하길, 용의 발톱과 산 호를 곱게 간 뒤 진사(辰砂)와 수은 을 섞어 만든 마법 용액이라고 했 다.
“이거, 궁전으로 향하는 차원문 맞 지?”
‘차원문’은 순간이동 주문과 비슷 한 듯 다른 주문이었다. 차원의 틈 새에 통로를 만든 뒤 그것을 압축하 는 방식인데, 겉으로 보기엔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아주 높은 수준의 주 문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술자가 원하는 임의의 공간으로 차원문을 열 수 있는 마법사는 중간계에 존재 하지 않을 거라나.
그래서 내가 들고 있는 황금 판과 마법 용액처럼 귀한 재료들을 이용해 고정된 장소로 향하는 차원문을 여는 정도가 현실적인 한계라고 했다.
물음을 받은 마스터 하그니는 짧은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협조할 준비가 된 모양이군.
혹시 몰라서 ‘설득’에 필요한 도구 들을 이것저것 준비해 왔는데, 괜한 수고를 한 모양이다.
“시모스. 엘렌을 데려와.”
내 명령에 창고를 나섰던 애꾸는 시모스는 이내 엘렌과 함께 다시 모 습을 드러내었다.
“마스터 하그니.”
차가운 목소리와 그에 어울리는 새 파란 눈동자.
마스터 하그니는 엘렌을 올려다보 며 턱을 잘게 떨었다.
가문의 천덕꾸러기로 여겼던 소녀 에게 마법으로 압도당한 굴욕을 떠 올린 것일까?
아니, 조금 달랐다. 엘렌의 그것을 조금 닮은 짙푸른 눈동자엔 경외가 한 조각 스며 있었다.
그 눈빛이 무엇에서 비롯된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나쁜 일은 아닐 터였다.
후우웅.
창문 하나 없는 창고에 산들산들 바람이 불었다. 연금술사들이 귀한 재료를 위해 기를 쓰고 만들었을 창 고에 외풍이 들 리는 없으니 이는 분명히 부자연스러운, 또 인위적인 현상이었다.
“……에레나르, 님.”
가문의 방계요, 말석인 마스터 하 그니가 가문의 적통이자 할머니뻘 되는 친족인 엘렌에게 존대를 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엘렌은 그것으로는 부족하 다 여겼는지 방대한 마력을 과시하 여 그 공손함에 당위를 더했다.
포박된 채 고개를 조아리는 하그니 를, 엘렌은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나를 돌아보더니,
“풀어줘.”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째 거만해 보이는 표정이며 태도 가 썩 얄미워서 시비를 걸고 싶었지 만, 녀석의 체면을 배려해서 참기로 했다.
“……괜찮겠어?”
W O ” 흐.
난 잠시 턱을 긁적이다가 하그니에 게 다가가 밧줄을 끊어주었다.
“하그니.” “예.”
“이 주문판의 용도가 뭐지?”
하그니는 고개를 조아린 채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꺼내었다.
“갈나르 님께서 이르길, 에레나르 님을 처리하는 즉시 주문판을 이용 해 귀환하라 하셨습니다.”
“처리? 날 죽이라고 했어?”
“……예.”
슬쩍 고개를 들었던 하그니는 한층 날카로워진 눈빛에 얼른 머리를 처 박으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에레나르 님께서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자 갈나르, 는 초조해했습니다. 일이 늘어지는 것이 불쾌하다 하셨, 했지만, 에레나르 님께서 궁전으로 돌아와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워한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생포할 것 없이 무조건 죽이라고……
슬쩍 살펴보니 엘렌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아무리 갈나르가 또라이 라고는 해도 조카를 죽여 버리라 명 령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난 나의 결백을 밝힐 거야. 그 일 에 네 도움이 필요해.”
“……예, 말씀하십시오.” 이어진 엘렌의 질문에 마스터 하그 니는 차원문의 작동 방법, 지속 시 간, 제한 따위를 술술 늘어놓았다.
지긋지긋한 누명을 풀 순간이 코앞 까지 다가왔건만, 엘렌의 눈빛은 싸 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